<111화>
고작해야, 면사와 눈가에 역린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이 상황에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네가 너인 걸 안다. 그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인데, 네가 다른 사람인 척 다가오면 나는-
…나는 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할까.
죽이고 싶지 않다. 살릴 수도 없다. 용서할 수 없고, ……또한 네게 진 빚이 있어.
하나같이 상충되는 감정들뿐이다. 코끝으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지금은…, 그래, 해야 할 일이 있다.
시선을 내려 나만 올려다보고 있는 연연과 눈을 마주했다. 손을 뻗어 연연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잔머리가 일어나며 부스스해졌다.
잔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끝으로 살짝 토닥여 눌러 준 뒤 손을 뗐다.
“이제… 돌아갈까?”
연연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며 말했다. 여상한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어딘가 미묘하게 힘이 빠져있었다.
별생각 없이 주변을 훑는 내 눈에 지나가는 선사가 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정확히는 그 선사의 허리춤에 매인 선검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선검 한 자루 사려 했었지.
‘음…….’
잠시 고민하며 근방에 무기점이 있는지 찾아봤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무기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이참에 한 자루 사 가는 것도 좋겠다.
시간상 아직 여유도 있으니 말이다. 무기점만 들렸다가 돌아가면 되겠어.
“연연, 마지막으로 저곳만 들렀다 가자.”
무기점을 눈짓하며 연연에게 말했다. 내 옷자락을 흔들며 혼자 놀고 있던 연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리 구경엔 이제 시들해진 모습이었다. 덕분에 다소 얌전해져서 통솔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연연과 나란히 손을 잡고 무기점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자 입구에 매달아 놓은 종이 울렸다.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가 번잡해지며 가게들도 인파로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는데, 여기 ‘무철점[武鐵]’은 한산했다.
가게 주인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안을 먼저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가게 바깥까지 좌판을 벌여 놓은 걸로 보아, 장사에 열성인 듯하니 구경하다 보면 조만간 돌아오겠지.
벽과 선반, 그리고 바닥의 좌판까지. 사방에 늘어놓은 물건들을 눈으로 대충 훑었다. 그러다 우측 상단에 있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의 나무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묵직한 흑[黑]색이었다.
무심코 집어 들어 검집을 절반쯤 빼 안의 검을 확인했다.
예리하게 선 날에 차가운 광택이 흘렀다. 검면에는 아직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선검인데, 검날에 살기가 있다.
깨끗한 검면에 비친 내 얼굴을 일별한 뒤 그대로 검집을 닫았다.
스릉-
‘이걸로 하자.’
가볍게 결정짓고 어느새 곁을 떠난 연연을 찾아 눈을 돌렸다. 연연은 가게 안쪽, 주인이 자기가 앉으려고 가져다 놓았을 둥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상태로 몸을 약간 비틀어 옆의 벽에 난 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제법 열중하고 있는 옆통수를 보며, 방금 고른 검으로 검집째 내 목뒤를 탁탁 두드렸다.
‘흠.’
여기선 연연의 표정이 안 보인다.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 연연과, 연연이 내다보고 있는 창을 번갈아 보다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기척까지 죽이며 살금살금 다가가 바로 옆에 섰다. 그러곤 나도 연연이 보고 있는 창을 봤다.
처음엔 멀리 풍경을 내다봤다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까지 내 존재를 눈치 못 챈 연연이나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기습적으로 연연을 왁-! 부를 생각으로 입을 뗐다가 무심결에 바로 아래를 보았다.
처음 눈에 띈 건 바닥에 깔린 좌판이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늘어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조잡스러운 하품[下品]이었다.
물건을 파는 이는 여기선 뒤통수밖에 안 보였다. 그 맞은편의, 좌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도 고개를 한껏 숙인 탓에 정수리만 보였다.
“이건 말하자면, 머나먼 서역의 고분[古墳, 고대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파낸 희귀한 보물이오!”
좌판 주인이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한껏 낮춘 목소리는 은근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척 봐도 불순물이 많이 낀 질 떨어지는 수정구인데, 보물은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연연도 저런 거짓말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다. 손님으로 보이는 저자도 콧방귀를 뀌고 일어날 거라는데…….
“…….”
생각을 잇다 말고 잠시 고심했다.
저런 허접한 좌판 앞에 눌러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것인데, 참으로 운이 좋소이다. 여기, 이 귀물[貴物, 귀중한 물건] 또한 아주 특별한 것이라서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복[福]을 불러오고, 앓던 병이 나으며, 흰 머리가 검은 머리가 되고… 특히 밤에 아주 좋소!”
좌판 주인의 말이 수위를 넘나드는 걸 보며 연연의 귀를 잠시 막아야 할지 고민했다.
“숙면에 아주 그만이오!”
…괜한 고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연이 내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곁에 온 걸 알아챈 거다.
“연연. 이건 왜 보는 거야? 설마 저게 갖고 싶은 건 아니지?”
내 말에 연연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래, 사부는 믿고 있었어. 저걸 사면 안목이 재앙 수준인 거지.”
사기꾼의 좌판에 찾아온 손님도 그 정도로까지 어수룩하진 않은지 귀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옆에 있던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조악한 백색 호리병이었는데 몸통에 찌그러진 원앙 한 쌍이 그려져 있었다.
“그건 금슬 및 애정에 아주 요긴하게 작용하는 신비의…, ‘원’…, ‘원앙병[鴛鴦甁]’이오! 그것만 있으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온다오.”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이름이었다. 거기다 정성도 없다.
누구도 눈길도 주지 않을 그 싸구려 호리병을 손님은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살 거 같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호구[虎口]’와 같았다.
‘호구[虎口, 범의 아가리. 어리숙한 사람을 이르기도 하는 말.]’ 말 그대로 범의 아가리에 제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꼴이었다.
내 눈에는 사기꾼이 개 주둥이 같아 보여도 저 손님에겐 범의 아가리와도 같았다.
손님이 마침내 품에서 전낭(돈주머니)을 꺼냈다. 아주 호구[虎口]다, 호구.
“더도 덜도 말고! 그 전낭을 주면 이 ‘원앙병’을 팔겠소.”
염치없는 사기꾼은 손님의 전 재산을 대놓고 노렸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것도 정도가 있지.
‘쯧.’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구경도 다 끝났으니 무기점 주인이나 찾아서 방금 고른 검의 값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지.”
그런데 호구의 목소리가 낯익었다.
퍼뜩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를 숙이고 있어서 정수리만 보였던 이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덕분에 면사로 가린 그 얼굴이 훤히 보였다.
심마다.
또 심마였다. 이것도 우연이라 치기엔 지나치게 공교롭다. 어떻게 내 주위에만 있지?
낙주의 식당과 유연재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번까지 해서 벌써 세 번째다. 하루 동안 세 번의 우연이라.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던데.
이 세 번째 우연을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심마도 일전에 우리 사이에 인연이 없다고 했다. 그런 마당이니 당연히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자, 여기-.”
심마가 사기꾼에게 제 전낭을 통째로 내준다. 합리적 의심이고 뭐고 간에 지금은 저 전낭만 집중적으로 보였다.
사기꾼에게 다 차려진 밥상처럼 구는 게 어떤 얼간이인가 했더니…!
나는 인상을 쓰며 창의 난간에 올려 둔 손을 바쁘게 두드렸다. 탁, 탁, 탁, 다소 신경질적으로 난간을 두드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손을 뗐다. 그러곤 ‘순간 전이술’을 이용해 사기꾼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심마의 전낭부터 챙겼다. 그리고 심마의 손에 있는 허접한 원앙병도 내 것과 순식간에 바꿔치기했다.
심마의 손에 들려 준 건 귀곡에 쌓여 있는 보물 중 하나로, 원앙 한 쌍이 그려진 진품이다.
같은 백색에 비슷한 크기의 호리병이니 저런 안목으론 크게 눈치채지 못할 거다.
이렇게 도와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번에는 내 눈에 띄었으니 어쩔 수 없다만, 앞으로는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잘해야 한다.
그날의 어검 연습처럼 말이다.
나는 창을 바로 등지며 사기꾼에게서 가져온 심마의 전낭을 한 차례 던졌다 받았다. 생각보다 묵직하다. 무게를 가늠해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안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작은 돌이 한 무더기 들어 있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