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흠?”
순간 잠시 사고를 이을 수 없었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이내 실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은 도의군.’
본의 아니게 내가 덤터기를 썼지만 말이다.
“사부?”
옆에서 날 부르는 연연의 목소리에 도로 전낭을 닫아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심마의 전낭을 아공간에 넣으며 적당한 크기의 조각 은화를 꺼냈다.
무기점 주인이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니 은화로 대충 값을 치르고 갈 생각이었다.
조각 은화는 검을 올려 두었던 받침대 근처에 두었다.
“가자.”
호쾌하게 말하며 앞장서서 가게 문을 나섰다. 연연이 그런 내 뒤를 쫓아왔다.
딸랑-
문이 열리며 다시 종이 울렸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과 동시에 시야 가장자리로 익숙한 이가 들어왔다.
문설주 옆의 벽에 기대 서 있는 이는 심마였다.
내가 바꿔치기해서 준 원앙 호리병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고선 나를 보고 있다. 엷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기분 좋아 보였다.
나는 심마를 흘끗 본 뒤 바로 지나치려 했다.
“진연.”
그런데 심마가 말을 붙여 왔다. 그에 반응하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이전에도 이러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심마는 내 옆에 따라붙었다.
하여간 심마에 한해선 내 예상이 들어맞았던 적이 없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심마를 곁눈으로 슬쩍 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고 있다.
이대로 술법을 써 순간이동을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런 식으로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심마가 자진해서 물러가게 해야겠다.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어디까지 쫓아올 셈이야?”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곤륜산에서부터 오늘 하루 종일. 그러고 보니 곤륜산에서 나한테 유인 계책을 써서 얻은 게 그 동동 하나인데…, 너 목적이 뭐야? 날 쫓아다녀서 뭘 하겠다는 건데?”
말하다 보니 정말 의문점이 들어서 심마를 돌아봤다. 곧 심마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내가 당신을 쫓아다닌 건,”
“정말 날 쫓아다닌 거였어?”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심마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말했다.
“네. …음. 응.”
심마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내 의심이 맞았다. 예사 우연이 아니다 싶긴 했는데.
“일전에 말한 거래에 대해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심마가 말했다. 진중한 눈빛은 올곧았다.
나는 이제 아예 심마에게로 돌아서선 팔짱을 끼고 섰다. 그리고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 말 없이 심마를 응시하며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이어 말해 보란 뜻이었다. 곧 심마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한텐 절대 나쁜 거래는 아닐 거야.”
“‘선사’이면서?”
내가 반문하자 심마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똑바로 나를 응시한다.
“당신 앞에서 난 처음부터 ‘심마’였어.”
“…….”
“그리고 내 앞에 당신은 단순히 귀신(귀족)이 아니야.”
말을 이으며 심마가 표정을 부드럽게 편다.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풀어지며 봄바람 같은 미소가 심마의 입가에 스쳤다.
“진연.”
나를 부르며 심마가 미소 지었다.
그에 나는 인상을 쓰며 눈을 돌려 시선을 피했다.
“헛소리.”
낮게 뇌까리며 다시 힐끔 시선을 돌려 심마를 보았다.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야.”
다신 날 쫓아다니지 말라고 엄포를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심마가 먼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인연에 다음이 있다면?”
“우리 사이에 인연은 없어. 네가 억지로 잇고 있는 것뿐이지.”
“…그래. 그럼 내가 ‘다음’을 만들면?”
“……언제까지고 내가 널 용납할 것 같아? 응?”
말을 이으며 심마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자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심마. 내가 널 못 죽일 것 같아?”
그 말만 남기고 비스듬히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심마는 예상과 달리 굳은 표정이 아니었다. 날 보고 있는 눈매는 미묘하게 유했다.
“…응.”
…뭐?
예상외의 대답에 뭐라 따져 물으려는 찰나,
“나는 당신한테만큼은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심마가 이어 말했다.
“…….”
나는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미간을 찡그린 채 잠시 먼 하늘을 봤다. 그러다 코끝으로 한차례 숨을 내쉬며 방금 무기점에서 산 검으로 내 목덜미를 탁, 탁 두드렸다.
“-재밌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나가듯 짤막하게 중얼거리다가, 돌연 검을 쥔 팔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휘둘러진 검 끝이 심마의 목 근처에서 멈췄다.
분명 살기를 담았음에도 미동도 없는 심마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안 피해?”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요. …-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뭐?”
내 속내를 파악하기라도 한 것 같은 말에 짜증 내며 미간을 구겼다.
처음의 하오체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존댓말 실수까지 하고 있다. 바로 반말로 정정해서 더 거슬렸다.
“-그럼 이번엔 어떨 것 같아?”
짓씹듯 말을 이으며 그대로 검을 마저 휘둘렀다. 이어지는 검의 궤로에는 심마의 목이 있었다.
순간 심마의 눈빛이 일변하며 그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자세를 틀어 내 검로를 피해 버렸다.
나는 애꿎은 곳을 향하는 검 끝을 바로 틀어 다시 심마를 향해 겨누었다.
이 일련의 소동에 주변에서 작게 소란이 일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거리에 사람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인파가 우리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무리가 나와 심마를 두고 원형으로 감싸니 일종의 간이 대련장 같은 게 생긴 셈이 되었다.
나는 심마를 향해 무자비하게 검격을 쏟아 냈다. 검의 궤적은 현란하면서도 변칙적이었다.
횡으로 그었던 검로를 도중에 틀어 순식간에 위로 휘둘렀다. 검 끝이 심마의 옷깃을 날카롭게 스쳤다. 나는 찢어진 심마의 옷깃을 보며 비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혀 반격하지 않는 심마에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일부러 틈을 보여도 공격하지 않는다.
“뭐 하는 거야?”
미간을 찡그리며 심마를 향해 말했다.
“심마!”
분을 참지 못하고 내가 외쳐 부르는 순간 심마가 움직였다.
내 검 끝이 자기 목을 똑바로 겨누고 있는데도 피하긴커녕 정면으로 맞부딪쳐 왔다. 그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무슨 묘수가 있는 줄 알았다.
적어도 선술로 자신을 확실히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검 끝이 그의 살갗에 닿는 순간 아무 방비도 안 되어 있단 걸 알았다.
그에 놀라 잠깐 멈칫한 찰나의 순간, 심마가 내 검 바로 앞에서 몸을 틀며 돌려차기를 했다. 두 손은 원앙 호리병을 안은 채였다.
나는 얼른 한쪽 팔을 들어 그 발차기를 막았다.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자신의 공격이 막힐 걸 예상했는지 심마는 이어서 원앙 호리병을 공중으로 높이 던지며, 곧바로 나를 향해 한 손을 내뻗었다.
장풍일 거라 생각한 나는 심마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맞댔다. 일순 기파가 가볍게 원형으로 퍼졌다.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이 넓게 호를 그리며 흔들렸다.
나는 그대로 운공한 진기를 퍼부으려 했다. 그런데 심마가 돌연 맞닿은 손을 아래로 틀어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허공으로 던졌던 원앙 호리병은 심마의 다른 손 위에 안착했다.
탁-
“…뭐야?”
당황해서 바로 따져 묻지 못하고 잠시 침묵한 뒤 물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차분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며 심마가 말했다.
“이제 당신도 알잖아.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야.”
나를 보는 심마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미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건 잔잔한 강물에 인 범랑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내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너를 믿을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아.
‘…우사.’
모든 게 거짓이고 기만이었던 네 진심은, 끝내 내 약지마저 끊어 버렸다.
그와 함께 반지도 잃었다.
그 모든 ‘원멸 이전의 생’이 원멸 이후엔 ‘내 몽경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고, 지금은 없는 네 역린과 오연의 광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오늘에 이르게 했다.
원멸 전후로도 인과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단 방증이었다. 그러니 삶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론 지난 은원과 인연의 골이 저절로 해소되지 않고 메꿔질 수도 없다. 무엇으로든 대가를 치르고 빚을 갚아야만 끝이 날 거다.
“당신이 누구이건 상관없어.”
심마가 이어서 말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것은 원멸 이전에 우사가 내게 한 말이다.
‘형이 누구이건 상관없어.’
…역시, 너는 여전히 너야.
“나한테 당신은 원앙 호리병을 준 좋은 사람일 뿐이야.”
‘나한테 형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좋은 사람일 뿐이야.’
더 들어줄 수가 없다.
심마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거칠게 빼냈다.
“멋대로-!”
내가 말했다.
“…지껄이지 마.”
끝말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이런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그냥 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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