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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13화 (113/141)

<113화>

이미 한 번 죽였는데, 두 번째는 더 쉬울지도 모른다. 죽여서 내 앞에서 아예 치워 버리면, 없애 버리면-.

“이 호리병. 나 때문에 손해 봤잖아.”

심마가 말했다.

그 순간 다시금 깨달았다. 역시 나는 널 죽일 수 없다. 그런 식으론 끝을 낼 수 없어.

“당신이 나를 위해 뭘 했는지 알아.”

‘형이 나를 위해 뭘 했는지 알아.’

“다신 나 때문에 손해 볼 일 없을 거야.”

‘다신 나 때문에 상처받을 일 없을 거야.’

심마의 말과 원멸 이전 우사의 말이 겹치며, 그 둘의 목소리가 일치한다.

“날 믿어.”

‘날 믿어.’

심마가, 그리고 원멸 이전의 우사가 내게 말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가 이내 다른 쪽 입꼬리도 대칭으로 휘어 올렸다.

나보고 너를 믿으라고?

“…좋아.”

잠깐의 침묵 끝에 답했다.

“그렇다면야, 내가 뭘 믿어 줄까?”

나는 너 안 믿어.

아무리 원멸로 인해 배신당했던 그 삶이 지워졌다 해도.

…너는 여전히 너니까.

너무 쉽게 변절되는 마음속, ‘진심’이란 게 얼마나 얄팍한지 안다.

“…그믐달이 뜨는 밤에는 신당에 서린 선기가 더욱 짙어져.”

그믐달이 뜨는 밤이면 내일이다.

“그날이 적기야.”

심마가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물었다.

“날 믿어?”

날 바라보는 눈의 눈망울이 미묘하게 일렁인다. 한없이 진중한 낯은 어딘가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심마의 살짝 찡그려진 미간을 보았다가 느슨히 눈을 내리떴다.

‘왜 그날 천옥을 쥐고 도망치는 나를, 벼랑에서 놔줬어?’

문득 속에서 불쑥 의문이 치솟는다.

그때 천옥을 쥐고 있는 나를 보내면 자기가 죽을 거란 걸 알았을 텐데.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우사가 보인 언행들뿐이다. 그가 내게 보여 준 모습을 토대로 그를 알 뿐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의 모습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면, 그건 우사가 나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게 만든 것이다.

기만당한 삶은 진실을 찾기 어렵다.

‘진실’이라….

“-그믐달 밤.”

나직이 읊조리며 내리깔았던 눈을 다시 바로 떴다. 그리고 심마를 한 번 일별한 뒤 몸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는지 심마는 날 붙잡지 않았다.

나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연연만 챙겨 자리를 벗어났다. 구경하러 모였던 인파가 흩어지며 금세 사위가 어수선해졌다.

앞으로 걸음을 내딛을수록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코끝으로 긴 숨을 내쉬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가 아랫입술을 한 번 세게 말아 물었다.

속이 답답하다.

괜한 잡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혹시나’하는, 그런-.

“…‘진실’이라….”

낮게 중얼거리며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 * *

약속 시간인 정오에 딱 맞춰서 초옥으로 돌아왔다.

무본은 진작부터 초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

먼저 부르며 입매를 시원스레 휘어 올렸다. 그에 무본은 작게 숨을 들이 삼키더니 잠시 주춤거리다가 곧 내게로 후다닥 뛰어왔다.

“하이고-. 대인. 간밤 편안하셨는지요? 그나저나 멱리는…,”

“볕이 좋아 당분간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너스레를 떠는 무본의 말을 자르며 답했다.

무본은 그에 개의치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허어-. 그러시군요. 하기야, 멱리로 가리기엔 아까운 용모입니다요. 이리 훤칠하시니 낙주의 젊은이들이 꽃과 실을 사느라 바쁘겠습니다요. 대인의 걸음걸음마다 자수 놓인 손수건과 꽃을 뿌려…,”

“…….”

신나서 말을 잇는 무본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무본이 말을 잇다 말고 내 눈치를 본다.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저 그런 무본을 지켜만 봤다.

“…딸꾹! 딸꾹!”

급기야 무본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선 눈을 굴리는 무본의 모습에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며 입가의 미소를 거뒀다.

“나와 다시 만난 게 즐거운 모양입니다, 선생.”

내 말에 무본이 다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이어 말했다.

“아. 나도 선생을 다시 만나서 과히 기쁩니다.”

그러자 무본이 고개를 가로젓다 말고 다시 황급히 끄덕였다. 그에 나도 함께 고개를 주억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마음이 맞는 이도 드문데, 앞으로 서로 친목을 다지는 건 어떨는지.”

“……!”

사색이 된 무본의 두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대, 대인!”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서둘러 내리며 무본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마른침을 한 번 삼킨다. 무본의 숨결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느끼며 나는 한쪽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농입니다.”

“…예?”

“농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무본에게 친절히 한 번 더 일러 준 뒤 옆으로 비스듬히 걸음을 틀었다. 무본은 화등잔만 하게 뜬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박이다가 뒤늦게 얼빠진 웃음을 지었다.

“헤… 헤헤. 그러셨군요. 농담…, 농담…! 허허허-.”

나는 그런 무본을 일별한 뒤 완전히 돌아섰다. 그러자 무본이 알아서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하이고야-. 소인의 콩알만 한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요. 앞으로 그런 농은, 에잉-! 떼낑!”

“…….”

아주 질색하는 무본에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누가 보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이라도 한 줄 알겠군.

어떻게든 나와 엮이지 않으려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그래, 부득불 내게 다가오려는 심마가 이상한 거다. 무본은 아주 정상인 거야.

매우 정상적인 거지.

“지금 또 생각하니 농이란 걸 이제 확실히 알겠소이다. 대인과 소인이 친분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옆에서 계속 조잘대는 무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다가 어느 순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이에 무본의 말소리가 끊겼다.

“……대인……?”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날 부르는 무본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예?”

어리벙벙한 목소리로 되묻는 무본을 돌아봤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정색하며 내려다보자 무본이 슬그머니 반걸음 물러선다.

“무, 무슨….”

“…….”

나는 한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대인-. 무엇이 바뀌었다는 건지….”

다시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붙으며 무본이 물었다. 물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인…, 혹 아까의 그 친분을 다지자는 말과-,”

“그럴 리가.”

제대로 헛다리 짚는 무본에 결국 짤막하게 한 마디 대꾸해 줬다. 내가 반응을 해 줬다는 것 자체에 용기를 얻었는지 무본이 아까보단 좀 더 가까이 붙는다.

“그럼 무슨 마음이 바뀌었다는 겁니까요? 소인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

“대인~”

이제는 숫제 우는 소리를 내는 무본을 향해 소매에서 꺼낸 목독을 던졌다. 오늘 아침에 초옥에서 발견한 그 목독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압니까?”

무본을 보지 않은 채 여전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알아내면 살려 주시는 겁니까요?”

“…….”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무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서서 그와 마주했다.

“나는, 선사입니다.”

속에서 치미는 살심을 억누르느라 말을 하는 도중에 잠깐 숨을 삼켰다.

“…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

무본이 초조하게 눈을 굴리며 내가 준 목독을 두 손으로 꽉 쥔다.

“선생이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데-. 사실 선생 눈엔 내가 진짜 선사로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렇습니까?”

“…아니요. 선사님.”

“왜 날 선사라고 부릅니까. 선사로 보지도 않으면서.”

“…선사님, 저…, 제자분이 보십니다요.”

“…….”

내 관심을 돌리려는 무본의 노력은 통했다. 온 신경은 곧바로 곁의 연연에게 쏠렸다.

나는 눈만 굴려 연연을 힐끔 일별한 뒤 다시 앞의 무본을 보았다. 입가에 의식적인 미소를 그려 넣으며 싱긋 웃었다.

“눈치 좋네.”

무본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쟤가 보는 앞에선 안 죽일 거거든.”

무본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

무본은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조차 멎었다. 그리고 이내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무본의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무본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토닥여 줬다.

“장난입니다, 선생. 선생이 계속 내게 짓궂게 굴길래 나도 한번 재밌으라고 해 봤는데.”

대수롭잖은 어투로 가볍게 말하며 무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무본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대답했다.

“……예…. 예….”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눈가에 잔떨림이 일고 있다.

“…재미….”

내가 한 말을 멍하니 따라 하다가 다시 그 예의 어정쩡한 웃음을 짓는다.

“어때, 재밌었어요?”

내 물음에 무본의 웃음이 비굴함을 띤다. 그런 무본을 싸늘히 응시하며 입매만 호선을 유지했다. 그 상태로 잠시간 대치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재미없어.”

단호히 말한 뒤 아까 다가간 만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제야 무본이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쉰다.

목독을 들고 있는 무본의 손이 한 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꼼지락댄다.

“……저-, …정말 선사님 맞으신 거지요?”

얼마간의 숨 고르기 끝에 무본이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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