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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 메리드 트러블 (4)화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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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스의 하루는 거기까지였다. 빈혈에 시달리던 위스의 몸은 정신적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다.

위스는 다음 날 오후 늦게 눈을 떴다.

‘망할.’

커튼을 걷으니 오후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보석 세공된 장식함과 투명하리만치 얇게 직조된 캐노피 같은 것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전날과 다른 점이라고는 바닥의 깔개가 사라졌다는 것밖에 없었다. 피가 묻어 가져간 모양이다.

300년 뒤 후손의 방이었다. 위스가 겪은 일은 죽기 전 꿈도 환상도 아닌 모양이다.

문을 두드려 부르자 말 많은 호위가 달려왔다.

“너 말고 다른 기사는 없느냐?”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래도 자리는 안 비켜 드립니다. 전하 애인님은 성안에 안 계십니다. 저 쫓아내도 못 불러요.”

주인의 생각을 멋대로 추측하는 버릇은 또 어디서 배워 먹은 건지.

위스는 왕국 기사 수준에 실망하기를 그만뒀다.

“넌 알파냐?”

대신 그는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아직도 이 몸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위스에게 형질인은 낯선 인종이었다. 그의 부인들은 대부분 오메가이긴 했다.

위스는 끝도 없이 전쟁에서 승리해 나갔고 영토를 넓혔다.

그의 왕국으로 편입한 세력은 딸을 보내 평화를 도모했다.

위스는 그들 전부와 결혼했다. 정략적인 혼인이었고, 대개 결혼식에서 처음 얼굴을 봤다.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그들을 후궁으로 보낸 뒤 위스는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는 뜻이다.

부인들은 왕족이거나 귀족이었고, 그렇다는 건 그들이 형질인이라는 뜻이었다.

정략혼으로 보낸 혈족이 알파일 리 없으니 당연히 오메가다.

위스에게 굴복한 군주들은 위스가 베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스의 태생은 유명했다. 노예 출신의 천한 왕.

베타와 오메가의 결합에선 아이가 태어나기 쉽지 않다.

지극히 드문 확률로 임신이 가능하긴 했다. 그 예로 제레미는 베타였으나, 알파 자식을 둘이나 봤다.

제레미가 사교계에서 ‘위스 왕의 종마’ 취급을 당한 건 그 때문이었다.

비형질인이 형질인을 낳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도가 있었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위스에게 오메가를 보낸 귀족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천한 핏줄에서 귀한 자식을 얻도록 어디 죽도록 노력해 봐라’ 아니겠는가.

위스의 측근들은 모욕이라 분노했으나, 위스는 내버려 뒀다.

애초에 그는 자식을 가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인들의 역할은 위스의 아이를 낳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평화의 증표로.

위스의 왕국을 공격하지 않고 적대하지 않겠다는 살아 있는 증거로.

위스는 부인들이 마음껏 사치할 수 있게 허락했다.

그가 왕국의 일원에게 베푸는 후의였다.

그럼에도 배반자는 나왔고, 반역은 일어났다.

위스는 반역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제가 뭐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라고 알파겠습니까? 당연히 베타입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십니까? 전하 저 유혹하십니까?”

기사가 물을 따라 왔다. 위스는 저 뻔질뻔질한 얼굴에 물을 끼얹어 주면 정신을 차릴까 싶었으나, 물이 아까워 참았다.

기사의 말을 들어 보니 300년 뒤에도 형질인은 드문 모양이었다.

‘오메가는 가까이 가면 향기가 나고 눈을 마주치면 매혹된다지 않나.’

위스는 편견에 기초한 정보를 떠올렸다.

300년 전의 편견이라 대단히 고루했다.

서머력 310년에는 평민들도 안 믿는 헛소리였지만, 위스가 그 사실을 알 방도는 없었다.

그는 손목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봤다. 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내게 무슨 향기가 나지 않느냐?”

“예, 전하의 용안에선 빛이 나고 몸에선 꽃과 같은 향기가 납니다.”

“너한테 물은 내가 멍청했다.”

“아,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데요? 전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폐하께서 몹시 걱정하셨습니다. 신관도 다시 불렀는데 그냥 주무시는 거래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요란하게 드십니까?”

위스는 기사의 말을 무시했다.

‘이 몸이 쓰레기인 게 내 탓이냐.’

“형질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던데. 네 주변에 알파는 없느냐?”

“제 주변에 그리 귀한 분은 없지만, 전하의 애인님은 알파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몸 애인이 있었지.’

형질인의 애인은 보통 형질인이다.

“그놈 어디 있지?”

“애칭이 험악하군요……. 전하 기절하셨을 때 방위군으로 끌려갔습니다.”

“수도 방위군?”

“예. 그분도 기사니까요. 일하셔야죠. 왕국을 버리고 왕자를 택한 건 기사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충심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건 로맨틱하기는 한데요.”

‘수도 방위군 기사씩이나 되는 놈이 전시에 도망을 쳤다고.’

위스는 왕국 돌아가는 꼴이 이제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넌 이제 입 다물고 그놈 좀 불러와라.”

“전하, 그분은 당연히 지금은 본인 영지에 계십니다. 수도에 계셨어도 성안엔 못 들어오시고요. 폐하께서 직접 금지하셨잖습니까. 아, 그때 기절해 계셔서 모르시겠구나.”

이 기사는 말이 많은 데 반해 말귀는 못 알아들었다.

“누가 대놓고 데려오라더냐? 몰래 들여와야지. 수정구로 연락을 넣고 은밀히 다녀와.”

“저 마법사 아닌데요. 수정구를 어떻게 씁니까?”

수정구는 수정에 마력을 넣어 형상과 음성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기사라도 마력을 운영하기만 하면 쓸 수 있다.

“마력을 써!”

위스가 성질을 냈다.

기사는 움츠러들었다.

“기사가 무슨 수로 마력을 씁니까…….”

“뭐 하는 기사가 마력도 못 써? 왕성 마법사를 부르든가.”

“전하……. 마법사는 다 마탑에 살지 않습니까. 왕성 마법사라뇨.”

‘그건 또 뭐야.’

마탑?

300년은 긴 시간이었다. 변하지 않은 것보다 변한 것이 더 많았다.

“아니, 설령 애인님이 성내에 계신대도 제가 그분을 부르면 안 되죠. 사랑의 도피 협력자를 찾으시는 거라면 잘못 보셨습니다.”

“헛소리해라.”

“그분 불러서 뭐 하시게요?”

기사가 물었다.

평생을 베타로 살면서 오메가라는 오해는 받아 본 적 없었다. 이 얼굴로 오메가라니 무언가 착각이 있는 게 아닌가.

위스의 부인 가운데도 남자 오메가가 있었다.

‘어떻게 생겼더라?’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오메가란 대개 그렇지 않은가?

위스는 거울 앞에 섰다. 장식적인 타원 거울 한가운데 가냘픈 남자가 비쳤다.

“…….”

‘미쳤나.’

위스는 거울을 쳤다.

“왜 이러십니까. 미치셨습니까? 신관! 신관!”

기사가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위스는 알파를 직접 만나 형질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그만뒀다.

그 애인 놈을 보면 위스의 심장이 갑자기 뛰며 ‘난 오메가고 알파를 보면 설렌다’고 주장하기라도 하겠는가?

그냥 현실 도피였다.

위스가 어린 시절 이 얼굴을 왜 싫어했던가? 오메가라는 오해는 받은 적 없지만 여자애 같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다.

‘너 참 여자애처럼 예쁘구나.’ 하며 쓰다듬던 주인에게 ‘여자애를 이렇게 만지면 변태 새끼 아니냐. 주인어른 변태 새끼시냐.’ 했다가 죽도록 얻어맞은 적도 있다.

‘오메가란 말이지.’

위스가 아는 오메가는 왕족이거나 귀족이었다.

고귀하다는 혈통이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형질을 발현하는 순간 귀족의 양자가 되었다.

알파가 자식을 보려면 반드시 오메가와 결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가 적다는 의미에서라면, 오메가는 알파보다 더 귀한 인종이었다.

위스는 이 왕국에 남은 유일한 재산인 셈이었다.

위스는 왕이 답도 없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나, 그 수준까진 아닌 모양이었다.

왕국의 재정은 구멍 뚫렸고 국방은 허물어졌다. 과대한 세금으로 민심은 들끓는데, 팔라틴은 승전국의 권리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다.

이 망할 왕국이 망하게 하지 않을 방법은 놀랍게도 하나뿐이었다.

‘결혼.’

위스는 뛰쳐나간 기사를 다시 끌고 왔다.

“아카젤 대공에 대해 말해 봐.”

⚜ ⚜ ⚜

아카젤 대공 테오도어는 팔라틴이 자랑하는 무패의 기사였다.

여덟 살에 알파로 발현해서, 열세 살에는 키가 이미 성인만 했다.

17세에 왕실 토너먼트에서 우승해 무명(武名)을 얻었는데, 이토록 젊은 청년이 우승자의 관을 차지한 건 왕국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왕국 각지의 토너먼트를 차례로 우승하며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소인배들의 잡소리를 잠재웠다.

그에 대한 기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그 눈부신 외모와 고결한 성품은 귀족들의 흠모를 받았다.

왕에 대한 충정은 어떠한가?

신왕은 이후 첫 번째 대사업으로 정복 전쟁을 천명했다. 그는 아카젤 대공에게 원정군의 선두에 설 것을 명했는데, 그때만 해도 세간에서는 무리한 전쟁이라는 평판이 강했다.

대공이 갈 곳은 사지였다. 그러나 대공은 ‘기사는 왕의 명에 따를 뿐’이라며 군말 없이 출전했다.

‘위인전을 써라.’

위스는 눈을 내리깐 채 생각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대공이 집무실로 사용하는 중앙궁의 내실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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