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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 메리드 트러블 (5)화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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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스의 방문 요청을 대공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위스는 서머의 유일한 후계자인 것이다.

“들어오십시오.”

대공의 부관이 말했다. 그는 위스가 응접실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고 있었다.

방문이 허락된 사람은 위스 혼자였다.

위스의 호위 기사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공의 기사들이 ‘약속이 잡히지 않은’ 상대가 복도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스는 기사들의 상태만 보고도 대공이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사들은 태가 번듯했고 경계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다리시면 대공께서 오실 겁니다. 차는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괜찮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부관이 나가자 위스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질서 정연한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서머 왕국의 형편이 다시금 한심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긴장을 풀 순 없었다.

내실 문이 달칵 열렸다. 위스의 등줄기에 힘이 들어갔다.

돌아보니,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시 봐도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카젤 대공은 곧장 위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체구는 거대한데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태생이 군인인 듯한 남자였다.

대공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위스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비슷한 높이에서 마주 볼 수 있었다.

북쪽 지방 출신답게 머리카락은 색이 짙게 검었다. 마찬가지로 짙은 색의 눈썹 아래로 선명한 벽색의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잘생겼군.’

좀 과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군인의 피부가 저렇게 매끄러운 경우는 또 처음 봤다.

칼자국 하나는 있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위스는 자고로 군인은 좀 험악한 얼굴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위스의 부관만 해도 외모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통제 안 되는 잡졸들을 붙여 줘도 순식간에 훈련받은 군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상관없나.’

위스의 편견과 별개로, 신분 높고 능력 있는 놈이 외모까지 출중하면 숭배하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대공은 팔라틴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전쟁 전에도 팔라틴에서는 그 앞에 이름을 댈 수 있는 기사가 없을 지경이었다니 더 말이 필요 없었다. 현재 그가 받는 지지는 광신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아카젤 대공’은 명목상의 작위였다. 왕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카젤 대공 테오도어는 현 팔라틴 왕의 친동생이었다.

신분과 능력이 필요 이상으로 대단한 인물인 셈이다.

‘이만한 인물이 야심이 없을 리 없지.’

위스가 공략해야 할 부분은 그 점이었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대공이 먼저 물었다. 가진 것에 비해 사교성이 뛰어난 편인 모양이었다.

위스가 상대해 온 귀족은 하나같이 주눅이 들어 있어 그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그야 자기 왕관을 밟고 있는 상대에게 사교적으로 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위스는 입안이 떫어졌다. 대공 앞에서 보인 추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신관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라틴의 종군 신관이었다고요.”

“왕성 밖에서 신관을 부르기엔 전하의 상태가 위급해 보여 한 일입니다. 별일 아니니 굳이 감사하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안부까지 물어 놓고 퍽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러더니 대공은 시계를 힐끗 봤다.

위스는 무슨 뜻인가 의아해졌다가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게 용건이었다면 나가라는 뜻이다.

‘이 자식이.’

그야 대공이 자신을 만나 준 것만으로 예의는 충분히 차린 셈이다. 위스도 머리로는 이해했다. 물론 가슴이 납득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위스는 대공 앞에서 정리해 말하려던 ‘결혼 동맹의 이점’을 떠올렸다.

꽤 긴 얘기였다.

말한다고 저놈이 듣고 있을까?

위스는 자신이 약자의 입장에서 협상이라는 걸 진행해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떠올려 보려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그리고 위스는 약자일 때도 협상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보다 몸을 먼저 쓰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대공이 점잖게 물었다.

위스에게는 그 말이 ‘이만 나가지 그러냐.’로 자동 번역돼 들렸다.

‘후.’

위스는 잡다한 생각을 집어치우고 그냥 말했다.

“제가 대공 전하께 청혼하고 싶은데요.”

“……예?”

대공의 무뚝뚝한 표정이 깨졌다.

“팔라틴은 전쟁 공훈자에 대한 서훈이 약해, 대공 전하께서는 귀환하셔도 별 재미를 못 볼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팔라틴 왕……. 리엔델 폐하가 전하를 예뻐할 리도 없으니 영지를 받는 건 기대조차 할 수 없겠죠. 왕국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카젤 대공은 왕족이지만 다스리는 영지가 없었다.

애초에 왕실 직할지라는 게 넘쳐나질 않아서, 왕자가 태어났다고 한 뙈기씩 떼어 주면 남아나는 땅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공은 개털이었다.

공을 세우고 귀환한다고 팔라틴 왕이 영지를 하사할까?

온갖 훈장과 금은보화, 명예로 금칠을 하더라도 땅은 안 줄 것이다.

자신보다 명망 있는 동생에게 영지까지 줘 봐라. 반역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라도 하는 셈이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왕가의 혈족 중에 저 외의 오메가는 없습니다.”

위스는 대공의 선택지가 자신밖에 없음을 알려 준 뒤 말을 이었다.

“저희는 리엔델 폐하가 두렵습니다. 그분의 야심이 겁이 납니다. 지금은 저희에게 충성을 바라시지만, 또 무엇을 더 바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한테 힘을 실어 주겠다는 얘기다.

명분도 완벽하다.

리엔델 왕에게서 가장 싫은 부분은 그놈의 야심이 아니라 그놈이 물린 어마어마한 배상금이고, 아카젤 대공에게 서머 왕국을 떠안겨 주는 것처럼 구는 이유도 사실 대공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어디 대답해 봐라.’

야심 있는 놈이라면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공의 명성은 현재 최고치를 찍었다. 명성을 등에 업고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뿐이다. 때와 장소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팔라틴 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원정을 나와 있을 때.

이곳에서 대공이 결혼을 한대도 팔라틴 왕은 막을 수 없다. 이미 해 버렸다는데 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대공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혹시 제레미아 폐하의 명으로 오셨습니까?”

위스는 떨떠름해졌다.

‘그놈이 명령한다고 누가 듣겠냐.’

신분은 아직 왕이었지만, 제레미아 왕은 무시받는 왕이었다.

“아닙니다.”

“강요를 받아 오신 거라면, 마음에 없는 말씀을 제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는 연인이 있지 않습니까.”

저 소문이 대공의 귀에까지 들어갔단 말인가? 이 나라는 왕자의 추문 하나 관리 못 하고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분과는 이미 끝났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신경 쓸 만한 관계가 아닙니다.”

“신관에게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고요. 연인과 강제로 헤어지고 마음의 병을 얻어, 한동안 계속 앓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위스는 신관을 떠올렸다. 표정이 이상하더라니.

“신관이 무언가를 오해한 모양입니다.”

“전하, 그 자리엔 저도 있었습니다.”

대공은 테이블을 잠시 보더니 고개를 들어 위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위스는 그 시선에 할 말을 잃었다.

‘불쌍해하고 있잖아.’

누가 그를 동정하는 걸 얼마 만에 본단 말인가?

“바로 며칠 전의 일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쓰러져 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몸의 상처는 신관이 치료했더라도,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엔 짧은 시간일 줄 압니다. 전하께서도 이곳에 찾아오는 마음이 좋지 않으셨겠지요.”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레미아 폐하께는 제가 확실히 거절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하께 피해는 없을 겁니다.”

대공이 달래듯 말했다. 위스가 자신의 뜻으로 왔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럴 만하긴 했다. 보통 다른 알파와 야반도주하려던 오메가가 며칠 만에 자의로 다른 알파에게 청혼할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위스가 자의로 왔든 타의로 떠밀려 왔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거래의 내용이 아닌가.

“아바마마와는 관계없습니다. 청혼은 제 뜻입니다. 제 말씀 들으셨습니까? 저는 왕국을 대공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자 대공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청혼의 대답을 제가 전하께 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거절입니다.”

위스는 욕설을 참았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왕국이 개털 수준도 아니란 걸 알았나?’

하지만 왕국의 가치는 그 나라의 부에만 있지 않다. 영토와 성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재산인가?

전쟁이 끝났으니 대공의 군대는 해산해야 했다. 그가 이끄는 기사단이라면 뭐 대공이 알아서 먹여 살리겠지만, 용병은 둘 곳이 없는 것이다. 용병을 이끌고 팔라틴 수도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서머 왕국이 대공의 소유라면, 그는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나라에 박아 둘 수 있는 것이다.

서머에서 군세를 확장하고 명분을 얻어 팔라틴으로 진격하면, 대공은 팔라틴의 왕이 될 수도 있다.

위스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팔라틴을 두 쪽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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