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눈을 떴을 때 격렬한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쉴 새 없이 발로 구타당하는 듯한 통증에 날 선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지만,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하다 결국 속에 있는 것들을 게워 냈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목울대가 꿀렁이며 멈추지 않았다.
토는 멈추지 않고, 몸은 여전히 아프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깨어나기 전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악마에게 공격당한 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태운이 다시 돌아와서 나를 구해_줬단 걸 알 수 있었다.
간신히 구토를 멈추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다행히 고통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마물에 의해 뜯겨 나간 팔과 다리 또한 모두 말끔하게 회복된 모습을 보니 조금씩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태운을 찾으려 했으나, 주변을 둘러보자마자 그대로 굳고 말았다. 병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내가 3년 전 다니던 공장 숙소였다.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이번 게이트 때 단독 행동으로 셸터에서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협회에서 제명당한 걸 수도 있었다.
불안함에 서둘러 핸드폰을 찾았지만, 머리맡에 놓인 것은 최근까지 쓰던 기종이 아니라 한참 전에 잃어버렸던 핸드폰이었다. 의아함과 불길함을 느끼며 현재 사용하는 핸드폰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결국 예전 핸드폰으로 진호 형에게 전화하려고 했지만,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센터에 연락하려고 할 때였다. 핸드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중요) 어머니 생신]
“어머니 생신?”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알림 메시지를 읽었다.
어머니 생신이면 7월이었다. 4개월 전에 떠야 하는 알림이 왜 이제야 뜨는지 알 수가 없어,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캘린더를 확인했다.
내가 악마에게 부상당하고 몇 달 동안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캘린더는 11월이 아니라 7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지만, 연도가 3년 전이었다.
나를 놀라게 하기 위한 센터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센터에서 이런 바보 같은 장난을 할 리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들도 모두 3년 전 오늘이었다.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며 손바닥으로 뺨을 쳤지만, 정신이 차려지기는커녕 아찔하고 뺨만 아팠다.
지금 상황을 봤을 때, 나는 3년 전으로 돌아왔다.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지금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금까지의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나는 한동안 뜯겨 나갔던 팔을 바라봤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까지의 일들이 꿈일 리는 없었다.
이내 핸드폰으로 현태운도 검색해 보았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앳된 현태운의 사진이 뉴스 기사와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사진을 본 순간 목부터 뜨거워지더니 얼굴에 피가 쏠렸다. 나를 버리고 주원재에게 달려가던 현태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점점 숨이 거칠어지는 걸 느끼며 서둘러 화면을 껐다.
눈앞이 빠르게 차오른 눈물로 일렁이더니, 결국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닦아 내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참혹하고 괴로운 기억이었다. 이 기억은 절대로 내 상상이나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정말 내가 3년 전으로 돌아온 것일까? 그냥 죽어 버리지 왜 과거로 왔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없애 주지. 그랬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현태운이 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도 되었다.
끝까지 내게 상처만 준 현태운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다시 밀려들어 왔다. 나를 버리고 간 그를 생각하자, 배신감과 함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자니,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태운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냉정해지며 메마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 태운 때문에 울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는 그 때문에 울고 싶지 않았다. 계속 운다면 예전의 미련하고 바보 같던 나와 똑같은 것이다.
멈출 거 같지 않았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두 번 다시 현태운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만나게 되더라도 예전처럼 그에게 마음을 바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이 어머니의 생신이라면 내가 가이드로 각성한 날이었다.
현태운을 만나고 가이드로 각성했으니 오늘은 절대로 나가면 안 되었다.
가이드가 되어 봤자 C급이었고, 현태운과 엮일 것이 분명했다. 각성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과거로 돌아왔다면 오후에 A급 게이트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오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은 너무나도 느리게 흘러갔다.
우선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우고, 정말 3년 전으로 돌아온 것인지 문자와 뉴스들을 재차 확인했다. 그렇게 오후 5시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창문 안으로 어둠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주홍빛 노을이 지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창문으로 다가갔다.
머지않아 핸드폰이 울리며 긴급 메시지 알림이 떴다.
[(긴급안내문자에스퍼가이드협회) 107구역 A급 게이트 출현. 외출 및 야외 활동을 삼가시고 게이트 근방 주민 여러분들은 대피소로 즉시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107구역이면 내가 각성했던 날에 있었던 구역이었다. 정말로 게이트가 열리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게 작은 희열감도 느꼈다. 죽었는데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이니 말이다.
실시간 뉴스를 확인하자, 그날 내가 봤던 보스 마물과 게이트 주변이 찍힌 사진들이 보였다.
이것만으로 단정 짓는 건 섣부르단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의 상황들을 봤을 때는 내가 진짜 과거로 돌아온 거 같았다.
현태운과 다른 에스퍼들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고, 나는 하늘을 보며 게이트가 닫히길 기다렸다.
게이트가 닫히면 내가 가이드로 각성할 일도, 더는 현태운과 만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구름은 1시간이 지나서야 걷혔다. 먹구름이 물러가기 무섭게 비가 쉴 새 없이 내렸다. 현태운의 능력으로 불바다가 된 게이트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물 속성 계열 에스퍼가 내리는 비였다.
게이트가 닫혔다는 안내 메시지에 뉴스를 확인하자, 현태운이 부상당했다는 뉴스가 제일 처음으로 화면에 띄워졌다.
예전이라면 걱정부터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살짝 놀랐다.
과거로 돌아오자, 그를 좋아했던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 그를 향한 마음도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현태운을 향한 불쾌하고 역겨운 감정만을 느꼈다.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콱 막히는 기분도 들었다.
평생 현태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을 느꼈다.
그동안 현태운에게 당했던 일들도 하나씩 떠올랐다. 그에게 헌신적이었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현태운은 3년간 자신에게 헌신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호구라 여기며 자기 좋을 대로 휘두르고, 이용하기 좋은 가이딩 기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현태운을 만나더라도 예전처럼 당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이드로 각성하지 않은 채, 현태운 같은 건 몰랐던 일반인 이신의로 살고 싶었다.
이제야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지금처럼 공장에서 쉬는 날 없이 일하면서 어머니의 병원비로 사용된 사채를 갚을 때가 더 행복했다. 가이드로서 사는 것보다 이런 삶이 나와 더 어울렸다. 물론 몸은 괴롭겠지만, 적어도 마음만큼은 괴롭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왠지 현태운을 다시 만나게 되면 과거로 돌아오기 전처럼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대로 현태운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현태운을 위해 죽을 생각 따윈 없다. 필사적으로 그를 피하고,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내 안에서 완전히 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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