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협회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직서를 썼다. 사직서를 제출해도 처리가 안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쓰는 이유는 원재를 위해서였다. 원재의 일은 협회의 부당함이 도를 넘어섰다.
생각보다 가이드의 사망률은 높았다. 에스퍼와 달리 능력 사용이 불가능했고 역가이딩이나 마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 또한 게이트에서 죽었기에 게이트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각성한 지 3개월도 안 된 원재가 S급 에스퍼의 전담을 한다니 말도 안 되었다. 적어도 충분히 가이딩 훈련을 받은 뒤에 전담을 맡는 것이 맞았다.
사직서에는 그동안 협회의 계약 불이행 건과 성요한에게 강간 미수를 당했을 때의 대처, 그리고 그동안 내가 해고 사유에 해당하는 일을 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다. A4 용지 3장을 꽉꽉 채웠다.
마지막으로 흰 봉투에 사직서라고 큼지막이 쓰고 종이를 접어 넣었다. 내일 이것을 들고 협회에 갈 생각이었다.
***
원재는 훈련 때문에 일찍 센터로 간 뒤라, 나는 따로 협회로 향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태운이었다.
현태운의 모습에 나를 쫓아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이내 그 또한 여기서 살고 있다는 게 기억났다. 현태운도 나를 눈치챘는지 거리를 둔 채 속도를 멈춰 섰다.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내게 말을 건넸다.
“어디 가세요?”
“어디 좀 가려고요. 현태운 씨는 왜 여기에 있으세요.”
“운동하고 왔어요. 어디 가시는 건데요?”
현태운의 모습을 보자, 평소의 제복 차림 대신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협회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모셔다드릴까요?”
현태운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사직서를 내기 위해 협회에 가는 것도 모른 채 데려다주겠다니.
그래, 현태운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도 좋을 거 같았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끝난다는 사실을 그도 확실히 느꼈으면 했다.
“좋아요.”
내가 승낙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태운이 놀란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차 가지고 올게요.”
나는 현태운이 차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태운의 스포츠카가 보였다. 잘 알고 있는 차였다. 태운의 본가에 있는 온실 정원에 갔을 때 탔던 그 스포츠카였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의 기억이 생생했다.
현태운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려고 하는 것을 알기에 내가 먼저 조수석 안으로 들어갔다. 현태운이 머쓱해하며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현태운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안전띠를 매고 운전을 시작했다.
“신의 씨, 아침은 드셨어요?”
“네.”
“협회 일 끝나면 같이 점심 먹을까요?”
“아니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나는 더는 답하지 않은 채 옆 창문을 바라봤다. 10분 안에는 협회에 도착할 것이다.
“신의 씨, 센터는 언제까지 쉬는 거예요?”
“모르겠네요.”
나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현태운과의 대화가 이제는 껄끄럽지는 않았지만, 그와 단둘이 차 안에 있으니 마음이 다시 갑갑해졌다.
“신의 씨가 접근 금지 풀어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 열심히 신의 씨 마음 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현태운의 어떤 짓을 해도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열 일도 용서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답하지 않은 채 옆 창유리로 시선을 돌렸다.
머지않아 협회 건물이 보였다. 곧 있으면 더 이상 현태운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차는 부드럽게 협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곧 차가 주차되고, 정차했음에도 나는 내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현태운을 향해 낮게 말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요?”
“아니요. 왜 왔는데요?”
나는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현태운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이내 사직서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자, 현태운의 눈이 커졌다.
“신의 씨!”
나는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협회 건물에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능력 무효화 에스퍼가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 물리적 힘을 제외하고는 현태운이 나를 억압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현태운이 나를 쫓아왔다.
“신의 씨, 정말 퇴사하려는 거에요?”
나는 현태운의 말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 내 어깨를 그가 돌려세우며 말했다.
“왜 퇴사하는 거냐고요!”
“제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죠.”
나는 싸늘하게 말하며 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태운 또한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퇴사할 생각이라서 접근 금지도 풀어 준 거였나요?”
“이번에는 빨리 눈치채셨네요?”
“신의 씨는 왜 저한테 한 번의 기회도 안 주는 겁니까.”
“현태운 씨한테는 기대감이 없어서요.”
“왜요?”
현태운은 이번에도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과거로 돌아오고 현태운의 새로운 면들을 보는 거 같았다. 그의 눈물도 보고 말이다.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세요?”
“네. 저는 변한다고 생각해요.”
“전 아니라서요.”
다행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곧장 협회장실로 이동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협회장실에 들어가려면 비서실을 거쳐야 했기에 데스크에 앉아 있는 비서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신의 가이드님, 무슨 연유로 오셨나요?”
“협회장님을 뵙고 싶어서요.”
“잠시만요.”
비서는 곧장 협회장실에 내선 전화를 넣었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나누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비서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협회장실로 들어갔다.
“신의 가이드님, 아침부터 무슨 일이신가요?”
협회장이 나를 반기면서 다가왔다. 선량한 사람인 양 웃는 낯짝이 여전히 기분 나빴다.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나는 사직서를 그에게 주었다. 내가 사직서를 가지고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현태운같이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우선 이쪽에 앉으세요.”
협회장은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를 손짓했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지만, 이야기라도 들어 볼까 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많이 참았습니다. 더는 협회에 협조할 생각 없어요.”
“이신의 가이드님이 원하시는 대로 다 해 드리겠습니다. 성요한 에스퍼님과 페어를 해지하고 싶다고 하셨었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랐다. 성요한과 페어를 끊어 주다니? 솔직히 협회에서 순순히 뜻대로 해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급히 한 가지 조건을 더 말했다.
“원재도요. 가이딩이 능숙해질 때까지는 전담 에스퍼 붙이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사직서는 무르시는 거겠죠?”
“네.”
협회장이 내게 사직서를 다시 주었다. 퇴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렇게까지 협회장이 뒤로 물러서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아직은 원재와 지훤과도 멀어지고 싶지 않고 말이다.
“대신 이번에도 불이행하시면 두 번은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협회장실에서 나오자, 현태운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직서 수리됐어요?”
“아니요.”
내 말에 그제야 태운의 경직되었던 얼굴이 안도감으로 풀어졌다.
“협회장이랑 말 잘됐나 봐요?”
“네.”
나는 현태운을 지나치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내 옆으로 현태운이 걸음에 맞춰 걸어오더니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며 말했다.
“현태운 씨는 내가 싫다는데도 왜 계속 다가오는 거예요?”
“신의 씨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현태운은 망설임 없이 곧장 말했다.
“왜 갑자기요?”
“신의 씨를 좋아하니까요.”
“S급이라서요?”
현태운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분명 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표현해도 그는 한 번도 마음을 열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S급이 되자마자 나를 좋아한다니. 역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안됐네요. 저는 현태운 씨 싫어해요.”
“괜찮아요. 전 계속 좋아할 거고 신의 씨 지킬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갔지만, 그런 내 뒤로 현태운이 따라오며 말했다.
“제가 바래다드릴게요.”
“괜찮아요. 각서대로 접근하지 마세요.”
내가 단호히 말하자, 결국 태운도 물러섰다. 그렇게 협회의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내 뒤로 현태운의 차가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
협회장은 약속대로 원재의 전담 건을 미뤘고, 나와 성요한과의 페어도 해지해 주었는지 성요한과 내 워치의 가이딩 수치 연동이 풀렸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센터에 나가게 되었다. 사실 집에서만 있는 것이 지루하고 심심했다.
내가 다시 센터에 나오자 모두 환영해 줬다. 늘 그랬듯 원재, 지훤과 훈련하고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지훤이 오늘은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보고 있었다. 의아함에 왜 그런지 물었다.
“미국 텍사스 쪽에 S급 게이트 열렸나 봐요.”
“S급 게이트?”
S급 게이트라고 하면 내가 죽었던 S급 악마 게이트가 반사적으로 떠올라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네. 심각한 거 같아요.”
지훤이 내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미국 상황이 실린 기사와 함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게이트로 인해 허허벌판이 되어 버린 현장은 살풍경했다.
“최다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해요. 에스퍼랑 가이드도 많이 죽었고요.”
기사를 보니 게이트는 S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게이트인 거 같았다.
“걱정되네요.”
“그러게.”
나는 인상을 쓴 채 뉴스를 봤다. 부디 게이트가 빨리 닫히기를 기도했지만, 게이트는 일주일이 넘도록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