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1화 (2/176)

1화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 주역 정백강, 잉글랜드 포츠머스 FC 입단!]

[피지컬이 가장 큰 강점, 성장 가능성 ‘무한대’]

[‘EPL 선배’ 박지승―이형표―설기윤과 맞대결은 언제쯤?]

나의 잉글랜드 진출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뉴스였다.

만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 리그 중 하나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당시의 내가 너무나도 어렸다는 것.

애송이 주제에 스타병에 제대로 걸려 버렸고, 잉글랜드에서 끔찍한 삽질 끝에 1군 경기를 단 한 번도 뛰어 보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이후부터는 한때 반짝했던 별 볼 일 없는 선수로 연명하다 허무하게 죽어 버렸고.

뭐, 결과적으로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말이다.

“네, 통역은 필요 없습니다.”

2007년 7월 15일.

오늘은 나의 역사적인(?) 입단식이 있는 날.

구단에서는 통역을 준비해 주겠다고 했지만 쿨하게 거절했다.

새로 얻은 능력 덕분에 나의 영어 실력은 이미 원어민 수준이니까.

그나저나 술에 찌든 30대 중반의 몸에서 팔팔하던 스무 살로 돌아오니 몸이 아주 가볍다.

샤워하려고 옷을 벗었더니 식스팩이 선명하다.

역시 나이가 깡패… 인 것도 있고 내가 관리를 워낙 안 했었다.

입단식이 열린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턴 파크에는 꽤 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당시에는 너무 긴장해서 리프팅 실수를 하는 추한 모습을 보였었지.

그러나 두 번의 실수는 없다!

“하하… 우리 정백강 선수가 많이 떨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길.

또 똑같은 실수를 했다.

쪼르르 따라가 공을 줍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쭉 솟았다.

이렇게 민망할 수가 있나.

해리 레드냅 감독이 웃으면서 내 편을 들어 주긴 하지만….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명색이 인생 2회차인데 말이지.

한 차례 커다란 삽질을 한 후 유니폼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배번은 12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남는 번호 중에 제일 빠른 번호라서 골랐다.

두고 봐라.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번호로 만들 테니.

비록 첫인상은 구겼지만, 기자 회견은 시작부터 잘 풀렸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포츠머스 FC에서 뛸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기자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감탄사가 터졌다.

귀여운 녀석들.

이렇게 영어 잘하는 한국 축구 선수는 처음이지?

‘박―이―설’ 선배님들보다 축구는 못할지 몰라도 영어는 내가 몇 수 위란 말씀이야.

은퇴 후 학원 차릴 계획까지 다 세워 놨단 말이다.

“신체적으로 완성된 선수라는 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레드냅 감독이 나를 영입한 이유를 설명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피지컬이 좋아서 샀다’라는 얘기.

근데 정말 그렇다.

자랑이나 과장이 아니다.

‘탈동양인’ 수준의 몸을 보유한 게 바로 나, 정백강이란 선수의 아이덴티티다.

긴말 필요 없이 스펙을 보라.

188cm, 90kg.

체지방률은 5%대.

도하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다른 나라의 공격수들은 미친 신체를 앞세운 나의 수비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국 전 경기 무실점의 기록을 세우며 멋지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나보다 더한 피지컬 괴물이 많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번 시즌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자의 질문이라는 건 뻔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답변은 미리 준비해 놓았다.

“1군에서 자리를 잡는 것. 그리고 FA컵 우승이 목표입니다. 장기 레이스인 리그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단판 승부인 FA컵이라면 승부를 걸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레드냅 감독이 꿈도 야무지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감독님.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도 모르시나요.

저를 믿으세요.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 드릴 테니.

* * *

‘크으… 반가운 얼굴들이군.’

입단 후 첫 팀 훈련이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옛 동료들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물론 1회차 때는 그리 친해지진 못했었다.

아무래도 영어가 짧다 보니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었고,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해외 축구에 늦게 입문한 친구들은 포츠머스를 하부 리그 팀으로만 알고 있겠지만 지난 시즌, 그러니까 2006―2007 시즌에 포츠머스는 EPL에서 무려 9위에 올랐었다.

만만찮은 전력의 팀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네임드’도 꽤 있었다.

“정붹가앙. 포츠머스에 온 걸 환영해.”

완벽하진 않지만 연습해 온 듯한 발음으로 나를 반겨 주는 이 사람.

젊은 세대는 ‘피파 온라인’에서 자주 봤을 바로 그 선수.

포츠머스의 주장이자 잉글랜드 국대 출신이기도 한 솔 캠벨이었다.

토트넘의 올드팬들에게는 희대의 역적으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트넘 주장이 다른 팀도 아닌 아스널로 휙 떠나 버린 건 인간적으로 좀 너무하긴 했다.

물론 이적 후에 영광의 무패 우승 주역이 됐으니 본인 커리어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감사합니다. 같이 뛰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나도 한 피지컬 한다고 했지만, 캠벨 앞에 있으면 어린아이가 되는 기분이다.

키나 몸무게는 분명 나랑 비슷한데, 떡대가 차원이 다르다.

저 무지막지한 몸뚱이로 공격수들을 씹어 먹으며 EPL의 정상급 센터백으로 군림했던 캠벨.

실력뿐만 아니라 상징성도 있어서 내가 밀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미션.

그렇다면 나의 실질적 경쟁자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왔구나, 실뱅 디스탱.

맨시티에서 뛰다가 나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즌에 포츠머스에 합류한 이 프랑스 출신 센터백은 몸만 보면 캠벨 이상의 괴물이다.

신장이 무려 193cm.

게다가 발도 빠르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신체.

자기 관리까지 뛰어나서 1977년생인데 2016년까지 EPL에서 플레이했다.

우이쒸.

왜 이렇게 센터백 라인이 탄탄한 거야?

비비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이네.

게다가 레드냅 감독은 유명한 ‘베스트 11’ 신봉자.

한번 정해 놓은 주전 라인업을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 스타일이다.

물론 반대로 얘기하면, 어떻게든 주전 자리에 발탁만 된다면 좀 여유 있게 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수비수들 지도는 수석 코치인 토니 애덤스가 도맡아서 진행했다.

아스널에서 동상까지 세워 줬을 정도니, 말 그대로 레전드 오브 레전드인 애덤스.

레드냅 감독이 아스널 광팬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아스널 출신들이 많기도 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내년에 레드냅 감독이 토트넘으로 떠나고, 애덤스 코치가 그 자리로 올라갈 예정이다.

여러모로 잘 보여 둘 필요가 있다.

“자, 공 다루는 훈련부터 시작해 볼까?”

애덤스 코치는 훈련 때 항상 ‘기술’을 강조했다.

피지컬이 좋은 선수가 워낙 많다 보니 부족한 부분을 채우자는 의미였다.

제기랄.

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어이 신입, 잘 좀 해 봐.”

‘볼 살리기’ 게임에서 나만 실패를 거듭하자 애덤스 코치가 참다 참다 못해 한마디 던졌다.

심장에 비수처럼 박히는 말.

그렇다.

나의 약점은 바로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것.

한국에서 뛸 땐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높은 무대에서는 확연히 두드러졌다.

물론 보완할 생각이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꽉 붙잡아야지.

“다들 모여 봐.”

포지션별 훈련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레드냅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30분짜리 게임 하나 뛰고 끝내자. 첫날이니 가볍게 하지 뭐.”

가벼운 거였어?

숨을 헐떡이는 걸 들킬까 봐 급하게 입을 막았다.

애덤스 코치의 주도하에 팀이 나뉘었다.

우리 팀은 빨간 조끼, 상대는 노란 조끼.

내 센터백 파트너는 디스탱.

이적생들끼리 붙여 놓은 건 일종의 테스트일 것이다.

기대해라, 내게는 봉인해 놓은 필살기가 있으니까 말이다.

킥오프.

옐로 팀의 선공.

경기 시작하자마자 미드필더 션 데이비스가 장거리 패스를 우리 진영으로 때려 넣었다.

공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지난 시즌 팀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핵심 공격수 은완코 카누.

전성기가 지나서 발은 많이 느려졌지만 페널티 박스 안에서 공을 잡으면 여전히 위협적인 베테랑.

근데 왜 패스가 디스탱 쪽으로 가냐, 나한테 와야지.

가볍게 패스를 끊어 낸 디스탱이 설리 문타리에게 공을 넘겼다.

문타리 역시 이번 시즌 새로 포츠머스에 합류한 선수.

조직력이야 옐로 팀이 좋겠지만, 레드 팀은 감독에게 눈도장을 받겠다는 의욕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문타리가 대지를 가르는 패스를 시도.

차후 인터 밀란에서 기량을 만개하게 되는 문타리지만 왼발 킥력은 이때도 장난이 아니었다.

빨랫줄처럼 쭉쭉 날아간 공이 포워드 존 우타카에게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와… 무지하게 빠르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우타카의 스피드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나이스 디펜스!”

포츠머스의 주장은 쉽게 뚫려 주는 인간이 아니었다.

파워풀하면서도 깔끔한 태클로 공만 따내는 캠벨.

역시 ‘짬바’는 무시할 수 없는 법.

그런데 첫 연습 경기라 그런지 의욕이 과했다.

평소 잘 보여 주지 않던 롱 패스를 하더니 공을 라인 밖으로 날려 버린 것.

본인도 머쓱했는지 아직 흐르지도 않은 땀을 닦는 모션을 취했다.

덩치는 산만 한데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이후 중원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옐로 팀 플레이 메이킹의 핵인 니코 크란차르는 파파 부바 디오프가 모기처럼 따라다니며 봉쇄.

문타리는 데이비스가 철저하게 1:1로 마크했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측면으로 눈이 돌아가는 법.

옐로 팀 오른쪽 풀백인 글렌 존슨이 눈치를 보다가 빠르게 측면 공간을 파고들며 손을 들었다.

역시 잉글랜드 국대답게 오버래핑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아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크로스에 대비해야 할 때.

우리 카누 형님은 헤더 득점에도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란 말이다.

크란차르의 날카로운 로빙 패스를 받은 존슨이 고개를 들어 카누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크로스.

그래그래.

나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엉덩이에 힘을 빡 주면서 솟구쳐 올랐다.

카누도 함께 뛰었지만 나와 경합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누구냐.

서전트 점프 130cm의 괴물 아니겠는가.

압도적인 높이를 과시하며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퍼어어억!

<머리여 발이여>의 효과는 굉장했다.

헤더에서 이런 굉음이 날 수 있단 말인가.

내 머리에 맞은 공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중앙선 부근에 있던 문타리의 품에 쏙 하고 안겼다.

그래, 바로 이거야!

힐끗 고개를 돌려 분위기를 확인하니 코칭 스태프 전원이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레드냅 감독은 입을 떡 벌린 채 눈알을 여기저기 굴리는 중.

감독님, 태어나서 이런 건 또 처음 보셨죠?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저는 쌓인 게 아주 많은 놈이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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