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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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씹어댔는지 빨대 끄트머리가 다 닳았다. 이번에는 혀로 문지르며 창밖을 끈질기게 주시했다. 잿빛 유리에 멀겋게 비친 내 눈동자가 유리 밖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일렁인다. 방금 전 휴학계를 수리하고 온 사람답지 않게 초조한 모습이었다.

티끌 없이 맑은 오후 속에서 이세정이 걷고 있었다. 걸음 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며, 더욱이 상류층의 여유로움까지 갖춘 남자였다. 건조하게 가라앉은 눈, 유리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풀리는 입꼬리, 그는 그 어느 것으로도 시선을 쉽게 사로잡았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이세정은 곧장 창가 귀퉁이를 찾았다. 들어오기 전부터 줄곧 거슬렸다는 듯 앉지도 않고 내 턱부터 쥐었다. 입술로 물고 있던 빨대가 힘없이 컵 속으로 떨어졌다.

“휴학했죠.”

협소한 도로변에 바이크와 검은 차가 나란히 주차되는 광경을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대면하니 속이 쓰렸다.

“왜 했어요?”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부족하고…….”

“돈이 필요해요?”

“돈은 항상 필요합니다.”

너 때문에 휴학했다고 말할 수 없어 에둘러 한 표현이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세정은 뜻 모를 얼굴로 내 등을 천천히 감쌌다. 간지러울 만큼 부드럽다. 등줄기가 쭈뼛 서는 듯해서 덩달아 허리를 폈다. 이세정은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유리창 밖을 가리켰다. 허공의 어느 지점을 찌른 손가락이 옆으로 쭉 당겨졌다.

“저기부터 저기까지, 풀을 지어줄게요.”

“예?”

“그 풀을 다 현금으로 채워서 파묻혀 수영하게 해줄 수 있어요.”

이세정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쯤은 바로 알아들었다. 주로 국외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을 창단한 부계 쪽과 독자적인 명품 브랜드를 가진 의류 사업을 성공시킨 모계 쪽 피를 이어받은 이세정의 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출발선부터가 남달랐으며, 선택 가능한 길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간결하고 다양했다. 설렁설렁 모터스포츠를 즐기며 보냈던 부유한 유년기. 본격적으로 바이크를 배우며 선수 생활을 했던 소년기. 그리고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스포츠 산업 관련 전공으로 독일 유학을 갔다 온 지금. 그 쉬운 인생을 내게도 선사해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쉬운 걸 좋아한다. 인생이 완만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거머쥘 수 있었으면 한다. 그때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노력하지 않고 얻어내는 것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내 동의를 구하는 듯 끈덕진 눈길을 보내는 이세정을 힘겹게 밀어내며, 완곡한 거절을 했다.

“재밌네요.”

“재밌나…… 재밌기만 하면 안 되는데.”

잠시 나를 보던 이세정이 고개를 돌렸다. 꺼진 음악 사이로 카페 손님들의 음성이 조악하게 모이고 있었다. 이세정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운데 자리, 그러니까 카페 안 소음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는 테이블 자리였다.

“여기 있어요.”

이세정이 일어났다. 그럴 리가 없단 걸 알면서도, 혹 소음의 원인의 멱살이라도 붙잡을까 봐 나는 다급히 물었다.

“왜, 왜요?”

이세정은 카페 사장과 할 말이 있었는지 그 테이블을 지나쳤다. 다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주시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이세정이 곁에 있으면 온갖 말 같지도 않은 망상들이 쏟아지곤 했다. 혹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면 어쩌지, 저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할까. 속을 달래려고 음료를 빨아먹었다. 주스에서는 단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세정과도 만났겠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

“저기요.”

비스듬히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올리니 밝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뒤에 몰고 온 무리는 저리 물러나게 하고, 남자 하나가 내 옆에 앉으며 친근한 척 물었다.

“방금 여기 있던 사람, 이세정 맞아요?”

물음을 듣자마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뉴스에 간혹 얼굴을 내비치는 이세정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전직 바이크 선수였던 이세정을 말하는 걸까. 뉴스에 몇 번 나오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알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고민이 길어질 것도 없이 남자가 내 손목을 잡았다. 덩치는 비슷했으나 악력이 세서 잠깐 주춤했다.

“돌아오면 저 바이크요.”

남자가 유리창 밖에 세워진 바이크를 가리켰다. 7억짜리 바이크다. 아니, 40억이었나. 이세정이 가지고 있는 바이크 중에는 비슷비슷한 디자인이 많았다.

“저 바이크 한 번만 구경시켜달라고 말 좀 전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걸 왜 저한테 말하십니까.”

“꽤 친해 보이길래요.”

“안 친해요.”

남자는 내 말을 거절의 한 부분으로만 받아들였겠지만, 친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세정과 먼 사람이었고, 그것은 재력적인 부분만을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세정의 가치관, 이세정의 생각, 이세정이 중요시 여기는 그 모든 것들. 이 작은 세계에서 아등바등 평범하게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을 이세정은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이세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세정이,

“가족이에요?”

남자에게 잡혀있는 내 손목을 잡아 풀고,

“가족도 아닌데 왜 잡아.”

하며 남자의 가슴을 발로 찰 때조차 나는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싸움이 이뤄지고 있는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이세정은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나를 찾아냈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뻔뻔하게 쳐다본다. 안 다쳤냐고 물어보는데 입술도 열리지 않았다.

“잡고 일어날래요?”

이세정의 손을 잡는 대신 가까운 의자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세정은 내 이마에 부드럽게 손등을 올렸다. 맞닿은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눈썹을 움찔했다. 방금 전 폭력을 행사하던 남자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 적잖은 부담이 차올라서 결국 도망치듯 카페 밖으로 뛰쳐나왔다.

휴대폰을 꺼내 갈등했다. 119를 눌러 다친 사람들을 구조해야 할지, 아니면 저들에게 맡겨야 할지. 떨림의 여파를 여태 잡아내지 못한 엄지손가락으로 계속해서 1과 9 사이를 오갔다. 엄지손가락을 서서히 미끄러트린 순간, 어깨가 잡혔다. 물론 내 몸은 돌려졌으며 정면에는 이세정이 있었다. 이세정의 뒤로 낯익은 경호원이 두엇 보였다. 결국 저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수습하겠구나, 생각이 드니 가슴이 발랑발랑 뛰었다.

“데려다줄게요.”

“바이크 안, 안 탑니다.”

“거기에 태울 생각 없어요. 우채민 씨 뒤에 태우고 코너링이라도 할까 봐요?”

이세정이 몇십억짜리 바이크를 타고 공도 주행을 즐긴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사실 뉴스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이세정의 집에 방문했을 때 보았던 수백 대의 바이크들. 대부분 집 안에 모셔져 있었고, 나는 그 집에서 보았던 것들을 하루에 한 번씩, 그러니까 이세정이 나를 보러 올 때마다 번갈아 보았다. 눈에 익을 즈음에 새로운 바이크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정확히 몇 대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았던 것들 중 일부는 폐차가 되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운전자의 뒷자리에 타고 싶지 않았다.

이세정은 머뭇대는 내 팔을 부드럽게 잡고서 서 기사님에게 고갯짓했다. 서 기사님은 얼른 뒷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힘없이 빨려 들어갔다. 다리를 채 집어넣기 전에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고, 구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내 또래 청년이 자전거 밑에 깔린 채 연신 끙끙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세정이 신호등을 가리켰다. 신호 좀 지키라는 뜻이었다.

자전거와 함께 쓰러진 청년의 위치로 보건대, 청년은 분명 인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설마 자전거가 거슬린다고 청년을 걷어찬 건 아니겠지.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비뚠 환경에서 자라 속이 곪은 것도 아니고, 치열한 경쟁 속에 일찌감치 떨어져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이세정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는 듯이 남을 상처 입히는 것에 어떠한 죄악감도 없었다. 내가 무서운 것은 그거였다. 이세정이 타인을 해하듯이 나를 해하지 않을까. 이세정은 상처 주는 것에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상처받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세정이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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