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담 (1)
이세정과는 세 달 전 처음 만났다.
과제 더미에 눌려 매일을 정신없이 보내던 때였다. 모두가 으레 그렇듯 마감일에 쫓겨 과제 곡을 썼고, 서양 음악사와 작곡 기법 분석 과제를 연달아 타이핑했다. 위클리 곡을 새로 쓰는 와중에 음악회에 참석해 교수님께 눈도장을 찍었으며, 거기서 교수님이 주최하는 연주회 티켓을 다섯 장이나 강매당했다. 돈과 맞바꾼 대가는 어설프게 난해함을 시도하지 말라는 모호한 조언이었다.
조언은 다음 날 레슨까지 이어졌다. 위클리 악보를 피드백 받으며, 교수님이 콘서트홀에서 했던 말의 연장선으로 내 개성에 관하여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채민아, 너에겐 너만의 개성이 있어, 하고.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티켓을 다섯 장이나 산 내게 주는 립 서비스 같은 거였다.
심심한 감성, 개성 없는 개성. 빗대자면 시중에 파는 이 퍼센트 부족한 음료수. 대충 썼냐는 타박을 빈번하게 듣는 내 곡이 정말로 개성이라면, 왜 나는 소수의 취향조차 사로잡지 못하는 건지. 개성도 실력의 한 부분이라고. 나를 할퀴기만 할 뿐 도움도 안 되는 불만들을 입술로 곱씹다가 그렇게 나왔던 것 같다.
오후 레슨을 막 끝낸 후라 배가 조금 고팠다. 지수와 만나기로 한 벤치 의자 앞에 앉아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좀 늦네, 하던 찰나 무언가 커다란 존재감을 뽐내며 내 앞을 지나쳤다. 제법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제 몸만 한 바이크를 타고 있는 남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바이크는 주차장에 주차된 통학용 바이크 수준이 아니었다. 캠퍼스 내부에서 타기에는 다분히 우람하고 위협적인 크기였다. 혹시 오늘이 바이크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인가. 경계심을 가지고 남자를 쳐다보았다가 불쑥 시선이 맞붙었다. 정말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실은 내 뒤를 보고 있는 건데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께름칙하게 고개를 숙였다.
악기소리로 고여 있던 공간에 발소리가 겹쳐 울렸다. 소리는 올곧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나를 향해 직진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저 덩치 큰 바이크 때문일 수도 있고, 바이크보다 더한 위압감을 뿜어내는 저 남자 때문일지도 몰랐다. 볕을 피해 가늘게 뜬 눈과 날렵한 목선, 깔끔한 셔츠와 재킷, 정결한 걸음걸이, 그리고 염세적인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단조로움. 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오래 관찰한 적이 있던가. 남자의 시선에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음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기류가 있었다.
남자와 나 사이에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서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았다.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작년 위클리 때 내 악보를 연주해주었던 배도빈이었다. 이번에도 부탁할까 망설이던 중에 작곡과로 전과했다는 소문을 뒤늦게 접했다.
“세정이 말 잘 듣네. 강아지야?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가리지 마, 도빈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목소리 안에서 성격이 보이는 사람. 나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잘 다듬은 다정함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서 배도빈을 옆으로 밀어내는 손길이 의아할 만큼 거칠어서 내가 느낀 것이 다정함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나 싶었다.
남자는 다시 걸었다. 뒤에 서 있는 배도빈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가 시야가 가려졌다. 바로 앞에 그림자가 졌다.
“연주회에서 본 적 있는데.”
느긋하게 꺼낸 첫말은 우리가 구면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 낯선 남자와 내가 과거에 인연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트홀.”
아트홀이라고 하면 당장 생각나는 것은 위클리, 졸업연주회. 이 남자가 우리 학교 재학생이 아니라면 위클리로 마주친 것은 아닐 것이다. 위클리는 관계자 외엔 출입이 금지되어있으니까. 작년에 선배들의 졸업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아트홀에 간 적 있었는데, 그때 무대 아래에서 마주쳤나. 기억을 되짚어보았으나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머릿속이 하얬다.
“우리 대화했었습니까?”
“하고 싶었어요.”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는 사람들과 말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고, 남자는 내 대답이 필요치 않다는 듯 옆에 앉았다. 더욱이 불편해졌다. 나는 대화를 길게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 말을 꺼내야 할까? 저 남자가 먼저 옆에 앉았잖아. 그럼 말을 건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한참이 지나도 영 말이 없기에 결국 내가 먼저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색한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심장이 막 뛰기 시작했다. 의자 끝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돌렸다. 갈 길 잃은 시선이 배도빈에게 가 멈추었다. 배도빈은 남자가 타고 온 바이크를 기웃거리다가 힘차게 올라앉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바이크의 주인을 다급히 보았다. 방금 바이크 도둑이 다녀갔다고 입술을 떼기도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가르고 들어왔다.
“불협화음만 듣다 보니 순수한 것이 그리웠는지…….”
“…….”
“그래서 그렇게 보였나 했는데 아니네요.”
남자는 느릿느릿 미소를 지었다.
“데이트할래요?”
나는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듯이 입을 벌렸다. 입을 벌렸으면 말을 해야 했는데, 입꼬리만 어색하게 끌어당겨 난감함을 비췄다. 남자는 거절의 뜻을 명확하게 내포하고 있는 내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이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소리 내어 말했다.
“아니요.”
그렇게 대답하고서야 뒤늦게 거절보다 중요한 문제를 떠올렸다. 남자가 옆에 앉아 쳐다보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거절당해 실망하는 상황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잠시 우리 둘 다 남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저 가야 되는 거 맞죠.”
남자는 눌린 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갈 거면 빨리 가주지. 틀 속에서만 갇혀 지내서 그런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변화가 찾아올 때면 속이 거북해지곤 했다.
“미련이 남아서 못 가겠네.”
남자는 조그맣게 읊조리며 은근히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했다. 하마터면 이름이라도 알려줄 뻔했다. SNS를 안 하니까 이름 하나로 나를 찾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긴 캠퍼스 내부, 그것도 음대 근처니까.
다행히 남자는 이름이나 번호를 알려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내려다보면서 제 이름을 말했다.
“이세정이에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을 잘 외우는 편이 아니라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세정. 별것도 아닌 세 글자를 붙들고 괜히 씨름하고 있는데, 옆자리가 비워졌다. 이세정은 내 이름은 묻지 않고 가버렸다. 왜 안 묻지. 모순적이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뻗었다. 다리에 힘을 주며 스트레칭을 했다. 지하철을 타는 내내 쭉 서 있었던 터라 다리가 아팠다. 지수처럼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하나 마련하면 훨씬 편할 텐데. 사실 일전에 지수가 같이 살자고 말한 바 있었지만, 아직 누나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혼자 두고 나가기 뭐했다.
그러고 보니 곧 누나가 퇴근할 시간이다. 미리 저녁밥을 차려두고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휴대폰이 불빛을 냈다.
[대답안하냐ㅋ]
양형배의 메신저였다. 양형배와 텍스트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하나만 있는 키읔이 너무 싫다. 눈썹을 구부리며 엄지를 당겼다.
[뭐 해]
[레슨끝나고 따로 얘기하자 했는데 왜 그냥 가ㅋㅋ]
[딴 게 아니고 너도 알잖아 나 요즘 알바뛰느라 바쁜 거 근데 과제가 감당 안 돼ㅋㅋㅋㅋ]
[그래서 니가 위클리곡만 좀 빠르게 써주면 좋을 거 같은데]
[물론 페이 지급. 나 같은 놈이 어딨냐 동생 용돈도 주는데ㅋㅋㅋ 자세한 얘긴 전화로 할 테니까 봤으면 전화해라]
과제 대행을 같은 학교, 같은 학부 학생에게 의뢰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내가 만든 곡을 가리켜 ‘개성 없는 개성’이라고 폄하 했으면서 작곡을 부탁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어지간히도 급한 모양이다. 나는 이번 부탁은 확실히 거절하고자 메신저를 씹었다. 그러나 내가 메신저를 확인했다는 사실을 기가 막히게 캐치하고 바로 전화가 걸려오는 양형배에게 나는 방금 전의 결심을 모두 잊은 듯이 꼬박꼬박 형, 형 거리며 대꾸했다. 피곤해지지 않으려면 굽히는 편이 나았다.
우리 학교 음대에는 예술인으로서의 특유성으로 포장해 엄한 짓을 저지르는 또라이들이 제법 있었다. 강의실에서 술을 마시고, 대낮에 과 내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또 간혹 싸움질을 하기도 했다. 그것도 떼거리로. 네임벨류가 좋은 학교에 어떻게 그런 또라이들이 들어왔는지 의문이었지만, 인성적인 부분은 재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법칙을 되새기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생활을 가진 음악가들과 같은 부류로 분리해서 보면 편했다.
양형배는 혼자서 주절주절 뭔가를 말하더니, 갑자기 계좌 번호를 요구했다. 이미 내가 위클리 곡을 대신 써준다는 것을 확정 짓고 있는 듯해서 얼른 대꾸했다.
“저 못 합니다, 형.”
양형배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정적이 두려워 양형배의 숨소리만 끈덕지게 따라갔다.
-저 못합니다, 형?
예상대로 목소리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돈 준다잖아. 그것도 못 해줘?
“과제는 스, 스스로 하셔야죠.”
-지금 설마 훈계하냐?
“아닙니다.”
-아나…… 짜증 나네.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형이 알바 때문에 존나 바쁘다니까?
“저도 바쁩니다.”
말대답을 하고 나서 후회했다. 양형배는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동생들을 싫어했다. 꼰대 기질이 있다 보니까 제아무리 같은 학번이라고 해도 봐주는 경우가 없었다. 여기가 대학교인지, 아니면 중학교인지 도통 모르겠다.
할 말을 고르던 도중에 양형배가 전화를 뚝, 끊었다. 다른 선배들이었다면 내일 마주치면 한 소리 듣겠구나, 하고 말 텐데 양형배가 끊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심장을 겨우 추스르며 일단 저녁을 준비하러 갔다.
이튿날. 나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온종일 양형배를 피해 다녔다. 양형배와 같이 듣는 강의가 있는지 속으로 곱씹어 보기도 하고, 혹시 양형배와 마주칠까 봐 자주 출몰하는 카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양형배와 마주친 곳은 과방 안이었다. 양형배와 나 사이에 마찰이 있었단 걸 모르는 지수는 작년 부실기로 선택해 시험까지 봤던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연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 괴로운 소음에 혼이 팔린 듯이 양형배를 무시하고 지수에게 걸어갔다.
“오늘 알바 가면 사장님한테 나 사고 나서 못 나온다고 전해줘.”
나를 발견한 지수가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바 빠질 거면 그냥 아프다고 해.”
“아프다고 하면 핑계 같잖아.”
“아니면 네가 직접 말하든가.”
“그럼 사장님한테 ‘저 오늘 다리 부러질 예정이라서 못 갑니다.’ 이러냐.”
“맨날 다리 부러진대… 그러다 진짜 부러진다.”
지수가 히죽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함경윤 알지? 이번 신입생 과탑.”
“과탑?”
“외모 과탑. 개총 걔.”
“아…….”
“걔 레슨 해주기로 했어.”
수작질에 눈이 멀어 시급 센 알바를 내팽개친 것이다. 머릿속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지수는 허밍을 하며 책상에 걸치고 있던 엉덩이를 바로 들었다. 나는 과방을 나가는 지수의 뒤를 따르려다가, 양형배에게 덥석 잡혀 질질 끌려갔다. 짜장면이 놓인 테이블 앞 소파에 거칠게 던져졌다.
“먹어.”
비닐 랩도 벗기지 않은 짜장면이 좀 의문스러웠다. 지수의 몫이었나. 나는 나무젓가락조차 집어 들지 않고 양형배가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단순히 밥 상대를 해달라고 부른 것도 아닐 텐데 양형배는 말 한마디 않고 짜장면을 흡입하기에 바빴다. 내 몫의 짜장면이 퉁퉁 불어 가고 있을 때쯤 양형배가 들고 있던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채민아.”
“예, 형.”
“그래도 좀 너무하지 않냐.”
“예?”
양형배가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둘둘 말아 입술을 닦았다.
“그냥 부탁만 했는데 그걸 교수님한테 그대로 일러바치냐. 유치원생도 아니고.”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 터라, 나는 그가 생략한 말을 추측하기에 바빴다.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자 양형배가 고만고만한 목소리를 냈다.
“넌 꼭 조용히 있다 뒤통수 후려치더라. 그거 존나 기분 나쁜 거야. 나라서 봐주는 거지 딴 데 가봐. 너 그따위로 굴면 어떻게 되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 뭘 몰라. 선배 아니라고 우습냐?”
“…….”
“뭐, 그치. 우스울 수도 있지.”
양형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올라오는 화를 눌러 담는 것처럼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에 나는 바짝 긴장한 입술을 안으로 말아 꾹꾹 눌렀다.
“박수연이랑 너한테만 내가 따로 부탁했는데, 왜 교수님이 이 일을 알고 있냐고.”
“……위클리 곡 말씀하시는 거예요?”
“채민이 개그맨이었네. 연예인 해라, 연예인.”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고,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다.”
양형배가 그러시겠지, 하며 비꼬았다. 원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단단한 믿음을 가지고 나를 몰아세우는 것 같아 의아해졌다.
“형, 저는 교수님께 형에 대해 말씀드린 적 없어요.”
“박수연이 채민이 오빠가 했다던데요.”
“예?”
“엉엉 울면서 자긴 죽어도 안 했대. 채민 오빠가 했대. 그럼 너지, 씨발아.”
거친 언사에 놀랐다. 직접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하는 욕에 아직 면역이 덜 된 탓이다. 나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의연하게 보일까 고민했다. 다행히 정적이 더 흐르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뛰다시피 들어온 권……씨의 성을 가진 누군가가 당장 냉장고로 직행했다. 왜 소주밖에 없냐며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조용한 과방을 울린다. 권, 누군가는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고서야 과방이 조용하단 걸 인식했는지 나와 양형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스리슬쩍 등을 돌렸다.
“채민 오빠, 곡 다 썼어요?”
막 나가려던 중에 권, 누구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냥 마무리 단계예요.”
“진짜 요즘 뒤지겠지 않아요? 전 오케곡 쓰고 있는데 마감기한 없었으면 이년 뒤에 완성했을걸요.”
“맞아요.”
대충 대답하고 과방 문을 닫았다. 누구에게 대신 맡기고 싶다고 중얼대는 권 씨의 목소리가 문틈에서 잘려나갔다.
그대로 내려가다가 1층 카페에서 박수연을 발견했다. 하필 음악관 학생들이라면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있던 터라 찾지 않으려고 해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헤매고 다닌 것도 아닌데 박수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구질구질하게 여기까지 따지러 왔냐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오기로라도 말을 걸까 하다가 말았다. 괜한 소동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박수연이고 뭐고, 애초에 양형배가 과제 대행 제의만 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텐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부스럼처럼 남아있던 불만은 진상 손님과 함께 승화되었다. 재떨이를 가져다 달라고 해서 여긴 금연구역이라고 했더니, 진상 손님은 언제부터 술집이 금연구역이 되었느냐고 화를 냈다. 요즘 흡연자들은 어디에서 담배를 피우냐고 흡연구역에 관한 재정 문제를 애꿎은 나에게 풀기도 했다. 그에 나도 동의하는 바였으나 맞장구를 쳤다가는 이때다 싶어 담배를 꺼내 물까 봐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겨우 손님을 진정시키고 계산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텔레비전 소리를 라디오 삼아서 그 손님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저 손님은 흡연을 포기하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 피우고 올지도 몰랐다. 어차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니까 일을 저지를 거면 빨리해줬으면 했다.
“채민이!”
내내 보이지 않다가 내가 쉴 때마다 귀신같이 나타나는 사장님은 역시나 타이밍 좋게 나를 불렀다. 흠칫 놀라 일어서려고 했더니 그보다 먼저 제 휴대폰을 내 눈앞에 가져다 댔다. 웬 게임 화면이 보였다.
“이거 해봤냐?”
“제가 게임을 잘 안 해서…….”
“요즘 딸이랑 같이 하는 게임인데, 좀 봐봐. 이거 세계 1위 맞냐? 월드 랭킹, 이렇게 뜨는데?”
“오, 맞는 것 같아요.”
사장님은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게임인지 아느냐고 으스댔다. 게임 쪽으론 문외한이라서 그런가. 게임을 잘한다고 해서 경외심 같은 것은 별로 생기지 않았지만, 최대한 감정을 담아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내 대답이 퍽 흡족했는지 사장님은 계산대 서랍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한 턱 쏘겠다는 것처럼 두드렸다.
“곧 첫 월급인가. 뭔 놈의 월급날이 장마철 비 오듯이 오냐. 계좌 적고 가라.”
“계약서에….”
“야 이, 귀찮게 그걸 일일이 찾아?”
이번에 새로 판 계좌가 있는데, 아직 번호가 낯설었다. 휴대폰에 연동해놓지도 않았기에 나는 집에 가서 문자로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래, 그럼.”
사장님이 포스트잇을 휙 던졌다. 네모난 포스트잇은 텔레비전에 퍽 맞고 죽 미끄러졌다. 나는 포스트잇을 주워 제자리에 넣었다가 문득 사장님의 시선을 따라 화면을 쳐다보았다.
“끌까요?”
“부모 잘 만나서 지멋대로 하고 사네. 부럽다, 부러워. 저놈은 저런 오토바이 한 백 대는 있겠지.”
듣도 보도 못한 채널에서 뉴스가 재방송하고 있었다. 내가 막 눈길을 주었을 때는 이미 아나운서의 말이 다 끝난 뒤였다. 화면이 넘어갔다. 이제 뉴스에서는 페이스 코트 대표의 막내아들이 바이크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정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잠시 페이스 코트가 어느 기업인가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뉴스는 친절하게도 페이스 코트의 통일되지 않은 계열사별 상호를 일일이 나열했고, 사돈 기업이라는 유명 명품 회사도 소개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얼마 전 주요 기술이 유출 당해 해외 유명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이력이 있는 기업이었다. 페이스 코트의 자체 인지도보다는 계열사별 인지도가 훨씬 큰 터라 잠깐 잊고 있었다.
샛길로 빠져있던 뉴스가 다시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왔다. 아나운서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나는 사장님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비싼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역주행하는, 겁 없고 매너 없는 재벌 3세. CCTV 화면 속에서는 도로를 역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운전자의 모습이 노골적으로 비치고 있었다.
이어 막내아들의 바이크 선수 시절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흐릿하게 떴다. 아래에 자막이 붙여졌다. 이세정.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몸매만 보면 레이서가 아니라 남자 레이싱 모델 같았다. 답지 않게 몸매 품평을 하고 있는데, 또 새로운 사진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텔레비전 화면을 빨려갈 듯 쳐다보았다. 환영처럼 눈앞으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손등으로 화면을 툭툭 두드린다.
“검열해야 할 것 같은데.”
“예, 사원님.”
“장 비서님, 반항심이란 건 작은 계기만 있다면 계속 유지되는 겁니다. 자꾸 사원, 사원 하시니 아무래도 평생 사원으로 살아야 할까 봐요.”
텔레비전을 두드려 주목시켜놓고 제 일행과 이야기하던 남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호선을 띈 입술이 매끄러웠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어제, 그리고 방금 전에.
“초면 아니니까 이름 물어봐도 되죠?”
갑작스레 내몰린 상황에 떨떠름해졌다. 떨리는 시야와 복잡한 머릿속이 한데 섞여 혼연일체가 되었다. 어제 마주친 이세정,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이세정,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세정.
***
고록담은 직원이 많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다. 1차선 도로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를 따라 골목 안으로 꺾어 들어가면 낮은 언덕이 보인다. 두툼한 흙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마치 어디서 뽑아다 심어놓은 듯 부자연스럽게 돋아난 풀들이 몇 개 있고, 그 바로 위에 말뚝이 박힌 안내 표지판이 있다. 크고 둥근 글씨로 고록담beer라고 적혀있어 맥주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3층 건물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고, 고록담은 2층에 있었다. 테이블 몇 개, 최신 음악, 맥주. 고록담은 그게 다였다. 그러니까 룸이 필요하다는 이세정의 요구에 할 수 있는 대꾸라곤 여기서 룸이란 화장실 칸막이가 전부라는 말뿐이었다. 이세정은 나름 농을 친 내 말을 싹 무시하고 다른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옆에 있는 장 비서님이라는 사람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을 즈음, 이세정이 설렁설렁 허공에 직사각형을 그렸다.
“다른 데에선 이게 룸이죠, 우채민 씨.”
“……예, 룸은 보통 네모나게 생겼죠.”
“여기도 그러네요.”
예? 내 물음에 이세정이 바닥을 가리켰다. 나는 이세정이 가리킨 곳을 얼마간 쳐다보다가 사장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세정의 말은 이곳을 모두 빌리겠다는 말과 다름없었고, 내 가게가 아니니 나는 사장님의 허락이 필요했다. 다행히 장 비서님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온 사장님은 로또라도 당첨이 된 듯한 얼굴로 당장 일정 보상을 주고 손님들을 내보냈다.
이세정과 테이블 한자리를 잡고 마주 보고 앉았다. 이세정을 보고 있자니 입식이었음에도 무릎을 꿇어야 할 것만 같았다. 손님들을 내보내면서 사장님이 내게 귓속말로 혹시 저 사람에게 무슨 죄라도 지었느냐고 물었었는데, 그 말을 듣고부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나랑 친해지고 싶은 재벌 3세인 줄 알았더니, 실은 나를 해코지하러 온 재벌 3세였던 것인가. 그러고 보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그다지 친해지고 싶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신입생 때만 정신없이 불려 다녔을 뿐이지, 원체 친화력이 없다 보니까 군대를 다녀오고부터는 학과생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간간이 참석한 술자리에서는 지수가 없으면 쉬이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과거 일을 샅샅이 훑어보니까 내 어디에서도 친화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말로 내가 은연중에 이세정에게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다. 때마침 테이블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세정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사과부터 했다.
“제가 원래 좀 실수도 잦고, 아니 잦지는 않은데…… 가끔 깜빡하거나 좀, 뭐라고 해야 하지.”
정확히 어떤 점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사과를 하려니 말이 꼬여버렸다. 혓바닥을 괜히 씹어댔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세정이 눈동자만 올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모습이 무서워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반복하자, 이세정이 테이블 바로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사내의 배를 손등으로 밀어냈다.
“장 비서님이 그렇게 서 있으니까 우채민 씨가 무서워하잖아요.”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지만, 이세정에게 불리는 이름은 꼭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단지 어색할 뿐인데 수줍은 양 입술을 말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부동자세로 서 있는 장 비서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나가라니까.”
소파에 머리를 기댄 이세정이 푹 늘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말에 기가 죽은 것은 내가 심약한 탓일 것이다. 정작 장 비서님은 특별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옆을 턱 버티고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지니 주변이 휑해지면서 시야가 트였다. 사장님은 가게를 내게 맡기고 신나서 어디론가 가버렸고, 알바생들은 일찌감치 퇴근했다. 스피커를 통해 잔잔히 울리는 음악과 좁은 가게, 그리고 작은 테이블. 이 장소는 이세정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혹시 제가 큰 잘못 같은 걸 저질렀어요?”
“그랬다면 대화하러 안 왔겠죠.”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이세정은 나에게 큰 원한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진짜로 내가 마음에 든 건가.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 약간 바그너 마니아 같은 취향인가.
“알바하는 곳은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중요한 문제예요?”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우연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젠 일부러 우채민 씨 만나러 간 거예요. 데이트하자고.”
“농담하신 줄 알았는데…… 전 진짜로 그때 처음 봤고, 게다가 남자고.”
“남자예요?”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세정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이세정이 눈가가 찡긋하게 구겨질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아, 농담이었구나. 이제껏 한 번도 여자처럼 생겼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데 설마 착각했을 리가 없었다.
“여긴 맥주만 파나 봐요.”
이세정의 물음에 아차 싶어서 얼른 일어났다. 이세정은 룸을 빌린 손님이었고, 나는 퇴근하지 못한 알바생이었다. 우선 목이라도 좀 축이라고 맥주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렸다. 막 잔에서 손을 떼려는데,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맥주잔 하나를 쓰러트렸다. 맥주는 해안가 모래에 부딪힌 거품처럼 퍼져나가 이세정의 셔츠를 적셨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실수였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사과도 못 하고 테이블 아래를 기웃거렸다. 발에 걸려 넘어질 만한 구조물이 있던가?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세정의 다리 말고는.
“일부러 그랬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세정은 끄트머리가 젖은 휴대폰을 테이블 한구석에 올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안 다치셨…… 아니.”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물었다. 당황한 나머지 자꾸 헛소리가 나갔다.
“제가 꼭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밖에 장 비서님 있을 거예요. 차에서 옷 가져와달라고 해줄래요?”
네, 네. 정신없이 대꾸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바깥공기를 마시자 왠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불안정하게 가라앉은 호흡을 몇 번 내쉬었다. 장 비서님은 건물 앞, 빈약한 풀밭 위에 서 있었다. 내가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았는데, 엄지와 검지 사이에 부연 연기를 뿜어내는 담배가 들려있었다. 이곳은 흡연구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까 하다가 그냥 삼켜버렸다.
“저기, 제가 맥주를 쏟아서 급히 갈아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세정이요?”
“예.”
장 비서님이 이마에 주름이 질 정도로 한쪽 눈썹을 높이 들어 올렸다.
“쏟았어요? 세정이한테?”
“실수로…….”
“맞은 데 봅시다. 어디 찢어졌습니까?”
“……무슨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장 비서님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내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눈을 느리게 끔뻑인다. 장 비서님은 이내 비둘기를 내쫓듯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그리고 근처 쓰레기 봉지에 담배를 비벼 끈 뒤에 앞에 세워둔 차 문을 열었다. 그동안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자리를 옮겨 옆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이세정이 셔츠를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나는 깨끗해 보이는 수건을 찾아 이세정에게 건넸다. 이세정은 받지 않고 내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안 받으십니까?”
“우채민 씨.”
“예.”
“연락하려면 번호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옷을 세탁해서 돌려주려면 전화번호가 필요하기는 했다. 테이블 위에 마른 수건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냈다. 이세정이 내 휴대폰을 가져가 번호를 입력했다.
“받아요.”
감사합니다. 안 해도 되는 말을 굳이 내뱉으며 화면을 확인했다. 이세정, 세 글자와 함께 새로운 번호가 하나 떠 있었다.
“준비되면 연락해요.”
이세정의 말은 좀 뜬금없는 면이 있었다.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되물으려는 순간, 장 비서님이 비닐 커버에 둘러싸인 새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비닐을 두어 번 쓰다듬으며 터는 시늉을 하다가 이세정의 모습을 보곤 눈동자가 조금 커진다.
“생각보다 많이 젖으셨습니다. 혹시 속옷까지 젖으셨습니까?”
“아, 오늘 안 입고 와서 괜찮아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런 농담은 회장님 앞에서 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호적에서 안 파였어요? 이상하다. 며칠 전에 그렇게 경고하시더니.”
이세정은 한 손으로 단추를 풀면서 장 비서님에게 비닐 커버를 벗기라고 지시했다. 손놀림이 꽤나 빨라서 순식간에 쇄골이 드러났다. 옷 벗는 모습을 대놓고 보고 있기 뭐 해 아까 맥주를 엎었던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내 동선에 맞춰 장 비서님이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에 서 있건 장 비서님의 몸에 가려 이세정이 보이지 않았다. 괜한 착각이겠지만 일부러 이세정에게 눈길을 주지 않음으로써 훔쳐볼 의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내가 왜 굳이 그런 연기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을 말끔하게 치웠을 때쯤 이세정의 환복도 끝이 났다. 이세정의 벗은 옷을 받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세탁소에 가져갈 요량이었는데, 그는 내게 짧은 인사만을 건네고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텅 빈 손이 무안하게 구부러졌다. 준비 다 되면 연락하라는 말이, 세탁비를 달라는 뜻이었던가. 준비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면 상당한 액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건데.
큰일이었다. 마땅히 조언을 구할 데 없어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누나를 찾았다. 누나는 거실 한복판에 대자로 뻗어있었다. 퇴근한 지 몇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여태껏 아침 모습 그대로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누나, 오늘 어떤 사람이…….”
“너 잘 왔다. 여기 청소기 돌려.”
청소기를 돌리고 다시 누나 곁에 앉았다.
“누나, 오늘 어떤 사람한테…….”
“누난 이번 달에는 더 이상 용돈 못 준다.”
“…….”
용돈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용돈으로 이어지는 문제이기는 했다. 그럼 어떡하지…… 혼자 안절부절못하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검색창에 이세정을 치자 인물 정보에 여자 뮤지컬 배우가 떴다. 이세정 중에서는 별로 안 유명한가 보다. 이번에는 페이스 코트 이세정이라고 쳤다. 이세정의 지난 행적들을 정리해놓은 블로그가 상단에 바로 떴다.
블로그에는 뭔가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사적인 정보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큰 글씨만 훑었다. 도로 역주행, 대회 도중 노선 이탈, 불법 유턴으로 교통 혼란. 우리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재벌 집 막내다운 철없는 행보와 막상 마주한 이세정의 차분한 행동 사이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역동성이 없어 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이세정의 사진들을 몇 장 훑어보다가 마우스 커서를 닫기에 가져갔다. 월급날까진 아직 나흘이나 남아있었다. 나흘 후에야 이세정에게 연락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저 사람은 학교에 놀러 오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배도빈은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기로 말이 꽤 나오는 사람이었다. 과가 다름에도 내가 배도빈을 인식하게 된 계기도 장기 휴학생이란 타이틀 때문이었다. 또, 지수가 저 사람의 능력에 대해 심하게 질투하기도 했고.
배도빈은 온 구석구석을 전전하며 친목을 과시하기에 바빴다. 학교에 나온 기간도 짧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을까. 그것도 온통 여자들이랑. 이 사실을 중얼거리듯 말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수가 콧바람을 냈다.
“여자 밝히는 거 존나 꼴불견이야. 얼굴값도 적당히 해야지.”
“확실히 호감형으로 생기긴 한 것 같다. 약간 웃는 상이네.”
“호감형으로 생겨도 못생기면 여자애들 상대도 안 해줘.”
“호감형이 잘생긴 거 아니냐?”
“아니지. 뭘 모르네.”
나는 답답하다는 듯 약간 언성을 높이는 지수를 잠시 보다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나 알바하다가 손님한테 맥주 엎질렀다.”
말을 뱉고 보니 내가 사장님께 월급을 입금받을 계좌번호를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자? 번호 땄어?”
“번호는 땄는데, 남자야.”
“그냥 돈 몇 푼 쥐여주고 끊어버리지 뭘 번호까지 따냐.”
메신저에 들어가자, 오늘 아침 급하게 준비를 하면서 적은 계좌번호가 분명하게 떠 있었다. ‘읽지 않음’ 표시도 사라져 있었다. 휴대폰을 껐다.
“옷이 비싼 것 같아.”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다고. 재벌도 아닐 텐데.”
“재벌 맞아.”
지수가 농담 좀 진지하게 하지 말라고 키득거렸다. 간헐적으로 끊기는 웃음소리 뒤로, 배도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배도빈이 아까 여자들과 이야기했을 때와는 생판 다른 어투로 과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간간이 받아주는 목소리는 양형배였다. 세탁비에 대해 귀띔이라도 받을까 했던 망설임이 양형배의 목소리를 듣고 싹 사라졌다.
“화장실 갈 거면 가라.”
지수가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응?”
“안절부절……멍멍이 같아.”
“아…….”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려는 고개를 바로 하고 책상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배도빈은 강의가 끝나고도 곁에 다가설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몰려든 여자들과 대화하며 낄낄거리기에 바빴다. 나는 지수가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배도빈의 곁을 맴돌다가 결국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뒤돌아 생각해보자니 알아서 결론지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구태여 남에게 조언을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라는 건 좀 이상한 면이 있었다. 배도빈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먹는 내게 그가 직접 다가온 것이다. 작년 이후로 번번한 대화 한 번 나눠보지 못했음에도 배도빈은 마치 십년지기 친구인 양 어깨동무를 했다.
“그거 아냐? 나 오늘 처음으로 설렜다.”
예상치 못한 말과 함께.
“예?”
“내 인생 통틀어 남자가 말 걸어주길 기다린 적은 처음이야.”
“…예?”
“할 말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말아. 왜 자꾸 헷갈리게 해.”
내 딴에는 혼자 고민한 건데 눈치채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미안하다고 조그맣게 중얼댔다. 배도빈은 자판기에 카드를 긁으며 빈정거렸다.
“선배님 보기보다 숫기가 없으시네. 보기로는 카톡 창에 여자 스무 명 띄워놓고 동시에 톡 하면서 놀 것 같은데.”
비약이 심한 말이었다. 나는 그럴 만한 숫기도, 인기도 없다. 나를 놀리려는 건지 배도빈이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음료를 눌렀다. 퉁, 떨어진 음료수를 찾으려고 몸을 굽히는 배도빈을 따라 내 허리도 같이 굽혀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배도빈이 음료수를 숨 쉴 틈 없이 몰아넣는 사이 나는 할 말을 가다듬었다.
“그, 있잖아요. 상호명은 기억 안 나는데 자동차랑 바이크 파는 회사…….”
“언제부터 페이스 코트가 차 팔이 회사로 바뀐 거냐?”
“네, 그 기업 아드님.”
“…아드님.”
“이세정, 님이랑 친구예요?”
배도빈이 음료수를 먹다 말고 내가 한 말을 되뇌며 웃었다.
“왜?”
“그냥 전에 바이크 훔쳐 가는 걸 봐서…….”
“훔쳐 가? 아, 뭐 그냥 같은 동아리였어. 여기 체대 졸업생이거든.”
배도빈이 분리수거함에 캔을 집어던졌다. 분리수거함 모서리에 맞은 캔이 퉁 튕겨 오르자, 음료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와, 또 실패야. 작년에 내가 네 곡 연주해준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예, 맞아요. 형이 전과하기 전에.”
“그 곡 진짜 병신 같았는데.”
“…….”
노골적인 욕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배도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속도 모르고 키득키득 웃어댄다.
“내 귀엔 다 고만고만하게 들려.”
“아… 네.”
배도빈은 이제 가야겠다며 몸을 틀었다. 옆으로 비켜서 주었더니, 배도빈이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내 뒷목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목을 자라처럼 굽혔다.
“애가 생각보다 맹하네.”
“왜, 왜요.”
“이세정이랑 왜 엮인 건지 모르겠는데, 웬만하면 친하게 지내지 마라.”
걔 존나 미친놈이야. 음대 공식 미친놈인 배도빈이 그렇게 경고했다. 어쩐지 오싹해졌다. 배도빈은 내 목을 확 놓아버리곤 뒤로 돌았다.
***
객기를 부리고 싶은 어떤 날이 있다. 교양을 재수강하고, 폐강일 거라고 말 나오는 강의를 선택하고. 물론 감당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으므로, 나는 스케줄에 쫓겨 가며 과제를 해나갔다. 덕분에 위클리 곡이 완성 단계에 다다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마저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시간이 남는 틈틈이 수정에 열중했다.
오늘도 나는 시계를 확인하곤 과 건물 내에 위치한 메인 작곡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작곡 스타일은 각자가 다 다르지만, 내 경우엔 피아노와 함께하면 잘 되는 편이었다. 그것도 특정 브랜드의 억대 피아노로.
커튼 자락이 유난스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억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에 손을 얹기도 전에 주머니가 진동한다. 고록담 사장님의 메신저였다. 입금했다, 간단한 네 글자와 함께 웃는 스티커. 간지러울 정도로 귀여운 캐릭터가 화면 안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작곡실에 온 목적도 잊고 알고 있는 피아노곡을 몇 곡 완주했다. 입시 때 배운 에튀드랑 작년 위클리 때 작곡했던 피아노곡. 전자는 손을 풀기 위함이었고, 후자는 배도빈이 생각나서였다. 넌 호불호가 꽤 갈리겠다, 재미없다, 미디 작곡으로 가면 망하겠다, 뭐 이런 평은 들어봤어도 병신 같다는 평은 또 처음이었다. 비평이겠지만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피아노를 도중에 중단하고 뺨을 괬다. 이 곡을 작곡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만족했던 것 같기도 하고, 평가고 뭐고 마감기한 지키기에 급급해서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굽히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상념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의식 속에 들어왔다.
“존나 짜증 나. 게시판 그 글 누가 올렸어?”
“몰라. 익명 글 가지고 존나 갈구는 그 새끼가 문제냐, 아님 글 올린 어떤 새끼가 문제냐?”
“팔에 뭐 돋았어. 아까 목소리 깔아가지고 소름…….”
“야, 야.”
말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고개를 돌렸다가 문 앞에서 경직되어있는 여자 두 명과 차례로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가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난처하고 곤란한 마음이 여실히 비쳤다. 낯빛이 심각하게 바래져 그대로 나갈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한 명이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걸어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1학년 함경윤인데 혹시 아실까요?”
함경윤은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앉았다. 나는 함경윤의 엉덩이 부근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피아노 치는 중이셨어요? 잘 치신다는 소문을 엄청 들….”
“휴대폰 깔고 앉았는데.”
함경윤이 미소를 띤 입술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를 들어 휴대폰을 빼내곤 공손히 건넨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입술이 손바닥에 눌려 발음이 뭉개진 탓에 단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다. 우선 받은 휴대폰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이마를 긁었다.
함경윤에 대해 아는 거라곤 현재 지수가 개인 레슨을 해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개총 뒤풀이 때 유난히 튀었다는 것. 일면식은 있어도 완전히 안면을 텄다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사이였다. 물론 뒤풀이하던 날 술에 취한 함경윤이 양형배에게 ‘야, 인마! 나한테 톡 하지 마, 인마!’라고 소리쳤던 일화가 지수의 입에서 어찌나 많이 회자 되었던지 나중에 가서는 좀 친근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먼 사이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이리 어줍게 접근한 이유는 작곡실에서 나가라고 눈치를 주기 위함이 분명했다.
“갈게요.”
함경윤과 반대로 몸을 틀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문 앞에 서 있던 다른 신입생이 어깨를 떨며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께름칙한 눈인사를 건넸다.
건물 밖에 서서 손목시계를 살폈다. 알바 오픈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들어온 급여나 확인해볼 생각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가만, 계좌를 연동해놓았나. 졸려서 그냥 잤던 것 같은데. 지난밤을 되돌아봄에 여념이 없다는 듯 한참이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며 빈손으로 빼냈다.
“아, 피아노.”
휴대폰을 찾으러 다시 작곡실로 들어갔다. 아까와 달리 숨 막히는 정적이 작곡실 내부를 한껏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 양형배가 앉아있었고, 그 앞에 함경윤과 다른 신입생이 죄지은 듯이 서 있었다.
“여기 연습실이 한둘이냐. 다른 곳도 많은 데 꼭 여기 와서 그래. 피아노 이거 얼마나 한다고.”
“죄송합니다.”
“주의 준 지 시간 존나게 많이 흘렀지. 얼마나 됐더라. 일주일? 삼 일? 아, 삼십 분이었나? 계속 그렇게 말 씹어버리고 멋대로 할 거면 그냥 우리 말 까고 지내자. 말 놔.”
“아닙니다.”
“이럴 땐 또 아니라고 하지. 맨날천날 아닙니다, 이러곤 뒤돌아서서 다 잊어버리고. 그치?”
나도 방금 전까지 이 연습실을 사용했지만, 이곳의 어느 부분이 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건지 늘 의문이었다. 2평짜리 다른 연습실에 비해 넓어서 그런가. 아니면 억대 피아노 때문에? 이 작곡실 사용 문제가 선후배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고질적인 요소가 될 만큼의 어떤 메리트가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양형배처럼 작곡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선후배 간의 타협을 바라기란 어려울 듯했다.
“저기, 형.”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자, 제 무릎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던 양형배의 쌍꺼풀이 겹으로 접혔다.
“어? 우리 채민이 아니야?”
“아, 저…….”
함경윤과 아직 이름을 모르는 신입생을 곁눈질했다.
“제가 양보했어요. 여기서 하라고.”
말을 뱉고 나서 조마조마하게 양형배를 보았다. 다행히 양형배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게 건넸다.
“그랬어? 너 이거 찾으러 온 거지?”
“아, 감사합니다.”
“잘 가지고 다녀, 인마. 비밀번호도 안 걸어놓고.”
“예.”
“이제 가봐. 야, 너네도 가라.”
양형배는 어쩐지 유순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저도 발을 질질 끌며 작곡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모두가 사라진 작곡실을 눈으로 훑었다. 어느새 창문은 다시 열려 있었다. 휘청거리는 커튼 자락이 묘하게 눈에 밟혔다. 작곡실에 휴대폰 말고 또 뭘 두고 온 것 같다고 느끼는 건, 아마도 나 혼자뿐인 듯했다.
고록담이 하루 문을 닫았다. 덕분에 일찍이 집에 들어온 나는 방에 틀어박혀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시곗바늘이 똑딱이고 있었다. 벌써 여덟 시였다. 월급도 받았겠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연락해야 할까 하다가 우선 문자 한 통 보내놓았다. 늦은 저녁에 전화를 거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허락부터 구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세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이고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뭐 해요?
목소리가 엿가락처럼 찐득거렸다. 응집되어 있던 긴장이 삽시간에 녹아, 나는 괜히 옷소매를 붙잡았다.
“저 그냥 있어요. 그것보다 맥주 엎지른 거 말입니다.”
-예약해놓을 테니까 올래요?
“어디로요? 아, 아니. 언제요?”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잠시 주의가 흐트러졌다. 항상 보던 방이 뭐 새삼스러울 게 있다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창문도 열어보았다가 폭격처럼 다가온 빗소리에 놀랐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비 온다.”
-비 오네.
권태롭게 내 말을 따라 하는 목소리에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대면한 상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서늘함이 있었다. 아니, 바람 때문인가. 창문을 닫았다.
-내일 볼래요? 차 보낼 테니까.
“아침에 보자는 소리예요?”
-아침에 보고 싶으면 일정 비울게요.
“아닙니다.”
구체적인 시간을 전달받고 통화를 끝냈다. 며칠 동안 곱씹고 또 곱씹었던 남자와의 통화가 생각보다 짧아 허탈함마저 돌았다. 그나저나 지금이 보통 잘 시간이던가. 반수면 상태인 양 질리도록 늘어진 목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은 채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
주말에 외출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일찍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청소 바람이 난 누나를 도와 정리정돈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위클리 연주자를 구한다는 글을 썼다. 모임 몇 번, 페이 얼마, 3학년 이상. 잘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번 연주자는 부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로만 모였으면 했다. 저번에 많이 힘들었다. 그때 생각에 진저리를 치며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비 온 뒤의 눅눅함이 어깨에 내려앉아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네가 외출을 다 하느냐고 놀라워하는 누나의 목소리를 문을 닫아 잘라내고, 손부채 질을 했다. 선선함은 찰나였다는 듯이 더위가 기어 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니 이번 여름은 아주 지독할 것 같다.
얼마 걷지 않아서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 문을 열어주었다. 생각 없이 차에 오른 나는 무언가를 깨닫고 뒤늦게 당황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도착한 곳은 의외로 한옥이었다. 안내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이크와 한옥의 상관관계가 뭘까. 나도 모르게 이세정이 예약한 곳이 평범한, 그러니까 이세정의 기준으로 평범한 레스토랑임을 단언하고 있었나 보다. 바이크는 둘째 치더라도 나이가 어려서 이런 곳은 안 올 줄 알았다.
문이 열리고 단출하게 차려진 상이 보였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 홀로 앉아서 밀처럼 뽀얀 도자기로 손을 뻗었다. 흔들어보니 맑은소리가 났다. 물인지 술인지는 몰라도 마셔보고 싶을 만큼 예뻐서 한동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닫이문이 열렸다. 고아한 여자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세정이 내 앞에 앉아 잠시 주위가 아득해질 만큼 깊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들고 있던 도자기를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도자기를 상 위에 얌전히 놓았다.
“잘 지냈어요?”
“평소랑 같았습니다.”
“그게 대답이에요?”
이세정이 도자기를 빙그르 돌려 들어 올리곤 내 앞에 놓인 술잔에 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뻐서,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괴롭고, 가끔 행복한 사람도 있잖아요.”
“제 기분이 중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술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일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겉보기와 다르게 그다지 예쁘지 않은 맛이었다. 한 모금을 겨우 넘긴 상태로 입맛만 다셨다. 그 와중에 술잔도 너무 예뻐서 쉬이 손을 떼지 못하고 집게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질감 또한 부드러웠다.
“그것보다… 제가 어제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서.”
“어제 통화할 때요?”
“예. 감사하게도 차 보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집 주소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술잔에서 손을 떼고 무릎을 만졌다.
“차가 어떻게 제집을 잘 찾아온 것 같지만.”
며칠 전에 자른 손톱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손톱으로 무릎을 긁어보았다. 그 의미 없는 행위는 내 안의 초조함을 표방하고 있었다. 내가 내려놓은 술잔에 다시 맑은 술이 내려졌다. 애초에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으니 더 채워 넣을 공간이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술은 넘쳤고, 잔 주변에 조금 고였다.
“남 커리어 염려하는 거, 쓸모 있는 거 같진 않은데.”
“예?”
“서 기사님은 우채민 씨 잘 찾아갔고, 그럼 된 거지. 아니에요?”
간단하게 일단락할 문제라기엔 너무 어려웠다. 그곳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혼자 사는 곳이었다고 하더라도, 뒷조사를 하는 건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잔 밖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한입에 넣었다.
“많이 놀랐습니다. 안 그러셨으면 해요. 필요하다면 제가 직접 말할 겁니다.”
강경한 어조로 말해놓고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힐끔 눈치를 보자, 이세정이 입가에 띤 미소를 풀었다. 복잡하게 꼬인 내 속을 들여다보듯 시선이 꽤 오래 이어졌다.
“물어보면 정말 다 말해줘요?”
“아마도…….”
지금 당장 질문이라도 하려는 건지 이세정은 눈을 가늘였다. 내가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 신비로운 사람은 아니긴 한데. 무안하게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문득 이세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아…… 나는 세탁비를 전해주러 온 거였다. 액수를 몰라 돈은 준비하지 못했으나 계좌 이체라는 편리한 수단이 있으니 계좌 번호만 받으면 된다. 다만 계좌를 알아내기에 앞서 우선 사과부터 했다.
“저번에 맥주 엎질러서 죄송했습니다. 벗은 옷을 받아 가려고 했지만, 그냥 가셔서 나중에라도 세탁비를 드릴 요량이었어요. 그제 월급이 들어와서 연락을…….”
“잠시만…….”
“…….”
“맥주 쏟은 것 때문에 온 거예요?”
“예, 세탁 비용 드리려고.”
살짝 찌푸린 눈살은 우스운 것 같기도, 황당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그려냈다.
“제가 그거 받으려고 번호를 줬겠어요?”
“연락처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얼마 주려고 했어요?”
“잘 몰라서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정말로 알아들은 것이 맞는지 이세정은 성가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대단한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닌데 괜히 위축되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나. 상에 차려진 안주들을 관찰하는 척 시선을 피하다가 그냥 입을 열었다.
“얼마 드리면 됩니까?”
“계산하기 민망할 정도로 몇 푼 안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죄송한데, 저는 계산 필요합니다. 어차피 길게 보지 않을 것 같으니까 얼른 해결 보고…….”
“해결 보고?”
“해결 보고…….”
“치우려고?”
이세정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에 힘입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이상 세탁비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연락 안 할 거예요?”
“친하게 지내기엔 좀 부담이 돼서요. 그보다 구체적인 비용…….”
이세정이 내려놓은 술잔이 덜그럭, 소름 끼치게 회전했다.
“무언가를 갚을 때, 꼭 돈으로 해결 보라는 법은 없잖아요.”
이세정이 잡아챈 도자기는 우아한 곡선을 띠고 기울어졌다. 눈이 질끈 감겼다. 정수리 부근이 먼저 축축하게 젖었고, 이어 머리에 고인 술이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술은 쇄골, 그리고 가슴 안쪽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내가 이세정에게 맥주를 쏟았던 것처럼, 이세정도 내 옷을 적셨다.
“이제 만족해요?”
“…….”
“봐봐. 싫잖아. 그래서 그냥 됐다고 했는데.”
상 위로 술병이 쓰러졌다. 고운 도자기가 데굴데굴 굴러서 접시에 쨍 부딪혔다. 몇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딸꾹질이 날 것만 같았다.
결국 술자리는 이른 시간에 파했다. 혼이 빠져 얼른 벗어나려는 나를 이세정이 데려다주겠다며 붙잡았다.
포장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리면서 기사는 기침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라디오나 음악도 틀지 않았다. 목적지를 물어보고 싶어도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숨죽였다. 완연한 고요였다. 내가 불안함에 몇 번이고 이에 힘을 주었을 즈음, 이세정이 젖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위협하는 것처럼 뒷덜미를 잡았다가 팔을 조금 더 뻗어 어깨에 걸쳤다. 지수가 떠올랐다. 지수는 시시때때로 내게 어깨동무를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이렇게 조심스럽고 딱딱한 기분을 느껴본 적 없었다.
순간 백미러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속력이 급격히 빨라졌다가 차내가 흔들리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죄송합니다. 예견된 사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사는 능숙하게 차를 출발했다. 다만 옆에선 욕설이 들려왔다. 상스럽진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살며시 눈길을 틀었더니 덩달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깔아보던 이세정은 미련 없이 내 어깨에 올린 팔을 치웠다. 어느새 나와 이세정은 서로의 팔조차 닿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다음에 또 봐요.”
“…….”
“오늘은 집에 데려다줄게요.”
나는 뒷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었다.
“다음이요?”
“싫으면 우연처럼 만나요.”
무슨 대답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느린 생각으로는 이세정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타이밍을 놓쳐 그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호선을 그은 입술은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
교수님은 양형배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좁은 연구실에 옹기종기 모여 피드백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여기까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간간이 시계를 확인하며 초조하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분이니 레슨 시간이 끝나면 미련 없이 등을 돌릴 것이다. 당장 연주자들의 연습 기간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교수님의 조언이 꼭 필요했다. 시답잖게 웃던 양형배가 드디어 돌아갔다. 나는 악보를 챙겨 교수님께 최종 점검을 받았다.
“고쳤네. 몇 분이지?”
“9분 조금 넘을 것 같습니다.”
“반복은 일부러 집어넣은 거야?”
“구조 맞추려고 넣었습니다.”
“스케일의 맥락이 다 비슷해서…… 썩 나쁘지는 않은데. 3마디 플랫 하나 잊어버린 것 같다. 연결 안 됐어.”
“아.”
“전에 반음계를 잘 이용하라고 했더니 조금 조잡해졌지. 그것도 확인 좀 해보자.”
교수님이 악보를 돌려주었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피드백이 부실해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교수님은 돌아가지 않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열심히 해. 내가 너 참 좋아한다.”
“예.”
“요즘 다들 장난처럼 음악을 하니까. 무슨 소린지 알지?”
조언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김빠지는 레슨이었다.
레슨을 끝내고 복도를 걷다 삼 인용 철제 의자에 앉았다. 같이 걷는 내내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던 지수가 잽싸게 옆에 앉아 이어폰을 내 귀에 쑤셔 넣었다. 목을 움츠렸다. 평소 듣던 음악과는 거리가 먼, 조잡하고 난해하고 시끄러운 비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데시벨로 귓가를 파고들었다. 초장부터 여자 귀신이 울부짖었고, 삼분 남짓한 시간 동안 웬 남자분이 음악적인 기교가 섞인 샤우팅인지 단순한 고성방가인지 모를 것을 내질렀다. 혼이 빠진 나머지 이어폰을 빼낼 생각을 못 하다가, 노래가 끝나서야 하얀 줄을 잡아당길 수 있었다.
“뭐야, 이게.”
“주말에 녹음실 빌려서 불렀다. 노래 좋지 않냐?”
“네가 직접 불렀어?”
“앞에 영어 파트는 보컬 구했고, 나머지는 내가. 3옥타브 시까지 갔다고 본다.”
“거기까진 아니고……. 근데 뭔가 좀 그렇다. 차라리 랩을 해.”
“오, 그럴까.”
나는 지수의 휴대폰 액정을 부질없이 만지작거렸다. 귀가 호되게 고역을 치른 듯 욱신거렸다.
“공모전 넣을 거냐?”
“어, 될 때까지 하려고. 기본기는 다 배운 것 같으니까 실용으로 빠질 거야.”
“잘해봐.”
“너도 이참에 빠져라. 방학 때 프로젝트 앨범 그거 한다는데 같이 하자.”
지수는 내가 주무르고 있는 휴대폰을 쏙 빼갔다. 허전한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거 할래.”
“우채민, 진짜 양심 없다.”
“왜.”
“클래식은 돈 낭비야. 막말로 재능도 없으면서 유학 가면 생고생한다.”
“나 재능 없냐.”
“여기 있는 애들 중에 팔 할이 재능 없어.”
“너도 그래.”
“난 아니거든?”
지수가 두 손가락으로 내 목을 쳤다. 힘 조절을 못 했는지 목울대 부분이 너무 아팠다. 고통을 삼키며 고개를 고꾸라트리고 있는데 문득 바닥에 고여 있던 빛 웅덩이로 그림자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지수가 먼저 반응했다.
“함경윤이-”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녁 드셨어요?”
“아, 먹어야지. 사줄까?”
“도빈 오빠랑 교선 팀플 있어서…지금 기다리고 있어요.”
함경윤은 나와 지수에게 차례로 눈인사를 건네곤 원피스 자락을 흔들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지수는 함경윤이 사라지자마자 머리를 젖혀 벽에 기댔다. 분명 박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았다.
“배도빈 그 새끼는 학교를 몇 년째 다니는 거냐. 따라다니면서 학점 관리해주고 싶다.”
“남지수, 저녁 먹자.”
“고.”
지수와 동시에 일어나 그의 자취방으로 걸으며 메뉴를 상의했다. 죄다 쓸데없는 음식들만 나열하다가 라면으로 의견이 좁혀졌다. 사실 학식을 먹지 않는 이상 선택권은 별로 없었다.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학식보다 라면이 더 싸고, 맛있고, 게다가 질리지도 않으니까.
어.
문득 걸음을 멈춘 지수가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매고 있던 백팩도 앞으로 당겨 손으로 휘저어댔다. 가져온 노트북을 머리 위로 높이 든 지수는 멀거니 백팩 안을 주시했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생각에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왜.”
“나 아침에 과방 갔다가 거기다 열쇠 두고 온 거 같은데.”
“무슨 열쇠?”
“방 열쇠. 아… 복사해서 너한테 준 거 있지 않냐?”
“내가 네 방 키를 가지고 다니겠냐. 그러니까 진작 비밀번호로…….”
“일단 있어 봐.”
지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나는 할 일 없이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다가 길을 물어보는 신입생들을 피해 바위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으며 이어폰을 빼 들었다. 그 순간 바로 앞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쓱 지나갔다.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와 연계되어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나는 이세정이 생각났다. 이세정을 새겨볼 때면 묘한 기분만 든다. 단 한 번도 내 성향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성애자일 것이다. 경험에서 바탕 된 것이 아닌, 모두가 내게 주입 시킨 질서였다. 나는 이세정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제 일 이후로 이세정이 나를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데이트를 하자며 다가온 건 분명 어떤 목적을 품은 접근이었을 텐데 남이 탐낼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그의 속셈을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땅에 뭐라도 있냐.”
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잘 닿지 않는 뒤쪽을 손으로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배도빈이 덜 여문 석양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네 이름 뭐더라.”
“우채민입니다.”
“먹을래?”
배도빈이 입에서 막대사탕을 빼냈다. 동그란 사탕이 유난히 반짝였다.
“아니요.”
“그럼 버려주기라도 해. 지금 과 예쁜이가 기다리고 있는데, 쓰레기통을 못 찾아서 못 가고 있거든.”
내가 꼼짝 않고 있자 배도빈은 내 손목을 강제로 붙들었다. 단단히 쥔 주먹을 막대로 툭툭 쳐대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었다. 배도빈은 인사 겸 또다시 등을 세게 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막대 끝을 어정쩡하게 붙잡은 상태 그대로 잠자코 서 있었다.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버리긴 버려야 하는데 근방에 쓰레기통이 없었다.
막대사탕은 의외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하늘을 날듯이 뛰어온 지수가 내 손에 들린 사탕을 잡아채 곧장 입에 넣은 것이다. 지수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다가 물었다.
“새 거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먹던 거냐?”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야, 그것보다 나, 씨발.”
“왜?”
“와, 씨. 입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아.”
지수가 어금니로 사탕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단단한 사탕은 부서지지 않았고, 막대만 뱅글뱅글 돌았다. 큰 사탕이 입안을 꽉 채우고 있던 터라 지수의 발음이 조금씩 새어나갔다.
“양형배랑 양원이랑 둘이서 개수작질 이더라. 양형배가 이번에 레슨 피드백 받은 거 양원한테 존나 떠벌리면서 다 알려주길래 처음에는 그냥 방향성 같은 거 물어보는가 보다 했거든? 근데 낌새가 이상해서 몰래 엿들었더니, 야, 씨발. 양형배가 양원 곡 돈 주고 산 것 같아. 솔직히 양원 작곡 천잰 거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다 알잖아. 양형배가 그대로 내면 우리 조 이번 점수 씹창날 텐데 억울해서 살겠냐? 누군 몇 날 며칠 밤새워서 작곡하고, 누군 돈 주고 사고.”
“양원이 누구지.”
“벌써 써스 엔터 들어갔잖아.”
“아, 걔. 근데 그런 애가 대신 써주면 확 티 나지 않아?”
“뭐, 안 들키게 조율 잘했겠지. 정의롭게 그냥 조교한테 찔러? 아니면 교수님한테 다이렉트로……수연이, 안녕.”
무심코 뒤를 힐끗 본 지수가 입에 물고 있던 막대사탕을 빼내고 손을 흔들었다. 지수를 따라 뒤를 돌았다. 박수연이 키가 유독 작은 여자애의 팔짱을 끼고서 우리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우리 이야기를 다 들었나. 나는 쫄려 죽겠는데 지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수연이 벌써부터 선배 행세하냐? 맨날 1학년들만 데리고 다니네.”
“아니에요, 오빠.”
박수연은 빵빵한 볼을 씰룩이며 눈웃음을 쳤다. 분명 웃는 낯이었으나 내 시선만큼은 끈덕지게 피하는 것으로 보아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근데 무슨 대화 했어요? 지나가다 들었는데.”
지수는 가볍게 대꾸했다.
“양형배 병신이라는 얘기.”
낯빛에 혐오감을 띤 박수연이 그에 격하게 동조했다. 어째 코드가 맞았는지 지수와 박수연이 잠시 동안 양형배를 두고 험담을 나누었다. 나는 주변 나무들을 지루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이 느껴져 박수연의 옆에 있는 여자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쳐다봐놓고 여자애는 내 눈길을 잠시라도 견디기 힘들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귓불이 달아오를 만큼 화를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좀 무안해졌다.
***
위클리 발표를 도와줄 연주자들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문자 몇 번, 메일 몇 번 주고받은 것이 다라서 만남은 당연히 어색했다. 한 시간 동안 뻣뻣한 웃음만 짓다가 모임을 파했다. 모두 가지고 온 악기를 들고서 뒤뚱뒤뚱 나갔다. 조금 텀을 두고 나가려는데, 피아노를 맡은 연주자가 다가와 페이는 언제쯤 줄 예정이냐고 물었다.
“위클리 끝난 뒤에 드릴게요.”
“아.”
친절을 흉내 내려는 내 노력은 인상을 팍 쓴 피아노 연주자 앞에서 깨져버렸다. 나는 연습실을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돈이 급한가. 한 번 먹튀 당한 경험이 있어 신중 하려는 것뿐인데. 보도블록 무늬를 따라 걸으며 요 근래 돈을 얼마나 썼는지 꼽아보았다. 터무니없는 비용을 들여 빌린 연습실 가격과 각 악기 포지션별로 줄 페이. 이것만 해도 벌써 수십이 깨진다. 고록담의 시급이 세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누나에게 몇 번이고 손을 빌렸을 것이다.
불현듯 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유학 자금은 고록담 시급으로는 커버가 안 될 텐데. 유학을 아주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그 말곤 선택지가 없었다. 이제 와 다른 길을 찾아보자니 지금껏 해왔던 것이 걸리고, 그대로 밀고 가자니 천부적인 재능이 없었다. 써스 엔터에 들어갔다는 그 애만큼만 됐어도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에 치인다.”
팔이 덥석 잡혔다. 나는 몸의 무게를 앞으로 실었다가 반동에 이끌려 뒷걸음질 쳤다. 바로 옆에 커다란 자전거가 있었다. 아니, 자전거라기에는 울음소리가 사나웠다.
“우채민 씨, 정신 놓고 걸을 거면 택시를 타요.”
이세정에게서 눈을 떼고 앞을 보았다. 긴 횡단보도가 아찔하게 뻗어있었다. 빨간불이었고, 차들이 총알 같은 속도로 횡단보도를 밟고 있었다.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고는 잡힌 팔에 손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근데 좀 아파서.”
이세정이 내 손과 겹쳐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힘을 풀지 않아서 이세정의 옷차림으로 신경을 돌렸다. 퇴근하는 길인지 좀 많이 생략한 정장 차림이었다. 재킷이나 타이도 없었고, 바지마저 캐주얼했다. 근방에 페이스 코트 지사 건물이 있나.
“탈래요?”
물어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이세정이 타고 있는 바이크 뒷좌석을 보았다. 어차피 탈 생각은 없었으나, 앉을 자리가 아예 없어 눈썹을 올려선 의문을 표했다.
“여기 말고 저기.”
이세정이 가리킨 곳에 이제는 낯이 익은 검은 차량이 있었다. 차 앞에서는 장 비서님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뺨을 홀쭉하게 꺼트렸다가 연기를 뿜어내기를 몇 번, 자신에게 시선이 꽂히자 급히 불을 껐다. 그리고 다급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는 언제 다시 실장 답니까? 평사원 한 분 모시고 보모 놀이하는 거 지겹습니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면서 어조는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이세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저 말고 이정우 뒤꽁무니나 쫓아다니세요.”
“정말로 독일에서 삼 년간 배운 게 하나도 없으십니까? 혹시 본사에서는 야근 중 뛰쳐나가는 문화가 만연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까?”
“본사엔 야근이 없습니다, 장 비서님.”
“아주 제대로 배워오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이세정은 허공에 손을 저어 비켜서라고 명령했다. 아까 전 들이마신 담배 연기까지 모조리 내뱉을 것처럼 깊은숨을 내쉰 장 비서님이 옆으로 몸을 틀고는 이세정이 대충 세워놓은 바이크를 부여잡았다.
“댁으로 보낼까요?”
장 비서님이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장 비서님이 통화하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시야가 가려졌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아, 저 아르바이트 하러 갑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무심코 이세정의 손목을 훑었다. 이세정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다.
“데려다줄 테니까 타요.”
“예? 아……. 저, 혼자 갈게요.”
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나를 보는 이세정의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다. 마주 보고 있던 눈길을 아래로 내리니, 예상외로 담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혼자 가요. 택시 타고.”
이세정은 지갑에서 하얀 종이를 꺼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통화를 하고 있던 장 비서님이 이곳으로 뛰어오더니, 그보다 더 빠르게 내게 노란 종이를 쥐여주었다. 장 비서님이 이세정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차를 타라고 주는 겁니까, 사라고 주는 겁니까.”
장 비서님은 직접 택시를 잡아서 나를 차내로 밀어 넣었다. 문이 냉정하게 닫힌다. 나는 오만 원권, 한 장을 꾹 쥔 채 밖을 쳐다보았다. 창 너머의 이세정은 내가 타고 있는 택시에 관심 한 줌 주지 않고 바이크에 올랐다. 바이크가 엔진음을 내며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면서까지 이세정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훑었다. 분위기가 되게, 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박수연은 명품 백팩을 메고 있었다. 사실 명품 가방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내게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박수연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배도빈이 간혹 사천만 원에 달하는 바이크를 타고 와 엔진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때나, 양형배가 시계를 보여주며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고 으스댈 때나, 살펴보면 본인이 직접 과시하지 않는 이상 명품임을 아예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니까, 박수연의 가방에 양형배가 휘핑크림이 듬뿍 든 핫초코를 쏟아붓기 직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그 가방의 가격대를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열이 올라 씩씩대는 박수연을 앞에 두고, 양형배는 안절부절못했다.
“야, 미안하다. 어쩌냐. 이거 얼마야?”
“육백이요!”
“뭐? 더럽게 비싸네. 그거 빨아서 쓰면 안 돼? 줘봐. 한 번 빨아보게.”
“뭐, 뭐라고요?”
지루하던 차에 일어난 소동에도 의외로 학부생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일이 커진 건 배도빈이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고부터였다.
“형배야, 똑같은 걸로 하나 사다 줘. 이 가방은 네가 들고 다니고.”
“씨발, 육백을? 장난하냐?”
“그럼 그 시계 가져다 팔면 되겠네?”
“뒤지고 싶냐? 여기다 돈 얼마나 쓴 줄 알아?”
“왜 기분 좆같게 욕을 해. 말 좀 예쁘게 해라.”
“양아치 새끼들이네. 내가 육백이 어딨냐?”
배 째라는 식으로 목청껏 내지른 양형배가 주변 눈치를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별로 안 묻었잖아. 수선해, 수선.”
양형배는 지갑을 벌려 만 원짜리 세 장을 집었다가 한 장을 쓱 밀어 넣고 두 장만 꺼냈다. 그리고 박수연의 손에 억지로 쥐여준 뒤 더 이상 이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 급하게 강의실을 나갔다. 박수연의 주변으로 여자들이 몰려들어 숙덕거렸다.
나중에 지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해주니, 지수는 양형배보다도 배도빈을 씹었다.
“별걸 다 참견한다, 그놈은. 그보다 곧 위클린데 준비 다 했냐?”
“너는?”
“아…… 피아노과 애한테 곡 좀 쳐달라고 했더니 페이 선불로 달라 하잖아. 미리 줬더니 연습은 좆도 안 해. 그 새끼 나 입학할 때 같이 들어왔으면 선배들한테 존나 맞았을 거다. 뭔 말만 하면 가혹 행위라 그래. 여기가 군대야, 뭐야. 시발, SNS엔 맨날 나 까는 글만 올리고.”
“요즘 거기 글 누가 믿어.”
“보는 사람은 봐, 인마. 교수님들도 보는데.”
왜 내 주변엔 진상들이 많지. 지수가 중얼거렸다. 지수가 진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지수를 진상이라고 여길 확률이 적지 않게 존재했기에 나는 격하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와 연관 지어 요즘 느꼈던 것들에 대해 사족을 달았다.
“여기 애들 좀 이상한 것 같다. 굳이 누굴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건 아니고, 전반적으로 다.”
“맞아. 그중에서 네가 제일 이상해.”
“뭐?”
꼭 외모를 가리켜 한 말이 아닐 텐데도 나는 뺨을 문질렀다. 볼때기를 잡아 쭉 늘리자 지수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뭐냐. 귀엽게 군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나 게이 같아.”
별거 아닌 말에 나는 마치 아웃팅이라도 당한 양 놀랐다. 그러고 보니 장 비서님에게 택시비를 받은 그날 이후로 이세정을 본 일이 없었다. 만날 때마다 자꾸 이상한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또 마주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휴대폰 번호부터 지울까 싶다.
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위클리 멤버들 간의 삭막한 단톡방에 톡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저 개인 사정 때매 오늘 연습 못 갑니다;]
피아노 연주자의 통보였다. 마지막 연습이니 꼭 좀 와달라고 며칠 전부터 사정을 했었는데. 나는 입술 새로 비집고 나오려는 욕설을 삼키며 위클리 당일엔 반드시 나와 달라고 답문을 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주 위클리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학생들이 아트홀로 모여들었다. 홀은 각기 다른 과, 학교, 대학원 등 여러 곳에서 온 연주자들로 인산인해 했다. 나는 내 연주자들이 빠짐없이 왔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피아노를 담당한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늦는다는 연락을 받기는 했으나, 설마 공연시간이 다 되도록 오지 않았을 줄이야. 급히 연락을 취했더니 돈을 안 줘서 못 가겠다는 황당한 대꾸를 받았다. 떼어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번 공연만 끝나면 틀림없이 준다는데 대체 왜 못 믿는 거지. 어찌나 터무니없던지 화도 나지 않았다. 집에 가자마자 인터넷 카페 열 군데를 돌아다니며 블랙리스트 신청란에 신고 글을 넣을 생각이다.
내 차례는 앞에서 두 번째였다. 악보는 한 번 보고 칠 수 있을 만큼 쉬운 편이 아니었다. 빠른 시간 안에 연주자를 섭외할 수 없을뿐더러 운 좋게 연주자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당장 악보를 익히게 할 수가 없었다. 대기실 좌석에 앉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내게, 첼로를 맡은 남자가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자를 데리고 연주자들에게 갔다.
“피아노 연주자가 안 왔어요. 제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연주자들과 대기실 한쪽에서 악보를 조목조목 뜯어보며 상의했다. 문밖으로 첫 번째 위클리 곡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첫 타자는 양형배였다. 자작곡을 감상할 새도 없이 재빨리 악보로 눈을 돌렸다.
“할 수 있으시겠어요? 전공도 아니고, 또 어려운데요.”
“교수님한테 말하면 연주자 관리 못 했다고 점수가 깎입니다. 곡 발표도 진짜 중요한 거라서.”
“피아노 얼마나 배우셨어요?”
“배우기는 오래 배웠는데, 잘 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
“그래도 이건 제가 만든 곡이니까 어떻게 잘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악보 끄트머리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불신으로 사로잡힌 눈동자 여럿이 나를 옭아맸다. 모두 이 발표가 망했음을 직감하고 있는 듯해 괜히 힘이 빠졌다. 사실 나도 내가 완벽하게 곡을 완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독주였다면 혼자 어떻게든 했을 테지만 이건 다른 사람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비전공인 악기로 화음을 이루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악보는 다 외우셨어요?”
“제가 쓴 거니까요.”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다시 악보를 내려다보았을 때, 갑자기 싸한 위화감이 들었다.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분위기, 감성, 자주 쓰는 기교.
양형배의 자작곡, 어쩌면 양원의 자작곡일지도 모르는 음악은 기가 막히게 내 개성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써왔던 그 어떤 곡과도 부분적으로나마 명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 구간이 없었고, 개성만 좀 닮았을 뿐 전반적으로는 내가 하는 음악과 비슷한 것 같다는 식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수준 높은 음악이라서 함부로 코멘트를 달기 어려웠다.
휴대폰을 꺼내 악보집에 들어갔다. 그동안 써온 악보들을 살펴보며 무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곡이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들을수록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미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찝찝함은 내 오만방자함에서 비롯된 감정일 것이다. 이미 레슨을 통해 교수님께 검증받은 곡이었으니, 말을 함부로 했다가는 교수님으로 하여금 다소 건방지다는 인상을 자아낼 수도 있었다.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곡 한 번 정말 잘 뽑았다. 기존의 양형배의 스타일과 차이가 있지만, 지수의 밀회 목격담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양형배는 악마에게 혼이라도 판 모양이다.
결국 곡을 감상하는 데에 시간을 모조리 쏟아버렸다. 무대 위에 세트가 만들어질 동안 악보를 몇 번 더 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무대에 오르자, 나를 본 지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네가 왜 거기를 올라가냐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교수님은 구태여 내게 피아노 연주자가 바뀐 것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연주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순서가 양형배의 뒤라는 것부터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것까지 심적 부담이 상당했다. 어떻게 연주를 하기는 한 것 같은데, 부분 기억상실에 걸린 환자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정신 상태로 무대에 올라갔었다니,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위클리를 끝내고 지수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연주자들에게 지불 했던 위클리 비용을 꼽아보며 샌드위치를 뜯었다.
“위클리만 하면 돈이 깨져. 그렇다고 독주곡 만들면 까이고…….”
지수는 투덜거리는 내 말을 곧장 받지 않고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더니 불쑥 물어왔다.
“나 하고 싶은 말 있는데, 해도 되냐?”
“언제부터 물어보고 했다고.”
지수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내 손을 꼭 붙들었다. 땀 찬 손으로 내 손가락을 샅샅이 훑는 모습을 께름칙하게 쳐다보았다.
“남자 손 맞냐?”
“뭐야.”
“지금이라도 전향하는 건 어떠냐. 왜 피아노 쪽으로 안 갔어?”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드라마틱 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 몹시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지수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기에는 그때의 내 생각은 아주 단순한 편이었다. 말없이 푸석한 빵 쪼가리를 씹어 먹고 있는데, 지수가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라고 하며 나를 멋대로 불쌍하고 연약한 놈으로 취급했다.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던졌다.
“아버지 눈치 보이게 어떻게 가.”
“아저씨가 반대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냥…… 그때 검은 피아노를 버렸잖아. 갑자기 은퇴하고. 뻔하지.”
“음…….”
“어차피 나 예고도 작곡으로 갔었고, 피아노에 별로 미련 있던 건 아니었어.”
“으음…….”
지수는 입을 꾹 다물고 연신 영혼 없는 대꾸를 반복했다. 휴대폰 화면을 보며 눈을 껌뻑껌뻑하는 것이, 아무래도 내 말을 모두 흘려들은 모양이다.
“뭐 하냐.”
“존나 웃기네. 이야, 위클리 끝나니까 바로 올라와.”
지수가 휴대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샌드위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학교 SNS에 올라온 짧은 글이었다. 내용이 많이 낯익었다.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보려고 했으나 지수가 문장마다 자꾸 주석을 다는 통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얘 머리 썼네. 위클리 전에는 그래도 고칠 수 있잖아. 점수 빼도 박도 못하게 공연 끝나고 터트린 거 봐.”
“나 좀 읽고.”
“뭘 자세히 읽어. 이거 박수연이 그때 우리 대화 듣고 익명으로 제보한 거잖아.”
“무슨 대화? 양형배가 양원 곡 샀다고?”
“아…… 박수연 데려다 입막음을 시켰어야 해. 이걸로 양형배 협박할까 하고 너한테만 말하고 아껴뒀던 건데.”
나는 빠르게 글을 훑었다. 글 어디에도 박수연이 썼음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가방 사건으로 양형배에게 앙심을 품었을 터, 박수연이 곡 발표가 끝나자마자 터트렸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양형배 이 새끼 전화 오는 거 봐라.”
지수가 휴대폰을 바닥에 엎어두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왜 너한테 전화 오지?”
“양형배랑 양원이랑 작당 모의할 때 존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쳐들어갔었거든. 대충 짐작했겠지. 내가 그 새끼들 모의한 거 눈치채고 나불거렸다고. 너한테도 곧 전화 올걸.”
“나는 왜…….”
“글을 봐라, 멍청아. ‘아 전 작곡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남자 복학생인데요. 친구한테 들었는데…….’ 씨발, 작곡과에 이 조건 충족하는 놈이 너랑 나 말고 또 있냐? 본 건 나니까 글 쓴 건 너겠지.”
지수는 주작 티가 뻔히 나는데도 어째서 댓글에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냐고 억울해했다. 하도 분통을 터트리기에,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씨발, 너는 마음이 평안하세요? 난 지금 복학생이란 단어도 괜히 좆같은데.”
그러고 보니 복학생, 복학생 하다 보니까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수야, 나 지나가다 들은 거 있어.”
“뭐.”
“복학생 주제에 신입생한테 들이댄다고 너 엄청 까더라. 애들이.”
“누가 보면 나 지금 막 전역한 줄 알겠다.”
짜증을 내는 지수를 두고 나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흘끗 보았다. 떨떠름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했지만, 지수만큼의 걱정은 없었다. 이 수상한 글을 다들 믿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음대에 도착했을 땐, 건물 한 층이 어수선하게 들떠있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용기가 없어서 그저 내 할 일만 했다. 강의도 열심히 듣고, 밥도 열심히 먹고, 양치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 시커먼 낯으로 다가온 양형배와 맞닥트렸다. 양형배는 제 짝눈처럼 비딱하게 물었다.
“너냐.”
대답도 듣기 전에 괜히 물었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양형배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휴대폰 좀 빌려줘라.”
“왜요.”
“문자 좀 할게.”
겨우 문자 한 통을 쓰겠다는데 안 주자니 좀스러운 듯해서 순순히 휴대폰을 건넸다. 한참 붙들고 있을 줄 알았던 양형배는 의외로 짧게 사용하고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별다른 인사 없이 휙 지나쳐갔다.
나는 휴대폰을 뒤적여보았다. 흔적을 지웠는지 문자 함은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혹시 몰라서 최근 쓴 어플을 확인했다. 메신저? 메신저에는 왜 들어갔지? 메신저 창을 내려 보니 양형배와 대화를 나눈 개인 채팅방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뭐야, 이게. 양형배에게 물어보기 위해 급히 자리를 박찼다.
“선배님.”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 도중에 멈춰 서야 했다. 함경윤이었다. 양형배가 사라진 계단 쪽을 미련 섞인 눈으로 힐끔거리다가 그가 막 모습을 감추자 어쩔 수 없이 함경윤에게로 몸을 돌렸다.
“왜요?”
“아…… 그게 혹시, 양형배 선배님 찌른 거 선배님이세요?”
“응?”
“그 선배가 교수님한테 불려 갔다 오고부터 막 선배님 욕하시던데…… 에이, 아니에요. 쓸데없는 말 해서 죄송합니다.”
함경윤이 가고 난 뒤, 나는 오늘 처음으로 불길함과 마주했다. 무언가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흘러가고, 그것이 겹겹이 맞아떨어지면서 나를 어딘가로 내모는 거다. 진행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짧은 새에 멀어진 함경윤을 도로 잡고 캐물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사람? 다른 누구?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양형배가 교수님에게 불려 갔을 정도면 죄다 들켰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큰 파장을 불러오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 했다. 음대 안에서 가장 점수에 예민하기로 소문난 학과라서 그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제를 최대한 돌아보았다.
‘아 전 작곡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남자 복학생인데요. 친구한테 들었는데…….’
SNS엔 분명 그런 문장이 있었다. 양형배의 시선으로 보면 글쓴이가 나로 오인될 수 있는 여지가 분명히 존재했다. 설마 저 말을 믿을까 했는데.
SNS를 탈퇴한 지 오래라고 변명을 하기도 뭐 한 상황이라, 매우 난감해졌다.
어찌 되었건 오후까지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날 밤, 내 계좌로 의문의 돈이 입금되었다. 갑작스레 입금된 돈의 정체는 아침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혹시 아버지가 계좌를 바꿔 용돈이란 걸 부쳤나 했더니 역시 아니었고, 누나에게 물어봐도 아니라는 답변만 받았다. 고록담 사장님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지수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입금자라 잘못 보낸 돈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조금 있다가 은행에 연락을 넣어보기로 하고 우선 학교에 갔다.
그리고 나는, 열두 시도 채 안 되는 시각에 지도 교수님께 불려 가 면담을 받았다. 학과장실에는 양형배도 있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이 내겐 너무 버겁기만 해서, 교수님의 말이 지속될수록 점점 혼이 빠져갔다. 윤리적으로…… 장학금 제도를…… 결국 도태되는 것은 너고……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머릿속에서 여러 단어들이 회전하는 통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그 마지막 한마디에 번뜩 이성이 돌아왔다. 놀란 나머지 변명 한 번 제대로 못 할 뻔했다. 힘겹게 오해라고 말을 했더니, 교수님이 양형배의 휴대폰을 들어 그와 대화를 나눈 카톡창을 보여주었다.
[뭐 해]
[레슨 끝나고 따로 얘기하자 했는데 왜 그냥 가ㅋㅋ]
[딴 게 아니고 너도 알잖아 나 요즘 알바 뛰느라 바쁜 거 근데 과제가 감당 안 돼ㅋㅋㅋㅋ]
[그래서 니가 위클리곡만 좀 빠르게 써주면 좋을 거 같은데.]
[물론 페이 지급. 나 같은 놈이 어딨냐 동생 용돈도 주는데ㅋㅋㅋ 자세한 얘긴 전화로 할 테니까 봤으면 전화해라]
[대답안하냐ㅋ]
그 뒤에 실제로 통화를 했으니 내 거절이 메신저 안에 담겨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양형배의 메시지 밑에는 내가 보낸 적 없는 답장이 있었다.
[xx 은행 000000-00-000000]
보낸 시각을 확인하니, 어제 양형배가 내 휴대폰을 빌린 그즈음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계좌번호가 여지없는 내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양형배가 내 계좌번호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황당한 나머지 입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멋대로 해석한 교수님이 점잖게 말했다.
“곡도 보면 말이야. 네가 자주 쓰는 진행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어. 들키지 않으려고 몇 번 꼰 것 같지만.”
“제가…….”
양원을 끌어들이는 일이 과연 합당한지는 모르겠다. 양형배와 양원이 몰래 교류했다는 사실은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지수의 입을 통해서 확인된 문제였다. 일단 되는 대로 설명했다.
“지수가, 형배 형이랑 양원이 과방에서 교수님께 피드백 받은 부분을 같이 고쳐나가는 모습을 봤다고 했습니다. 양원도 의심해봐야 할…….”
“그건 그 친구를 데려와서 할 얘기고.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않고 말할 순 없니.”
“교수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제가 이런 곡을 쓸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 만약 쓸 수 있다고 해도 형배 형의 제안은 일찌감치 통화로 거절했습니다. 제가 거절했다는 것은 박수연이라는 2학년도 아는 얘기고, 그리고 이 카톡은 어제…….”
“그래서 돈은 왜 받았지. 이미 계좌내역까지 확인했다.”
“어제 형배 형에게 핸드폰을 빌려준 적 있습니다. 계좌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때…….”
“채민아, 구구절절 듣기엔 좀 바쁘다. 일단 나가줄래?”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자를 거면 굳이 부드러울 필요가 있을까. 교수님은 말문이 막혀 입만 달싹거리고 있는 나를 반강제적으로 밖으로 쫓아냈다.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 신뢰성이 떨어진 것인지, 정말로 바빴던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좀 원망스러웠다. 굳은 표정을 미처 풀기도 전에 문 앞에서 학과장실 내부를 기웃거리고 있던 양형배가 내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돈은 잘 받았냐? 나 이번 달에 쓸 때가 많아서 그런데 돌려줘.”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저한테 왜 그러세요.”
“어차피 너 학점 좋잖아. 이거 하나 미스 뜬다고 망하기라도 하냐?”
“……양원은요?”
양원은 왜 끌어들이지 않은 거냐고, 왜 양원 대신 내가 몰매를 맞아야 하는 거냐고, 묻는 내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양원은 인마, 써스 들어간 작곡가잖아.”
“거기서 잘 비벼서 형 당겨준댔어요?”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우리 상호 간에 예의는 지키자. 사회 나가봐라. 내부고발 그거 정의로운 거 아니야.”
양형배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말하다 말고 마구 웃어댔다. 휘어진 눈과 여러 겹으로 주름진 입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옛말은 죄다 틀렸다. 나는 화내는 것에 한해선 기복이 심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를 지그시 물어 화를 누르고 있는데 양형배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도 입금된 금액을 그대로 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학과장님께 불려 갔음을 뒤늦게 알게 된 지수가 사방팔방에 다 들리도록 씨근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학부에 모두 퍼진 것 같은데, 지수까지 그에 대해 떠드니 매우 불편해졌다. 목소리를 낮추라고 중얼거리며 지수의 팔을 잡았다. 그럼에도 지수는 여전히 억센 톤으로 말했다.
“내가 가서 너 아니고 양원 새끼라고 말해줄게. 가자.”
“교수님이 양원 아끼는 건지 아니면 진짜 듣기 싫었던 건지 내 말 자꾸 끊어. 아마 소용없을 것 같은데.”
“씨발, 가지가지…….”
지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짧은 앞머리가 여러 방향으로 비쭉 솟아올랐다.
“아, 그럼 녹음기 누르고 양형배 외진 데로 끌고 가서 존나 패.”
“나중에 폭력으로 경찰서 가면 그게 증거가 되겠네.”
“아니, 내가 화나서 말이 헛나왔다. 녹음기 가지고 양형배 외진 데로 끌고 가서 왜 그랬냐고 물어봐. 그럼 아무도 없으니까 술술 불 거 아니야. 그거 들고 다시 교수님한테 가. 점수 그따위로 받고 끝낼 거냐?”
나를 다그치는 목소리에는 내가 억누르고 있는 감정들이 있었다. 내가 내지 못하는 그런 텐션으로 대신 화를 내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였을까. 지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동요하듯, 담담하던 속에서 어떤 파도가 쳤다.
“……잠깐만. 잠깐만, 지수야.”
나는 발 빠르게 걸었다. 어리숙한 경보로는 지수를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아예 뜀박질을 했다. 뒤에서 지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멈추어 서지 않았다. 억울함에 갑자기 터져버린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쳤다. 부딪힌 어깨가 몇 있었고, 도중에 팔이 잡힐 뻔하기도 했다. 나는 웬만한 학생들이라면 관심 없이 지나칠 만한 외진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갔다. 아무 바위 위에나 걸터앉아, 속 좀 진정시키고 돌아갈 셈으로 심호흡을 했다. 지수에게 연락하는 건 자꾸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가다듬은 뒤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무릎 위에 올리고, 이마를 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동음이 울렸다. 장사를 하루 쉴 예정이니 오늘은 오지 말라는 사장님의 메신저였다. 그대로 끄려다가 엄지손가락을 밀어 화면을 올렸다. 지난번 월급날을 앞두고 사장님께 보냈던 내 계좌번호가 시야에 깊이 박혔다.
“아…….”
고개를 푹 숙였다. 유난히 고운 손바닥으로 까칠해진 얼굴을 쓸었다.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꾹 누르자 고집스럽게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억울한 한편으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았다. 이까짓 일로 우는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고, 그 전에 양형배에게 이용당한 것이 분통했으며, 그 전에…….
지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오랫동안, 동상이 된 듯 앉아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정신이 든 것은 다리에 무언가가 닿으며 여실한 존재감이 느껴졌을 때였다.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없었는데. 분명 붉어져 있을 것이 뻔한 눈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빳빳하게 내린 고개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턱이 잡힌 까닭에 억지로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앞에 있는 사람을 쏘아보았다.
“얼굴 보려고 온 건데, 울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단조롭게 이야기하는 이세정을 쳐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체감상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이세정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처럼 무덤덤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라이브할래요?”
“그럴 기분 아닙니다.”
“그럴 기분이었다고, 얌전히 따라올 거 아니잖아요.”
나는 손바닥으로 한쪽 눈을 꾹 눌렀다. 아직 덜 나온 눈물을 쥐어 짜내는 중에, 이세정의 어깨너머로 낯익은 누군가가 보였다. 천만다행으로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충분히 내가 보일 수 있는 거리라서 급히 몸을 움츠렸다.
“정말 죄송한데 저 좀 숨겨주시면 안 됩니까?”
“우채민 씨, 안기진 말고.”
일어선 이세정에 의해 거칠게 밀쳐졌다. 딱히 안길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느꼈다니 미안해졌다. 근데 많이 닿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안한 정적 속에서 이세정은 평온한 얼굴로 구겨진 셔츠를 털었다.
“갈까요.”
***
뱃멀미도 없는데 속이 울렁였다. 창에 머리를 기대자니 이마가 불편하고, 시트에 몸을 눕히자니 예의가 아니라서 많은 자세를 취해보다가 결국 허리를 꼿꼿이 펴들었다. 그러나 눈을 다 뜨기엔 겁이 너무 많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쉬이 갈무리하지 못하고 유리창만 노려보았다. 몰아쳐 오는 풍경 속에는 기이한 블랙홀이 있었다. 앞서 달리는 차들을 죄다 빨아들이다가, 종래에는 두 대의 거대한 탑차까지 삼켰다. 막 아슬아슬하게 탑차를 스쳐 간 직후 차가 세워졌다. 이세정을 쳐다보니, 그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왜 그리 떨어요.”
“드, 드라이브가 재미없습니다. 내려주세요.”
“우채민 씨 발로 직접 탔잖아요.”
“지금 후회 중이에요.”
이세정이 내 이마에 손등을 댔다. 땀으로 범벅된 이마가 온기에 잠시 녹았다.
“천천히 달릴게요.”
그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듯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제야 차들이 씽씽 오가는 다리 위에서 잠시 동안 정차하고 있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보다 속도가 줄었으나,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양 어디 잡을 곳이 없을까 얼마간 창 아래를 손으로 더듬거렸다. 예고도 없이 지붕이 열렸을 때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다짜고짜 침입한 바람이 정신없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칼바람 때문에 두 쪽의 눈두덩이 욱신댔다. 안전벨트가 판판하게 당겨올 정도로 몸을 굽힌 채 눈을 비볐다. 그때 입가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무심코 입을 벌렸더니 둥그런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씹어요.”
“…….”
“초콜릿이니까 겁먹지 말고.”
이세정은 평온하게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입안에 가득 찬 초콜릿을 조심히 오물거렸다. 겉면이 순식간에 쪼개지고, 대신 과즙처럼 묘한 액체가 채워졌다.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상반된 자극의 여파인지 어지럽기도 했다.
“약간, 알코올이 느껴지는데.”
“좀 들어갔어요. 더 먹을래요?”
이세정이 초콜릿 상자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얼결에 상자를 받아 무릎에 올렸다. 반쯤 열린 포장지 너머로 모양도 없이 둥근 초콜릿이 보였다.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취향에서 벗어나는 초콜릿을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는데, 이세정이 그렇게 물어왔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당장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처럼 누구에게 쫓기듯 달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내려달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었고, 뜬금없이 피아노를 치고 싶다며 당혹스러운 감성을 이야기할 이유도 없었다.
대답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도 차는 거침없이 도로를 주행했다. 다리를 빠져나와 바다와 닿아있는 길로 진입한다. 부드러운 천으로 초콜릿을 잘 덮고, 점점 어둠이 내려오는 바다 지평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오랜만이었다.
“대답 계속 기다릴까요?”
“그냥…….”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렸더니 이세정이 손을 내밀었다. 본능에 충실한, 그렇지만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그 손을 잡았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어이없는 행동에 이세정은 더 당황한 듯 보였다. 이세정은 내 손을 움켜쥐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삭막한 정적이 바람과 함께 차내를 휩쓸었다. 이세정은 한참 뒤에서야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렸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장난처럼 내 손등을 문질렀다.
“예쁘네요, 손.”
“아, 네…….”
“상자 치워줄게요.”
얼른 손을 떨쳐내고 초콜릿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집어넣은 이세정이 정면을 보았다. 은은하게 잠긴 어둠 속에서 눈꺼풀이 가만가만 움직였다.
“원래 잘 우는 편이에요?”
“아니요. 억울하면 웁니다. 슬플 때는 안 울고.”
내 말이 웃긴지 이세정이 비딱한 미소를 지었다.
“나랑 있어서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예, 차들을 막 추월할 때는 정신없었는데, 지금은 좋습니다.”
“아깐 미안했어요. 뒤에서 자꾸 누가 따라와서.”
이세정은 분명 아까라는 단어를 붙였지만, 나는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인 양 뒤를 쳐다봤다.
“뒤에서 누가…….”
“우채민 씨를 바다에 빠트리기라도 할까 봐 겁나는 모양이에요.”
나는 드물게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비소처럼 짧은 웃음 속에는 수많은 의문점이 꼬여있었다. 왜 저리 엉뚱하고도 살벌한 농담을 하는 걸까. 추격자가 경찰인지, 장 비서님인지 아니면 다른 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세정이 평소에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고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농담에는 별로 개연성이 없었다.
갑작스레 지붕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옆 차창을 한 번, 벌써 천장의 절반을 덮은 지붕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왼쪽 뺨에 빗물을 맞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어차피 차 안이었으니 밖에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었다. 단단히 닫힌 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대뜸 갓길에 차가 섰다. 이세정이 아예 운전대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멈추세요?”
“와이퍼 거슬려서 뗐어요.”
“예?”
“그냥 갈까요? 스릴 있고 재밌겠네요.”
“아, 아니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기는 했으나 이세정의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유리창을 눈으로 힐긋힐긋 뜯어보며 와이퍼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내 쪽에는 없었지만, 간혹 한 곳에만 달려있는 차도 있었으니 그런 종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참을 관찰해보아도 와이퍼로 보이는 기구는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외관이 별로라면 차라리 와이퍼 없는 차량을 사면 될 텐데 왜 멀쩡하게 잘 붙어있던 것을 굳이 떼버렸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을 때 비가 왔다면 지금보다 더 난감한 상황에 치달았을 테다.
빗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주변은 점점 컴컴해졌다. 도로에 차 또한 몇 보이지 않았다. 조금 무서웠고, 조금 추웠다. 나는 유리창을 끈질기게 쏘아보는 이세정을 곁눈질하면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계속해서 일깨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만 같은 정적에 무슨 말이든 꺼내야 했다.
“비 오는 거 좋아하세요?”
“지금 나온 거 후회 중이에요.”
예상에서 벗어난 대답은 괜한 당혹감만 주었다. 미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나는 이세정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금 숨 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시트에 기댄 채 홀로 무거운 침묵을 견뎠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바닷길을 달리면서 잠깐이나마 들떠 올랐던 기분이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이세정을 슬쩍 곁눈질했다가 눈이 마주쳤다.
“에어컨 틀어도 돼요?”
아까 맞았던 바닷바람의 여파로 몸이 찼다. 내겐 오히려 겉옷이 필요했지만, 고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위아래로 차분히 흔들렸다. 이세정이 버튼을 조작했다. 곧 내부에 차가운 공기가 돌았다. 팔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순식간에 온도가 낮아졌다. 나는 춥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시트에 최대한 몸을 붙였다.
누군가와 통화를 끝낸 이세정이 내 뺨을 건드렸다. 고개를 드니까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두 번 두드렸다.
“눈 부었다. 알아요?”
나는 우물쭈물 눈을 더듬어보았다.
“많이 운 거 아닌데 왜 부었지.”
“…….”
“저 조금 운 거 아시죠? 그런데 왜 부었지.”
거울이 없으니 당장 얼굴 상태를 확인해볼 수 없었다. 혹시 개구리눈처럼 심하게 부었을까 봐 눈을 거칠게 비벼댔더니, 이세정이 내 손을 끌어내렸다. 이번에는 놓지 않고 꽤 오랫동안 만지작거렸다. 맞닿은 손바닥이, 얽혀있는 손마디가 모두 내 것이 아닌 양 어색했다. 비 오는 소리가 아득해지고, 이세정의 목소리만 남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이세정은 운을 떼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지도, 그렇다고 아주 고요하지도 않았다. 추위로 인해 몸이 떨렸고 그 떨림이 가슴 안쪽에서 간질거렸다. 그러니까, 어둡고 조용하고 게다가 몸까지 떨리는 상황에서 만난 온기가 마치 외로움 속에서 맞닥트린 구원자인 듯 나를 흔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감과 현황이 절묘하게 맞물린 탓에 웃기게도 나는 잠시 동안 이세정을 이성적으로 본 것 같았다.
“아까 왜 울었어요?”
“예?”
“만났을 때 울고 있었잖아요.”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급 한 번 않기에 이대로 넘겨줄 생각인 줄 알았다. 이세정은 내 대답을 기다리다가 시선을 슬쩍 깔았다. 덩달아 나 또한 이세정의 시선을 따라갔다. 내 팔이 추위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추워요?”
초여름이긴 해도 일단 저녁이었고, 바다 근처였고, 방금 전까지 에어컨을 틀었었으며, 옷도 얇게 입은 상태였다. 혼자 긴 팔 셔츠를 입은 이세정은 나만큼 춥지 않은지 내가 떠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에어컨을 껐다.
“말을 하지.”
말해야 할 때 안 하는 건 내 특기였다. 나는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보일 듯 말 듯 나를 따라 웃은 이세정은 조금 있다가 히터를 틀어주겠다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말만 안 할 뿐 나를 응시하는 눈길은 거두지 않았는데,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세정이 아까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채민 씨는 별것 아닌 일에 자주 우나 봐요?”
“그건 또 아닌데…….”
“비가 와서 기분도 안 좋고, 예약해둔 곳도 못 가고, 왜 울었는지 털어내지도 못하면 억울하지 않겠어요?”
“괜찮습니다. 전 비 오는 날도 좋아요. 그리고…….”
막 시작한 대화를, 전조등이 칼같이 끊어왔다. 오가는 차 없이 젖어있기만 한 도로에 두 대의 차량이 들어섰다. 각종 헤드라이트 하며, 손전등 하며, 아무튼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데 이세정이 내게 말했다.
“다음에는 와이퍼가 필요 없는 날 만나요.”
“네.”
기약에 긍정한 것은 그저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이세정이 손을 놓았다. 단단히 쥐고 있던 온기가 문득 사라져버리자, 나는 멍청하게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장 비서님이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우산을 잡았다. 내 쪽으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장 비서님은 내게 완전히 우산을 넘겨주지 않았다. 결국 서로 다른 두 손이 고집스럽게 우산대를 잡은 그대로, 빗속을 걸어야 했다.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됩니까.”
빗소리를 뚫고 장 비서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우산을 공유하면서 삶까지 공유하고 싶었나. 장 비서님의 질문이 괴상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단 대꾸했다.
“아버지, 그리고 누나가 있습니다.”
“누나랑 같이 살고?”
“아…… 네.”
“외출할 때 어디 간다고 말하고 가는 편입니까?”
“……아니요.”
“친한 친구는 많습니까? 이를테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찾아줄 친구.”
“…….”
장 비서님을 스쳐보았더니, 장 비서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묻는 겁니다. 궁금해서.”
왜 그런 게 궁금하지. 수상쩍다면 수상쩍었으나 간혹 무슨 말이든 꺼내려다가 예정에도 없던 말까지 꺼내는 경우를 더러 봤기에 말실수를 했나 보더라고 단순하게 넘겼다.
새로운 차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기사님이 지체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이세정이 타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시트에서 등을 뗐다. 창에 바짝 붙어 밖을 살폈다. 어둠도 그렇고 빗물도 그렇고 호락호락하게 차 밖 상황을 보여주지 않았다. 슬그머니 가운데 자리로 옮겨서 기사에게 물었다.
“저기, 저만 갑니까?”
기사님의 시선이 잠시 내게 닿았다.
“비 맞는 걸 싫어하셔서 옮겨 타는 것도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눈길이 다시 차창으로 돌려졌다. 빗물이 치덕치덕 달라붙었다가 죽 미끄러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이세정은 비가 그칠 때까지 차 안에 있을 생각인가. 장 비서님이 그쪽으로 돌아갔으니 혼자 있지는 않겠지만, 그 어두운 곳에서 한참 동안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내가 다 질리는 기분이었다. 거기 계속 있다간 비가 더 싫어졌으면 싫어졌지, 좋아지진 않을 것 같은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창에 기댄 팔로 턱을 괴었다. 차내는 따뜻했고, 멀미도 없었다. 어쩐지 내 우울함을 이세정에게 줘버린 기분이었다.
***
오늘따라 강의를 듣는 것이 고역이었다. 시선 때문이었다. 간혹 내 쪽을 보는 학부생들의 눈길에선 의구심이 만개하게 피어있었다. 이세정과 드라이브를 하면서 일부 휘발되었던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소문을 대체 어떻게 잡아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소문을 피해 다녔다. 과방이나 연습실 복도같이 학부생들이 즐비한 곳에는 가지 않았고, 그저 강의실만 전전했다. 다행히 연강이 있어 바쁜 척을 할 수가 있었다.
다음 강의실은 여기서 십오 분이나 떨어져 있는 인문관에 있었다. 심지어 계단까지 올라야 했다. 다급하게 음악관을 내려오던 중에, 억센 손이 나를 잡아챘다. 배도빈이었다. 배도빈은 나를 잡아놓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렸다.
“오태민?”
한참 만에 꺼내놓은 물음은 좀 기운 빠지는 말이었다. 벌써 몇 번째 묻는 건지 대답해주기도 지겨웠다. 그렇다고 섭섭한 마음이 이는 것은 아니었다. 익히 들은 바로 배도빈은 특정 성별에 한정 지어 편애하는 경향이 있었고, 나는 차별 당하는 것에 익숙한 편이었으니까. 당장 곁에 있는 지수만 보더라도 배도빈과 비슷한 과였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자기소개를 하고 싶지는 않아서 제발 외워달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채민입니다.”
“우채민…… 오태민이 더 낫지 않냐.”
나는 손목시계를 힐끔거렸다. 당장 뛴다고 해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은데 배도빈은 영양가 없는 말로 자꾸 시간만 끌고 있었다.
“저, 형. 이제 가야 합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배도빈이 귀찮음이 역력히 묻어나오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너 얘한테 뭐 잘못했냐?”
“……무슨.”
“됐다. 그나저나 너 양형배랑 뭔 일 있었지.”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얼굴이 구겨졌다. 따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배도빈은 알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있어서 내 이야기가 술자리 안주나 혹은 농담 따먹기의 소재로 등극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이야? 너랑 매일 붙어 다니는 걔는 너 누명 씐 거라고 하던데.”
정말로 진위 여부가 궁금한 건가. 내게 말 걸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곁에서 기웃대던 사람들을 많이 지나쳐온 터라 함부로 답하기 꺼려졌다.
“저 다음 강의 때문에 빨리 가야 해서요.”
나는 배도빈이 붙잡기 전에 인문관을 향해 힘껏 뛰었다.
연강을 듣고서 지수를 만났다. 커피를 사 온 지수는 내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자 빈 강의실을 찾아주었다. 사실 담소를 나누기엔 2평 남짓한 연습실이 제격이었으나 이 시간엔 개인 레슨을 받는 학생들이 많았다. 연습실이 거의 다 채워졌을 것이다.
“너 어제 어디 갔었냐.”
빈 강의실 안쪽으로 들어가 지수와 앞뒤로 앉았다. 나는 얼음을 갈아 넣은 주스를 내 쪽으로 끌어오며 대꾸했다.
“나 누구 좀 만나느라.”
“그럼 말을 하고 갔어야지. 그렇게 가버려서 내가… 아니, 누굴 만나?”
“어.”
“누구 만났는데?”
“재벌가 막내아들.”
“아, 병신아. 좀.”
지수가 신경질적으로 커피를 빨아 마셨다. 입술에 힘을 줄 때마다 빨대에 색이 입혀졌다. 맛있어 보여서 도중에 커피를 가로챘다. 순순히 제 몫의 커피를 내준 지수는 팔을 쭉 뻗어 내 쪽으로 휴대폰 화면을 비추었다.
“이거 봐봐.”
화면에는 마이크 모양의 그림이 떠 있었다. 지수는 재생 버튼을 누르곤 ‘우채민, 안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장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는데, 분명 작게 말했음에도 또렷하게 녹음된 음성이 귀에 와 박혔다.
“내가 이걸로 양 원 떠볼 테니까 넌 양형배 맡아. 괜히 휘말리지 말고 잘 꼬셔서 녹음 제대로 따와라?”
지수는 양형배를 상대할 때 주의점이 뭔지, 어떤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야 하는지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지수에게 말했다.
“고마워.”
“고마우면 함경윤이랑 잘 되게 도와줘라.”
“근데 어디서 들었는데, 너 복학생 주제에 어린…….”
“뒤지고 싶으면 계속 말해.”
지수는 벌써 일 년째 우려먹고 있는 군대 이야기를 꺼내면서 네가 나한테 이래도 되느냐고 빈정거렸다. 아마 예비군을 모두 끝마치는 날이 오더라도, 군대에서 지수에게 받았던 은혜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지수가 십 년은 족히 더 우려먹을 테니까.
나는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바꾸며 지수를 응시했다. 군대에서 살뜰하게 챙겨주었던 일화들 하며, 시간을 거슬러 중학교 때 이야기까지, 지수의 자화자찬을 지겹도록 들었다.
“중딩, 고딩, 재수, 군대, 대학. 우린 몇 년 지기 친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학과, 같은 부대. 같은, 이라는 수식어가 어디에 붙었느냐가 중요한 거지. 재수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군대는 어떻게 같이 간 거지?”
“몰라.”
“애들이 네가 나 스토킹하는 줄 알더라.”
“누구 애들?”
“중딩 때 애들 있잖아.”
“스토킹은 네가 하고 있고…….”
나는 지수의 커피를 마셨다. 반대로 내 주스를 가져가 빨대를 덥석 문 지수가 웅얼거렸다.
“그거 기억 나냐. 진유성 있잖아. 인기 존나 많아서 나랑 비밀 연애했던 애. 지금 연예인 하고 있고.”
마음에 드는 애는 다 사귀어서 어쩔 수 없이 비밀 연애한 거 아닌가.
“씨발, 그래놓고 너랑 사귀게 됐으니까 헤어지자 해서 존나 어이가 없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진유성이랑 사귄 적이 없었다. 우연한 계기로 진유성과 내가 어느 면에서 공감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호감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 뿐이었다. 이성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그 공감대라는 것을 화제로 자주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친밀함이 있었다. 나를 헤어짐의 핑곗거리로 쓸 만큼 인성적인 부분에서 약간 하자가 있는 애였지만 그래도 미운 애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그 애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있다가 진동 소리에 휴대폰으로 눈길을 틀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이세정의 문자였다.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지수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나는 답장을 생각하며 턱을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문자는 아니었다. 물꼬를 튼 건 어젯밤. 집에 들어와서 약 삼십 분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세정에게 ‘잘 들어가셨어요?’라고 문자를 보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몇 시간 간격으로 조금씩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세정… 여자 이름인데. 뭐야. 어디 학과야?”
지수의 물음에, 깜짝 놀라 휴대폰 화면을 껐다.
“저리 가.”
“그 불경한 태도는 뭐냐. 예뻐?”
“몰라.”
“그럼 사진 보여줘. 예쁜지 봐줄게.”
지수가 내 휴대폰을 강탈해갔다. 나는 다급하게 지수의 손목을 쥐었다. 그러나 번번한 힘자랑 한 번 하지 못하고 싱겁게 제압당해버렸다. 지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상태로 대화 내용을 읽었다.
“잘 들어가셨어요? 예. 일찍 주무세요. 예. 뭐야. 세정이 단답 봐라. 존나 도도하네.”
나는 기겁했다.
“야, 세정이라고 부르지 마.”
“왜. 세정이, 세정이.”
지수의 유치한 언사에 나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진짜, 하지 마라. 나보다 안 어려.”
“몇 살인데.”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앞자리 숫자조차 몰랐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프로필에는 구체적인 생년월일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명색이 총수 일가의 한 사람인데, 게다가 마이너 장르이긴 해도 전직 모터사이클 선수 출신인데, 이렇게 정보가 없을 수 있나 싶었다. 내가 생각에 빠진 사이 지수는 다시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얘는 자기가 예, 라고 보내서 할 말 없게 만들어놓고 왜 답장 안 하냐고 그러냐. 웃긴다.”
“다 봤으면 줘.”
“우채민, 안 그런 척하면서 뒤에서 여자 만나고 다니고…….”
해명을 하기 위해 말을 고르다가 이내 접어버렸다. 이제 와서 성별을 바로잡기도 뭐 했고, 해봤자 왜 남자랑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고 추궁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고 보니까 왜 난 계속 받아주고 있을까. 이세정의 위로가 생각보다 더 와닿았던 건가.
***
한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문자를 주고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대화는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주제 특성상 돌아오는 답장들은 죄다 짧았고, 또 성의가 없었다. 몇 번 비슷비슷한 문자를 받다 보니 내가 왜 이 사람과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눠야 할까 의문이 들어 씹었는데, ‘왜 답이 없어요.’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어영부영 여태까지 연락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 낯선 이의 생각 따위 별로 하지 않는 나조차도 이세정의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꼬박꼬박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언제쯤 답장이 올 것인가 기다렸다.
휴대폰에서 막 시선을 뗐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질질 끌었다. 나는 누가 나를 이리 무자비하게 끌고 가는 것인지 확인하고 휴대폰을 켰다. 양형배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내 팔을 던지듯 놓았다.
“왜 돈 안 부치냐. 내가 돈 돌려달라고 했잖아.”
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양형배가 나를 몰아붙였다. 하필 마주 보고 선 곳에 해가 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싶었는데 그럼 시비 거는 것으로 보일까 봐 곤란한 척 앞머리를 만지작거려 그늘을 지게 했다.
“아,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빨리 은행 갔다 와.”
양형배가 제 가슴께를 꼬집듯이 붙잡아 서너 번 잡아당겼다. 더운 티를 여실히 내더니, 이내 손부채 질을 해댔다.
“날씨 한 번 좆같네. 야, 대답 안 하냐.”
나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런데요, 형. 꼭 부쳐야 돼요?”
“뭐?”
양형배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 입술은 마음대로 움직여졌다.
“제 계좌번호 멋대로 알아내서 마음대로 주셨잖아요. 제 수중에 들어온 돈인데, 굳이 돌려줄 필요가 있나 해서요.”
양형배의 두꺼운 아랫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양형배는 얼마 동안 눈만 맞추다가 곧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주눅이 들었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원하는 말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곡은 양원이 만들고, 돈은 네가 받겠다고? 채민아, 너 날 거 엄청 좋아한다.”
“형배 형, 말하자면 대가는 있었습니다. 양원 대신 제가 누명을 썼잖아요. 그것 때문에 위클리도 다시 해야 하는데, 돈 몇 푼마저도 못 받으면 억울할 것 같아서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형배가 손을 들었다. 때리려는 줄 알고 움찔했는데, 다행히 손은 얌전히 내 어깨에 안착했다.
“존나 인심 한 번 쓴다. 이만 원은 너 가져.”
“…….”
“어이가 없지? 그러게 왜 교수님한테 찔러. 네가 글만 안 올렸어 봐. 내가 교수님한테 의심받을 일이 아예 없었을 거잖아. 씨발, 갑자기 열받네. 메일 내역을 진작 지웠어야 했는데.”
“메일이요?”
“교수님한테 나 아니라고 염병 떨었더니, 그럼 교수님이… 아, 내가 왜 이걸 너한테 설명하고 있냐.”
“교수님이 메일 내역 확인했어요?”
양형배는 대답 대신 나를 쏘아보았다. 혼란스러웠다. 교수님은, 두 사람의 작당 모의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메일 주소는 따져보지 않았던 것인가. 주소를 확인했다면 내가 한 짓이 아니라 양원이 한 짓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을 텐데.
하긴, 교수님이 그리 꼼꼼한 분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누명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양형배의 허술한 고백과 몇 가지 정황증거들만 가지고 대충 범인을 단정 지었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듯했다.
“후, 씨. 더워. 넌 안 더워?”
“…….”
“난 들어간다. 넌 은행 갔다 와서 들어와.”
양형배가 건물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켰다. 양형배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당길 때부터 재생시켜놓은 녹음 어플을 중지시킨 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늘진 곳으로 향하면서 저장된 음성을 들어보았다.
[곡은 양 원이 만들고 돈은 네가 받겠다고? 채민아, 너 날 거 엄청 좋아한다.]
양형배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녹음되어 있었다. 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양형배와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통 오지 않아 얼마나 초조했던지 모른다. 나는 지수와 연락이 닿자마자 같이 교수님을 찾았다. 손에는 내가 따온 양형배의 음성과 지수가 따온 양원의 음성이 각각 들려있었다. 누가 듣는다고 해도 틀림없는 두 사람의 목소리였으니, 달리 걱정은 없었다. 곧 내 학점은 원래대로 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두 번째 면담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 일이 썩 단순하게 얽혀있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조언도 잘 해주고 비교적 친절하던 교수님은 음성을 듣는 내내 돌덩이보다도 딱딱한 얼굴로 일관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아들었다며 우리를 쫓아냈다. 정말로 알아들었다면 조금 더 질문을 하고, 조금 더 알아봤을 텐데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내막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내 누명이 벗겨지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아니, 양원 그 새끼 뭐야. 뭔 빽인데?”
복도를 걸으며, 지수가 씨근덕거렸다.
“우리도 글 하나 올릴까? 아니면 내가 학과장실 앞에서 지랄이라도 해줘?”
“뭔 지랄.”
“기다리고 있어봐. 양원한테 너네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묻고 온다.”
“하지……!”
급히 몸을 튼 지수를 붙잡기 전에, 그가 먼저 멈추어 섰다. 지수의 앞에는 웬일로 곁에 아무도 달고 있지 않은 배도빈이 서 있었다. 지수의 얼굴이 퉁명스러워졌다.
“왜 앞길 막으시죠?”
배도빈이 지수를 무시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우채민.”
이번에는 이름을 정확하게 불렀다.
“우리 강아지가 자꾸 지랄해서 그런데, 얼른 무슨 일인지 말해줘.”
배도빈은 꽤 지쳐 보였다. 나는 의아하게 옆에 서 있는 지수를 곁눈질했다. 강아지? 지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
인도 경계턱을 사이에 두고, 이세정이 클랙슨을 울렸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배기음이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줄곧 신경이 가있던 중이었다. 창문 너머의 이세정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가 타고 있는 차를 재차 훑어보았다. 수집욕은 바이크에만 해당되는 건지 차는 접때 보았던 그 컨버터블이었다.
“우연치고 자주 만나네요.”
우연에 고의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일단 그렇게 뱉었다. 세상 간질간질하게 웃던 이세정이 갓길에 주차된 트럭을 피해 잠시 멀어졌다. 과시하듯 사납게 우는 차량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내가 다섯 보 앞에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은 직후였다. 이세정은 정류장 바로 앞에 차를 세우더니 또다시 클랙슨을 울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문자 텀이 점점 느려지기에 이제 안 만날 줄 알았더니 갑작스러운 대면이다. 아니, 마주친 건 마주친 거고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내가 가는 장소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고 행선지로 향하는 패턴도 대부분 비슷한 편이라서 얼추 유추가 가능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불쑥 찾아올 수 있을 만큼 일정한 생활방식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조수석에 앉아 가방을 옆으로 잡아당기고 안전벨트를 맸다. 차가 출발했다.
“퇴근하는 길이에요?”
항상 타고 다니는 바이크도, 언제나 따라다니는 장 비서님도 보이지 않아 물었다. 이세정은 대답 대신 손마디만 한 스낵 봉지를 건넸다. 뜯어보니까 아기자기한 젤리들이 들어있었다. 이 차에는 간식이 많나. 단 게 당기진 않았지만 준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한 개만 입에 넣었다. 젤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해해버리겠다는 듯이 꼭꼭 씹어 먹는 중에,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고록담이라고, 전에 오셨던 곳이요.”
왠지 이세정을 기사 취급하는 것 같은 뉘앙스라서 덧붙여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이세정은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설렁설렁 운전대를 움직이다가 문득 품을 뒤적거렸다. 담배 케이스를 하나 꺼냈는데, 디자인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피워도 돼요?”
물음에 생각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정은 신호에 걸린 틈에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자 불씨가 얼마간 타올랐다. 연기를 천천히 내뱉은 이세정은 창에 팔을 기댄 채로 느긋한 호흡을 지속했다. 미처 창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차내를 은근하게 적셨다. 간접흡연을 싫어하는 편인데, 이건 향이 좋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좀 기웃거렸더니 이세정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넸다. 턱 근처로 불쑥 들어온 담배를 내려다보다 입으로 물어서 받았다. 곧 불이 붙었다. 예상보다 독했으나 목 넘김이 좋았다. 향도 괜찮았다. 비싼 담배라 그런가. 나는 조수석 쪽 창을 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동안 차는 좁은 도로에서 벗어나 큰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속력을 낸 차량의 엔진울음이 도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제 슬슬 담뱃불을 끌까 생각이 들 때쯤, 보행자 정지 신호불이 켜진 횡단보도 근처에 웬 소동물이 보였다. 차들이 씽씽 지나다니는 도로 위에서 강아지는 어설프게 뛰고 있었다. 강아지가 향하는 방향이 인도 쪽이라, 지금 직진하고 있는 이 차와 잘하면 충돌하겠구나 싶었다. 멈추어 서거나 속도를 줄이라며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세정은 강아지가 보이지 않는지 무심한 얼굴로 핸들 위로 손가락을 까딱까딱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에 강아지…….”
내 말이 안 들리나. 이번에는 이세정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차 세워주세요!”
브레이크를 밟았는지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안전벨트와 이세정의 손에 막혀 불상사는 면했으나 심장만큼은 목 끝까지 뛰어대고 있었다. 마구 흔들리는 시야로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멈춘 차량 바로 근처에 강아지가 서 있었다. 잠깐 이쪽을 쳐다본 강아지가 다리를 절뚝이며 인도로 뛰어가 중년 여자의 품으로 덥석 안겨들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필터를 지그시 물고 있던 이세정이 담배를 버렸다.
“소리 질러서 놀랐어요.”
내가 왜 차를 세워달라고 했는지 모르는 건가 의구심이 들 만큼 태연한 목소리였다.
“아, 앞에 강아지 있어서……못 보셨어요?”
“귀 아프네.”
이세정에게서 짜증 비슷한 것이 잠시 올라왔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세정은 나를 한 번, 그리고 강아지를 품에 안은 여자의 모습을 한 번 쳐다보았다. 분명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눈치라서 나는 당혹스럽게 물었다.
“왜, 왜 안 멈추셨어요?”
이세정이 눈썹을 휙 올리고 나를 응시했다. 오래도록 한 곳에 고정되어 있던 눈동자는 서서히 옆으로 옮겨가서는 내 뺨과 코, 그리고 입술 따위를 훑었다. 아, 하는 탄식이 작게 들렸다. 이세정은 얼어붙어 있는 나를 녹이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놀라서요.”
뜨끔했던 가슴이 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죠.”
“그럴게요, 우채민 씨.”
차내를 음습하게 적셔놓았던 이상스러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는 이세정이 태연하게 까딱거리는 핸들 위 손가락을 바라보며 살짝 올라온 열을 식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로운 오후가 돌아왔다. 이세정은 이따금 알바 시급 같은 시답잖은 것에 대해 물어왔고, 나는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고록담에 도착했을 때는 일이 언제 끝나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는 시간을 가늠해보다가 대개 두 시쯤에 끝이 난다고 말했다. 사실 퇴근 시간을 물어봤으니 혹시 데리러 오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세정은 주말 내내 연락이 없었다.
주말은 어영부영 와서는 또 어영부영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밥 먹을 때 말고는 계속 방에만 있었다. 간단한 운동을 하기도, 과제를 깨작거리거나 시험공부에 미리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깊이 집중하진 못했다. 양원과 보이지 않는 손을 잡은 교수님이 자꾸 떠오른 탓이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젠 얼굴을 보기도 싫은데, 하필 지도 교수님이라서 교류 없이 지낼 수가 없었다. 그냥 휴학계를 써버릴까. 상황을 외면해봤자 나아지는 건 없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지만, 회피 말곤 적당한 방도도 생각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듯 어디선가 굉음이 들렸다. 오 분이나 지속된 날카로운 소리에 누나에게 일러바치듯 말했더니 옆집에서 공사 중이니 네가 이해하라는 허탈한 답이 돌아왔다. 왜 꼭 이런 때에. 어차피 공부도 안 되겠다, 펜을 집어 던지고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내가 눕자마자 들이닥친 누나는 내가 방금 전까지 열심히 공부에 임한 것은 까맣게 모르고 그렇게 할 일 없이 있을 거면 같이 대청소나 하자고 나를 방에서 끌어냈다. 차라리 도서관에서 빈둥거리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나는 이놈의 대청소는 어째서 주마다 돌아오는 것인가 한탄하며 누나 방에 있는 침대의 위치를 볕이 드는 쪽으로 옮겼다.
각종 집안일로 지쳐있는 나를 누나는 마지막이라며 싱크대로 데려갔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닦으면서 누나의 명령에 열심히 따랐다.
“아니, 제대로 헹궈야지. 야, 그릇 엎어놓으랬지.”
“응.”
“식칼 그따위로 닦을래?”
“미안.”
내 솜씨가 영 시원치 않았는지 누나가 혀를 찼다.
“채민아, 설거지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 너 요리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있어?”
“……아니.”
“그럼 세탁기 버튼 누를 줄 알아?”
“그건 알지. 삑 하고 삑 하면 삑 되잖아.”
고분고분 대답하면서 한편으로는 왜 누나가 뜬금없이 교육을 시키는지 어리둥절했다. 혹시 곧 결혼하느냐고 물었더니 누나가 입매를 비틀었다.
“나 이제 선보러 다니려고.”
“누나 당분간 결혼 생각 없다며.”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나 소연이 청첩장 받았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걔 분명 독신주의였거든? 개뿔이나 독신이야. 이제 내 친구들 중에서 결혼 안 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
누나의 말을 듣느라 그릇을 엎어두는 것을 잊어버렸다. 누나가 내 머리를 사정없이 갈겼다.
“말했지. 이러면 네 아내가 싫어할 거라고. 가정부 둘 정도로 부잣집에 장가갈 거 아니잖아. 아니, 네가 문제가 아니지. 내가 급하지, 내가.”
누나가 중얼거리며 멀어졌다. 가는 어깨엔 유난히 힘이 없었다.
결국 주말 동안 소처럼 일만 하느라 제대로 완성 시킨 과제가 없었다. 과제 마감일이 언제까지였더라. 날짜를 가늠해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공 수업 휴강 안내 문자를 뒤늦게 발견했다. 지수는 운도 좋다. 술병 걸려 못 오는 날이 전필 휴강이라니.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3.0에 턱걸이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그냥 집에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 몇 시까지 학과장실로 오라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부름이었다. 분명 휴강을 한다고 했으면서 웬 호출인지.
나는 제시간에 맞춰 학과장실에 도착했다. 학과장실 안에는 양형배와 양원이 있었다. 양형배는 할 말이 굉장히 많다는 듯이 나를 보자마자 눈부터 부라렸다. 어리둥절하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양형배든 양원이든 입만은 단단히 다물고 있어, 무슨 분위기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얼떨하게 서 있는 내게 교수님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어. 당장 세미나 준비다, 음악회 준비다, 겹치는 일이 많아서 레슨 시간도 빠듯할 때가 많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시간을 내주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지? 이해해줄 거라 믿는다.”
이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치고 나는 교수님의 말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요지를 파악하느라 바쁜 나를 두고, 교수님이 목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상호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다시 불러들였다.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불거져서 기분이 좋지가 않네.”
“…….”
“지도 교수를 선택한 건 너희들이야. 부조리를 외면 않고 바로잡을 권한을 내게 이임해준 거라고 봐도 되겠지? 내 선택에 대해 따로 뒷말 없기를 바란다.”
허리를 비틀어 노트북 화면을 켠 교수님은 전에 나와 지수가 보내주었던 음성과 메일 내역 파일을 차례로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교수님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탐탁지 않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의 말이 거듭 진행되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교수님이 증거를 들이밀며 말하기를, 내게 씌워진 누명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으니 위클리 점수를 분별 있게 재분배할 것이며, 공모로도 모자라 남에게 피해를 입힌 양형배와 양원은 학칙에 따라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더 큰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 조로 힘주었다.
거기까지 말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양형배나 양원의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정신없이 교수님의 목소리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내 처리 방식에 대해 부디 이견이 없었으면 한다. 양심적으로.”
교수님이 단호하게 끝맺음을 했다. 며칠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태도는 신기하다 못해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학과장실을 나가자마자 양형배에게 붙잡혔다. 양형배는 으레 그랬던 것처럼 내 팔을 붙잡고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 잡힌 팔이 욱신거렸다.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양형배의 얼굴을 살피며 뒷걸음질을 쳤다. 양형배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내 양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야. 너 씨발, 뭐야. 너, 너……. 네가, 너…….”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한 양형배가 소리를 빽 질렀다.
“씨발, 좆같은 새끼야!”
몸이 움츠러들었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마음 같아선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양형배에게 팔이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를 대신해서, 뒤에 서 있던 양원이 쉿, 쉿 하며 양형배에게 주의를 주었다. 양형배는 목소리만 낮췄을 뿐이지 여전히 사나운 말투로 나를 추궁했다.
“뭐냐고! 뭐냐, 이게! 이게 뭐야! 네가 그랬냐? 무슨 힘으로?”
“방금 교수님 말씀 말이에요?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뭘 시치미야, 씨발 새끼야. 하루아침에 우리 엄마 학원이 부도나고, 양 원은 써스에서 쫓겨났어. 양 원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파면됐고. 이게 우연처럼 보이냐? 네 짓이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럴 리가 없잖아!”
양형배가 어찌나 빠르게 말을 하던지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고 넘겼다. 나는 문맥을 더듬어보며 대충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어 났거니 짐작했다.
“괜찮으세요?”
“씨, 씨발. 지금 괜찮다고 물었냐? 존나 어이없네. 엄마 우는 거 보고 나왔다. 네가 사람 새끼냐? 화 좀 난다고 가족을 건드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전 그런 짓 한 적 없어요. 애초에 제게 그럴 힘이 어디 있어요, 형.”
내 말이 옳다 싶었는지 양형배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 그야 그렇지. 근데 이 새낀, 눈깔 똑바로 뜨고.”
다급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양형배가 더욱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반항하냐?”
“쳐다보지 말라고 해서 안 쳐다본 건데…….”
“이 개새끼 봐라?”
양형배가 손을 휙 들어 올렸다. 폭력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기울였다. 뒤에 서 있던 누군가의 몸에 뒤통수가 부딪혔다. 울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애꿎은 애한테 화풀이하지 마, 찌질아.”
대번에 돌아보았다가 배도빈과 눈이 마주쳤다. 배도빈은 그대로 나를 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저 나를 구해주려는 목적이었는지, 배도빈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먼저 입술을 떼지 않았다. 아무튼 내게는 기회였다. 사방이 조용해진 틈을 타 이 갑작스러운 일련의 상황들에 혹시 타인의 개입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니, 없을 수가 없었다. 교수님의 바뀐 태도가 개연성 없이 너무 억지스러웠다. 더군다나 한날한시에 양형배와 양원의 가족들이 죄다 안 좋은 일을 겪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압력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밖에는 없는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겠다며 씩씩대다가 신나게 헌팅을 하러 간 지수는 그럴 힘이 없을 테니 제외하고, 누가 있더라. 도움을 주려면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아.”
나는 옆에서 걷고 있는 배도빈을 쳐다보았다.
“이거, 혹시 형이 도와주신 겁니까?”
“아, 뭐.”
배도빈은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물어보면서도 믿기지 않아 반신반의했기에, 들려오는 대답에 입술이 벌어졌다.
“어떻게…… 아, 아니, 왜요?”
“고맙다고 절이나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