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농담 (1)-2화 (3/15)

“감사합니다.”

이렇게 담백하게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질문을 골랐다.

“왜 절 도와주신 건데요?”

“내가 도와준 건 아니고.”

“……아깐 형이 도와주셨다고.”

“그렇게 매듭지으려 했는데…….”

권태롭게 머리를 매만지는가 싶던 배도빈이 별안간 나를 노려보았다. 벼락같은 눈초리라 움찔 떨었다.

“이세정이랑 놀지 말라니까 내 말 뭐로 들었냐.”

이세정의 이름이 갑자기 왜 튀어나오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돈 많은 애가 잘해주니까 좋냐?”

“아니…….”

“형도 세정이랑 많이 친하거든. 그런데도 전에 손 한 번 잡았다고 존나 맞았어요. 씨발, 개새끼.”

배도빈은 당시 기억을 되짚어보듯 미간을 좁혔다. 눈엔 짜증이 가득한데 입만은 웃고 있어서 의아스러웠다. 배도빈은 이세정의 이름이 왜 대화에 등장한 건지 설명해주었다.

“너 학점 되돌려준 거, 내가 아니라 세정이.”

“…….”

“설마 나한테 며칠 만에 여러 집안 말아먹을 힘이 있다고 생각했냐.”

“…아.”

“며칠은 힘들고, 반 년쯤은 필요할걸.”

나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의도와 목적을 찾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배도빈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세정은 더욱이나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이세정과 나 사이에는 그다지 큰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저 손 몇 번 잡고, 문자 몇 번 주고받은 것이 다였다. 아, 지난번 그 앞에서 울었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나. 강아지 때문에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면 생각보다 섬세한 사람 같은데.

뭔가 복잡해졌다. 고맙기는 고마웠고, 사실 괜한 개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양형배와 양원의 가족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쌤통이라, 혹시 나중에라도 이 일을 홀로 곱씹다 고소해할지도 몰랐다. 문제는 내가 이세정과 관계를 이어갈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느냐는 거였다.

“멍청하게 있지 말고 말 좀 해라.”

배도빈의 짜증 섞인 말에 고개를 번뜩 쳐들었다. 가늘게 좁힌 눈이 잠시 나를 훑었다. 배도빈은 내 뺨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하여간 덜떨어지게 생겨가지고.”

전에는 여자 스무 명 어쩌고 하더니 무슨.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문질렀다.

***

서빙하는 간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고민하고 있었다. 이세정에게 어떤 식으로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빈 맥주잔을 스테인리스 선반 위에 올려두고 밀대를 빨러 갔다. 검은 물이 죽죽 흘러나오는 걸레를 보면서, 이번에는 언제쯤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보았다. 일단 문자 하나 넣어볼까. 타이밍이 기막히게도 때마침 연락이 왔다. 휴대폰에 이세정의 이름이 뜨자마자 자루를 벽에 세워두고 화면을 당겼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상대방에게 고개까지 까딱 움직이며 인사했는데, 우연히 내 앞을 지나가던 지수가 능글맞게 받아주었다. 지수에게서 등을 돌려 가까운 창고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좀 시끄럽죠.”

-끝나고 이리 나올래요?

“어딜…… 밖에 계세요?”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요.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밖에 있는 건가. 그대로 전화가 끊겼으니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창고에서 나와 고록담 안으로 들어갔다. 조잡한 음악 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곧장 창가로 직진하려는 나를 사장님이 잡아챘다.

“이거 서빙. 6번.”

맥주 두 잔을 창가 테이블로 운반했다. 그러고서 창문 너머를 살폈다. 멀리, 전봇대 근처에 검은 바이크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 단연 눈에 띄는 남자가 말뚝이 박혀있는 표지판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왜인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마감까지 십오 분이나 남아있었다.

마지막 테이블을 깨끗이 정리한 뒤 알바생 몇몇과 함께 먼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 시는 대중교통의 운행이 중단되는 시간이었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 말고는 모두 사장님의 차를 기다려야 했다. 다들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어대는 동안, 나는 손을 마주 비비며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그러다 따뜻한 손길에 놀라 지수를 돌아보았다. 지수는 찬물에 손걸레를 빠느라 땡땡 얼어붙은 내 손을 잠시 동안 조몰락거렸다.

“따뜻한 물 나오는데 왜 찬물로 했냐.”

“급해서.”

“온수 기다릴 시간도 부족했냐?”

나는 지수의 손을 뿌리치며 전봇대 근처를 살폈다. 검은 오토바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그다지 늦게 나온 것 같지 않은데, 설마 십오 분 사이에 마음이 바뀐 걸까. 내심 실망하던 차에 반대편에서 웬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낯이 익은 것도 같았다. 나는 지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 먼저 간다.”

“택시 타고 가려고? 왜?”

“아니, 저 차 타고.”

“저 차가 뭔데.”

마지막 말에 대꾸 없이 등을 돌렸더니, 지수가 뒤에서 ‘야, 모르는 사람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니다!’라고 외쳤다. 덕분에 집중된 이목에 힘입어 더욱 빠르게 달려야 했다. 문을 열어준 서 기사님에게 고개를 숙이고 뒷좌석에 올랐다. 차내의 따뜻한 기운이 몰아쳐 차가운 몸을 덥혔다. 손등을 쓰다듬으며 옆에 있는 이세정을 보자, 그가 어쩐지 침울한 낯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아무나, 손잡고.”

뒷말을 기다렸으나 말을 더 이어가지 않았다. 다만 이세정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선 내게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원래 뒷좌석에 앉을 땐 잘 안 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누가 이렇게 챙겨준 것이 처음이라서 좀 민망했다. 안전벨트를 덥석 쥔 손가락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따뜻한 공기를 마시며 얼마간 앉아있다 보니 전봇대 앞에 세워져 있던 바이크가 떠올랐다. 미간을 좁힌 채 차 뒤를 힐끗거렸다. 그러다 원 자세로 돌아오면서 마주친 눈에 괜히 뜨끔하여, 변명 조로 말했다.

“아까 일하면서 창문으로 봤는데…… 바이크는 어디 있습니까?”

“장 비서님 편으로 보냈어요.”

“아, 오셨었구나. 그런데 안 불편하세요? 차랑 바이크, 둘 다 가지고 다니기 번거로울 텐데.”

“안 불편해요.”

딱 잘라 말한 터라 뜻하지 않게 정적을 맞았다. 더 이어갈 대화가 생각나지 않아서 나는 창밖을 살피는 척 고개를 돌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따위를 확인했다. 눈은 그들을 훑고 있지만 실은 온 신경이 이세정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눈치를 봐가며 쳐다볼 만도 한데 이세정은 그런 소모적인 행동도 없이 대놓고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무슨 음악 들으세요?”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을 만한 질문을 던지곤 기억을 더듬었다. 이세정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작년에 학교 졸업연주회에서 마주쳤다고 했다. 작곡과 졸업연주회는 학부생 가족들만의 축제였다. 웬만한 학생들은 절대 오지 않을 장소여서 마땅히 이세정도 음악을 좋아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이세정의 대꾸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류의 말이었다.

“소음으로 들려서.”

“아.”

소음 공해도 음악이 되곤 하는 세계다. 음악가들은 괴짜인 척 소음을 만들고, 사람들은 권위자의 흉내를 내며 소음을 찬미한다. 만약 그런 류의 음악이 상류인 거라면 나는 좋은 리스너가 되기란 그른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 음악에 한정 지어 한 발언은 아닐 테지만 이해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정이 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싶으면 들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연관하여 질문하려던 말들이 들어가고, 나는 다른 화제를 찾아 머리를 굴려야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마음으로 나를 도왔던 건지 심중을 들여다볼 셈이었는데 도통 생각나는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문득 아까 그 바이크가 떠올랐다. 지금껏 바이크에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 없으면서 궁금한 척 바이크의 종류에 대해 물었다. 이세정은 의외로 성의 있게 답해주었다.

“회사 브랜드는 아니고 클래식인데, 폐차 직전의 기존 타사 제품을 수입해 와서 튜닝을 했어요. 새 제품에 튜닝하면 기분이 안 나거든요. 근래 안 쓰는 디젤이 엔진으로 있어서 먼저 바꾸고, 프런트 포트 갈고, 마모선 지난 타이어는 온로드 용으로 바꾸고, 도색하고.”

권태로운 말투로 타이어가 몇 인치인지, 8 스포크 휠은 이 바이크에 적합한지, 프런트 브레이크에 적용된 레디얼 마운트 캘리퍼는 몇 포트인지, 그 고정 방향이 어디로 되어있는지, 뭔가를 계속 설명해주었다.

“아…….”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제트엔진으로 튜닝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그래도 돼요?”

“아마 안 될걸요. 독일에서 시도했다가 당국 경고받고 무산된 적이 있는데, 여긴 땅이 더 좁으니까.”

그러니까 몰래 법을 어겨보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건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어이없이 웃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세정이 문득 물었다.

“바이크 더 보여줄까요?”

“예?”

“지금은 늦었고, 내일 시간 있어요?”

내일 시간이 있느냐는 말은 원래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할 제안이었다. 입을 뻐끔거리며 고민하는 중에 느닷없이 룸미러로 서 기사님과 눈이 맞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서 기사님이 흐뭇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채민 씨.”

“아, 네. 저기, 내일 만나는 건 정말 좋은데요. 그, 듣기로 절 도와주셨다고…….”

이세정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도빈이가 말했어요?”

“예.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 제가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

섣부르게 뱉어놓고 생각해보니 만족스러운 식사 자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세정은 1인분에 7,000원씩 하는 고깃집 같은 곳에는 안 갈 테니까 돈을 아주 많이 써야 할 텐데, 지금 내 재정 상태로는 이세정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장소에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쩨쩨하게 돈을 안 쓰기도 뭐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걱정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럼 우리 집 올래요?”

“예?”

“모터바이크 구경시켜줄게요.”

“식사는요?”

“직접 만들어줘요. 보조 한 명 붙여줄게요.”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끔뻑거렸다. 보조 요리사를 지원 받기로는 또 처음이었다.

***

이세정과의 만남을 앞두고 기이한 하루를 보냈다. 냉탕과 온탕 사이를 전전하듯 마주칠 때마다 시비를 걸어대는 양형배와 반대로 호의적인 관심을 보이는 교수님,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줄곧 도망쳐다녔다. 겨우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함경윤이 다가와선 음료수를 사주었는데, 그것을 목격한 지수는 마치 양형배에게 빙의라도 한 듯이 내게 시비를 걸었다.

지수가 질투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좀 했으면 하는 마음에, 며칠 전에 헌팅을 하러 나갔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함경윤 앞에서 슬쩍 흘려도 되느냐고 물었다. 당연하게도 싸움이 났다. 나는 지수의 짜증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약속 시간에 다다라서 역 근처로 나왔다. 곧 검은 차 한 대가 바로 앞에 섰다. 익숙하게 올라앉으며 서 기사님에게 인사했다. 서 기사님은 말이 없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나도 부담스러웠기에, 이렇게 무시하는 편이 낫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내가 이세정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던 것 같은데,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았을까.

휴대폰으로 미리 봐둔 레시피를 확인했다. 지금 다시 보니까 영 아닌 것 같다. 망치지 않고 레시피 그대로 요리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요리가 전혀 없었다. 누나 저녁상이야 누나가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누나가 만들어놓은 반찬을 꺼내고, 물을 따뜻하게 끓여 식탁에 가지런히 차려두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누나 없이 밥을 먹어야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컵라면 물을 끓일 텐데 이세정에게 라면을 대접할 순 없었다. 급하게 다른 쉬운 레시피를 검색해보았다. 이세정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간다면 편할 텐데. 나는 이세정이 바이크를 좋아한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런저런 걱정에 휩싸여있는 사이, 차는 거침없이 질주해 어느 순간 멈추어 섰다. 꽤 오래 타고 있었던 것 같아 다 왔나 하고 창문 밖을 살폈다.

유리창이 코끝을 스치며 열렸다. 웬 아저씨가 허리를 숙여 내 쪽을 들여다보았다. 경계하는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이었다. 신분증 검사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대로 창이 닫히며, 다시 차가 출발했다. 차는 우람한 대문을 통과하고도 조금 더 달렸다. 좁은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땅을 갖는 것이 과연 말이 될까. 비록 강남 일대와는 떨어져 있었지만, 부지가 넓어서 돈이 제법 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차에서 내려 바라본 고급 주택은 혼자 산다기엔 유독 넓어 꼭 회장님의 집처럼 보였다. 설마 회장님이랑 사모님도 같이 사는 집에 온 건가. 페이스 코트의 본사는 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내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인터넷 창에 들어가기도 전에 서 기사님의 눈짓에 이끌려 우선 뒤를 따라야 했다.

중간에 아주머니 한 분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와서는 서 기사님에게 귓속말을 했다. 서 기사님이 ‘아닙니다.’라고 간단히 대꾸하자, 아주머니는 나를 못 미더운 듯 흘겨보곤 휙 지나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본댁 사모님이신가 조심히 물어봤더니, 서 기사님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시죠.”

뒤따라 도착한 곳은 집 안이 아닌, 그와 조금 떨어져 있는 소형 건물 앞이었다. 작긴 해도 주택만큼이나 공을 들여 설계한 모양인지 근처에 지하로 가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어서 타지는 못하고 그냥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의 문이 열리고 이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와요.”

턱 짓을 하며 옆으로 비켜선다. 문 앞에는 지하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애초에 지하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데다가 곳곳에 고급 조명들이 번쩍번쩍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시선이라곤 이세정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사방의 눈치를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완전히 내려온 지하에는 부품이며 장비들이며 하는 것들이 널려져 있었다. 가장자리에 분해된 바이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꼭 바이크 정비소를 연상케 했다. 그러고 보면 이세정이 입고 있는 하얀 셔츠에 거뭇거뭇한 기름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반쯤 걷어붙인 손목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직접 정비하십니까?”

“그냥 취미 삼아 해요. 귀찮으면 맡기고, 하고 싶으면 하고.”

이세정의 팔 부근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취미 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팔에 상처가 그득했다. 아니, 바이크 선수였다고 했으니 당시 입은 부상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작위적이지만.

“잠깐 씻고 와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이세정과 나란히 정비소를 빠져나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세정은 편하게 있으라며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대체 어디에 앉아있어야 할지 몰라 한 걸음만으로 주변을 왔다 갔다 거렸다. 가구가 간소하다 못해 아예 없어서 도무지 않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흔한 소파도 없었고, 작은 의자도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었다. 호텔 로비도 이보단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정자세로 서 있는데, 불쑥 아까 서 기사님에게 귓속말을 했던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내가 여기에 서 있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밀고 있는 휠체어 위 여자에게 빠르게 무어라 속삭인다. 덩달아 놀란 여자는 내 쪽을 기웃거리다가 어설프게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정말 사모님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일부러 소리 내어 인사를 건넸다. 눈을 지그시 감은 이세정의 어머니가 물었다.

“세정이 손님이신가요?”

“예, 신세 진 게 있어서 갚으러 왔습니다.”

“……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머니가 난처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의는 아니었을 거예요.”

나를 도와준 게 고의가 아니라면 좀 곤란한데.

“심성은 착한 아이예요.”

“사모님, 인사 나눴으니 이제 갑시다. 막내 도련님이 별로 안 좋아하실 겁니다.”

아주머니는 또 나를 쏘아보더니 어머니를 데리고 사라졌다. 초면에 미움받는 건 익숙했다. 첫인상이 차갑단 말을 꽤 많이 듣는 편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어색하더라도 미소를 지어 인사할 것을 그랬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이젠 소용도 없는 웃는 연습을 하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코트의 본사가 어디에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외국에 있었다. 또 검색창을 열어 ‘페이스 코트 회장 부인 사ㄱ…’까지 썼는데, 왜인지 더는 쓸 수 없었다. 여기엔 나밖에 없지만 뭔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인터넷을 꺼버렸다.

잠시 후 이세정이 젖은 머리로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중간에 서서 바이크를 보여주겠다며 손짓했다.

2층은 아래층과 달리 무언가 빼곡했다. 유리막으로 보호된 바이크가 있는가 하면, 거치대 하나 없이 세워진 바이크도 있었다. 종류가 다양했고, 그 수도 대단히 많았다. 관리까지 잘 되어있어서 바이크 박물관처럼 보였다. 내가 하나하나 감탄하며 걷자, 이세정은 좀 신이 났는지 이 바이크는 뭐고 저 바이크에는 어떤 튜닝을 했는지 짧게 설명해주었다. 전문 용어를 써놓고는 말로 길게 풀어주지 않아서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아. 지나는 길이 좁아 실수로 바이크 하나를 쳐버렸다. 흔들거리는 하얀 바이크를 손으로 잡아 세운 이세정이 시트를 매만졌다.

“여기 상처 있거든요. 기스 나는 편이 예쁠 때도 있어서 그냥 뒀는데, 어때요?”

“……아, 네.”

그다지 예쁜 줄은 모르겠으나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심하게 눈이 마주친 순간 이세정이 눈을 접어 웃었다. 뭔가 안을 움켜쥔 것처럼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딘지 예민한 면이 있어서 환하게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했었다. 이세정은 차체가 잘 빠진 검은 바이크 앞에 멈춰 서더니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우채민 씨한테 어울려요. 한 번 타볼래요?”

“여기에서요?”

“그냥 앉아만 봐요.”

나는 놀이기구도 못 타는 편이었다. 바이크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머뭇거리다가 한 번 올라앉기만 해보자며 다리를 뻗었다. 그런데 막상 시트 위에 다리 하나를 올려놓으니까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바이크는 철제 받침대로 바퀴가 고정된 채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었다. 높은 시트에 오르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키만은 큰 편이라고 자부하던 것들이 이 바이크 앞에선 다 무용지물이었다.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이세정이 다가와 내 허리를 조심히 안았다.

“어깨 안아요.”

나는 이세정의 어깨를 더듬었다.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할까 가늠해보았다. 결국 어색하게 목을 끌어안았다. 은은하게 돌던 샴푸 냄새가 가까워졌다. 무슨 샴푸일까. 숨 막히는 향이었다.

“이제 놓지?”

이세정의 말에 깜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이세정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무안함에 얼른 고개를 돌려 바이크 핸들을 잡았다. 클러치 레버를 당겨보기도 하고, 발로 발판을 더듬거려보기도 했다. 재밌어 죽겠다는 연기는 못 하겠어서 신기하다는 듯 여러 곳을 만져보다가 뛰어내렸다. 이세정은 내가 앉은 탓에 흐트러진 바이크를 원래대로 고정시켜 놓았다. 그러고는 또 다른 것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안쪽으로 끌고 갔다. 지겹도록 많은 바이크를 구경하다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이렇게 바이크가 많은데 잠은 어디서 자요?”

“방 구경시켜줄까요?”

안쪽으로 들어가야 침실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바와 달리, 이세정의 방은 계단 근처에 있었다. 문은 아예 없었고,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으며 그 외에는 아래층처럼 달리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나는 방을 한 번 훑어보곤 금방 몸을 틀었다.

“그런데 뭐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방 구경도 끝났고, 이제 뭘 해야 하나 싶은 와중에 문득 이세정이 물어왔다. 내가 뭘 해준다고 했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입을 벌렸다.

“맞다.”

이세정의 안내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는 라면, 그리고 방금 떠올랐는데 샌드위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두 요리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걱정 더미에 쌓인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웬 요리사 한 분이 내 조수를 자처하고 있었다.

조수랍시고 이세정이 붙여준 남자는 어딘가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이세정의 눈치를 심하게 살피는 모습 하며, 내게 과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모습 하며 어디 하나 자연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남자의 눈동자에 서린 불편함이 내게 옮겨가, 도리어 내가 남자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남자는 수첩에 정리해둔 비밀 레시피를 건넸다. 칼 대신 종이라니, 왜 주는지도 모르고 받아들어 첫 번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먼저 빵에 칼집을 내 한 번 구워준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듯한 빵 칼을 쥔 남자가 둥그런 빵을 쓱쓱 잘랐다. 그러고는 다음 문장을 읽으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당황해서 내가 하겠다고 했더니 남자는 이런 시답잖은 것은 조수에게 맡겨두라고 대꾸해왔다. 이와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고 나서야 남자가 내게 요리를 맡길 생각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가짓수가 제법 되는 음식들이 완성될 때까지도 나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못했다. 당연히도 만들어진 요리에는 내 지분이 일절 없었다. 돈도, 노동도 그 어떤 것도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내 쪽에서 공짜로 귀한 인력을 부려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는 길에, 식재료를 살 필요가 없다는 서 기사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끝끝내 마트에 들르는 거였다.

“다음에는 제가 살게요.”

주방과 이어진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면서 이세정이 말했다. 우스운 소리였다. 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나는 민망한 얼굴로 이세정의 반대편에 앉았다. 남자가 컵을 엎어두며 반주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더니 테이블을 한 번 둘러보곤 주방으로 나갔다. 방금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식탁 위에 예쁘게 차려진 저녁을 눈으로 훑었다. 다른 식구가 모이기를 기다리며 물 한 잔을 마셨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이세정의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원래 어머님과는 같이 안 드세요?”

빈 접시를 쳐다보고 있던 이세정이 시선을 올렸다.

“만났어요?”

“예, 아까 샤워하러 올라가셨을 때 잠깐 뵀습니다.”

이세정이 너무 빤하게 쳐다봐 뜬금없이도 지금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뺨을 손으로 더듬어 뾰루지라도 났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만약 있다면 심하게 부끄러울 것 같다. 저렇게 꼼꼼하게 뜯어보는 시선으로는 숨기고 있는 무엇 하나 잡아내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으니까.

“먼저 먹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이세정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불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와달라고 명령하자 남자가 눈알이 빠질까 염려될 정도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나를 쏘아보는데, 겨우 몇 시간 머물다 가는 객 주제에 괜한 부탁을 한다는 시선이었다.

“우채민 씨, 옆으로 와요.”

“예?”

옆으로. 이세정이 고갯짓했다. 쭈뼛대며 이세정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옆이라고 해봤자 서로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멀었다. 곧 어딘가에 다녀온 남자가 내 자리를 새로 세팅해 주곤,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에 놓인 식기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자 대신 손가락 마디를 이용해 거리를 재고, 각 맞춰서 정렬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난스러워 보였지만, 아까 마주친 이세정의 어머니를 생각하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아…….”

어설프게 흘러나온 감탄사를 집어넣고 인상을 썼다. 뒤늦게서야 내 잘못을 깨달았다. 이세정에게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을 그랬다. 여기서는 먼저 먹는 게 예의가 아닌 것이 아니라, 같이 먹자고 제안하는 게 예의가 아닐 수 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자책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문득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정이 느긋한 걸음으로 식탁 모서리를 돌아갔다. 이세정은 반대편 의자 등받이를 붙잡아 옆으로 쭉 끌어당겼다. 내 발에 차이고, 남자의 발에 치여 비뚤어진 의자가 원상태로 정돈되었다.

한참 후 모습을 드러낸 이세정의 어머니는 여전히 휠체어 위에 앉아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었다는 거였는데,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라 나는 인사를 하고자 벌떡 일어난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머니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휠체어 위에서 내려와 신중한 발걸음으로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리가 불편한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내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일어났기는 일어났는데 인사하며 앉을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눈치만 살피다 어영부영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가 들리자, 어머니가 내 쪽을 보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제야 나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허리를 꼿꼿이 들며 내 이름을 물었다.

“우채민입니다.”

“고마워요, 채민 씨.”

나를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기분이 좋은 건지 어머니의 얼굴이 환했다. 싫은 티를 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눈치가 보이기는 여전했다. 앞에 놓인 접시 끝을 잡았다가 놓은 어머니가 잠깐 멈칫했다. 다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초점이 어긋나있었다.

“제가 눈병에 걸려서 부득이하게 안대를 착용했는데, 양해해 주세요.”

네, 라고 말했다가 옆에서 헛웃음이 들려 무안해졌다. 설마 비웃음인가. 정말로 제 어머니의 말을 비웃은 거라면 이세정에게 크게 실망할 것 같다. 무엇이 그리 겁이 났는지 이세정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불편한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맞은편 부인을 힐끗거리며 음식을 씹는 둥 마는 둥 했다. 이세정의 어머니는 간혹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커질 때마다 식기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잔이 비면 보틀을 기울여 정확히 반 잔을 따르고, 포크를 들어 가재의 살을 발랐다. 접시 옆 소스를 찍는 것은 정확했고, 따로 가져다 달라고 한 밥을 떠먹는 것 또한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어머니가 그랬다. 내 친구들과 같이 식사하고 싶어 했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화면을 굳이 응시했다. 가끔은 영화를 보러 갔다. 일부러 쇼핑도 즐겼으며, 레스토랑에 가면 꼭 경관 좋은 곳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그랬는데 이세정의 어머니는 누굴 위해서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 걸까. 더 먹었다간 남의 집 식탁에서 불경하게 체할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잔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둥근 잔에 부딪혀 요동치고 있는 술을 바라보던 눈길이 서서히 제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노려보는 건지 그냥 바라보는 건지 시선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거울을 볼 때면 짙은 혐오감이 서리곤 한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계속 나이므로 나는 나를 혐오하는 것이다. 결코 거둘 수 없는 과거의 파편을 직시하듯 이세정의 음울한 눈에도 저릿한 무언가가 숨어있었다. 정제되어 있지 않아서 더 사실적인 다정함 혹은 혐오 같은 것들.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세정의 눈썹이 느릿느릿 올라가고, 곧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번졌다. 이세정은 하얀 천으로 내 입가를 닦아주며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렸다. 뺨을 두드리며 마음까지 두드린 것은 정말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당혹스럽게 시선을 거둬들였다. 심장이 뜀박질하고 있었다.

***

오랜만에 다시 들어가 보는 블로그였다. 검색창에 페이스 코트 이세정이라고 치면 가장 상단에 뜨는 블로그.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정보를 가진 공간이 마땅히 없어 결국 돌아 돌아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인터넷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회사에 관한 사적인 정보가 없었다. 기껏해야 후계자가 누구이며, 현재 주가가 어떻게 되는지 등의 지금 나에겐 영 쓸모없는 질문 글들뿐이었다.

기업 차원에서 언론사를 통제한 건가. 뉴스에서 본 이세정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단단하고 폐쇄적인 벽을 뚫고 그를 소개한 언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보는 블로그 글은 전과 달리 눈에 띄는 점이 곳곳에 있었다. 그늘진 스탠드에 앉아 콜라를 마시는 사진, 레이싱 슈트를 입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는 사진, 여러 명의 선수들과 레이싱 대결을 하는 영상. 설명글은 대충 넘겼고, 얼굴이 선명하게 나오는 사진이 나올 때면 얼마간 멈춰서 지겹도록 보았다. 대략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과거의 이세정의 얼굴 위로 어제의 이세정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햇볕 때문인지 이때는 인상이 더 사나웠다.

“뭐 보냐?”

책상에 짐을 내려놓은 지수가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뚱한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존나 진지하게 보고 있길래 과제 하나 했더니, 남자?”

남자. 남자는 맞는데. 나는 이세정의 얼굴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사진을 눌렀다. 사진이 화면을 가득 메우자, 지수 쪽으로 화면을 기울였다.

“잘생겼냐?”

“뭐?”

“네 눈에도 잘생겨 보이나 하고.”

지수가 화면을 힐끔 보곤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얘가 잘생긴 게 뭐.”

휴대폰을 가져와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지 꽤 오랜 날이 지났다. 그래서 누구와 비교할 수가 없는데, 말하자면 선 고운 미남 같았다. 달리 각지지 않고 유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다운 구색은 갖추고 있었다. 어렸을 땐 되게 예쁘고 귀여웠을 것 같은 외모였다. 물론 잘생긴 것뿐만이 장점은 아니었다. 키도 크고, 선수 생활을 해서인지 옷 태가 좋았다. 게다가 재벌이었다. 이따금 예민하고 싸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 미성숙한 다정함으로 포장하니 성격 또한 그럴듯해 보였다.

“잘생겼다.”

“뭐냐. 작작해라.”

짜증을 낸 지수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뭐.”

“네가 누구 얼굴 보고 그러는 거 처음이라. 빨리 말해. 난 어떻게 생겼냐?”

“넌 그냥 생겼어.”

“고맙다, 개새끼야.”

지수를 살짝 밀어내곤 펜을 두 개 꺼냈다. 하나는 지수 주고, 하나는 내 앞에 두었다. 지수가 자신은 신세대라서 허접하게 손으로 메모하지 않는다며 펜을 돌려주었다. 책상 위를 구르는 펜을 내려다보며, 교수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교가 들어와선 교수님의 자리에 음료수를 두고 나갔다.

“야.”

지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너 어제 어디 갔었냐?”

“뭘.”

“나랑 술 마시자니까 갈 데 있다고 갔잖아.”

“네가 삐졌잖아.”

“안 삐졌, 하 참. 이 새끼 날 쫌생이로 보네?”

지수는 지난번 알바 끝나고 타고 간 그 의문의 차는 뭐며, 어제 네가 역 앞에서 어떤 검은 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본 애가 있는데 그건 또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을 해댔다. 누가 목격한 건지는 몰라도 괴소문을 만들어놨네. 나는 휴대폰을 켜서 아까 보여준 것과 똑같은 사진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 집에 놀러 갔었어.”

“뭐야. 너 아는 사람이었어? 얘가 누군데?”

“이세정이네.”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고개가 올라갔다. 배도빈과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도, 지수가 먼저 반응했다.

“신입생이랑도 같이 듣고, 3학년이랑도 같이 듣고, 아주 가지가지 하시네요?”

“도강하러 왔는데.”

마뜩잖은 표정을 지은 지수의 반대편, 그러니까 내 옆에 거칠게 앉은 배도빈이 내 손목을 단단히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들고 있던 휴대폰까지도 같이 배도빈 쪽으로 향했다. 사진을 자세히 확인한 배도빈이 연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세정이네, 이세정.”

배도빈은 어딘가 맛이 가 있었다. 눈에는 분명 초점이 있는데, 들떠있는 목소리 하며 흐트러진 머리카락 하며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죄송한데, 혹시 술 드시고 오셨습니까?”

“티 나?”

“좀…….”

사실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티가 났다. 술 냄새도 났고, 목덜미도 붉었다. 근처에서 병나발이라도 불고 왔나. 가볍게 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이렇게 자정의 지하철에서 주정을 부리는 사람들 마냥 술에 푹 절어있는 모습에 기가 찼다. 신입생 시절 억지로 불려 간 술자리를 새벽까지 지키다 오전 강의를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정신을 차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나와 달리 배도빈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가방에서 물을 꺼내 배도빈에게 건넸다. 배도빈은 반쯤 남아있는 물을 단숨에 비워내고 물통을 집어 던졌다. 빈 통을 간신히 잡아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옆에서 지수가 진상이라며 중얼거렸다.

배도빈은 물을 너무 급하게 마셔서 도리어 속이 안 좋다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식겁할 만한 말을 중얼대며 홀로 끙끙 앓았다. 종래에는 머리를 푹 숙여 책상에 이마를 붙였다. 마침 늦어서 미안하다며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누가 무엇을 하던 일절 신경을 쓰지 않는 교수님이었지만, 배도빈에게 끝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지금으로서는 배도빈이 얌전히 누워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역시나 배도빈은 내 바람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벌떡 고개를 들었다.

“너 이세정 집 갔었냐?”

“……예.”

“가서 뭐 했어?”

“같이 저녁도 먹고, 바이크도 구경하고, 어머님한테 인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어머님? 배도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동공이 풀리더니, 이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배도빈이 내 한쪽 어깨에 뺨을 기댔다. 거기까지는 견딜 만했는데, 갑자기 내 목 주변을 입술로 짓뭉개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배도빈의 팔을 손으로 꾹 잡아 입술을 밀어냈다.

“너 존나 부드럽다. 우와, 다시 와봐.”

생각했던 것보다 심하게 취했구나. 벌써 교수님과 몇 번이고 눈이 마주친 참이었다. 배도빈을 완전히 밀어내려고 애썼다.

“걔 이상한 결벽증 있잖아.”

지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며, 배도빈의 말에 뚱하게 대꾸했다.

“결벽증이요?”

“이세정 말이야. 누가 만지는 거 진짜 싫어해. 손 한 번 잡았다가 존나 맞았다고 내가 얘기했나? 몇 년 만에 본 사람을 어떻게 때릴 수가 있지? 걔는 진짜 애기 때부터 너무 한결같아. 내가 더럽나 봐. 너도 내가 더럽냐? 응?”

동아리 때 만났다면서 웬 아기. 대꾸해봤자 완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머리를 밀어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배도빈이 왜 자신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는 거냐며 찡찡거렸다.

“저, 저도 누가 만지는 거 좀 싫어지려 하는데요.”

배도빈을 힘을 주어 떨쳐냈다. 가만두면 혹시 또 이상한 짓을 할까 봐 배도빈의 팔을 책상 위에 올려 구부린 뒤, 뒤통수를 눌렀다. 배도빈은 내가 잡아준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당장은 얌전한 척을 해도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몰라 지수에게 바짝 붙었다. 지수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한숨을 돌리곤 배도빈에게 희롱당한 목을 문질렀다.

겨우 강의에 집중하려니까 이번에는 배도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새롭게 괴롭혀댔다. 결벽증? 일반적인 결벽증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무슨 결벽증? 가끔 병적으로 스킨십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과인가.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지금껏 만져댔으니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우리 개새끼 시집은 어떻게 가냐며 한탄하는 등,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배도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강의에 집중했다.

***

신혼부부가 입주한 지 오늘로 2주째였다. 근래에 느끼는 건데 아마도 성가신 이웃이 들어온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빌라 앞에 택배 차량이 섰다. 각 분야의 업자들이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시공 소리가 크게 울리는 것은 당연했고, 다녀가는 아저씨들의 목소리 또한 그에 못지않은 소음을 냈다. 무엇보다도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다들 때를 가리지 않고 부지런을 떨었다는 것이다.

처음 몇 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누나도 불면증을 견디지 못하고 옆집을 찾아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그 괴팍함이 한껏 발휘되어 기막힌 싸움을 만들어냈다. 문 너머로 누군가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잠시 뒤 현관문을 쾅 닫으며 들어온 누나는 여전히 열에 뻗쳐있는 상태였다. 옆집에서 다 풀고 온 것은 아닌지 웬 여자의 욕을 끊임없이 해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에서 다시 드릴 소리가 들렸다.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주겠다는 듯 히스테리적인 소음이었다. 소음을 들은 누나가 망치를 꺼내와 옆집과 이어진 벽을 쾅쾅 쳐댔다.

바로 이것이 시험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한동안 펜을 쥘 생각도 못 하고 음악 교육론을 정리해놓은 노트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느꼈다. 글씨가 왜 이렇게 바보 같지. 한 자 한 자 꼼꼼히 쓰는 편인데도 마치 휘갈겨 쓴 듯 단정치 못했다. 오르프가 오프르라고 보일 정도라, 그동안 왜 글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나 밥하기 귀찮으니까 오늘은 그냥 컵라면 먹자.”

급하게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을 연 누나가 통보했다.

“얼른 사 와.”

누나가 카드를 내밀었다. 휴대폰만 들고서 곧장 일어났다.

심술 맞게 활짝 열려 있는 옆집 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로 작업복을 입은 장정 두 명이 바닥재를 들고 지나갔다. 막 자리를 잡고 있는 시점에 하기엔 퍽 미안한 이야기지만, 옆집 부부가 하루빨리 돈을 모아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막 빌라를 빠져나왔을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받았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뭐 해요? 부드러운 첫마디에 곧이곧대로 컵라면을 사러 간다고 대답했다. 단순한 인사치레에 불과했던지 이세정이 화제를 훌쩍 넘겨 이번에는 운동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볕 아래에서 하는 것만 아니라면 딱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실내 운동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뜬금없이 운동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부정적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다만 내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어져, 내 쪽에서 먼저 물었다.

“지금 뭐 하고 계세요?”

-회사예요.

“주말인데요?”

-예. 주말인데. 내일 같이 운동할래요?

내일 기온이 몇 도까지 올라가더라. 괜히 날씨로 주의를 돌리면서 네,라고 말했다. 만남을 고대하는 감정이 간지러웠다.

-그럼 내일 봐요.

“예, 알겠습니다.”

-밥 잘 챙겨 먹어요.

“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오랜만입니다.”

픽업하러 온 차량 뒷좌석에서 장 비서님이 나를 맞았다. 지난번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어쩌면 홀쭉해진 뺨 때문에 더욱이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 점을 조심스럽게 언급하자, 장 비서님이 기운 빠진 미소를 지었다.

“업무량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피곤하시겠네요.”

“세정이 일을 모두 떠맡고 있습니다. 참고로 세정이는 평사원입니다.”

장 비서님이 평사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한때는 자신의 직위가 더 높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참 이상한 관계라고 맞장구쳤다.

“일을 아주 안 하나 봐요.”

“구조조정 제명 1순위이십니다.”

“설마요…….”

이세정의 아버지가 적법한 절차로 대표직을 승계받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알고 있다. 기업이 점차적으로 안정화되고 있는 지금으로서 이세정이 해고당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부럽기도 했다. 회사를 장난처럼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시트에 머리를 붙였다. 높낮이 없는 장 비서님의 목소리는 사람을 퍽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었다. 어찌나 편안하던지 눈이 막 감겼다. 사람을 옆에 두고 자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약속 장소에 다다를 때까지 눈만 감고 있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이곳이 차 안이라는 사실보다도 내가 장 비서님의 어깨에 기대고 잤다는 사실을 더 빨리 인식했다. 딱딱한 어깨에 눌린 뺨을 매만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듭 사과를 했다. 장 비서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신 내 뒤를 힐끗거렸다. 장 비서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열린 차 문 위로 팔을 기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정의 모습이 보였다. 장 비서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보다 더한 당혹감이 찾아왔다.

“잠자리가 좋았나 봐요. 푹 잔 걸 보면.”

“아닙니다.”

장 비서님이 대신 대답했다. 지나치게 확고한 대답이라서, 목을 주무르던 나는 장 비서님이 내 머릿속이라도 들어가 본 걸까 의아해졌다. 나는 엉덩이를 밀어 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세정이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잡으려다가 이세정이 스킨십을 질색한다는 배도빈의 말이 떠올라서 혼자 힘으로 밖으로 나왔다. 오후라 그런지 햇살보다도 선선한 공기가 먼저 와닿았다. 탄식과 함께 차내의 답답했던 공기가 일부 터져 나왔다. 묘한 눈으로 장 비서님을 응시하던 이세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강하게 맞붙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눈길을 돌려 이세정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기온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해도 운동을 하다 보면 땀이 날 텐데, 이세정은 팔이 긴 집업형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껏 이세정이 반팔을 입은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혹시 몸에 문신 같은 걸 했나. 한때 지수가 타투를 하느냐, 안 하느냐를 가지고 요란을 떤 적이 있었다. 그 당시가 생각나 소리 내어 물었는데, 마냥 억측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세정은 내 말을 씹어버리곤 뒤를 돌았다.

“이제 갈까요?”

“여기가 어딥니까?”

“레이싱 경기장이에요.”

“운동하러 가자고 했으면서…….”

가까운 곳에서 가볍게 조깅이나 할 줄 알았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스케일이 컸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짊어지고 이세정의 뒤를 따랐다. 나를 힐끗 본 이세정이 걸음을 늦춰줘서 곧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광활한 경기장 트랙 한 면을 지나자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이세정의 눈치를 보니 목적지는 건물 안인 듯했다. 혹시 두 발로 직접 모터 트랙을 돌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마라톤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웬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야옹 울면서 발밑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깨끗하고 몸통이 뽀얬다. 놀러 나왔다가 주인의 품을 놓친 집고양이인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애교가 너무 많았다. 말없이 주저앉아 손에 내밀었더니 고양이가 뺨을 비볐다. 나는 고양이의 코끝을 살그머니 만졌다가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속 만지고 있을 거예요?”

“예?”

고개를 올렸지만, 이세정이 근처에 버티고 서있어서 햇빛에 눈이 부시지 않았다.

“내 손은 뿌리치지 않았나.”

“…….”

이세정은 짧게 미소를 지으며 굳은 내 표정을 녹여주었다.

“이만 갈까요, 우리.”

“동물 안 좋아하세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세정은 고양이가 귀찮은 모양인지 언제쯤 가나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에게서 손을 떼어내며 머뭇거렸다. 제아무리 고양이에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인은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 의견을 들은 이세정이 불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장 비서님에게 새끼 고양이 문제를 대신 떠안겼다. 나는 그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간혹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유난히 짙은 눈길을 보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여기 관리하는 직원들이에요.”

이세정의 말에도 이 기묘한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골적인 시선이 아직 내게는 좀 어려웠다. 이렇게 주목을 받을 때면 어디든 숨고 싶었다.

GX 나 탈의실 따위를 지나 헬스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공간 속에 첫발을 디뎠다. 곳곳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경관 하나만큼은 좋아 보였다. 내부는 깔끔했고 난생처음 보는 기구들이 아주 많았다. 헬스를 위해 굳이 여기까지 와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지만 우선 운동을 하기로 했다. 가장 친근한 철봉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런 데 오면 주로 무슨 운동하세요?”

“따라 하게요?”

“아니요, 그냥…….”

철봉은 금방 잡히는 높이에 있었다. 팔에 힘을 주어 철봉 위쪽으로 목을 올렸다. 처음부터 하기엔 어려운 운동이었던 걸까. 오르락내리락 왕복하는 운동은 간단하기만 할 뿐 결코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머슬업이라고 하는데.”

이세정이 단번에 철봉 위로 상체를 올렸다. 목을 겨우 끌어올린 나와 달리 이세정의 팔은 세로로 곧았다. 꼿꼿한 팔은 진동 하나 없이 안정적이었다. 따라 해 보려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보았으나, 이것이 하루아침에 성공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면 나는 음대가 아니라 체대를 갔을 것이다. 결국 금방 포기해버렸다. 철봉에서 내려와 다른 기구를 찾았다. 곧바로 웬 침대처럼 생긴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편하게 정자세로 누운 후 원형 쿠션 아래로 발을 끼워보았다. 하체 운동을 하는 기구 같았는데, 쿠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조가 살짝 이상한 것도 같았다. 아니면 내가 잘못 누웠거나.

홀로 낑낑거리고 있는 나를 본 이세정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벌리고 있던 내 두 다리 사이에 무릎을 대더니 단번에 덮치듯 올라섰다. 한쪽 손으로는 내 목덜미 근처를 짚고, 나머지 한 팔을 들어 기구의 중량을 조절했다. 고개를 돌린 틈으로 잘생긴 귀와 턱선이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이세정이 내 위에서 내려왔다.

“잘못 누웠어요. 엎드리는 거예요.”

“아.”

발딱발딱 뛰는 심장을 잠재우며 당장 엎드렸다. 이세정이 자세를 교정시켜주었다. 나는 두 손으로 밑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쿠션을 아킬레스건 쪽에 걸었다. 그대로 무릎을 굽히며 천천히 움직여보았다.

“저 잘하고 있습니까?”

“체대 가도 되겠어요.”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들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주세요.”

이까짓 기구에 왜 시범 동작이 필요한지 묻는 듯 의아한 얼굴이던 이세정은 천천히 내 바로 옆 기구에 누웠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동작으로 자세를 교정했다. 시범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는데 상체보단 얼굴에 더 시선이 갔다. 눈썹을 덮은 결 좋은 머리카락이 통유리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 햇빛에 비쳐 옅은 색소를 띄고 있었다. 보기 좋을 만큼 찢어진 눈매는 나와 마주할 때마다 녹아내릴 것처럼 반듯하게 접혔다. 희고 고운 피부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깨끗한 느낌이었다.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보고 있는 거 맞아요?”

“예.”

“내 얼굴만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입을 벌렸다. 누군가를 보고 한 번도 잘생겼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세정을 신기하게 쳐다봤나 보다. 입술을 느리게 일그러뜨리며 담담한 투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잘생겼다는 칭찬에 좋아할 줄 알았더니 이세정은 눈을 가늘였다. 혹시 시비조로 느껴졌으면 어쩌지 싶어 덧붙여 말했다.

“다들 와, 잘생겼다… 손 한번 잡아보고 싶다… 할 것처럼 잘생겼습니다.”

분명 칭찬으로 들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이세정은 기꺼워 보이지도 않았다. 기구 위에서 몸을 일으킨 이세정이 한쪽에 걸터앉았다. 그 짧은 순간 이세정을 따라 일어나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우채민 씨, 잘생긴 사람 봤다고 손부터 잡고 그럼 안 돼요.”

“……안 그럽니다. 그렇게 느낀 적도 없고. 그냥 비유한 거예요.”

“그래요?”

이세정이 묘하게 눈썹을 올렸다. 말을 더 이어 붙이려나 했더니, 이내 다시 엎드려서 기구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세정이 이끄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니까 마치 장난을 치고 있는 듯 즐거워졌다. 본격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닌, 여러 기구를 깔짝대기만 할 뿐이라 땀도 나지 않아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나는 이세정이 찡그리며 한 말들을 모두 잊고 운동에만 빠져들 수 있었다.

몸이 다 풀렸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운동이 끝이 났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고, 그래서 더없이 개운했다. 이제 뭘 하려나 했더니 이세정이 저녁을 먹기 전에 같이 바람이나 쐬자고 제안을 해왔다. 솔직히 바람이란 거, 그냥 바깥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보같이도 헬멧을 쓰면서도 설마 내가 레이싱 카에 승차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싱 카를 바로 눈앞에서 본 나는 절로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뭡니까?”

“재밌어요.”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우아하게 서 있는 레이싱 카를 찬찬히 훑어보곤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싫습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진짜 무서워요.”

“천천히 달릴 거예요. 다치지 않아요.”

이세정이 내 두 뺨, 그러니까 헬멧을 쥐고서 낮게 이야기했다. 순간 이세정과 함께 차를 타고 다리를 주행했던 기억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그려졌다. 그때,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왜곡된 추억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기억과 무서울 거 하나 없다는 듯 끈질기게 나를 안심시키는 목소리가 한데 섞여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결국 나는 레이싱 카 조수석에 제 발로 올라탔다. 내게 안전장치를 단단히 매준 직원이 조수석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현듯 후회가 들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내 발로 탔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 나를 안심시켰던 이세정은 레이싱 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레이서 한 분이 우주복으로 무장을 하고서 운전석 안으로 들어왔다. 왜 저 사람만 우주복이고, 나는 헬멧뿐이지. 나도 저 우주복을 입혀달라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딘가로 사라졌던 이세정이 기가 막히게 큰 바이크를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불안감이 일었다. 이세정은 내 쪽 창문을 똑똑 두드리곤 씩 웃었다. 그러고서 안전 장비도 하지 않고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헬멧 없이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장난치다가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괜히 내 심장이 다 조였다.

차내가 덜컹거렸다. 누군가를 걱정할 수 있었던 여유가 차 속력과 함께 순식간에 흩어졌다. 대신 이세정을 향한 원망이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이세정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생각해보니 천천히 달리는 레이싱 카라니, 애초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흘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몸과 혼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겁을 좀 승화시켜보고자 눈을 감아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눈을 감는다고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옆에서 같이 달리고 있는 이세정을 발견했다. 더욱 겁이 났다. 저러다가 오토바이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간혹 나를 곁눈질하는 이세정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혹 눈이 마주쳤다가 한눈을 판 이세정이 사고를 내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내 눈은 마치 자석처럼 이세정에게 이끌렸다. 차내에선 느껴지지 않던 바람이 고스란히 이세정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부드럽게 늘어지는 눈꼬리.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입가에 피어오르는 삐뚤삐뚤한 미소. 그 모든 것들이 현실감 없이 와닿았다.

그때, 이세정이 핸들을 놓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손을 보는 건 아주 잠시뿐이었으나, 나는 못 볼 거라도 본 양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쳤다. 미쳤어. 햇살처럼 쏟아지는 풍경을 피해 눈을 감았다. 심장은 진정되지 않고 자꾸만 떨려왔다. 이세정이 좋아서 뛰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속도감과 이세정을 향한 걱정이 한 데 섞여 두려움을 가져다준 것뿐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

잔 안에 라일락 한 줌이 장식되어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스템 끝을 건드렸더니 라일락의 머리가 얼마간 크게 흔들렸다. 의미 없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꽃잎을 주시했다. 꽃잎은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처럼 생겼어요.”

“예, 그러네요.”

이보다 더 딱딱할 수 없겠다 싶을 만큼 기계적인 대꾸가 들려왔다. 이세정을 힐끗 살폈지만, 그는 유리 너머로 고정시킨 시선을 쉬이 거두지 않았다. 유리창에 붙어있는 통통한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에 맞아 터져나가는 모습 따위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얼핏 보기로는 그다지 재미있는 경관은 아니었다.

이세정이 바이크 위에서 두 팔을 벌렸을 때, 레이싱 카를 운전하던 남자가 속력을 줄였다. 곧 내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양 레이싱 카는 완전히 멈추어 섰고, 곳곳에서 경호원들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장 비서님이었다. 그림자가 져서 사방이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었지만 장 비서님의 이마에 번들번들하게 흘러내리는 땀만큼은 아주 두드러져 보였다. 냉정함을 잃고 거세게 흔들리는 눈은 자칫 실핏줄이 끊어질 듯 희번덕거렸다.

장 비서님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낮고 사나운 목소리로 발음을 씹어댔다. 흥분에 젖어있으나, 소리를 죽인 형태의 말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과 동떨어져 서 있는 내게는 대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물론 굳이 듣지 않는다고 해도 대강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아까 레이싱 카를 운전했던 선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금 페이스 코트의 막내아들이 죽을 뻔했음을 끊임없이 중얼거렸기 때문이었고, 다음으로 장 비서님이 저렇게 벌건 얼굴로 화를 낼만 한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든 이유에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얼굴로 일관하던 이세정이 우아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리를 옮긴 곳이 바로 여기였다. 경기장과 조금 떨어져 있는 호텔이었는데, 이세정이 나를 호텔로 데려온 목적이 밥을 사주기 위함이 아니라 비를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타이밍 좋게 비가 내렸다. 예보했던 시간보다 몇 시간 더 앞당겨 내리는 비였다. 주변 국가들의 예보까지 죄다 챙겨 본다는 이세정이 급작스러운 천둥 번개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이세정의 딱딱한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전 비 오는 날 좋아합니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 시켜 보고자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세정의 곁에 있으면 왜인지 대화를 주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세정이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대한 내 생각을 알려주고, 이세정의 생각도 듣고 싶었다. 감정적인 교류? 정의하자면 나는 그런 것이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둥 치고, 번개 치는 날이요. 비는 엄청 쏟아지고, 왠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은 날. 어머니가 청각이 많이 예민하셔서 그런지 그런 날을 유독 무서워하셨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하루 종일 피아노를 쳐줬어요. 집 안에 있는 창은 다 닫고 피아노 소리만 들리도록.”

잠시 말을 멈추었을 때, 이세정이 불쑥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였냐고 물어왔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라고 하기에는 말투에 고조가 거의 없었다.

“유명한 분은 아니셨어요.”

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아버지의 은퇴는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당신을 닮아 잔잔한 음악도 그즈음에 끝이 났다. 약하고 섬세하고 소심하고 감정적이었던 아버지가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을 때, 나는 가만히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떠나면서 아버지를 같이 데려갔구나, 그저 그런 생각만 하며.

이세정은 내가 내놓은 과거의 한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다. 대신, 내 접시를 보며 반응했다. 고깃덩이가 처음과 비슷한 모양으로 곱게 웅크리고 있었다.

“왜 더 안 먹어요? 맛이 없어요?”

이세정이 메인 셰프를 부르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나는 테이블 위로 허둥지둥 손을 올렸다.

“먹고 있습니다.”

나는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사실 레이싱으로 인해 놀란 심장이 여태껏 진정되지 못한 상태여서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기보단 속만 더 울렁거렸다. 나는 내 먹는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는 이세정의 주의를 돌리고자 물었다.

“비가 왜 싫으세요?”

이세정은 별것을 다 묻는다는 듯 눈을 돌렸다. 천천히 흐르던 시선은 이윽고 라일락 위로 얹어졌다.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말이 씹혔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뚱하게 고기를 씹고 있으니, 이세정이 웃음기가 밴 목소리로 뒤늦게 대답했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예?”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고, 왜 사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죽을 결심을 수억 번 한 사람들.”

“…….”

“이미 짜증이 난 상탠데, 누가 자꾸 보태 봐요. 더 짜증 나지.”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숨 막히는 공백을 따라 차분히 숨을 쉬다가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아주 멍청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했다.

“저는 비를 왜 싫어하시냐고 물은 건데.”

그러자 이세정이 느리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랬어요?”

나 혼자만의 침묵이 찾아왔다. 이세정에게서 가끔 보이는, 달관한 사람처럼 무심하고 나른한 표정의 근원을 알게 된 지금 너무 혼란스러웠다. 내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고 당황한 상태임에 반해, 이세정은 건조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가늠하듯 나도 이세정을 관찰했다. 내 쪽에서 깊은 눈길을 보내는 것엔 면역이 덜 된 모양인지 이세정이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괴상야릇한 분위기는 장 비서님의 등장으로 깨졌다. 장 비서님이 조용하게 다가와 차를 대기시켜놓아도 좋으냐고 물었다. 손목시계를 빠르게 살폈다. 늦은 저녁, 그것도 천둥 번개를 수반한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 서 기사님에게 운전을 맡기는 것은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자고 갈래요?”

내 손목을 끌어당긴 이세정이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단단하게 잡힌 손목에 왠지 부끄럼이 올랐다. 안 놀란 척 이세정을 마주 보자 그는 다른 불순한 의도는 전혀 없다는 얼굴로 손목을 놓아주었다.

“외박 못 해요?”

“그건 아닌데…….”

“원하는 방 있으면 말해요.”

당연히 방을 따로 쓰는 것을 전제하고서 한 제안일 텐데 왜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들었을까. 엉성하게 시선 처리를 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생각 없이 만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우선 대답을 보류하고 화면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제 오냐? 누나가 이 나이 먹고 주책없이 쫌 무섭구나. 너 안 오면 남자 하나 부르고ㅋ]

허세를 기반 한 독촉 문자였다. 평소에는 외박을 며칠이나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누나도 지금의 천둥 번개는 퍽 무서운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집 근처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실정이었으니 곁에 남자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세정은 별 미련 없이 장 비서님을 보았다. 장 비서님이 그럼 차를 대기시켜놓겠다며 등을 돌렸다.

“좀 더 먹어요.”

이세정의 은근한 강요에, 나는 고기를 한 조각 더 입에 넣었다. 최대한 씹는 데에 열중하며 다시금 내게로 향한 이세정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고기를 꿀꺽 삼키는 것과 동시에 물을 마셨다.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은 후 잘 먹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술 안 좋아해요?”

“예?”

이세정의 시선을 따라 내 와인잔을 보았다.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와인이 잔 안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아…… 술 잘 못 합니다. 와인도 안 좋아하고, 밥 먹으면서 술 마시는 것도 별로예요.”

이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한동안 살가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나는 마치 침묵이 자연스러운 사람처럼 입매를 올렸다. 대화가 끊길 때마다 이렇게 어색한 것을 보면 아직 이세정과 친해지려면 한참 먼 듯했다.

시선이 힐끗힐끗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전방을 주시하던 와중, 더운지 반쯤 걷어붙인 이세정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은 흐트러진 자세로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놓은 상태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팔에 난 상처가 자세히 보였다. 가만 보니까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만한 상처가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에 긁힌 듯 혹은 찔린 듯 꽤나 깊숙한 상처였다. 상처는 팔목 중간부터 손목까지 길게, 여러 번 이어져 있었다. 붉은색 선이었다. 요즘 의학은 옛날과 달라서 흉터를 깨끗이 없앨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세정의 팔에 난 상처는 치료받은 흔적 없이 아주 선명했다. 괜히 내 팔까지 따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과거의 이세정은 대체 무슨 짓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거지? 바이크로 인한 상처가 맞나? 만져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쯤 나는 이세정의 팔 부근으로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내 손가락 끝이 붉은 상처를 따라 훑어 올라갔다가 손을 좀 비틀어 팔목을 잡았다. 테이블 아래를 꾹 누르고 있던 부분도 역시 상처가 있었다. 사실 매만져봤자 몸에 상처가 있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내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단번에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아픔을 가늠해볼 뿐이었다. 이마가 답답해질 만큼 찌푸린 눈썹에 힘을 주었다.

“화가 너무 나는데 그걸 억누르고 싶을 때, 난 차분히 음악을 들어요. 그리고 한숨 자면 괜찮아지기도 하는데…….”

뱉어놓고 보니 오해할 소리였다. 나는 어떻게 상처가 생긴 것인지 아는 바도 없었으면서 자의로 했을 거라고 멋대로 단정 짓고 가르치고 있었다. 실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세정을 쳐다봤다가 쏘는 듯한 눈빛에 화들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치자, 이세정은 내게서 눈을 돌린 채 테이블에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그 신경질적인 동작이 화를 잠재우는 주문이었던 걸까. 잠시 후 나를 돌아보았을 땐 이세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채민 씨 화도 내나 봐요. 순해 보여서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아, 네. 저도 사람인데.”

“저도 사람인데.”

내 말투가 좀 웃겼는지 이세정이 장난스럽게 따라 했다. 나는 왜 따라 하느냐고 어설피 웃으며 이세정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에 탁월한 사람 같다. 귀가 붉어진 것으로 보아 분명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표정엔 그런 기미라곤 온데간데없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 내 쪽에서 먼저 사과를 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이세정은 그 말을 끝으로 장 비서님이 올 때까지 쭉 침묵했다. 재미없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만 깊게 빠져있었다. 제 손목의 상처를 매만지는 손길이 묘하게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뭐 물음이라도 던지면 즉시 답할 수 있게 이세정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를 데리러 온 장 비서님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영부영 인사만 하고 뒤를 돌았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이세정의 앞에 섰다.

“오늘 재밌었어요.”

테마마크의 가장 아찔한 놀이기구를 탄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날이다. 관람차도 잘 못 타는 내가 레이싱 카에서 재미를 느꼈을 리가 없었지만, 성의를 봐서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다음엔 다이나믹한 거 말고 다른 거 하자고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세정이 속 모를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는 대신 미소를 지어주었다. 환하지는 않아도 호의적이고 고마움을 담은 웃음이었다. 나와 다르게 이세정은 인상을 좀 쓰는 듯싶더니 어서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

‘재밌었어요.’라는 내 말이 마지막 인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보통 때와 달리 연락 한 통 없는 휴대폰을 보다가 문득 그 말이 떠올랐을 때. 나와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 하고 의아해하다가 혹시 상처 만진 일 때문에 마음이 돌아간 건가, 이상한 추측이 들었을 때.

연락을 끊는다고 서운함이 일거나 할 만큼 우리가 깊은 뭔가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잠수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책을 들여다보았다. 활자가 눈에서 자꾸 빗겨나갔다.

“배도빈 또 안 왔네.”

지수의 중얼거림에 나는 눈썹을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강의실을 훑고 있었다. 지수만큼의 관심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요 근래 배도빈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현재 드라마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연예인보다도 더 학비를 낭비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배도빈의 졸업 시기에 관하여 지수와 내기 판을 벌였다. 나는 서른일 거라고 했고, 지수는 마흔일 거라고 했다.

“얼마 걸 건데?”

“너는?”

“그냥 대답하면 되지, 뭘 물어. 응?”

지수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곤 누군가에게 답장을 보냈다. 화면을 힐끗 보니 술 약속이었다. 나는 어이없이 얼굴을 구기며 지수를 쏘아보았다. 분명 아까 이제 술 먹을 돈도 없으니 오늘은 꼭 과제를 끝마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강의가 끝나고 지수에게 이에 대해 묻자, 지수가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권주현이 부르잖아.”

“권주현이 누구야. 교수님이야?”

“넌 암기는 잘만 하면서 어떻게 사람 이름은 그렇게 모르냐. 1년을 봐온 앤데.”

“……나 잘 외워. 나 얼마 안 만난 알바생 여자애 이름 외웠어.”

“네가 잘 외우는 사람들 특징이 있지. 난 알지.”

이건 또 모를 소리였다. 나는 대체 무슨 엉뚱한 말인가 하여 지수를 쳐다보았다.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직접 카드를 긁었다가는 바로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온다며 돈을 뽑으러 가겠다고 했는데 그 정성으로 과제를 좀 끝냈으면 했다.

“무슨 술? 뭐 약속 잡았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수는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양형배를 흘겨보더니 말없이 돈을 뽑으러 갔다. 야, 나 두고 가면 어떡해. 내 소리 없는 비명은 지수에게 닿지 않았다.

“오늘 술 마실 거니까 나와야 돼, 채민아.”

당장 지수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참고 양형배를 마주 보았다. 양형배의 뒤에 양원이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흉내 내었다. 경계심을 허물어보려는 의도가 명백했으나 외려 나는 더 예민해졌다. 양형배가 내 뺨을 살짝 아프도록 꼬집었다.

“맨날 술자리 피하고……. 우리 학년 다 군대 가서 형이 많이 외롭다. 그러니까 남지수 약속 취소시키고 꼭 같이 와.”

“제가 왜…….”

“너한테 술 사달라고 안 해, 인마.”

“아니, 돈 때문이 아니라 제가 굳이 낄 필요가 있나 해서 묻는 겁니다.”

양형배가 제 뒤에 서 있는 양원의 목덜미를 잡아 앞으로 끌고 왔다.

“이 자식 아는 형이 괜찮은 기회 다시 잡아줘서 얘 대학로에서 공연 음악 담당하게 됐어. 그거 축하하는 자리야.”

“…….”

“다 네 덕분인 것 같아서 말이다.”

양원은 양형배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웃었다.

“축하하는 자리에 선배님이 빠지면 좀 섭섭할 것 같아요.”

양원의 긴 눈꼬리가 은근한 기대를 담아 흔들렸다.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가는 내 비뚠 마음만 드러날 것 같아서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데 얼굴에 다 드러났던 것일까. ATM에서 돈을 뽑고 돌아온 지수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지폐 뭉텅이를 들고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지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두 사람이 내게 했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주었다. 말을 들은 지수는 양원의 커리어를 가지고 양형배가 유세를 떠는 것뿐이라고, 정작 양형배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놈이라고 나를 달랬다. 틀린 말은 없었지만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양형배가 아니라 양원을 치졸하게 질투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술 약속을 거절하고 보니 정작 고록담 오픈 시간까지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되도록 양형배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하려고 일찌감치 학교를 빠져나왔다.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시계를 본 건지 잊어버리고 회사 퇴근 시간까지 앞으로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가늠했다. 오늘 아침에 깐 날씨 어플 또한 슬쩍 살폈다.

브런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어디서 연락이라도 올 것처럼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참 이상하다. 내가 관심 없을 때 연락을 끊었다면 이런 기다림은 절대 없었을 텐데.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대신 지수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너 어디냐?

“그냥 카페야. 공부하게.”

나를 버리고 여자애들에게 홀랑 가버려 놓고 이제 와 궁금한가. 퉁명스러운 투로 대꾸했지만, 혹시 약속을 취소하고 이곳으로 올 셈인가 싶어 좀 기대했다. 괜한 추측에 불과했던지 지수는 무심하게 아, 하고 대꾸했다.

-양형배 부르는 데 갈 거 아니지?

“안 가.”

-알았어. 설마 호구처럼 갔을까 하고. 끊어라.

담백하게 전화가 끊겼다. 주변에 시끄러운 잡음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급하게 통화가 종료된 빈 화면을 보고 있자니 기다림까지도 되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버리곤 공부에 집중했다.

***

시험공부를 하는 틈틈이 과제도 병행했다. 밤샘할 수 있는 다른 애들과 달리, 나는 새벽에 알바가 있었기 때문에 오후 시간에 분량을 다 채워야 했다. 조별 과제였다면 죽었겠지, 그냥. 안 쓰는 체력까지 다 끌어모았기 때문일까. 시험일에 가까워질수록 피로해졌다. 고개를 휘저어 잠을 털어내고 교수님을 쏘아보았다. 아니, 시선을 금방 내렸다. 이 교수님은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눈이 마주쳤다간 원치 않은 발언 기회가 주어질지도 몰랐다.

강의를 마치곤 오랜만에 학식을 먹으러 갔다. 빈 곳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으니 주변이 금방 채워졌다. 바로 옆에 앉은 누군가 내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낯이 익숙한 것도 같은 남자였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온 기억을 다 긁어모으는 사이 남자가 제 앞에 있는 여자에게 무슨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여자가 내게 말을 걸까 말까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대화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나는 얼른 먹고 일어나려고 부피가 작은 풀떼기를 골라 입에 집어넣었다. 그때 여자가 내게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아, 네.”

“원래 누구 뒤통수치고 먹는 밥이 꿀이잖아.”

옆에서 들린 말소리에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고기를 씹어 먹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앞에 앉은 여자가 나를 힐끗 보며 ‘야.’ 하고 주의를 준 것으로 보아 그건 나에게 한 말인 듯했다.

“남의 여친 뺏어놓고 태평한 게 웃겨서.”

“뭐 하냐, 진짜.”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냐?”

“눈치 브이즈느.”

“너 누구 생각 하냐. 난 그냥 걔 생각나서. 정철용, 걔.”

“찌질하다, 찌질해.”

나를 두고 떠들고 있단 건 알겠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귀를 기울여보려고 했어도 말하다 말고 갑자기 둘이서 싸우고 있어서 대화를 종잡기 어려웠다. 나는 풀떼기를 씹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여친 빼앗았다는 것은 무슨 소리지. 양형배가 눈치 없이 온갖 후배들의 술자리에 참석하며 나에 대해 뒷말을 지어내고 있다던데 그 관련 말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본 남자가 웃었다.

“어… 선배님 이야기한 거 아닌데…….”

아, 진짜 내 얘기였구나. 당혹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어설픈 인사와 함께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짜증이 났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짜증은 과방에서 양형배를 만났을 때 생겼다. 두고 온 프린트물을 챙기러 과방에 갔다가 양형배와 대뜸 마주쳤다. 뭔 연기를 하겠다고 못 본 척하고 있는 나에게 양형배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는 척을 해왔다.

“시험공부는 잘하고 있냐?”

“예.”

“너 시험 빽빽해?”

“그냥…….”

나는 과방에 아무렇게나 두었던 종이들을 모았다. 양형배는 옆에서 같이 종이를 모아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형이 말하는데 왜 표정이 그따위야.”

“제가 그랬어요?”

나는 난처하게 미소를 띠며 양형배에게서 프린트물을 받아들여 바인더에 정리했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내 가방 안을 힐끗 본 양형배가 왜 책을 가지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사물함 공간 모자라면 내 거 써.”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러시지.

“근데 넌 장학금 받으려고 공부 하냐?”

“받으면 좋지만…….”

자신이 먼저 물어놓고 양형배는 내가 꼭 농담을 했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실기랑 성적 따로 보는 대학이었으면 벌써 열댓 번은 받았을 텐데.”

“…….”

“실기가 좀…….”

나는 가방을 등에 메고 양형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풍기를 틀던 양형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형이 술 사줄게. 다음엔 꼭 와. 우리 화해도 하고. 응?”

“예, 형.”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과방을 빠져나갔다. 도서관에 자리가 있나 확인하러 가면서 왜 기분이 계속 가라앉는 건지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작은 일에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과방 안에서 대체 무슨 엄청난 대화를 했다고 짜증이 치미는 건지 심정이 복잡했다. 부적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표정 관리를 해보려고 애썼다.

화면을 힐끗힐끗 바라보던 눈길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이세정에게 제대로 식사를 대접했던가. 저번 날 양형배 사건이 잘 풀려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음식을 만들어주려다가 보조 요리사의 만류에 막혀 오히려 대접을 받고 돌아오지 않았나. 핑곗거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직 제대로 식사를 대접하지 못했으니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때 못한 식사 대접을 주말에 하면 안 되겠느냐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혹시 씹히면 어쩌지……하고 긴 고민에 빠졌다.

한 번의 아침을 더 맞이하고 나서, 나는 오랜 결심 끝에 배도빈을 찾아갔다. 그러나 단숨에 찾아간 것치고 쉬이 말을 걸지 못하고 여자들과 놀고 있는 배도빈의 주변을 뱅뱅 돌기만 했다. 다행히 배도빈이 일찍이 나를 발견하고 내 팔을 잡아 연습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살다 보니 위성을 자처하는 놈도 있네.”

“죄송합니다.”

“또 왜.”

“…….”

내가 입만 다물고 있자 배도빈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나 좋아하냐?”

“아닙니다.”

“그럼 싫어해서 괴롭히는 거냐?”

“그것도 아닙니다. 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제가 형을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배도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관심 없는 새끼가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냐고. 아, 그때 내가 술주정 부려서 그거 따지러 왔나?”

“…….”

“그래, 씨발. 입 다물고 있어, 계속.”

배도빈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았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배도빈이 소리라도 지를 듯해서 입을 열었다.

“이세정 뭐 하고 있나 해서요.”

“뭐?”

얼굴을 찡그린 배도빈이 잠시 생각에 빠지는가 싶더니 피아노 앞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습니다. 형은 알 것 같아서…….”

“넌 걔랑 몇 번을 만났다고 벌써부터 절친 행세야?”

“…….”

“세정이가 좀 제멋대로잖아. 막 연락 끊어도 그러려니 해.”

“이유가 없는 거예요?”

“모르지, 나는.”

배도빈이 지갑을 꺼내 지폐 넣는 자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쑥 나온 것은 직사각형 모양의 껌이었다. 배도빈은 같이 달려 나온 콘돔은 집어넣고 껌을 씹어 먹었다.

“세정이 별거 안 하던데. 운동 좀 하고, 술 한잔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그리고 의사랑 심리상담도 하고. 또 뭐 하더라…… 걔 일상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가 없어서.”

말하다 보니 떠올랐는지 배도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죽었나.”

제대로 된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아 나는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하곤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직접 연락을 해봐야 하나.

***

오늘따라 고록담에 사람이 적었다. 덕분에 마감이 일찍 끝나 빠르게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모두 건물 밖으로 나와 사장님의 차를 기다렸다. 쌀쌀한 새벽바람을 견디며 꼿꼿하게 서 있는 중에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여자애가 다가와 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름을 외운 여자애다. 옛 친구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안 돼요?”

나는 대체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도 모른 채 휴대폰을 건넸다. 여자애는 정말로 사진을 몇 장 찍더니 이번에는 찍은 사진을 메신저로 옮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여자애에게 휴대폰을 돌려받아 메신저에 들어가니 새로운 방이 하나 생겨있었다. 개인 채팅방에 덩그러니 남은 사진 한 장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귀엽죠?”

“응?”

“제 사진이요.”

표정이 웃겨서 웃은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채팅방에 들어간 김에 이세정의 이름을 찾았다. 뭐라도 바뀌었나 했더니 사진이 내려간 것 빼면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멍하니 빈 사진을 바라보다가 알바생들 무리에서 슬슬 빠져나왔다.

며칠째 주차구역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차 아래에 주저앉아 통화 버튼을 쏘아보았다. 그냥 보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엄지손가락이 멋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경우라 한동안 당혹스럽게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통화는 여전히 연결되고 있지 않다. 신호가 간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세정은 받지 않았다. 일부러 안 받는 거구나…… 마침내 깨닫게 된 순간 나는 축 처졌다.

툭, 그때였다. 연결 음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장 간단한 ‘여보세요?’라는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채 눈을 끔뻑거렸다. 한쪽 뺨을 쓸어보았다. 아, 돌아버리겠다. 연습이나 하고 전화할걸. 아니, 전화하지 말걸. 속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기 직전, 이세정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우채민 씨, 잘 지냈어요?

며칠간의 공백을 단숨에 뛰어넘을 만큼 태연한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예, 잘 지냈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저…… 전에 저 도와주신 거 갚지도 못했고…… 오히려 대접받았고…….”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려서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찾아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혹시 끊은 건가 싶었다. 나는 화면을 한 번 보았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만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눈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지며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세정이 마치 아기를 달래는 듯이 유한 말투로 되물었다.

-만나고 싶었어요?

“……예. 한동안 연락도 안 하시고.”

휴대폰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단추를 만지기도 하고, 뜨거운 목을 주무르기도 했다. 내 초조함 따위는 전혀 모를 이세정은 전화기 너머로 유리 같은 무언가를 만지고 있는 듯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만나면 뭐 하려고요?

“……굳이 뭔가를 할 필욘 없는데요. 아…지금 당장 보자는 소리는 아니고……보고 싶긴 한데. 많이 바쁘세요?”

전화기 너머로 작게 웃음소리가 났다. 욕실로 자리를 옮겼는지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볼래요?

“네.”

뭐에 홀린 양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세정은 집 앞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왜 이렇게 초조하고, 부끄럽지. 온갖 생각이 한데 몰아쳐 가슴이 답답해졌다.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며 때마침 시동이 켜진 사장님의 차에 올라탔다.

사장님의 차는 알바생들을 차례차례 내려주고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나를 편의점 앞에 내려주었다. 더딘 발걸음으로 빌라를 향해 걸어갔다. 차들로 빠듯하게 메워진 주차공간을 지나면서도 걸음은 아주 느릿했다. 빌라 앞에 주차된 차들까지 지나자, 시동이 꺼진 오토바이가 보였다. 오토바이 옆에는 옆집 신혼부부가 타는 하얀 차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보닛 위에 이세정이 앉아있었다. 이세정은 차 키로 보이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잠은 잘 잤어요?”

“…….”

“난 못 잤는데.”

제 뺨을 만지작거린다. 구태여 내게 피곤함을 어필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좀 주눅이 들었다.

“……다음에 보면 되는데.”

그리 말하면서도 어둠 속에선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보고자,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드러난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무 말이든지 꺼냈다.

“뭐 하고 지내셨어요?”

이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건지 별거 안 했다는 건지. 어차피 정말로 궁금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 하고 탄식하며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웃음소리가 났다. 헛웃음인지, 비웃음인지 아무튼 짧았다.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이세정이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비스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연락 많이 기다렸나 봐요.”

“……예, 같이 더 놀고 싶어요.”

“놀고 싶구나.”

미묘하게 말을 흐린 이세정이 보닛 위에 얌전히 눕혀있던 꽃다발을 건넸다. 얼결에 받아들여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파란 꽃이었다. 왜 주는 거지. 한동안 고민하다 손으로 쓸어보았다. 꽃 치고는 약간 거칠한 느낌이었다. 향기라도 맡아보려고 꽃에 얼굴을 묻었는데, 미처 향을 마시기도 전에 이세정이 내 턱을 잡아 살짝 밀었다.

“먹는 거 아니에요.”

“……먹으려는 게 아니고, 그냥 보는 건데요.”

“숨겨둔 건 없어요. 현금이라도 넣어둘 걸 그랬나.”

이세정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리 가까이 와보라며 손을 까딱까딱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아 제 손목을 쥐게 했다. 깊게 베인 손목의 상처가 느껴졌다. 사선으로 그어진, 빗금 같은 상처였다. 의도를 파악지 못하겠다. 흉터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미끄러져 이내 바닥으로 향했다. 이세정은 내 뺨을 장난스럽게 주물럭거렸다.

“강아지도 아니고.”

“…….”

“아이도 아니고…….”

비유하여 귀여워 해주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투였다. 이세정은 물건을 사기 전에 꼼꼼히 따져보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순해 보이고.”

“…….”

“딴 데로 갈 것 같지 않고.”

나는 정말 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뜯어보는 눈길에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제야 보닛 위에서 완전히 내려온 이세정이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이세정의 허리를 잡았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방어기제를 취하는 것 같기도, 혹은 반대로 더 닿으려는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안아 봐도 되나.”

혼잣말처럼 이세정이 물었다. 나는 버젓이 고개를 끄덕여놓고 눈을 크게 뜨고 네? 하고 물었다. 그리고 얼마간 생각하는 척하다가 다시금 고개를 흔들었다.

“네.”

그쪽에서 먼저 안아올 줄 알았더니 그런 기미는 없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시간만 재고 있었다. 침묵 끝에 이세정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내가 안 밀쳐내면.”

이세정이 두 팔을 벌렸다.

“우채민 씨 나한테 와야 돼요.”

이세정은 얼른 안기라며 오만하게 고갯짓했다.

주춤할 새도 없이 품으로 들어갔다. 꽃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꽃향기에 녹아 그만 아득해졌다. 숨이 막혔다.

물밑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담배와 샴푸 향 아래로 계속해서 젖어가는 기분이었다. 질식할 것처럼 숨을 죽이고, 나는 몸을 더듬더듬 올라가 이세정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뒤통수를 토닥이는 손길이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 다정했다.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고 조용히 안겨 있었을 것이다.

“저쪽에서 사람…….”

고개를 돌리며 소리가 난 방향을 가리켰다. 손가락은 채 뻗어 가지 못하고 힘없이 내려앉았다. 빽빽하게 주차된 두 대의 차 사이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가 이쪽을 주시하며 서 있었다. 어둠에 가려 희미했으나 키 하며 체격 하며 아무리 본다고 해도 틀림없는 성인 남자였다. 근처에 사는 주민이면 어떡하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발이 주춤, 뒤로 움직였다. 급히 이세정을 밀쳐내니, 그가 단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안녕, 도빈아.”

도빈아? 성이 도 씨인가? 아니면 도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가? 그런데 이세정은 도빈이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당황한 나머지 도무지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체할까 염려가 될 정도로 혼란함을 들이키다가, 문득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가 묘하게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 속에 있는 얼굴임을 인지하는 순간, 도빈이라는 이름이 주인에게 돌아갔다.

“오빠, 나 간다? 빨리 인사해줘.”

고운 목소리를 따라 배도빈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러나 곧 고무줄에 튕겨지듯 다시 이쪽을 쏘아보았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서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당혹감에 휩싸인, 날 것 그대로의 표정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사나워졌다.

“거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여자가 차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려고 하자 배도빈이 여자의 앞을 막아섰다. 마지막으로 나와 눈을 맞춘 배도빈이 아예 몸을 틀어 사라졌다. 그저 안고 있던 것뿐이었지만 남에게 보이기에는 썩 달가운 장면은 아니었다. 현기증은 가중되고, 따뜻하게 덥힌 몸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러자 그걸 알기라도 하듯 온기가 내 눈가를 꾹꾹 문질렀다. 나는 여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남아있는 공간에서 시선을 떼고, 이세정과 마주 보았다.

“잘 자고.”

“아……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꽃을 챙겨 들었다.

“얼른 가요.”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등을 돌렸다. 배도빈이 내가 오밤중에 남자와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문이라도 낸다면, 나는 뻔뻔하게 학교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이세정이랑 친구니까, 그가 말해주면 괜찮지 않을까. 빌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휙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바이크 울음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을 흔들어놓았다. 이세정이 가버렸다.

집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환한 불빛이 나를 반겼다. 내 초조함과 대조된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나가 왜 들어오지 않고 멍청하게 서 있는 거냐며 정신을 일깨웠다. 뒤늦게 방 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또 한 번 나를 부르는 누나의 목소리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누나는 쭉 찢어진 눈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꽃. 누나의 시선을 따라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불빛에 비친 꽃을 보고서, 마치 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은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그저 파랗게만 보이던 것이 빛을 받으니 그리 새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색이 달리 보일 수도 있구나. 답답할 만큼 더딘 시선으로 꽃을 차분히 어루만졌다. 누나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물었다.

“뭐야, 이 화학조미료는?”

어디서 난 것이냐고, 누가 준 것이냐고 추궁을 할 줄 알았더니 영 뜬금없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식물 학대 엄청 했네? 난 요즘 프리저브드다 뭐다, 하면서 멀쩡한 꽃에 이상한 짓 하는 거 진짜 싫어.”

누나가 잽싸게 다가와선 내게서 꽃다발을 빼앗아 들었다. 꽃다발에 코를 한 번 박아보곤 픽 웃는다.

“이상해, 이거. 향초도 아니고. 외관만 겁나 예쁜 거네.”

“응?”

“이런 꽃에 속지 마. 꽃이란 자고로 속이 예뻐야지. 알겠냐?”

“응?”

“어디다 장식해놓지.”

자꾸 뜻 모를 소리를 중얼대던 누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틀었다. 식탁에 한 번 놓아보고, 텔레비전 옆에 한 번 놓아보고, 화장실 선반에 한 번 놓아보고, 꽃병에 한 번 꽂아본다. 그러나 결국 예쁘게 장식할만한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꽃다발을 방으로 가져가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옆에 누워서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세정이 곁에 있어야만 아찔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건지, 꽃은 고요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뭐든 좋았다. 지금은. 진짜로.

***

나는 온종일 배도빈을 찾아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솔직하게 말하고, 입막음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보다 나은 방법은 많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요령이 좋지 못해 거짓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배도빈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면서 뒤늦게 알아차린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이세정의 따뜻한 면에 반했고, 나조차도 버거울 만큼 급속도로 빠졌다. 연락 하나 안 된다고 왜 그리 안절부절못했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야 되돌아보니 아마도 나는 이세정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세정이 남자라는 사실은 감정을 숨겨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이 지내온 세월이었으므로,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성향에 관해서 깊이 고뇌하는 단계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내 성향을 제삼자가 알게 되는 문제는 아예 출발지가 다른 이야기였다. 나와 이세정을 쳐다보는 그 당혹스러운 눈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배도빈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기 전에 어서 만나야 했다.

그러나 늦은 오후가 다 되도록 배도빈을 찾지 못했다. 이 넓은 캠을 매일같이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어떡하지. 진작 번호를 알아낼 것을 후회스러웠다.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가 때마침 울린 진동에 문자 함을 열었다.

[조금 늦어요.]

데리러 온다기에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퇴근이 계속 늦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기다릴 셈으로 빈 연습실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시 한번 문자를 살폈다. 데리러 갈게요. 조금 늦어요.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비죽 웃음이 나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피아노는 지루함을 달랠 좋은 놀이였다.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에서 솔까지, 의미 없는 타건을 지속했다. 손가락은 좀 더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곧 알 수 없는 음들이 모여 기본적인 동요 한 곡이 만들어졌다. 곡이 후반부에 다다르자, 나는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으로만 연주했다.

아버지는 두 손 연주를 고집했다. 기교 또한 무조건 정석을 따랐다.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 한 번도 다른 연주법을 써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준으로 항상 자신을 조율했던 것 같다.

타건 속도를 높였다. 나는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잘 구부러지는 편이었다. 속도를 높인다고 해도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야.”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의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찾아도, 찾아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던 배도빈이 언제부터였는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왜 피아노과 안 갔냐?”

배도빈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정작 마주치게 되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일단 배도빈의 물음에 대꾸했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안 갔습니다.”

“작곡에 더 재능이 없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고?”

내가 입을 꾹 다물었더니 배도빈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요 근래 가장 많이 듣는 농담이었으나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아팠다. 아니, 사실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배도빈이 내 자작곡을 가리켜 매우 병신 같은 음악이라고 폄하를 했던 일이 있었으니까. 피아노에서 손을 떼어내고 괜히 과장해서 목을 주물러댔다. 그러면서 엉덩이를 뒤로 밀어 은근슬쩍 물러났다.

“왜.”

배도빈은 내가 멀어진 만큼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번 더 멀어지자, 그만큼 또 붙었다.

“왜 피하냐고.”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내 말투를 따라 하며 놀리던 배도빈이 내 쪽으로 기울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배도빈은 아까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얀 건반에 손을 올려 곡 하나를 연주했다. 음과 음 사이에서, 배도빈의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멍하니 있다가 자칫 말을 놓칠까, 건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남자 쪽으로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그런 사이인 줄. 난 또 우정이란 그럴듯한 핑계로 괴롭힘을 정당화시키는 빵 셔틀과 일진 관계인 줄 알았지.”

배도빈이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눈언저리가 유난히 봉긋했다. 눈 바로 밑에 점이 하나 있는 것 같다. 애매한 위치에 찍혀 있는 검은 점을 빨려 들어갈 듯 보고 있는데, 배도빈이 눈썹을 휙 올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말이야. 너 겉모습에 넋이 나갔냐? 아니면 돈? 예쁘고 잘생기고 귀엽고 돈 많으니까 이젠 아예 속까지 좋아 보이는 건가? 세정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좋아 보여?”

“아니…… 엄청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배도빈이 연주를 멈추더니, 여기서 웃으면 숨이 넘어갈 것이 분명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배도빈에게 해야 할 말이 불현듯 떠올라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다른 사람에게 어젯밤의 일을 말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봐야 했다. 배도빈은 내 불편한 침묵을 무덤덤하게 넘기며, 검은 건반을 눌렀다.

“이틀 전인가, 만났었거든.”

“이세정이요?”

“네가 사정해서 만나는……너 걔 없는 데에서 반말 막 한다? 아무튼 만났었는데, 평소와 똑같이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 걔 기분 안 좋은 거야, 하루 이틀이겠어? 뭐, 그래도 친구로서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해줬지. 그랬더니 감정조절이 안 돼서 내가 말 시키니까 데려가서 산에 묻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집에서 쫓겨났어. 씨발 놈의 강아지.”

배도빈이 페달을 힘을 주어 밟아대는 바람에 진동이 전이되어 몸이 떨렸다. 나는 배도빈의 어깨를 가만히 쥐었다.

“기분이 안 좋으셨나 봐요.”

배도빈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세정이? 아니, 세정이는 항상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니까. 기분이 안 좋은데, 겉으로는 그냥 좋은 척하는 거야. 걔는 항상, 한결같이, 언제나 기분이 안 좋은 애야.”

“잘 웃으시던데요.”

“넌 누가 웃으면서 돈 내놓으라고 하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하면서 꼭 줘라.”

나는 그저 건성으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왜 제 친구를 나쁘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추측하나 해보자면 이세정이 너 가지고 노는 것 같아. 왜냐면 난 세정이가 누굴 좋아하는 걸 본 적……이…… 근데 너 걔랑 안고 있지 않았냐?”

배도빈은 자신이 물어놓고 홀로 상념에 젖었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예고 없이 나를 껴안았다.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른 체격과 다르게 힘이 매우 셌고, 게다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짓누르는 자세는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였다. 배도빈은 내가 압력에 눌린 나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때쯤 힘을 풀었다. 배도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무슨 매력이 있는지 아직 못 느꼈어. 다시 안아보자.”

“안 될 것 같은데요.”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이리와 봐.”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배도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 무슨 치한인 줄 알았네. 알았어, 알았어.”

배도빈이 다시 건반을 쳐댔다. 길고 예쁜 손가락이 부드럽게 건반 위를 뛰어다녔다. 난생처음 듣는 곡이 연주되었다.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떤 기억을 훑어대었다. 눈이 가늘어지며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작년 작곡과 졸업연주회 때, 무대에서 배도빈이 연주를 한 일이 있었다. 오락가락 정신없는 곡 가운데 피아노 연주만은 기가 막히게 좋아서, 빨려 들어갈 듯 감상했었다. 어찌나 몰입했던지 옆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몰랐을 정도였다.

‘씨발, 일부러 잡은 줄 알았잖아.’

바로 옆자리에서 들린 낮은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목소리에 담긴 화가 그대로 내게 쏘아졌을 때, 나는 분명한 혐오를 뼛속 깊이 느꼈다. 마스크를 써 눈만 보였음에도 그 눈을 쉬이 들여다볼 수 없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얼른 도망쳐 나왔었다.

“근데 넌…….”

“예?”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나 배도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걔가 왜 좋냐.”

“좋… 좋냐고요?”

“왜 좋냐고.”

나는 의미 없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내가 줄곧 잡지 못해 눈치만 보고 있던 타이밍이 제 발로 내게 걸어온 시점이었다. 긴장감에 몸이 뻣뻣해졌다.

“잠깐만요, 형.”

배도빈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말 할 거죠? 어제 일이요.”

“내 말에 대답해주면 생각해볼게.”

“생각해보는 거 말고, 확신을 주세요.”

“이 새끼 은근히 사람을 쪼네? 알았어.”

배도빈은 유치원생들이나 하는 손가락 약속을 제안했다. 약속을 담아 손가락을 거는 것도 모자라 복사, 그리고 도장까지 찍었다. 누가 볼까 무서웠다. 나는 개운치 못한 눈으로 배도빈이 가지고 논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빨리 말해.”

“저랑 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디가? 너도 설마 개새끼냐?”

“개새끼요?”

“아냐. 말해.”

마른 입술을 몇 번 문지르며 입을 뗐다.

“초대를 받아 집에 갔을 때, 댁 사모님을 뵌 적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약간 다치셨나 보다 했어요.”

서두를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혹시 이세정의 어머니의 비밀을 나만이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삼킬 듯 말 듯 고민하는 말을 알고 있다는 듯 배도빈이 부드럽게 물었다.

“눈이 안 보이신다고?”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배도빈이 ‘알고 있어.’라고 말하며 어서 말을 잇기를 종용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습니다. 사모님께서 미처 대비를 못 하셨는지 다친 부위를 그대로 드러낸 채 모습을 보이셨어요. 그냥 딱 봤을 때, 한쪽 눈에 상처가 심하셔서 당연히 온전한 시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다른 눈에는 상처가 없으니까 한쪽 눈만 안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문득 눈이 마주친 배도빈이 너무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떨어져서 앉았더니 배도빈이 코웃음을 쳤다.

“저희 어머니도 시각장애인이시거든요. 그래서 잘 압니다.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그래서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어머니는 혹시 저한테 피해가 될까 봐 물잔 놓는 곳, 식기 놓는 곳, 그릇 놓는 곳 다 외워서 마치 시야가 훤히 보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하시곤 했어요. 어차피 친구들한테 다 말해놓은 상태였는데도 어머니가 그러시니까 차마 그만두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어…… 그래?”

“그런데 사모님도 그러셨어요. 마치 두 눈이 잘 보인다는 듯이, 혹시 아들에게 폐가 될까, 조심조심.”

“그게 이유야? 그냥 비슷한 어머니를 두었다는, 그런 멍청한 동질감 때문에? 야, 핑계를 댈 거면…….”

나는 배도빈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이세정은 사모님이 오기 전에 비뚤어진 의자를 정리해서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러니까, 제 어머니가 두 눈이 보이는 연기를 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덕분에 사모님은 평소처럼 바르게 정리되어있는 의자를 힘들이지 않고 잡을 수 있었어요. 제가 좀 오만한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배려는,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못 하는 거라고 봐요.”

나는 뒷목을 꾹 주무르며 배도빈의 눈치를 살폈다. 확신하여 말하는 꼴에 혹시 반감을 살까 겁이 난 탓이었다. 걱정과 달리 배도빈의 얼굴에는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식사 시간 내내, 이세정은 사모님을 가만히 지켜봤어요. 그 모습을 보고 어쩌면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껏 우리 어머니를 그런 눈으로 본 것 같거든요. 안타까운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표정.”

말을 끝맺었으나, 배도빈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온 이세정과, 자신이 알고 있는 이세정이 마치 다른 인물이 아닐까 의심이라도 하듯 눈동자만 빠르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한참 뒤, 배도빈이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근데 너 반말이 진짜 자연스럽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이세정이라고 부르는 거요?”

“응.”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어서……그럼 뭐라고 부르죠?”

내 물음에 배도빈이 깊게 고민하더니 이내 답을 내놓았다.

“개새끼.”

예의 없기로는 배도빈이 제일이었다. 나는 그저 픽 웃어버리곤 막 진동이 울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도착했는데, 어디에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배도빈에게 대충 인사를 건넸다. 어디 가는 거냐는 당혹스러운 물음이 뒤통수에 와 박혔으나 멈추어 서지 않았다.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역 근처였다. 검은 차를 찾아 역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눈에 띌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차를 숨겨두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때마침 이세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에요?”

-등 뒤에 큰 나무 보여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이세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혼자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제야 나무 뒤에 가려진 검은 차가 눈에 들어왔다. 툭, 전화가 끊겼다. 곧 차도 쪽에 나 있는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이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세정은 느린 발걸음으로 자동차의 후미를 돌아, 보행로 쪽에 난 차 문을 열고서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제멋대로 연락을 끊은 것치고 심상찮은 배려였다. 기분이 들떴다. 나는 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세정의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자전거 한 대가 나와 이세정 사이를 잽싸게 갈랐다. 휙, 거센 바람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진 자전거 때문에 급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로 넘어져 버렸다. 본능적으로 손바닥을 짚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손바닥이 바닥에 쓸려 작은 생채기가 났다. 이세정이 다가오기 전에 일어났다. 이세정은 의미 모를 얼굴로 내 손을 쳐다보았다.

“우채민 씨 근처에는 자전거 못 지나다니게 해야겠어요.”

이세정은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자전거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몸을 좀 비틀어 손등으로 차 문을 두드렸다. 어서 타라는 신호였다. 성급하게 느껴질 만큼 거친 두드림이라, 나는 허둥지둥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세정이 바로 옆에 앉으며 말했다.

“병원 가야겠는데.”

“병원 갈 정도의 상처는 아닙니다.”

“상처가 심하게 났어요.”

나는 혹시 내 눈이 잘못되었나 싶어 다시 한번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아무리 봐도 피 한 방울이 겨우 맺힌 생채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조금 쓰라리기는 했지만 팔에 치료받지 않은 상처를 가득 달고 다니는 사람 앞에서 끙끙거리며 괜히 주름잡고 싶지 않았다.

미처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전에 이세정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큰일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통화를 엿들어보니, 무슨 대학병원의 모 교수님을 호출하는 기가 막힌 내용의 전화였다. 응급환자들만 담당한대도 한 시가 모자랄 판인데, 이런 생채기 하나 때문에 바쁜 사람을 불러낼 수 없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이세정의 팔을 세게 잡아 내렸다.

“평범하게 치료받고 싶습니다. 평범하게…….”

“평범하게요?”

말을 되뇐 이세정이 통화하는 사람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이건 약만 바르면 낫는 거니까 간호사분이 발라주셔도 되고, 제가 직접 발라도 되고. 아무튼 약 바르는 건 간단한 일이잖아요.”

말은 끝났지만 지긋한 눈길은 한참이나 내게 머물렀다. 걱정되어 한 일인데 내가 뭐라고 해서 화났나. 우려도 잠시, 곧 이세정이 호선을 그리며 유하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요.”

차는 여전히 방향을 틀지 않고 직진하고 있었다. 나는 차내에 눅눅하게 내려앉은 볕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눈길이 잠깐 손바닥으로 향했다. 이상했다. 걱정하니까 좀 아파졌다.

얼마 안 있어 이세정의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괜스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이 가까이 오라는 듯 눈짓했다. 왜 붙어 앉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곁으로 다가가니, 이세정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를 뿌렸나. 아니면 체향인가? 너무 코를 들이대면 변태처럼 볼까 봐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가만가만 숨을 쉬었다.

이세정의 스킨십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이세정이 누군가와 살을 맞대는 것을 격렬하게 싫어한다는 배도빈의 말은 일정 부분 잘못된 데가 있었지만, 확실히 서투른 감이 있기는 했다. 지금껏 이런 류의 스킨십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나는 평범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병원 근처 벤치에 앉았다. 저물어가는 햇살에 손바닥을 비춰보니 정사각형 밴드가 보인다. 의사를 만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손등과 손바닥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을 것이다.

“술 마실 생각이었어요, 오늘.”

생수 뚜껑을 닫는 중에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이세정이 다가왔다. 바로 옆자리에 앉자마자 빗겨 쏟아지던 햇살이 일부 차단되었다.

“다음에 마실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술 먹으면 너무 업 돼서요.”

“누구나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한데요…….”

내 술버릇이 어땠는지 생각해보았다. 취할 정도로 먹은 적은 없지만,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얌전할 것이다. 술주정에 관해서 선배들에게 따로 뒷말을 들은 적 없으니까. 하기야. 남한테 엉기고, 사물을 착각하고, 반말을 하는 지수의 옆에 있으면 자연히 비교가 되어 더욱이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같이 마셔 줄 거예요?”

퍽 끈질기게 묻는 이세정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약속을 잡고 보니 대화가 끊겼다. 나는 대화에 약간의 텀이라도 생기면 안 된다는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매만졌다.

“그럼 이제 저 집에 갑니까?”

“집에 가고 싶어요? 난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여기서 계속 대화를 하자는 소리인지, 자리를 옮겨 놀자는 소리인지. 만약 전자라면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이세정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이 없었다. 바이크를 타는 것 말고 다른 취미가 있는지 물어볼까 생각하던 중에 이세정이 먼저 물었다.

“음악 재밌어요?”

“음악이요? 네, 뭐. 가끔 질릴 때도 있는데 대체적으로 재밌습니다.”

“질리기도 해요?”

“다들 그러잖아요. 질렸다가 다시 재밌어지고…… 한 우물만 파는 건 힘든 일이니까요.”

이세정이 눈썹을 쭉 올렸다. 대답이 없기에 의아하게 물었다.

“그런 경험 없어요?”

이세정은 ‘글쎄요.’ 하며 말을 늘어트렸다. 바이크를 좋아하지 않나. 집에 진열되어 있던 그 바이크들은 단지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수가 많고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이미 좋아하는 것을 찾은 것 같은데, 이세정은 먼 미래를 이야기하듯 말했다.

“좋아하는 걸 찾는다고 해도, 아마 난 질리진 않을 거예요.”

간혹 현실이 연극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세정이 미소를 지으며 불러일으킨 아득한 여명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음악 들으실래요?”

나는 재생 목록을 뒤적거렸다. 많이 들은 순서대로 정렬해서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 가운데 하나를 틀었다. 그러고는 이어폰 한쪽을 건넸는데, 손을 뻗고 나서야 뒤늦게 아차 싶었다.

“소음으로 들리신다고…….”

“괜찮아요, 우채민 씨.”

이세정은 이어폰을 가져가 귀에 꽂았다. 나는 나머지 한쪽도 넘겨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러면 웃긴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그냥 내 귀에 꽂았다. 웅장한 음악이 귀를 두드렸다. 반복되다가 조금씩 변화되는 음들은 머리를 깨끗이 비워내는 데에 효과가 있었다.

“클래식한 걸 더 자주 듣는 편인데 정작 끌리는 건 이런 겁니다. 뭔가 저랑 다른 거. 틀린 거.”

실험적이고 독특함을 특징으로 하는 이런 종류의 음악은 내가 작곡하는 곡과 확연히 다른 차이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이런 곡들에 많은 영감을 받는 편도 아니었다. 나는 고요하고 잔잔하고 평온한 음악을 더 선호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빠져드는 것들은 이런 종류의 음악이었다. 내 세계와 먼, 닿지 않는, 그런 것들. 어쩌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름에서 오는 끌림이거나. 대체로 나는 나와 비슷한 것들을 사랑하는 편이니까 후자일 공산은 거의 없었다.

이세정을 곁눈질하니, 이세정은 내가 마치 감상을 토해내라고 압박하는 눈빛을 보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평을 해야 하나요?”

“아, 아니요.”

“약에 취해 듣기에 좋은 음악이네요.”

감상평치고 호불호가 불분명한 말이었다. 사실 곡 특성상 그런 평론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이세정이 말을 하니까 혹시 자신도 약을 하기 때문에 나온 비유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자극이 필요하다면 다른 것도 많아요.”

“…….”

“그리고 난 그런 거 안 좋아해.”

내 생각을 꿰뚫은 이세정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길이 이세정의 손목으로 향했다가 이어폰 캡 사이로 흘러나온 곡을 듣고 멈칫했다. 무슨 곡인지 깨달은 순간 헉, 하고 가슴이 뜨끔거렸다.

“이거 제가 만든 곡이라…….”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짧게 듣기는 했지만, 이세정이 이상한 곡이라며 악평을 늘어놓을까 봐 조마조마해서, 먼저 나서서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제 음악 많이 심심하죠. 재미없고.”

이세정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다들 그러더라고요.”

“누가요.”

“…….”

“그때 그 사람들?”

“예?”

나는 바닥으로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규정하기 어려운 눈길과 마주하자, 이세정이 누구를 가리켜 이야기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양형배와 양원. 양 씨는 다 싫다는, 괜한 성차별을 야기할 만큼 질리는 사람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농담했다.

“자주 그래요.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시비를 너무 거니까 학교 좀 안 나왔으면 좋겠고, 막 그런 생각도 들어요.”

“2주? 3주?”

“예?”

“얼마 동안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어…… 곧 시험이니까 종강까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 잠시만요.”

나는 지수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내일 알바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가자는, 쓸데없는 내용이었다.

[시험공부나 하자.]

내가 답신을 보내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우리 안 마신 지 꽤 됨. 이맘때쯤 또 마셔줘야 우정도 돈독해지고 하는 거 아니냐;]

지수의 답장에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본 이세정이 물었다.

“누구예요?”

“중학교 친구예요. 어쩌다 군대까지 같이 갔다 온.”

“…와, 친하겠네.”

감탄사가 붙은 말이었음에도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지수에 대해 모르는 건 거의 없다고 덧붙였더니, 이세정은 내 말에 더는 관심이 없다는 듯 뚜껑을 단단히 닫아놓은 물병을 끌어와 손장난을 쳤다. 일부러 내 말을 안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세정은 물병을 피젯 토이처럼 돌렸다. 가만히 보다 보니까 신기해서 나도 한 번 해보겠다고 했더니 물병을 건네주었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한 번 돌리고, 두 번 돌렸다. 세 번째에 떨어트릴 뻔했는데 이세정이 날렵하게 잡아 내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물병을 다시 한번 돌렸다.

무려 십 분 동안이나 그 쓸데없는 놀이를 계속했다. 지수랑 했다면 물통으로 서로의 머리를 때리는 놀이를 했으면 했지, 절대 이런 놀이에 흥미를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남들이 보기에 재미없어 보일 것이 뻔한 놀이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좀 웃기기는 했다. 막 여덟 번 연속으로 돌려서 신나 있을 무렵, 빠르게 걸어와 우리 두 사람 앞에 선 장 비서님이 이세정에게 보고했다.

“CCTV 영상 확보했습니다.”

이세정이 저리 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장 비서님은 잠시 나와 이세정을 번갈아 보다가 뒤를 돌아 사라졌다. CCTV라니 무슨 소리지. 궁금증이 도졌으나 잠시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

이번 기말시험은 한 주 안팎으로 죄다 몰려있었다. 위클리 마지막 조였던 나는 실기와 필기가 이달 안에 모두 몰린,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예고된 일정이기는 했지만 새삼 부담이 되었다. 캘린더를 보다가 한숨을 쉬기를 몇 번, 마침내 나는 당분간 이세정을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서적을 챙겨 들고 근처 카페를 찾아 헤매면서 이세정에게 문자를 하나 보내놓았다.

[저 오늘 못 봅니다. 시험공부 때문에ㅠ9ㅠ]

한참을 기다렸지만, 이세정은 답신을 하지 않았다. 이모티콘 귀엽지 않나. 나름 고심해서 적은 건데.

두 번째 메시지를 보내야 하나 갈등했다. 고민은 깊어져, 곧 나를 귀찮아하면 어떡하나 염려로 번졌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연애 맞나. 아닌가. 이세정은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썸인지 연애인지 이 관계에 대해 정의를 내려줬으면 좋겠다. 현재 우리 사이는 메시지에 반드시 답장을 하는 관계라고, 홀로 결정을 내린 내 판단이 달갑지 않다면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이런 자잘한 문자에 일일이 답장을 기다리며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텐데.

“남자랑 문자 하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지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내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배도빈이 술주정을 부렸던 당시에 지수는 내가 문자를 주고받는 이세정과 내가 잘생겼다고 한 사진 속 이세정, 그리고 나와 몇 번의 만남을 가졌던 이세정이 모두 동일 인물임을 깨달았다. 투덜거림이 시작된 것은 그즈음부터였다. 지수는 내가 특정 남자와 자주 교류한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남자 좋아해?”

지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들도 몇 없었다. 수치심을 느낄만한 요소는 없었으나,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에 나는 좀 난처해졌다. 지수와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동성애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 없었다. 지수가 게이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물음에 머뭇거리는 나를 본 지수가 대번에 미간을 좁혔다.

“난 가볍게 물은 건데 왜 대답이 없냐.”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냥 웃었더니 지수를 뭘 웃냐며 짜증을 냈다. 그러고서 가만히 걷기를 한참, 불쑥 입을 뗐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그거 상담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정신과나 비뇨기과 같은 데에서.”

“뭐?”

“아니, 다들 그런 곳에서 상담받지 않아? 동성애자도 그렇고 무성애자도 그렇고. 아, 며칠 전에 이형준이… 이형준 알지? 고등학교 동창. 걔가 갑자기 술 먹다가 지가 무성애자라는 거야. 에이섹슈얼이래. 에이섹슈얼 뭔지 아냐? 아무튼 그래서 오밤중에 그거 증명해보겠다고 걔 집에 가서 같이 별별 야동을 다 봤다? 끝까지 안 서서 오오- 이랬는데 미친놈이 그… 아, 뭔가 말하기 그런데. 나중에 그 야동 보여줄게. 그거 보고 걔가.”

“안 보여줘도 돼. 그보다 에이섹슈얼이 뭔데?”

뜬금포로 빠진 이야기에 박차를 가해주니, 지수가 신나서 대답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느낄 수는 있는데, 성행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뭐, 종류가 있대. 가벼운 스킨십은 괜찮은 사람, 그마저도 싫은 사람, 사랑해야만 섹스가 가능한 사람, 애인에게 맞춰주려고 하는 사람. 근데 이형준은 무성애자가 아니고 그냥 변태새끼야. 지가 섹스 못 하는 걸 가지고 그럴듯하게 핑계 대고 있어.”

“무성애자도 일단 서기는 하지 않을까? 성불구자가 아니잖아.”

“나는 모르지.”

지수는 방금 전 내게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질문했던 것을 잊어버렸는지 더는 묻지 않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오, 함경윤이 같이 공부하재.”

“1학년 아니야?”

“예쁜 애랑 같이 공부하는 거 좋잖아. 부른다? 카페 어디로 갈 거냐? 어디로 오라고 하지?”

나는 대충 고개를 돌려 카페를 찾는 시늉을 했다. 마침 몇 번 가봤던 브런치 카페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지수가 힐끗 보곤 휴대폰 액정을 두드렸다.

함경윤은 나와 지수가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창 시험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도착했다. 2층으로 올라오는 함경윤을 본 지수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함경윤이 지수의 옆자리에 앉아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혹시 방해했나요? 괜히 낀 거 아니죠?”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질하며 물은 함경윤의 말에, 지수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린 원래 사람이 많을수록 집중이 잘 돼.”

“하하하, 친구들 더 부를까요?”

함경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책 끄트머리에 적힌 참고문헌 제목에 의미 없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원을 두 번도 채 돌리지 못해 펜이 맛이 가버렸다. 허공에서 몇 번 흔들어보았으나 잉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나는 새 펜을 꺼내며, 아까부터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함경윤을 마주 보았다. 함경윤이 당황한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음료수는 잘 드셨어요?”

“음료수? 아…….”

작곡실에서 양형배에게 혼나고 있던 함경윤과 신입생 한 명을 도와주고, 그 답례로 음료수를 받은 적 있었다. 나는 음료수를 멋대로 강탈해가서 다 마셔버린 지수를 곁눈질했다. 지수가 눈을 피했다.

“네,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

“사실 더 비싼 커피 사드리고 싶었는데, 커피는 잘 안 드시는 것 같아서요.”

“자주는 안 먹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이래 봬도 선배님에 대해 아는 게 많습니다.”

스토킹을 했다고 고백하는 것치고 당당한 태도였다. 나는 께름칙한 미소를 지어보이곤 고개를 숙였다. 새 펜을 시험 삼아 휘갈겨보았다. 잘 나온다. 그대로 노트 정리를 시작했다.

“그게 뭔 말이야. 우채민은 딴 사람들이랑 말도 잘 안 할 텐데.”

“아, 게시판에 가끔씩 글이 올라오거든요.”

“무슨 글?”

“이거 보세요, 선배님.”

중단되는가 싶던 대화가 지수의 합세로 물꼬가 터졌다.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한 손으로 펜을 돌리며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쏘아보았다.

“글 보여요?”

“아, 이거 진짜로 우채민 얘기 맞아? 쟤가 찬양받을 정도로 잘생긴 건 아니지.”

지수가 나를 뜯어보았다. 함경윤도 그와 비슷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온몸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되게 헛된 망상이었는데, 두 사람이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장난으로 쓰는 글이니까 그냥 재미로만 봐요.”

“경윤아, 내 친구 비꼬지 말라고 해.”

“엥? 비꼬는 게 아니고……. 진짜 아닌데.”

함경윤의 휴대폰 화면을 슬쩍 훔쳐보니 게시판의 정체가 대충 짐작이 갔다. 신입생 때 저 어플을 깔고 감수성 충만한 글을 하나 올렸다가, 댓글로 실컷 놀림을 받은 뒤로 바로 어플을 삭제해버린 기억이 있었다.

당시 게시판에는 익명임을 앞세워 학과 내 부조리를 까는 글로 도배가 됐었다. 지금은 그런 글보다는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글들이 많은 건가. 복잡한 마음으로 함경윤을 쳐다보니,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쁜 뜻은 없어요. 그냥 잘생겼는데 대화해본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저도 선배님이 그때 연습실에서 나서주기 전까지만 해도 진짜 무서우신 분인 줄 알았어요. 막, 목소리 깔고 ‘휴대폰 깔고 앉았는데.’ 이러고. 대화해보려고 했더니만 말 섞기 싫다는 듯이 ‘갈게요.’ 이러고. 엄청 무안…….”

“알았어요.”

함경윤은 잔뜩 당황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가족인 누나는 내가 그다지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왔고, 지수 역시 내 외모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해왔으며, 학창시절에는 하필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이 다니는 예고에 진학한 탓에 오히려 비교를 당했었다. 더군다나 지금껏 나는 이성적인 관심을 받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내가 정말로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면 길거리 헌팅이라도 당해야 정상이 아닌가. 내가 거리에서 받은 관심이라곤 기껏해야 두 부류뿐이었다. 대뜸 외모 칭찬을 늘어놓으며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거나 길을 물어보며 은밀하게 신상을 캐묻는 사람들이거나.

아무튼 신입생들이 뒤에서 나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인 문제였다. 휴대폰을 비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일부터 좀 꾸미고 다닐까. 고등학생 때에 비하면 엄청 꾸민 건데. 더군다나 이세정에게 관심이 생기고부터 신발까지 고심해서 고르는데. 왠지 몰려오는 서운함에 괜히 구레나룻을 문질러보다가 억지로 책을 보았다. 글자는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에 있다가는 쓸데없이 시간만 축낼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마저 공부를 해야겠다. 가방을 열고 책을 집어넣었다. 그때, 주의를 끄는 이름 하나가 귓가에 박혔다.

“양형배 진짜 죽었대?”

“아뇨, 죽은 건 아니고 병원에 입원했대요. 교통사고를 당해도 하필 뺑소니를…….”

“양원도?”

“네, 서로 다른 날 당했는데 똑같이 뺑소니였대요. 범인은 아직 안 잡혔고요.”

“와, 무슨 운명이 이명동음적으로 흘러가.”

너무 놀란 나머지 호흡마저 얼어붙어 버렸다. 펜을 집어넣던 손길을 멈추고,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어쩐지 시험 보러 안 오더라. 언제까지 안 오는지 들은 거 있어?”

“음, 종강까지?”

“그럼 곧 오겠네. 아, 개강하고 오려나.”

“아뇨. 이번에 말고 12월 종강이요. 전치 12주인가? 그렇게 들었어요. 말이 12주지, 치료받고 그러면 몇 달은 더 걸릴걸요.”

“생각보다 심각하네. 어디 다쳤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면 재활해도 못 걷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수와 함경윤의 목소리가 황혼처럼 멀어졌다. 흐릿한 음성이 몇 갈래로 쪼개져 한동안 정신이 없더니, 녹음하지 않은 대화가 돌연 머릿속으로 들어와 멋대로 반복되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양형배를 본 기억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우스웠다. 항상 시비를 걸어대던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는데, 이상하게 여기기는커녕 그저 회개했나 보더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전치 12주, 그게 어디 쉽게 나올 수 있는 숫자던가. 양형배와 양원이 아무리 밉다고 한들 진심으로 나쁜 일을 당하기를 기도한 적은 없었다. 고장 난 것처럼 떨리는 눈꺼풀을 몇 번 끔뻑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수와 함경윤에게는 변변한 인사도 채 남기지 못하고 카페 밖으로 나왔다.

몇 년은 지난 일이다. 내 어린 날에 어머니가 뺑소니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얻은 트라우마는 평소에는 잔잔한 죄악으로 웅크려 있다가 이런 일이 있을 때면 가감 없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스물다섯하고도 절반을 지나온 시점에서 연약함이란 좋은 밑거름이 아니라 성장을 발목 잡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결함을 완성 시킨 그 시간들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트리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죄송한데, 그냥 만날까요?]

한 시간도 안 되어 말이 바뀌었으니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세정을 만나야 했다. 별 사이 아닌 관계라고 해도 나를 달래는 것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아니, 이세정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세정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제야 현재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 시간까지 한참 남은 시간. 답장도 못 할 정도로 바쁘다면 이 이상의 문자는 별 소용이 없을 테다. 우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지하철에 올랐다.

***

시끄러운 시공 소리가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줄은 몰랐다. 음악으로 포장한 소음이 어째서 수요가 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옆집 비밀 요원들의 비밀 기지 건설 작업이 부디 순탄하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몇 시간 동안 딴 길로 생각이 빠질 새 없이 공부에만 열중했다.

휴식 시간 즈음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이세정의 전화를 받았다. 이세정은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으며 염려를 표했다. 사실 너무 늦은 연락이라 이제 와서 무언가를 요구하자니 조금 떠름한 감이 있었다. 저 공사하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한 탓에 기막히게도 집중이 잘 되던 차였고, 그래서 이세정을 당장 만날 필요가 없었다.

“딱히 없습니다.”

-……만나자며.

“아깐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공부하고 싶습니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침묵 속에 황당함이 녹아있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나를 어이없이 여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번호 하나 보낼 테니까 이젠 거기로 연락해요.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말에 예? 하고 되물었다. 이세정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주었다.

“번호 바뀌셨어요?”

-더 자주 쓰는 번호가 있어요.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이세정이 직접 준 번호가 화면에 분명히 떠 있었다.

“그럼 이 번호는 뭡니까?”

-학생 때 쓰던 거예요. 지금은 잘 안 쓰고.

“막…… 메신저 프로필 사진도 막, 막 바뀌고 그러던데.”

-그래요?

그래요? 라니. 왜 나한테 되묻는 거지.

-어디에요?

“저 집입니다. 공부하고 있어요.”

-우채민 씨 집으로 가도 돼요?

“예.”

나 방금 저 말에 긍정했나. 뒤늦게 말을 정정하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겨버렸다. 왜 예고도 없이 끊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에 집에 손님을 들인 적이 없어 뭘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 난감해졌다. 다행히 집 안은 깨끗했다. 누나가 항상 안고 자는 누런 인형이 거실에서 굴러다니고 있어 그것만 누나 방으로 돌려놓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문득 여전히 내 침대에 누워있는 꽃이 눈에 들어왔다. 이세정에게 받은 프리저브드. 꽃을 들고 현관 앞으로 가 잘 보이는 곳에 두었다. 아니, 이건 너무 대놓고 ‘나 잘 있어요.’ 하는 식 아닌가. 꽃을 주워들고 거실을 서성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에게 줄 여물처럼 보였다. 어떡하지. 삼십 분 넘게 고민을 하다가 도로 내 방으로 가지고 갔다.

또 뭐가 필요할까. 주방 쪽을 지나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대접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함이었는데, 냉장고 상태를 보니 우선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밖으로 꺼내져 있는 과일들을 서랍 안으로 죄다 밀어 넣고, 우유들을 줄지어 정렬했다.

정신 차려보니 내가 모든 반찬 통의 각을 재고 있었다. 뒤늦게 손을 떼어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손목시계를 살폈다. 이세정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으나 집 안에 간식이 따로 없어서 편의점에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지갑을 챙겨 들고서 밖으로 나왔다. 미처 다 빠져나오기도 전에 누군가와 몸이 부딪혔다. 한 발 뒤로 뺀 채 이세정을 올려다보았다.

“……주소를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이세정이 내 말을 무시하고 옆집을 힐끔거렸다.

“시끄럽지 않아요?”

이세정을 따라 옆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인식하지 못했던 소음이 다시금 귓가를 때렸다. 아차 싶었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오신 분들이 몇 주째 공사 중이세요. 많이 신경 쓰일 텐데, 그냥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선물도 가져왔는데.”

이세정이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나는 마음대로 닫히지 않게 현관문을 어깨로 받친 상태로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차 키였다.

“소음 많이 없는 차예요. 며칠 동안 고심했어요.”

“……아.”

헛웃음이 났다. 차 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가 어이없이 웃고, 유지비가 얼마나 들까 하는 생각에 또 웃고, 운전면허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한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싫으면 다른 걸로 사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고…….”

“아니면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줘요?”

“아니요…….”

“부담 가질까 봐 한 대만 샀는데, 받아주면 안 돼요?”

비싼 선물을 주면서 받아달라고 부탁까지 하니 안 받기도 뭐 했고, 그렇다고 덥석 받기도 뭐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옆집을 곁눈질한 이세정이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우선 문을 닫고서 소파로 가 앉았다. 이세정을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차 키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떴다. 이 차 키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음 없는 상대에게도 이런 선물을 아무렇지 않게 해줄 수 있을 만큼 돈이 넘쳐나는 사람이라서 함부로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고민은 더 길어지지 못하고 초인종 소리에 끊겼다. 문을 열어주자, 이세정이 들어왔다. 나는 곧장 문을 닫으려다가 어느 순간부터 쥐 죽은 듯 잠잠한 옆집을 의문스럽게 훑어보았다. 왜 갑자기 공사가 멈추었지. 이쯤에서 멈춰줘서 다행이긴 한데.

“어디 갔다 오셨어요?”

이세정을 소파로 안내하며 물었다.

“그냥, 담배 한 대 피우러.”

선물 하나 가지고 내가 너무 답답하게 굴어서 속이 터졌나 보다. 이세정의 눈치를 살피며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이세정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차 키를 보곤 입을 열었다.

“아직도 고민 중이에요?”

“아…….”

나는 손을 뻗어 차 키를 한 번 쓸어보았다.

“이거, 왜 주신 건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이세정과 마주 본 순간, 나는 정말로 무언가 속셈이 있어서 준 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아무 뜻 없이 줬다면야 내 쪽에서 괜한 부담만 짊어졌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주신 거예요?”

“원래 선물 받으면 다들 그래요?”

“예?”

“누구한테 선물해본 게 처음이라 반응이 익숙지가 않네요.”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유지하지도 못할…….”

“그건 내가 내고.”

“……아무튼요.”

차 키를 한 번 쳐다보는가 싶던 이세정이 몸을 돌려 내 등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통에 나는 아주 느리게 이세정 쪽으로 다가갔다.

“의미 두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무슨 의미요?”

“키스하고 싶어서 준 거예요.”

나는 하하…… 하고 딱딱하게 몇 번 웃었다. 웃음이 끊기고부터는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침묵이 뒤따랐다. 내 등을 끌어안은 손 때문에 몸도 채 돌리지 못하고 이세정의 눈치만 살폈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눈을 보자 곧 위화감에 휩싸였다. 뭘까? 뭐지? 억지로 궁금증을 짜내어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썼다.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뭐든 다른 데에 신경을 쏟아붓고 싶었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좋은 핑곗거리가 생각났다.

“번호…….”

“응?”

“번호 주신다면서. 새 번호요. 아직 안 주셨어요.”

흠 하나 없는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지고, 곧 등이 허전해졌다.

“휴대폰 어디 있어요?”

“여기요.”

휴대폰을 건네주었더니, 이세정이 기존에 있던 번호를 지우고 새 번호를 입력했다. 휴대폰을 다시 받아와서 메신저를 동기화시켜보았다. 이세정의 이름이 사라졌다.

“메신저 안 하세요?”

“그건 재학 중일 때만.”

“프로필 사진 막 바뀌고 그러던데. 며칠 전에도.”

“아, 도빈이 짓인 것 같아요. 가끔씩 바꿔줘야 의심하지 않는다면서.”

“의심이요? 누가요?”

“쓸모없는 인맥이요.”

이세정은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었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의문만 늘어갔다.

“쓸모없는 인맥을 굳이 관리해야 할까요?”

이세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게요.”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조금만 덜 잘생겼더라면 심장도 조금만 덜 빠르게 뛰었을 텐데. 눈길을 놓을 데 없어 허공을 더듬다가 이내 차 키를 쳐다보았다.

심장이 그나마 진정이 되니,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쓸모없는 인맥을 저장해놓은 휴대폰. 방금 전까지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학생 때 쓰던 번호를 왜 저한테 주셨어요?”

나 또한 쓸모없는 인맥이었냐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 잘못된 질문이기는 했다. 당시 나와 이세정은 거의 초면이나 마찬가지였다. 별것도 아닌 걸로 마음이 상하니, 이를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서운해요?”

“그냥 조금이요…….”

이세정이 내 어깨를 살살 더듬었다. 아까 분명히 떼어냈던 팔이 어느새 다시 내 등을 감싸 안고 있었다. 차 키를 보던 시선이 흔들렸다. 목은 움츠러들고, 가라앉았던 심장이 지진처럼 울려댔다. 아, 서운했구나, 하고 미소를 지은 이세정이 나를 끌어당겼다. 한 번 마주친 시선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세정이 깊은 눈동자로 나를 빨아들였다. 얼굴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얼어붙어 있다가 코가 닿자,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무슨 신호인 줄은 안다. 나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는데, 빌어먹을 수줍음이 문제였다.

“왜 피해요?”

낮은 속삭임에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나도 모르게 피하기는 했는데,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입맞춤이 처음이라서 뭔가 좀, 좀.

어깨를 매만지는 손길은 끝까지 부드러웠다. 슬쩍 시선을 올렸다가 무슨 용기를 받았는지 목을 위로 당겼다.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짧게 입을 맞추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아까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세정은 지금껏 한 번도 나에게 성적인 눈길을 보낸 적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던 건 그 때문이었고, 용기를 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세정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께만 노려보고 있는데, 그의 손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채민아, 고개 들어봐.”

시선이 멋대로 이세정에게 향했다가 별안간 감겼다. 입술이 부드럽게 나를 덮쳐왔다. 예고처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몇 번, 이내 입술이 지그시 눌렸다. 넘어질 듯 말 듯 뒤로 고개가 기울었다. 뒤통수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힘 때문에 더 이상 눌리지 못하고 벌어진 입술이 단번에 잡아먹혔다. 입술 채로 집어삼켜 졌다가 떼어지며 숨 가쁜 호흡이 잇따랐다.

나는 이세정의 어깨를 짚었다. 고개가 절로 비틀어지며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작게 떴다가 꾹 감으면서 입술까지 꾹 닫았더니, 이번에는 턱이 잡혔다. 내 안을 가득 채운 혀가 입안을 매끄럽게 더듬었다. 두근거림이 입안까지 전이된 것처럼 혀가 지나치는 곳이 몹시 쓰라렸다.

입술 말고 다른 곳은 마비된 것처럼 느낌이 없었다. 혀와 점막과, 입술에서 오는 감각이 너무 거세서 내가 어느새 소파 위에 길게 누워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 위로 오른 이세정이 고개를 움직였다. 코가 슬쩍 닿았다가 떨어지며 잠시 다문 입술이 벌어졌다. 재차 밀려들어 오는 혀를 받아냈다. 호흡할 구간을 놓친 탓에 중간중간 헉, 헉, 하고 짧은 신음이 내뱉어졌다.

한 팔로 이세정의 목을 껴안았다. 이세정이 더욱 깊게 들어오며 내 입술을 깨물었다. 혀도 한번 깨물었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내려 내 목을 또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생경한 감각에 눈을 뜨며 인상을 썼는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세정과 눈이 마주쳤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가늘게 뜬 눈. 이세정이 나를 홀리고 있었다.

이세정이 고개를 내렸다. 쇄골과 목 중간 어디쯤을 사납게 물었다. 그러고는 그렇게 하면 이 따끔거림이 잦아들기라도 하는 양 목덜미를 부드럽게 훑었다.

“아…… 으, 읏.”

목을 움츠렸다. 입술에만 모여 있던 감각이 목 쪽으로 옮겨지고, 숨이 멋대로 비틀린 채 뱉어졌다. 잘게 떨리는 팔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이세정이 애무하는 목덜미가 후끈 달아올랐다. 다리가 얽혀있어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세정의 품에 갇힌 상태로 가늘게 호흡했다.

그때, 이세정이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스르르 감기는 눈이 번뜩 뜨였다. 셔츠를 벗겨 내려는 손길은 크나큰 당혹감을 가져왔다.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이세정의 어깨에 손을 짚어 밀어냈다. 이세정이 슬쩍 나를 보더니, ‘아.’ 하고 감탄을 흘렸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건데도 마치 데일 것 같았다.

아직 서로 나눈 호흡이 주변에 끈적끈적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 나와 이세정은 한참이나 눈을 맞췄다. 시간이 지나도 뜨거움은 달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한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까 전 카페에서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모조리 흩어졌다.

한동안 서먹서먹하게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셔오는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강박증 환자처럼 손끝을 달달 떨었다. 그래도 침묵만은 싫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고자 머리를 굴렸다. 초조하게 옆을 돌아보니 이세정이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세정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사로잡혔던 내 시선이 천천히 풀어졌다. 나는 오갈 곳 없는 눈동자를 구태여 차 키에 고정시켰다.

“저는 뭐 해드려야 돼요? 집 해드려야 하나.”

“뭐가요.”

“차 주셨잖아요. 답례하려고요.”

이세정이 한쪽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그러더니 곧 간지럽게 웃었다. 나는 미인의 웃음에 면역력이 강한 사람처럼 표정 관리를 했다.

“뭐 주게요?”

“혹시 바이크 말고, 다른 좋아하는 거 있습니까?”

“아무거나 줘요. 좋아해 볼게요, 그거.”

“예? 아니…… 좋아하는 거 없으세요?”

이세정은 깊이 생각할 새 없이 대꾸했다.

“없어요.”

“바이크는…….”

“이건 취미의 일부죠.”

나는 이세정의 집에 전시되어 있던 수많은 바이크들을 떠올렸다. 정비소 건물도 함께 떠올렸다. 그것들을 구경시켜주며 신나 보였던 이세정의 모습도 돌아보았다. 좋아하니까 취미가 되었을 텐데 왜 부정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엄청 좋아하지 않는데, 수집하고 직접 정비하고…… 그런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세정은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막 진동이 온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화면을 힐끗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관심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그게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수단이에요. 남들과 비슷해 보이려고 만든 취미.”

“……모르겠다.”

나는 음악 감상도 하고, 작곡도 하고, 만화책도 읽고, 퍼즐도 맞추고, 펭귄 다큐멘터리도 즐겨본다. 그에 반해 이세정의 취미는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고작 하나뿐인 취미조차 수단에 가깝다니. 대체 남들과 비슷해 보이려는 노력이 무슨 소용일까.

갑자기 이세정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야겠어요.”

“왜요…….”

아쉬운 소리를 냈더니 이세정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가지 말라고 조르는 거예요?”

“아니에요. 가세요.”

“일정이 잡혀있어요.”

회사 생활도 착실히 안 하면서 무슨 일정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세정이 말했다.

“나도 더 있고 싶은데, 화가 많으신 분이라.”

이세정은 머뭇거리며 내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나 어정쩡하던지, 꼭 교단 의식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이세정은 나오지 말라는 한마디를 남기곤 집을 나가버렸다.

<2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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