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비 (2)(3권) (7/15)

2.비 (2)

대형 운동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광활한 축구장. 그 뒤로 서서히 전광판과 관중석, 그리고 트랙이 보였다. 나는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벌써부터 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운동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땡볕 아래에서 달리기를 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세정도 달리기를 취미로 둘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이크를 탈 때 말고는 대부분의 동작이 느긋했으니까. 그런데 예상과 달리 트랙 한쪽에는 자전거 두 대가 준비되어있었다.

“탈래요?”

직선으로 쭉 뻗어있는 트랙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자전거 타면 경비 아저씨가 잡으러 오는데. 생각과 달리 몸이 멋대로 자전거 쪽으로 다가섰다. 가까이 있는 자전거의 앞으로 걸어가 디자인 따위를 관찰하고 있는데, 이세정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쥐고 다른 자전거의 핸들을 잡게 했다.

“이건 브레이크가 없어요.”

“아.”

나는 한 걸음 옆으로 옮겨 내 자전거의 핸들을 만져보았다. 안장이 핸들에 비해 상당히 높고, 몸통에 바른 은빛이 세련됐으며, 선이 하늘하늘 가늘었다. 가는 몸통에 우아한 글씨로 쓰인 상호명을 보니, 이세정의 아버지 쪽 회사의 제품 중 하나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코트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술 도용 소송 건도 바이크를 만드는 주요 부품 문제였다. 코트에서 다루는 바이크들은 자전거나 오토바이, 종류 구분할 것 없이 모두 명품이라서 나는 마음껏 운전을 하다가 혹여 망가지면 어쩌지 걱정되었다.

“이거, 많이 비싸요?”

“아니요. 팔천 정도.”

이세정이 바닥에 있는 헬멧을 내 머리에 단단히 씌워주며 말했다. 나는 이어 팔꿈치와 다리 보호대까지 착용시켜주려는 이세정을 말리고, 자전거의 핸들에서 손을 뗐다.

“바이크가 아니고 자전거가요?”

“산 게 아니고 받은 거예요.”

“그래도 너무 비싸잖아요.”

이세정은 내 말을 들어주는 시늉만 하곤 막 생각난 듯이 물었다.

“컨셉 바이크 만들 건데, 만들면 그것도 하나 줄까요?”

바이크에 대해 잘 몰라서 뭘 만든다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준다는 말에 고개부터 저었다.

“……저 바이크 못 탑니다.”

“바이크는 타는 게 아니고 관리하는 거예요.”

이건 무슨 말이지. 돌 수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세정은 보호대를 바닥에 내려놓고 제 자전거의 핸들을 잡았다. 그대로 훌쩍 올라 느긋하게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안 어울릴 줄 알았더니 별로 어색함이 없었다. 이세정은 얼마 가지 못하고 내 앞으로 되돌아왔다.

“안 타요?”

“……다칠까 봐 걱정돼서.”

나 말고 이 자전거가. 뜻 전달이 잘못되었는지 이세정이 네 발 자전거를 가져다주어야겠다고 비웃었다. 나는 자전거에 즉시 올라서 앞서 달리는 이세정의 뒤를 따랐다.

속도를 내기 전에 시험 삼아 브레이크를 잡아봤다. 이세정이 탄 자전거엔 브레이크가 없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 건 잘 잡혔다. 나는 땅에 발을 대어 잠시 옆으로 기운 몸의 중심을 잡곤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핸들을 꺾어 커브를 틀면서 중학생 때 지수가 픽시를 사서 자랑을 하고 다녔던 일을 곱씹었다. 당시 지수는 매일 같이 공원을 출퇴근하며 윌리 연습을 하겠다고 난리를 쳐댔다. 결국 머리를 다치는 것으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때 지수가 약간 부러웠다. 내가 작곡을 쭉 전공하게 될 줄도 모르고 내 손이 무슨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애지중지하느라 함께 뛰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뭐, 다쳐도 상관없겠지. 나는 내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세정의 옆으로 성큼 다가섰다. 페달을 두 번 돌린 뒤 미끄러지듯 트랙을 탔다. 뜨거운 햇살과 달리 바람은 제법 시원했고, 레이싱 카와 오토바이처럼 극단적인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이세정의 옆으로 붙으면서 나는 속도를 줄였다.

“이거 기분 좋아요.”

“사이클 좋아해요?”

“아니요. 그냥 오랜만에 타니까 좋습니다.”

내 말에 응답하듯 이세정이 간지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억보다 빠른 속도로 심장이 뛰었다. 나 그때, 레이싱 카를 타고서 이세정을 쳐다보던 그때, 심장이 마구 떨렸었는데.

판판한 트랙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이 상황에 위험한 구석이라곤 내 감정 하나뿐이었다. 그 무엇도 나를 위협할 수 없는 지금, 심장이 뛰고 있는 이유가 너무나 명백하여 나는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앞바퀴 세울 수 있어요?”

뭐든 신경을 돌려보고자 구태여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예전에 친구가 그거 연습하다가 머리 찧은 게 생각나서…….”

“내가 다쳤으면 좋겠어요?”

“아,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에요.”

“손 아픈데.”

이세정이 한쪽 손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소매 사이로 불긋한 상처 자국이 보였다. 나는 매우 놀랐다. 손목을 다쳤단 걸 잊어버린 건 아니었지만 이세정이 약한 소리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심하게 자해를 했는데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더 이상했다. 제대로 치료조차 안 받았으니까 오죽할까. 나는 어영부영 직선 코스를 쭉 달리다가 커브 길 앞에서 끽, 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간 이세정이 뒤늦게 자전거를 멈추고 돌아보았다.

“저기.”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이세정에게 걸어가면서 목소리를 냈다.

“그냥 타기엔 심심하고, 내기하실래요?”

“뭘요?”

“세 바퀴 먼저 돌고 온 사람에게 소원 하나 들어주기.”

그러자 이세정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단번에 죽어 나갔다.

“소원?”

“예. 무슨 소원이든 꼭 들어주는 겁니다.”

잠깐 구겨진 눈살이 펴지더니 이세정이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무슨 소원을 말하고 싶어서 내기를 걸어요?”

“…….”

내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경기였다. 지금 소원을 말하면 분명 그에 대한 이세정의 답을 표정으로 미리 듣게 될 것이고, 그것이 만약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답변이라면 나는 기운이 빠져 경기에 제대로 임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답하기를 망설이자, 이세정은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참을 무안하게 말이 없더니, 고개를 돌렸다. 뭔가 내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스타트 할게요. 출발.”

스타트 신호부터 내고 출발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부정 출발은 아니다. 약은 수법임은 분명했지만. 나는 미친 듯이 페달을 밟으면서 뒤를 힐끔 보았다. 역시나 정신을 놓고 있던 이세정은 출발이 느렸다. 벌써 꽤 많이 차이 난 거리에, 나는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유롭게 커브를 돌면서 다시 한번 뒤를 힐끔 살폈다. 그런데 한 바퀴도 채 돌지 않았는데 이세정이 내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의 가격대는 성능이 아니라 디자인과 브랜드가 결정한다지만, 어쨌든 내 자전거는 팔천만 원짜리였다. 출발이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따라잡힌 것을 보니 아마도 이세정의 자전거는 이 억쯤 되나 보다.

나는 이세정이 나를 치고 나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트랙을 왔다 갔다 하며 나를 다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추월하지 말라고 암묵적인 협박을 한 것이다. 출발할 때부터 편법을 썼으니 이 정도 꼼수는 양반이었다.

골대를 지났다. 출발선이자 도착 지점이었으나 아직 두 바퀴가 더 남아있었다. 나는 최대한 속도를 올렸다. 이만큼 속도 있게 달린 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하게도 공포심이 찾아왔다. 잠깐 주춤한 사이, 이세정이 나를 완전히 따라잡았다.

내 옆에서 속도를 맞춰 달리던 이세정이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아, 나는 이세정을 무시하고 정면만 보았다. 이세정은 나와 대화하기를 포기했는지 나를 지나쳐 거리를 점점 벌렸다. 이세정은 자꾸 멀어졌다. 더 이상 경기에 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만큼 거리가 벌어졌음에도 계속 멀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핸들을 비틀었다. 트랙에서 빠져나와 축구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출발선이자 도착 지점인 녹슨 골대가 있는 장소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간발의 차로 내게서 승기를 빼앗긴 이세정이 자전거를 던지다시피 하며 내려왔다. 나도 자전거를 급하게 멈추어 세우곤 이세정에게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꼭 이겨야 하는 이…….”

헬멧이 쑥 벗겨지고, 입술 속으로 나머지 언어가 먹혀들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강한 손길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나는 기울이지는 구름을 보았다. 나를 삼킨 입술이 속을 까맣게 태웠다. 말라있는 살들이 단번에 말랑해지며 입술이 쉽게 열렸다. 나는 미끈하기도 까칠하기도 한 혀를 받아들이며 타액을 쭉 빨았다.

“하……아, 웁.”

이세정은 여린 살을 문지르며 내 짧은 호흡을 조금씩 먹어치웠다. 뜨거운 햇볕 때문인지 살덩이가 내 안을 꾹꾹 쑤셔댈 때마다 사방이 어질어질했다. 입술은 곧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목 주변을 빨았다. 턱 바로 아래부터 목까지, 나는 탄식과 같은 호흡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어금니에 힘을 주어야 했다. 참지 못하고 이세정의 가슴을 세게 밀었다. 밀려난 이세정이 나를 짜증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뭐 하자는 거예요.”

“……뭐, 뭘요.”

“우채민 씨 소원 말이에요.”

평소엔 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것처럼 굴지 않았던가. 청개구리도 아니고 내 쪽에서 먼저 소원을 요구한다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나는 이세정이 가지고 있는 주식의 일부를 양도받을 생각도, 한강이 보이는 펜트하우스를 선물 받을 생각도, 그리고 마스터키를 수집할 생각도 없었다.

“그, 그냥.”

“그냥?”

나는 바닥을 짚고 있는 이세정의 왼쪽 팔을 아주 조심히 잡았다.

“손목 제대로 치료받으셨으면 좋겠다고, 그, 그거 말하려고…….”

소매를 걷어냈다. 밴드 하나만 달랑 붙여져 있는 손목. 기껏해야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밴드로는 붉은 빗금을 완벽하게 감출 수 없었다. 다시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이세정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인상을 썼다. 걱정이 되어서 벌인 일인데 이런 반응을 내비치니 서운해졌다.

“승부욕 장난 아니네요. 반칙 안 했으면 못 이길 뻔했습니다.”

웃음으로 무마하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자, 이세정은 그대로 물러나서 내 바로 옆에 드러누웠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햇볕을 피해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더위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찜질방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이세정에게 어쭙잖은 말솜씨로 설명하는 대신 말없이 이 더위 속으로 데려왔어야 했다.

후,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숨과 함께 머릿속에서 현기증이 돌았다. 그 정신없는 때에 문득 이곳으로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겨우 눈을 뜬 채 고개를 돌리니 멀리 장 비서님의 모습이 보였다. 고용주가 못돼 먹어서 휴가를 주지 않는 건지, 워커홀릭이라서 스스로 주말을 반납한 건지, 어떤 이유이던 장 비서님을 보니 퍽 반가웠다.

“우채민 씨가 쓰러져서 인공호흡을 하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민망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은 장 비서님이 막 일어선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었다. 따갑게 찌르던 햇살이 한순간에 차단되었다. 다만 우산의 그림자가 이세정에게는 닿지 않아서, 나는 우산대를 넘겨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제가 합니다.”

장 비서님이 내 손을 쳐냈다. 전부터 그러더니, 반드시 자신이 우산대를 잡아야 하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는 이세정의 바로 옆자리로 슬금슬금 옮겨갔다. 우산이 나를 따라오더니 이내 이세정의 얼굴까지 가렸다. 어두워진 이세정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이세정이 무표정으로 있을 때는 도무지 산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이세정의 팔을 잡자 그가 흘끗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남몰래 안심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 소원 진지하게 쓴 건데.”

“…….”

“근데 갑자기 왜 달려들었어요?”

“헤어지자는 줄 알고.”

헤어지자는 말이 거창하게 느껴져서 말문이 막혔다. 이미 내가 한 번 언급한 바가 있었지만 그 뒤로 관계가 애매해져서, 내가 이세정이랑 뭘 하고 있는지 헷갈리던 차였다. 헤어짐을 입에 담는 것을 보면 이세정은 나랑 연애를 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도망가려고 마음먹었던 것들이 죄다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더워서 그런가. 짜증 나지 않아요?”

이세정은 그렇게 말하면서 우산 끄트머리를 잡아 옆으로 던졌다. 차단되었던 햇볕이 쏟아졌다. 방금 전까지 별로 짜증 나지 않았는데 지금 좀 그래졌다.

“눈부시면 나한테 와요.”

나는 내 눈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이세정을 힐끔 보았다. 해가 가려졌고 눈부심이 사라졌지만, 우산보다 작은 면적으론 얼굴에 닿은 더위까지 가져갈 수 없었다. 시야만 가린 차단막 속에서 내 얼굴은 여전히 뜨거웠다.

“내가 가려줄게.”

어지러울 만큼 더웠다. 꼭 이세정이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당근 좀 사와. 집에 당근이 읍당]

빌라 안으로 발을 디뎌서야 뒤늦게 누나의 문자를 발견했다. 그대로 뒤를 돌아 빌라 밖으로 나가려다가 주춤했다. 근처 계단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에 이세정이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직 차가 그대로 있을지도 몰랐다. 조심조심 치료를 해주고 빌라 앞에서 인사까지 했는데 다시 마주치기 민망했다.

계단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용기를 내 밖으로 나가보니, 검은 차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근처 슈퍼에서 당근을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누나에게 건네려다가 식탁 위에서 김밥용 김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김밥 쌀 거야?”

“응. 좀 많이. 너 김밥 좋아하지?”

“응.”

아마도 내가 김밥을 안 좋아한다는 사실은 지수만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프라이팬에 무언가를 볶고 있는 누나를 대신해 당근의 랩핑을 벗겨주었다.

“아빠가 용돈 부쳤더라. 너한테도 왔을 텐데……. 확인 안 해봤어?”

나는 정말이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즉시 확인해보니 내게 온 건 없었다. 누나가 전반적인 생활비를 담당하기 때문에 누나에게만 보낸 것 같다. 얼마나 받았느냐는 누나의 물음에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중고를 팔아 여행 자금과 피규어 값을 마련할 셈으로 노트북의 사양을 확인했다. 중고가를 검색해보니 이건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다. 외관 흠집의 작은 하자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프리미엄을 붙여서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찍어 중고 사이트에 올렸다.

***

누나가 일기예보를 확인하곤 욕을 했다. 날씨를 고려해서 휴가를 썼는데, 다시 보니 출발일이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날이라는 것이다. 누나는 김씨 놈(누군지는 모른다)과 조율을 하는 과정에서 순순히 양보를 해줄 것을 그랬다며 우울해했다.

왜 이틀 내내 김밥만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 이유를 물어보려고 거실로 나갔던 나는 누나의 옆에 앉아서 한참 동안 넋두리를 들어주어야 했다. 중간에 시계를 확인했다. 누나의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김밥을 누나의 입에 강제로 넣어주곤 말을 끊었다.

“비 와서 더 분위기 있는 여행이 되겠지.”

누나가 내 어깨를 팍팍 치며 입을 손으로 막았다. 김밥을 씹으면서도 누나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신발 젖고, 옷 젖고, 가방 젖고, 축축하고, 기분 처지고. 그래, 완전 분위기 있네.”

“어차피 비 내리는 곳은 여기뿐이잖아. 공항 갈 때까지만 괴로우면…….”

“그러고 보니 푸켓도 우기야. 여기도 비, 거기도 비. 친구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나 왜 이렇게 멍청하고, 정신없니?”

가끔 누나의 오락가락한 감정선을 따라잡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행의 설렘을 잔뜩 들떠있었는데, 지금은 갑작스레 여행이 취소된 사람처럼 성질이란 성질은 죄다 부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들어주다 불쑥 든 생각에 눈썹을 휙 치켰다.

“누나 나가는 날 비 와?”

“아이 씨!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말했어!”

누나의 손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비 오는 날은 이세정이 못 나가는 날이었다. 여행을 언제 가야 할지 고민했는데, 누나랑 같이 집을 나서면 될 것 같았다.

“난 진짜 화창한 날 갈 생각이었단 말이야.”

“누나, 생각해봐. 놀 땐 비에 얼마나 젖던 그냥 즐겁기만 하잖아. 정장 입고 우산 쓰는 것보다 수영복 입고 우비 입는 게 훨씬 재밌을걸.”

“그야 그렇지.”

누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가 다시 물었다.

“덥겠지? 여기보다 더울까?”

“왜 이래, 누나……. 그래, 여기서 짜증 다 풀고 여행 가선 재밌게 놀아.”

나는 나를 실컷 때리라며 허수아비처럼 두 팔을 들었다. 코웃음을 친 누나는 못다 한 출근 준비를 하겠다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나는 누나의 팔을 잡았다,

“누나.”

“뭐.”

“차 조심해.”

성질이 급한 누나가 종종 횡단보도를 이르게 걷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 또 얼마나 조심성 없이 행동하려나, 겁이 나서 기껏 말해주었더니만 누나는 대답도 없이 출근 준비를 하러 갔다. 너무 간섭이었나. 나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지수에게 갈 준비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중고 사이트에 올려둔 내 글을 확인했다. 최대한 빨리 팔아 넘기기 위해 노트북의 가격을 욕심보다 낮게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으로 깎아달라는 사람(무려 쿨거래를 하자고 했다), 작더라도 흠집이 났으니 삼십은 더 깎아야 하지 않느냐는 사람, 먼저 택배로 부치면 상태를 보고 돈을 보내겠다는 사람 등 아직도 중고 사이트에서 오는 쪽지들은 거의 쓸데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나마 이야기되고 있는 사람은 다른 거래들도 동시에 알아보고 있는 듯 성능을 비교하기에 바빴다.

여행 날까지 노트북을 팔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가격을 조금 더 낮추고는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그런데 지수에게 곧 도착한다는 문자를 보낸 것치고 버스에 금방 오를 수가 없었다. 나는 사색에 잠긴 사람처럼 아주 많은 버스들을 떠나보냈다. 정류장에 언뜻 비친 내 얼굴은 내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서늘했다.

승강기에 갇힌 적은 없으나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승강기를 피해 다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을 먹는 일은 아주 불편한 일이었다. 십몇 층의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기어코 발이 삐고 나서야 승강기를 탔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가 않아서 안도했던 기억이 있었다.

나는 오십 분을 훌쩍 지체해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타야 할 버스에 알맞게 올랐고, 자리에도 무사히 착석했다. 눈까지 감았다. 감은 눈은 절대 뜨지 못하도록 단단히 힘을 주었다. 어딘가를 붙잡고 버스가 어디쯤 왔는지 안내방송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얘.”

얼마 안 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오한이라도 든 듯 몸을 떨었다. 눈을 뜨니 웬 아주머니께서 땀을 왜 이렇게 흘리느냐며 휴지를 내밀었다. 얼결에 휴지를 받아들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덜컹거리는 차내는 쉬이 진정하기에 좋은 공간이 아니었다.

아, 미치겠다, 진짜.

나는 휴지로 식은땀을 닦고는 몸을 웅크렸다. 속이 울렁울렁 파도쳤고, 핏줄이 벌겋게 설 만큼 주먹에 힘을 준 탓에 손목까지 아려왔다. 일정 간격으로 심호흡을 했다. 나는 겁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버스 사고로 집에 왔을 때 악몽을 꾸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 그래. 나는 이제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 버스 사고도 천천히 극복하다 보면 괜찮아질 것이다. 숨을 쉬었다. 후우, 후우, 내 숨을 들으니까 점차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크게 기울며 앞 좌석에 머리를 박았다. 여러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가 난 거다. 사고가, 또. 나는 머리가 하얗게 질려서는 가장 먼저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어서 열어달라고 문을 쾅쾅쾅 두드렸다. 내 성화에 뒤쪽 문이 제일 먼저 열렸고, 나는 어느새 몰린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지며 정신없이 버스를 빠져나왔다.

나무 근처로 달려갔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시야마저 온전치 못해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아까 먹은 김밥을 쏟아낼 듯 허리를 숙이고 욱욱! 가슴을 쳤다. 그리고 분명 붉어졌을 눈으로 사고가 난 지점을 살폈다. 하얀 차였다. 땅에 손을 짚어 냉큼 일어서서 그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하얀 차에서 나온 운전자를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아니, 아니. 당연히 아는 사람일 리가 없는데 뭘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

나는 즉시 뒤를 돌아 걸었다. 여기서 병원까진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듯 빠르게 걸었다. 이세정이 건드리고, 그리고 저 남자가 쐐기를 박으며 버스를 못 타게 만들었으니 어차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사고를 겪고도 의연하게 버스를 오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여행 계획에서 버스를 타는 노선을 없애버린 나는 다시 멈추어 서서 헛구역질을 했다. 마침내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을 때, 나는 발을 돌려서 고집스럽게 트라우마 속으로 기어갔다. 도착한 버스에 올라 식은땀을 줄곧 흘리면서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꿋꿋이 앉아있었다. 그냥 이건 울화 같은 거였다.

땀에 젖은 나를 보고 지수는 집에서부터 뛰어온 거냐고 물었다. 기운이 없어서 대답 대신 쇼핑백을 건넸다. 지수는 득달같이 쇼핑백을 열어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 예상보다 상태들이 멀쩡했는지 짜증을 내거나 그러진 않았다. 아니, 웬만한 잘못은 잘못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은 상태가 그의 화를 상쇄시킨 듯했다. 간간이 도착하는 문자를 확인하는 지수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내 방문에는 썩 달갑잖은 표정이었으면서 메신저를 보내는 상대에게는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어주는 것을 보면 좋은 일이 있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수야.”

“어? 아, 어 이거.”

지수는 피규어들 가운데 부러진 것들만 뽑아서 값을 쳐주었다. 도합 백만 원인데 친구 디시해서 오십 만 원만 줘.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슨 오해를 했는지 ‘저기 리밋도 있어, 인마. 졸라 싼 거야.’라고 덧붙였다. 나는 얼른 고맙다고 말하며 점점 격양되어가는 지수를 진정시켰다. 지수가 수염이 군데군데 난 제 턱을 문지르며 흐뭇하게 말했다.

“채민아, 나 같은 친구가 있을까.”

“없지.”

원하는 대답을 해줬더니 지수가 귀엽게 웃었다.

“그치? 나 졸라 쿨하고 멋진 것 같아. 그러니까 이런 정신 나간 곳에서도 여자 친구를 만들지.”

“너 여자 친구 생겼어?”

“아래 병실 동갑 여자애. 수염 있는 남자가 좋다 해서 기르고 있어.”

흥미로운 주제에 흐려졌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수염 있는 남자를 좋아하다니 우리 나이 또래치고 특이하다.

“함경윤은?”

“걔 이름이 갑자기 왜 나와. 헤어진 지가 언젠데.”

“상상 연애라도 했냐……. 차인 거겠지.”

“씨발, 알면서 물은 거야? 아무튼 고백했다 차였으니까 끝이지. 난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이런 속담 절대 안 믿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던 지수가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근데 나 고백했다가 차인 거 어떻게 알았냐. 말해준 기억이 없는데.”

“……배도빈이.”

“아! 그 새끼 내가 언젠간 죽인다!”

입이 깃털처럼 가볍다며 난리법석이었다. 나는 지수를 두고, 막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화면에 뜬 이세정의 이름 석 자만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병원엔 왜 갔어요?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보다도 아까 버스 사고를 당했다고 징징거리고 싶었다. 그리고 일부러 냈던 그 사고가 얼마나 잦게 일어나는 사고인지 아느냐고, 한 번만 당할 수 있었는데 두 번이나 경험한 탓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된 줄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담 이세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누구랑 있어요?

목소리에 걱정이 깔려있다. 정말 나를 걱정하는 것이 맞는지 궁금했다. 가끔은 보호가 너무 심해서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나는 연이어 올라오는 수만 가지 의문을 헤쳤다. 여행 전까지는 이세정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기에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닌데. 간다니까 그럼,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줄래요?

전화를 끊고 당장 병원을 나와서 인근을 걷고 또 걸었다.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척하면서 주변을 탐색했다. 이세정이 붙인 감시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분명 감시자가 붙어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수색해도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이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까 통화를 하고 텀이 얼마 없었던 것 같은데 바쁜 건지 일부러 늦게 받은 건지 신호음이 거의 끊길 때쯤에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네, 우채민 씨.

“아까 못 한 말이 있는데…….”

-해요.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워요. 아까부터 계속 몰래몰래 따라오는 것 같아요.”

나는 입술을 축이며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무서워서.”

-계속 따라온다고요?

“예. 집에서부터인지, 아니면 정류장에서부터인지 누가 몰래 쫓아오는 것 같단 느낌을 받았어요.”

나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서 사방을 훑어보았다. 감시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이런 면에서 둔한 나는 누가 따라온다는 느낌 자체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세정에게 한 말은 그저 양심에 찔리기만을 바라는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가 나한테 들켰다는 것에 겁을 먹고 감시자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으면 했다.

-우채민 씨 아주 잘생겼어요. 입술과 목선이 특히 예쁘고, 얼굴이 뽀얘서 웃을 때 귀여워요. 시선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죠. 그렇게 예쁜데.

이세정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내 외모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뒤늦게 미간을 좁혔다.

“아니….”

-그래도 무섭다니까, 내가 혼내줄게요. 지금 눈에 보이는 사람들 다 기억해둬요.

“예?”

-사람 한 명 보내줄 테니까 그분한테 다 말해요. 주변에 범인이 있을 거예요. 찾으면 눈부터 지져놓고…….

“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마구 저으면서 뒷걸음질 쳐서 벤치에 앉았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느낀 것 같아요.”

이세정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다.

-곧 시선이 사라질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는 우채민 씨를 불안하게 하지 않을게요.

“…….”

-그나저나 어떤 미친놈이 우채민 씨를 감시하고 있는지, 얼른 알아내야 할 텐데.

정말로 누군가 이곳에 도착해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을 해칠 것만 같아서 나는 이세정이 내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정말 제가 잘못 느낀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 저…….”

-말이 잘 안 통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저 집에 갈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저렇게 말하니까 감시자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내 위치를 어떻게 추적하는 거지. 인상까지 써가며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던 그때, 번뜩 어떤 의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동안 그 생각을 못했을까. 휴대폰을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화면을 켜서 위치 기능을 살폈다.

***

내 노트북을 사기로 한 구매자가 정해졌다. 나는 구매자를 위해 OS 설치는 물론이거니와 에어팟과 마우스를 정성껏 포장했다. 그리고 직거래 장소로 향하면서 이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노트북 팔러 가는 중입니다.”

어차피 내가 어디 가든 알 수 있을 테니 그냥 대놓고 말해서 경계를 허물어보려는 수작이었다. 이세정이 대꾸하기도 전에 아주 빠른 속도로 이백 정도에 싸게 팔 생각이고, 판 금액으론 옷과 시계 등을 살 것이며, 팔려는 노트북은 당신이 준 거라고 약간의 거짓을 섞어 통보했다. 말하면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자신이 준 선물을 어떻게 팔 생각을 할 수가 있느냐며 화를 낼까 봐 걱정이 되었다.

-우채민 씨 귀엽네요.

말 끝나기 무섭게 나지막한 대꾸가 들려와, 내 속셈을 들킨 건가 순간 식겁했다.

-이백만 원으로 옷과 시계를 다 사겠다고요?

어느 부분에서 재미를 느낀 걸까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이만 전화를 끊겠노라고 말했다. 이세정은 내가 미처 통화 종료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기 전에 물었다.

-이따 볼래요?

분명히 앞서 거래를 하러 간다고 말을 했는데,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지?

-여섯 시쯤 볼까요?

“어…….”

-다섯 시 반? 다섯 시?

“…….”

-네 시 반?

현재 시간은 다섯 시였다. 여섯 시에 볼 수도, 네 시 반에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일곱 시에 보자고 약속 시간을 정하면서, 버스 앞에서 전단지를 받았다. 전화를 끊고는 버스 안으로 올랐다.

겁에 질리지 않은 척을 하면서도 혹시 오래 타면 사고가 날까 봐 한 정거장마다 내렸다.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내 트라우마에 반항이 하고 싶었다. 나는 역으로 가는 동안 수고스럽게 몇 번이고 갈아탔다. 버스에 타는 동안은 뭐든 신경을 돌리고 싶어서 받은 전단지로 하트를 접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버스를 뛰쳐나가 남은 길을 두 다리로 걸었다.

거래는 순조로웠다. 정품 코드와 사양, 부가장치, 배터리 등을 확인시켜주고서 AS관련 정보에 대해 말해주었다. 에어팟과 마우스는 서비스라며 주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송금된 계좌 내역을 확인했다.

구매자와 인사를 나눈 나는 역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먹으며 이세정이 오기를 기다렸다. 근처라는 문자를 받자마자 역 앞으로 나갔다.

익숙한 검은 차가 서자마자, 나는 뛰어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자리에 오르자 이세정이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차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고서 자동차의 후미를 돌아서 내가 가까이 앉아있는 조수석 뒷자리 문을 열었다. 이세정이 고갯짓했다.

“들어가줄래요?”

나는 운전석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이세정이 앉을 곳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제가 꼭 여기 앉아야 돼요?”

“아기들이 거기 앉잖아요.”

“…….”

“농담이고. 정면 추돌 사고가 나면 서 기사님은 핸들을 좌측으로 틀 거거든요. 무의식이란 게 교육받는다고 고쳐지는 건 아니니까.”

거울 너머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서 기사님의 눈과 마주쳤다. 서 기사님이 고개를 젓고는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동안 이세정은 내가 메고 온 가방을 살펴보았다. 어지간히도 심심한지 가방의 디자인 따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얼굴을 보고 싶다며 약속을 잡은 것치고 상당히 건조한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켓이 역 안에 있어요?”

문득 물어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세정은 여전히 가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물은 소린 아니죠?”

“헛소리 안 하게 말 좀 붙여줘요.”

“……플로마켓 갔다 온 게 아니라 일대일 중고거래하고 왔습니다.”

“누가 샀어요?”

“어떤 회사원분이요. 원래 지방에서 살았었는데 12살 때 서울로 와서…….”

나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내 손을 잡아 온 이세정이 부드럽게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세정은 손이 너무 예쁘다면서 손등을 쪽쪽거렸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땡볕 아래에서 거칠게 입맞춤까지 나눴는데, 스킨십을 하면 나는 아직도 심장이 뛰었다. 이제 무서워서 뛰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지. 다 사줄 텐데.”

“많이 해주셨습니다. 차도 주고, 작곡실도 주고, 꽃도 주고.”

“사랑도 주고.”

이세정이 덧붙이며 내 손등에 다시 입을 맞췄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우채민 씨는 나한테 줄 거 없어요?”

줄 거 없으면 뽀뽀나 해달란 건지 이번엔 내 손가락에 입맞춤을 했다. 나는 잘생긴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 불현듯 정말로 지금껏 이세정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나를 병원에 가둔 거나 지수의 다리를 부러뜨린 거나 지금껏 받은 것들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역풍을 맞았으니 굳이 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당장 뭐 줄 것이 없을까 주머니를 뒤졌다. 나온 것은 전단지로 접은 하트뿐이었다. 하트를 발견한 이세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어떻게 접는지 알려 드릴까요?”

나는 종이를 다 펴서 하트 접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썩 명강의는 아니었는지 이세정이 집중도 않고 웃기만 했다. 어영부영 종이접기 강의를 마치고, 잔뜩 구겨진 하트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왜 나 안 줘요?”

“이걸 줘요?”

나는 당혹스럽게 주머니에서 하트를 꺼내 보였다. 같은 걸 두 번이나 접어서 너덜너덜해진 하트. 그것도 예쁜 종이가 아닌 길에서 받은 전단지로 접은 거라서 쓰레기통에 넣기 좋았다. 이세정은 하트를 빼앗아 지갑에 넣었다.

“옛날에 지폐로 하트 접는 게 유행이었어요.”

지갑에 넣는 것이 신기해서 말했더니, 이세정은 추억에 젖게 해줄까 물으면서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냈다. 방금 전 내가 설명해주었던 대로 종이를 접는다. 몇 번 접어본 사람처럼 능숙했지만, 결코 꼼꼼하지는 못한 솜씨였다.

“이만하면 추억에 나도 포함해주나요?”

하트를 건네며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이세정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느리게 돌아가던 창밖 풍경이 멈추었다. 웬 카페 근처에 차가 정차했다. 안전벨트를 푼 서 기사님이 뒤를 돌아, 내게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었다. 창밖 깔끔하게 꾸며진 카페를 기웃거린 나는 무슨 메뉴가 있는지 되물었다. 당황한 서 기사님이 알아보고 오겠다며 차 밖으로 나갔다.

“아, 아니…….”

뒤늦게 붙잡아봤자 서 기사님은 이미 문을 닫아버린 직후였다. 부려 먹을 생각은 정말 아니었다. 내가 고용한 것도 아니고. 나는 조마조마하게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서 기사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시선이 흐르듯이 카페 외벽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풀들이 정신 사납게 흐트러져있었고, 그 속에서 머리가 긴 여자들이 수다를 떨어대고 있었다.

“우채민 씨.”

나는 창밖에 던져두었던 시선을 옮겨 이세정을 쳐다보았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서 기사님이 차 안으로 들어와 내게 메뉴판을 건넸다. 나는 메뉴판을 훑어보며 이세정에게 물었다.

“왜 안으로 안 들어가요?”

이세정은 내가 쥐고 있는 메뉴판을 같이 훑어보며 답했다.

“나 말고 또 누굴 보려고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혹 지금 한 말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준다거나 하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걱정할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피해자를 더 만들 생각이 없을뿐더러 양다리를 걸칠 마음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있었다면 이세정을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메뉴판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라테를 마실지 차를 마실지 고민했다. 평소와 달리 시간을 길게 끌 여유가 없어서, 민트향이 나는 홍차를 고르곤 이세정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이세정은 그 메뉴판을 다시 서 기사님에게 넘겼다.

에어컨이 돌고 있는 차내는 적당히 싸하고, 적당히 아늑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이세정의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에는 붕대가 딴딴하게 감겨있었다. 며칠 전 상처를 치료해줄 땐 혹여 아플까 봐 이렇게까지 세게 묶지 않았었는데.

“붕대 직접 갈았어요?”

“네.”

“잘했어요, 형.”

“왜 웃어요?”

시비조로 물어보기에 언짢은가 하고 얼른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막상 눈이 마주친 이세정은 내 웃음을 반가운 기색으로 바라볼 뿐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이세정은 내가 답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금방 화제를 돌렸다.

“며칠 뒤에 출국하는 거 알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다 보면 장 비서님이 이세정에게 말해주는 스케줄을 얼결에 엿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서인지 당장 며칠간의 이세정의 행보에 대해서 조금 꿰뚫고 있었다.

“삼일 뒤인가에 형님 결혼식 가신다고요. 잘 갔다 오세요.”

“왜 남처럼 이야기해요. 나랑 같이 안 갈 거예요?”

“…….”

지난번 장 비서님의 물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결혼식에 나도 데려가느냐고 물었을 때 이세정은 분명 고개를 저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철석같이 그가 혼자 다녀오겠거니 믿고 있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건지 따져 묻고 싶었다. 게다가 일전에 나는 분명 누나와 여행을 가겠다고 말을 해둔 바가 있었다. 내 계획을 가뿐히 무시한 것이 아니고서야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가도 돼요? 전 관련 인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데…….”

꼭 관련 인사나 가족이어야만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말이었다. 내 헛소리에 답하지 않은 이세정이 창밖을 가리켰다. 나는 창문을 열어 서 기사님이 건네주는 뜨거운 차를 받아들고 차를 맛보았다. 눈을 좁힌 채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서 기사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카페 안에서 죽치고 있을 계획인가보다. 그럼 이 차 안은 데이트 장소인가. 이세정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쳐 주의를 돌렸다.

“미리 짐 정리해 놓을래요?”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이세정이 못 갈만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겉으로는 의연한 척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속으로는 벌벌 떨었다. 여기에서 말 한마디 잘못한다면 내가 이세정의 의심을 걷어내기 위해 내 행보를 보고하고 친근하게 굴고 여유로운 티를 내며 공들였던 모든 일들이 무너져버릴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했다.

“잊으셨어요? 저 이틀 뒤에 누나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아, 그랬죠.”

이세정은 그렇게 대꾸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을 방금 막 떠올린 모양새는 아니었다. 마치 속내를 떠보고 있는 듯해서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고자 차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풀꽃이나 테이블, 카페의 유리에 비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내 얼굴 보면…….”

운을 뗀 이세정이 속삭이듯 말했다.

“다른 사람은 눈에 안 들어올 텐데.”

“…예?”

“나랑 있을 때 우채민 씨가 다른 곳 보면 슬퍼요.”

저 말을 어떻게 저렇게 감정 없이 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만들어진 표정이라도, 일부러 시무룩함을 흉내 낸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한 번 더 다른 데 보면 운전해서 여길 벗어날 거예요.”

“……서 기사님은요?”

“버리고 갈 거예요.”

서 기사님 없으면 누가 운전을 하나, 하고 멍청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껏 이세정과 단둘이 드라이브 간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당연히 그가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나는 면허가 없었다. 언젠가는 따야 하긴 따야 할 테지만 겁이 다 뭔지, 사고가 무서워 선뜻 학원으로 걸음 할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도 나는 수십 번의 사고를 냈다. 물론 내가 낸 가상의 사고에서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 이제 그 기가 막힌 상상을 거둘 때가 오긴 왔다.

“저 있잖아요.”

“네.”

“저 운전면허 딸까 생각 중입니다.”

의아해하는 이세정에게 나는 버스는 이제 질렸다고 말했다. 형이 선물해준 차를 직접 운전하고 싶다는 감언이설 또한 덧붙였다. 그런데 이세정은 면허를 따기만 해보라는 듯 대놓고 언짢은 얼굴이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까요? 좋은 장소 알고 있는데.”

“어디요?”

“아우토반이요.”

이정우의 예식이 끝나면 아우토반으로 가서 스포츠카를 타고 시속 300km로 달리자고, 원래 운전은 달리면서 배우는 거라고 말한다. 내 결심을 무너트리기 위해 한 짓궂은 농담임을 알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운전은 더 나중에 배울 예정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잊었을까 봐 ‘저는 누나랑 여행 가야 돼서 결혼식 못 가요.’라고 덧붙여주었다. 나를 묘하게 쳐다보는 이세정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들었다. 김이 나는 입구에 입술을 대고 차를 후륵-후륵- 마셨다. 민트향에 대한 호불호가 전혀 없었지만 꽤 이상한 맛이었다.

“그럼 그 짐 들고 나랑 가면 되겠네요.”

입맛을 다시는 내게 이세정이 불쑥 말했다. 누나랑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자꾸 무시하는 걸 보면 저건 강요였다. 어쩐지 순순히 여행을 보내주려나 했다. 바싹 마른 입안을 축이고자 차를 찬물 마시듯 들이켰다.

“우채민 씨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그런 계획 없다고 하던데.”

나는 놀라 사레에 들렸다. 내가 콜록거리자, 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 이세정이 다른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나는 찻물을 뱉다가 들고 있던 차까지 쏟을 뻔했다. 이세정이 내게서 홍차를 빼앗아 갔다.

“우채민 씨, 안 데었어요?”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은 이세정이 두 뺨을 덥석 잡았다. 나는 놀라 입을 벌렸고, 입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따가운 혀를 뒤로 뺐지만 손가락이 안 닿지는 않았다.

“차도 혼자 못 마셔요?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네.”

손가락을 쑥 빼고는 내 뺨을 양옆으로 장난스럽게 돌려댄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던지 튀어나온 볼살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이내 장난을 멈춘 이세정의 눈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나랑 있는 게 좋겠어요. 내가 다 챙겨줄게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말에 여유가 있었다. 여행 가방을 발견한 즉시 방을 나가기에 뭘 했나 했더니 내 거짓말을 뜯어보았던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뻐끔대다 일단 이세정을 고분고분 따르는 척을 했다.

여권을 찾아놓고도 한동안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내 여행은 성공적이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사고를 당하고 싶지도, 눈앞에서 손목을 긋는 이세정의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가기도 전에 들킨 이상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탈출할 기회가 아예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자꾸 나를 고민하게 했다.

지금껏 수많은 후회를 했지만 그건 다 내 짧은 생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오래, 오래,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여행 짐을 다시 싸기로 했다. 꼭 겪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하지 않으면 끝까지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벗어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세정을 좋아하는 나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곁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계속 좋아하는 건 일반적인 사람의 사고가 아니었으니까.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짐을 싸놓은 캐리어를 꺼냈다. 따로 백팩을 꺼내서 캐리어 안에 들어있던 남방과 모자를 옮겨두고, 속옷과 칫솔 등도 챙겼다. 더 넣을 것이 있을까 둘러보았다. 사실 넣고 싶은 건 아주 많았는데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미 무언가가 잔뜩 들어있는 더플백의 머리를 벌려 탈탈 털었다. 빈 더플백을 최대한 구겨서 그 또한 내 백팩 안에 집어넣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일으켜서 가방을 멘 상태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난장판이 된 방안에 시선조차 주지 못하고 이세정이 급히 나를 낚아챘다.

“어디 가요?”

“누나 방에 여권이 있는 것 같아서요.”

왜 누나 방에 여권이 있어? 꼭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던 이세정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는 급하게 안방으로 들어가, 누나가 미리부터 정리해둔 여행용 캐리어를 찾았다. 캐리어는 총 두 개였는데, 그중 검은 캐리어를 열어 가운을 꺼냈다. 가운을 펼쳐 들어 휴대폰을 놓을 자리를 마련했다. 집어넣기 전에 누나를 향해 예약 문자를 발송했다.

[누나 검은 캐리어 안에 내 휴대폰 있는데, 전원 좀 켜봐]

알맞게 잘 발송되었는지 확인을 한 후 휴대폰 전원을 껐다. 휴대폰을 가운 안에 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여권 찾았어요?”

“예.”

나는 아까 내 방에서 찾은 여권을 보여주었다. 여권 사진을 확인한 이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자꾸 귀엽다, 귀엽다 하는 이세정의 말에 나는 쓰게 웃으며 그의 표정을 계속 주시했다. 등에 멘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고 틈을 엿봤다. 긴장은 차 뒷좌석에 오르고부터 더욱 심해졌다.

얼마쯤 갔을까. 이세정이 내 목을 쓰다듬었다. 버릇인지, 이세정은 나를 만질 때 꼭 턱과 목 쪽을 주무르는 경향이 있었다. 창을 힐끗 살핀 나는 이세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을 내 뺨에 대고 비비며 갑자기 어지러워졌다고 칭얼거렸다. 눈길은 분명 내게 왔지만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세정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곤 시트에 기댔다.

“진짜 어지러운데…….”

아프다는데 이세정은 도리어 웃었다. 언짢은 것도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입을 틀어막고 차 문손잡이를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에 놀란 서 기사님이 속도를 줄였으나 이세정은 내가 뭘 하든가 말든가 뜯어말릴 생각조차 않았다. 겨우 차 문손잡이를 달칵거리는 것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창문을 내리고 창밖으로 두 팔을 뻗었다. 이세정은 그제야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저 속이 안 좋아요. 내려주세요.”

“알았어요. 위험하니까 손 내려요.”

대범하게 팔을 뻗었으면서 쌩쌩 달리는 차들이 내 팔을 치고 갈까 봐 남몰래 덜덜 떨고 있었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쑥 빼냈다. 부디 이세정이 내 심장 소리를 못 들었기를 바라며 어지럼증 때문에 죽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곧 차가 도로변에 안전하게 정차했다. 내가 당장 나가려고 하자 이세정이 내 어깨를 붙잡고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팔을 더 뻗어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나는 허리를 완전히 숙인 채 비틀거리며 내렸다. 그런 다음 가방을 단단히 움켜쥐고서 인도 쪽으로 힘껏 뛰었다.

빨간 불이 켜진 짧은 횡단보도를 겁도 없이 휙 건넌 뒤 버스 정류장을 미련 없이 지나서, 택시 정류장에 다다랐다. 가장 앞에 정차된 택시를 타려고 달려들었는데, 근처 도롯가에 차를 정차한 경호원들이 줄줄이 뛰쳐나왔다. 역시 감시자들이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아픈 시늉을 해가며 그들이 붙잡은 손을 떼어내곤 택시에 올랐다.

“기, 기사님, 그냥,”

닫으려는 문을 이세정이 잡았다.

“어지럽다면서 택시는 왜 타요?”

화난 건 아닌 듯하고 단지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문을 붙잡고 있는 이세정의 손을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희게 질리며 턱관절이 조금씩 떨렸다. 나는 이세정이 나를 끌어내려고 다가오기 전에 있는 힘껏 그를 밀쳐대기 시작했다.

“아.”

엄살과 같은 시늉을 하며 인상을 쓴다. 이세정은 일정 데시벨을 넘어서 소리를 내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속에 내재 된 화는 깊어서, 제 성질에 못 이겨 마구 패악을 부렸었다면 진작 화가 닳아 없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가끔 생각하곤 했다.

“어디 가요. 나랑 있기로 했잖아요.”

“그, 그런 적 없어요. 저 혼자 여행 가게…….”

“어디로 가려고요?”

“그걸 왜 말해줍니까?”

“설마 도망가요?”

이세정은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놀란 눈으로 물었다.

“우채민 씨, 나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시, 싫…….”

“가서 후회할 거예요. 우채민 씨 생각보다 나쁜 사람들은 많아요.”

나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 당신만 하겠냐고 받아치며 택시의 문을 닫으려고 애썼다. 문을 몸으로 받친 이세정이 불안할 정도로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더니,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염려를 섞어 미간을 좁혔다. 이세정은 마치 나를 문명에서 걷어내려고 온 사람 같았다. 나는 이세정을 힘껏 밀었다. 나도 남자였으니까 힘이 제법 셀 텐데도 도무지 원하는 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내 말 믿어요. 내 곁이 가장 안전하다니까.”

“그냥 좀……. 도망가는 거 아닙니다. 쉬다가 올게요.”

내 말이 웃긴지 이세정이 미소를 지었다. 표정은 아까와 별로 다를 법 없었는데 조금씩 짜증 같은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택시의 문에 손을 댔다. 내가 나름 반항한답시고 마구 때려댈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더니 그제야 내 손을 꾹 잡는다.

“손 좀 가만둬요. 거슬리네, 아까부터.”

“아, 아프…….”

처음엔 엄살이었고, 곧이어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눈살을 일그러뜨린 건 진심이었다. 이세정은 자신이 힘을 쓰고 있다는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끌어내릴 생각도 않고 그냥 잡고만 있었다. 계속되는 고통에 이기적이게도 두려움이 앞섰다. 나는 팔을 힘껏 비틀다가, 발을 사용해 이세정의 배를 찼다.

“이게…….”

아슬아슬하던 표정이 무너졌다. ‘이게’란 ‘이게 어디서 지랄이야’의 줄임말이었을까. 이세정은 내가 자신에게 폭력을 썼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지 눈에 띄게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우채민 씨 지랄하는 것까지 봐줘야 돼요?”

나는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으면서도 이세정의 말 따윈 들리지 않는 척을 했다. 내가 계속해서 비난을 하며 발로 차자, 이세정이 내 다리를 잡아 눌렀다.

내 시야가 불안증 환자처럼 정신 사납게 떨려댔다. 이세정은 내 뒤쪽을 힐끔 보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항상 그러했듯이 겁의 끄트머리 앞에서 흔들렸다. 내 안에 순종하는 DNA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손을 잡을까 말까 숱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손을 올렸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는지 먼저 이세정이 방향을 비틀어 차 문을 쥐었다. 화가 아예 터져버릴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바싹 올라온 핏줄이 들어갔다. 이세정은 나를 설득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기운 빠진 목소리를 냈다.

“밖엔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니까.”

네가 제일 이상한 것 같지만……. 덧붙이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이세정은 뺨을 긁적이다 차 문에서 손을 뗐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있는 이세정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꼭 겪어봐야 알겠어요?”

도망칠 틈을 재느라 이세정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나는 택시 안에서 빠져나오다시피 하며 일어서서 이세정을 다시 안 볼 사람처럼 힘껏 밀쳤다. 그대로 택시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쾅 닫았다.

“기사님, 빨리 달려주세요.”

마지막 기회를 내 스스로 차버렸으니 멀리 도망가야 한다. 내 다급함이 전해졌는지 기사님이 택시를 지체 없이 출발시켰다. 택시가 속도를 내서 직진했다. 나는 쫄보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얼마간 잘 보이지도 않는 뒤를 기웃거렸다. 가는 길이 몹시도 쓰라렸다.

“기사님. 뒤에 검은 차들, 아직도 따라오고 있습니까?”

“왜요. 속도 내드려요?”

“네, 네, 네.”

기사님이 운전대를 휙 틀었다.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커브에 토끼 눈을 뜬 채 기사님을 쏘아본 나는 얼굴을 보고 더욱 놀랐다. 아깐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젊은 택시기사는 또 처음이었다. 기사님은 젊은 체력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할 듯 기가 막힌 운전 실력을 보여주었다. 나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바짝 쫄아있다가 불현듯 택시면허증을 발견했다. 면허증 속에 있는 사람은 아예 다른 인물이었다.

“저기……. 여기 있는 분이랑 얼굴이 다른데.”

내가 면허증을 가리키며 묻자, 기사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희 아버집니다. 허리디스크 수술하셔서 대신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인천에서 택시로 일짱을 먹기도 했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아버지가 베스트 드라이버인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게다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택시를 운행하는 것은 징계를 받는대도 무방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찝찝했지만, 이분이 검은 차들을 잘 따돌려주는 것 같아서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은 따라오나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건지 신호에 부딪힐 때마다 어김없이 빨간 불이 들어왔다. 육안으로 추격 차들이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기사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한두 대가 아니라서.”

나는 달리는 버스들을 유심히 살폈다.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던 버스가 급하게 우측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기사님, 저기 저 버스 앞질러 주세요.”

“…….”

“노란 버스 말고요.”

“…버스 타시려고?”

곧장 대답하려던 나는 뭔가 경악하는 듯한 반응에 잠깐 주춤했다.

“아니요. 덩치가 커서 가려질까 하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차들은 정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님도 베스트 드라이버네요.”

“내가 뭐랬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기사님에게 나는 지폐 세 장을 꺼내 고이 놓아주었다. 그리고 여대 입구 앞에서 내려 외진 골목을 빙빙 돌았다. 호떡 기름 냄새나 분내가 나는 가게들 사이의 골목을 유연하게 빠져나간 나는 가까운 ATM 기기에서 통장에 있는 돈을 모두 뽑았다. 지갑에 쓸 만큼만 넣어두고 나머지는 모두 가방에 넣었다. 가방이 단단히 잠긴 것을 확인하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빠져나가려고 했던 것일까. 실수로 줄 서 있던 사람의 어깨를 세게 쳐버렸다. 비틀거리는 여자에게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괜찮아요.”

팔랑팔랑, 가벼운 목소리였다.

나는 서울역으로 옮겨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네이비색 남방 재킷, 검은 모자, 더플백, 마스크. 가지고 온 백팩은 돈과 여행 물품만 빼 더플백에 옮겨놓곤 쓰레기통에 버렸다.

화장실에서 나와 빠르게 걸었다. 기차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이제껏 놀러 갈 때마다 렌트한 차나 비행기만 타서 그런지 기차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했던 모양이다. 오후에 장시간 운행하는 열차가 거의 없었다. 일단 당장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여기선 말고.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사람은 없지만 뭔가 불안했다.

나는 용산역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이 몇 없는 지하철 안을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지금 쫄리는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평범한 할아버지마저 수상해 보일 지경이다. 에취! 이상한 기침 소리를 내는 남자도 수상해 보이고, 자리도 많은데 굳이 내 옆에 앉은 여자도 수상해 보인다. 나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는 여자를 힐끔거렸다. 여자는 기사를 검색 중이었는데, 주로 요즘 납치 범죄가 얼마나 잦아졌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잠시 후 열차가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들렸다. 나는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엄마!”

실수로 팔꿈치로 여자를 쳐버렸는지 바닥에 동전과 화장품 그리고 휴대폰이 우르르 쏟아졌다. 아…… 왜 이분은 이걸 다 손에 쥐고 있었던 걸까. 나는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면서 동전을 하나하나 주웠다. 가방을 든 채로 주우려니까 여러모로 불편했다. 멀리까지 굴러간 립스틱을 주워야 하는 경우 특히 그랬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두고 동전을 주워 담았다. 그러는 사이 지하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지하철은 조금 복잡해졌다.

“아우, 진짜.”

여자가 투덜거리면서 내가 주워서 준 동전들을 모두 제 지갑 안에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립스틱과 깨진 화장품을 손에 쥐곤 나를 노려보았다.

“왜 이리 조심성이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바빠 죽겠는데……. 일단 내려요.”

화장품의 가격을 가늠하며 지갑을 연 나를 여자가 다짜고짜 끌어당겼다. 마침 여기서 내려야 했기에 떠나는 지하철을 미련 없이 등지고, 여자와 차분히 화장품에 대해 논의했다.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됐어요. 제가 인심 한 번 쓸게요. 바빠서 먼저 가겠습니다.”

“예?”

여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급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진짜 괜찮나. 아까 지하철 안에서 마구 성질을 내기에, 나는 아무리 못해도 오만 원은 물어줘야 할 줄 알았다. 여행으로 들어갈 돈이 많았으니 잘 된 일이긴 한데…….

나는 인파를 헤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손이 허전하다고 느낀 것은 막 계단을 끝까지 오른 직후였다. 나는 멍하니 두 손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지하철 안에 가방을 두고 내렸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뜀박질했다. 나는 역무실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분실물을 조회해보았음에도 가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그 5분도 안 되는 사이에 누가 가져간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저번에 지갑을 두고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땐 동전 하나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찾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지갑을 확인했다. 돈 몇 푼, 하트 모양 수표, 카드 몇 개. 이걸로는 일주일은커녕 며칠도 버틸 수가 없다. 나는 즉시 ATM 기계 앞으로 갔다. 아까 다 뽑아버려 통장에 남은 돈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서도 굳이 빈 잔고를 확인했다.

여행이 초장부터 망했음을 직감하며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속이 꽉 막혀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돌아갈까. 그거 아니면 다른 선택지라도 있는 듯 고민했다. 아니, 있어야 했다. 꼴에 자존심도 상하고 이세정의 후환이 두렵기도 했으니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불쑥 마지막으로 본 이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눈앞에서 사람을 놓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버스 사건 때처럼 무식하게 나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밀려나는 시늉을 하지 않았던가. 이세정은 쉽게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마치 아량을 베풀 듯 놓아준 건가? 도망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변명한 내 말을 믿은 것은 아닐 테니…….

머리를 식히고자 기획한 여행이다. 도망은 아니지만, 돈이 없단 걸 알면서 여행을 강행하는 것은 명백한 도망이다. 고민하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돈은 벌면 그만이니, 나는 기차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

집을 나온 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나는 찜질방 오락기 앞에 앉아서 시간을 죽이다가 이세정이 아직까지 날 못 찾은 것을 보니 내가 꽤 잘 숨은 모양이라며 혼자 흡족해했다. 그러나 미소는 금방 거두어졌다. 멍하니 오락기 화면을 쳐다보다,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꼬마들을 피해 구석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깥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쯤 푸켓에 있을 누나에게 예약 문자가 발송되었을 것이다. 누나는 분명 캐리어에서 내 휴대폰을 찾아냈을 것이고, 아마도 전원을 켰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몰라 위치추적을 해본 이세정이 내 휴대폰 위치를 확인하고는 잠깐이나마 열이 받아, 그쪽으로 신경을 돌렸을 것이다.

“내 차례야!”

소리가 커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락기 하나를 가지고 싸우는 아이가 둘, 그 옆에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는 아이가 하나. 외딴 시골 아이들은 휴대폰을 잘도 가지고 있었다. 이 찜질방 와이파이를 쓰지 못하는 것은 나 혼자뿐인 듯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이는 흠칫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엎드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인터넷 한 번만 해도 될까. 지금 휴대폰이 없어서…….”

“어, 네……. 하세요, 네.”

수상한 오빠가 말을 건다면서 엄마에게 달려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빌려준다. 나는 페이스 코트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다. 주가 향방, 새 바이크 출시, 결혼을 앞두고 부회장으로 고속 승진한 이정우 전무. 이정우는 뭘 자꾸 승진을 하는 건지, 출시된 오토바이는 뭐 이리 예쁜지, 기사는 죄다 쓸데없는 정보성 글들뿐이었다. 이세정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에 관한 기사는 일절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을 받아든 아이가 내 옆에 앉았다.

“여기 왜 왔어요?”

“그냥…… 놀러.”

“엥? 여기 볼 거 없는데?”

“공기가 좋잖아. 서울이랑 다르게.”

“서울 공기 나빠요?”

“응.”

“오빠 그럼 여기저기 둘러볼 거예요? 언제 갈 거예요?”

영혼 없는 대꾸를 해주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힘없이 눈꺼풀을 내렸다. 이세정은 내가 있는 장소를 찾아내지 못한 듯하고, 나는 돈이 없고, 더 이상 갈 곳은 없고.

“이 근방에 아르바이트할 데 있어? 없지?”

“왜요?”

“돈도 없고 집도 없어서.”

내 말에 아이가 나를 짠하게 쳐다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동정 어린 시선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저 초등학생인데 여기서 일해요.”

“……응?”

“오빠도 여기서 일할래요? 이 사우나 우리 엄마 거예요. 엄마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아, 잠깐만…….”

아이는 말리기도 전에 어디론가 달려갔다. 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잘 대해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 아이의 마음이 찜질방을 운영하시는 저 아이의 어머니에게까지 닿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로 보나 꼬마를 꿰어서 일자리를 쟁취하려고 하는 모양새였으니까.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길을 나섰다. 가지고 있는 거라곤 천 원짜리 몇 개와 수표 하트, 카드,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돌려 입는 옷뿐이었다. 가방도 없어서 옷을 살 때 함께 받았던 쇼핑백을 달랑 들고 있었는데, 병원 입구 유리문에 비춰보니 꼭 서울역 거지 같았다.

나는 모자를 눌러쓴 채 얼마 안 되는 술집을 전전하며 혹시 남는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들은 어린놈이 공부는 안 하고 술 얻어 마실 생각만 한다고 나를 쫓아냈다.

밤이 깊어갈수록 상가의 불은 하나씩 꺼져갔다. 하루 내내 먹은 것이 없어 굶주림에 지쳐있던 나는 어느새 배고픔도 잊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곧 불이 다 꺼져 어둠 속에 나 혼자 남아있게 될 것만 같았다. 아까 그 찜질방을 체크아웃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바로 앞에 있는 가게 불빛이 꺼졌다. 나는 다른 불빛을 찾아 잽싸게 걸었다. 아직 자정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부터 다들 마감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상가 건물들을 등지고 잘 수 있는 곳을 탐색했다. 어둑어둑해져 어디든 다 똑같아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 부두 근처를 살폈다. 커다란 덤프트럭이 줄지어 주차되어있는 곳이 보였다. 덤프트럭 아래를 힐끔 보았다. 여긴 사람 하나 들어가도 되겠는데. 자다가 깔려 죽는 단점만 뺀다면 괜찮은 곳이다.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유난히 어두운 곳이라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구를 뻔했다. 평평한 바닥을 발로 두드려보며 걸으면서, 이번에는 야외주차장을 관찰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헤드라이트에 흠칫 놀라 옆으로 물러서야 했다.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주로 여행객들이 주차를 해놓는 곳이었다. 어째서 여행객도, 관계자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이 시점에 여기에 주차한 건지 실로 수상해 보였다.

곧 누군가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차 문을 닫았다.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오래도록 연기를 내뱉는가 싶더니 내 쪽을 힐끔 보았다. 의아하게 뜬 눈이 너무 무서웠다. 자정임에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밖에서 노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그 찜질방으로 달려갔다. 노란 불빛에 책을 비추고 글을 읽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하루만 재워달라고 사정했다. 안 되면 조용히 물러나자고 다짐하고 왔음에도 아주머니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옷을 건네주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찜질방을 나왔다. 찜질방 집 막내딸이라는 그 아이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 들러 일감을 찾았다. 시골은 젊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었는데, 이 동네는 모르겠다. 나 같은 서울 청년이 오히려 귀찮은 듯했다.

아침에 돈을 다 털어 주스를 사 먹은 게 전부라서 배가 주렸다. 오후쯤 되자 걸을 힘조차 사라졌다. 여기 사람들은 제 나름대로 바쁜 것 같았다. 며칠째 개 마냥 돌아다니는 나 같은 건 뵈지도 않는 모양이다. 꼭 신경 써달란 건 아니지만. 나는 긴 의자에 누워서 별거 없는 지갑을 뒤적였다.

이 수표를 쓰면 도망이 아니라 여행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은행에 갈 차비도 없는 주제에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렸다. 물을 많이 넣어 국물이 희멀건 라면이 먹고 싶다. 컵라면 말고, 냄비로 끓인 라면. 계란 하나 톡 까놓고 마구 휘저어버려 국물을 더럽힌 라면. 갑자기 내가 끓인 봉지 라면을 질색하면서도 함께 먹어주던 지수가 보고 싶어졌다. 계란을 젓네 마네 하다가 면이 다 불어, 너 때문에 라면이 4인분이 되었다면서 고맙다고 비꼬던 목소리가 웃겼는데.

라면을 먹고 싶은 내 염원이 통했던 걸까. 하늘에서 지갑이 떨어졌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들었다. 지갑 주인은 지갑을 떨어트린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미 상당히 멀어진 남자를 쫓아가 지갑을 건네주었다.

“어.”

남자는 지갑만 홀랑 받고 나를 지나가려다가, 멈추어 서서 내 행색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본 남자가 물었다.

“거지냐?”

나는 헌재 거지 신분이 맞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인심 한 번 쓰겠다면서 노란 잎들 사이에서 천 원을 한 장 꺼내주었다.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곧바로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을 하나 사 먹었다. 돈이 모자라 물은 사지 못했다.

밤은 똑같이 찾아왔다. 삼각 김밥 하나론 허기를 채우지 못한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조금은 다급하게 걸었다. 작은 곳에선 사람을 쓸 리가 없고, 큰 곳은 다 돌아보았다. 나는 아무 가게 앞에나 주저앉아서 돌아가서 받게 될 이세정의 보복을 가늠해보았다. 첫째, 택시에서 내가 때렸던 만큼 맞는다. 둘째, 병원에 가두어진다…….

“어이.”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등을 진 채 앉아있는 가게에서 나온 아저씨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저리 가라고 손짓했다. 문이 탁, 닫혔다. 그럼에도 나는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아저씨는 내가 왜 집이 없는지, 왜 일자리를 찾는지, 그 무엇하나 궁금해하지 않고 내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아니, 이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듯했다. 나는 그냥 잘 곳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아저씨는 그에 동의했을 뿐이니까.

“나 가서 잘랑 게 불 끄고 문 잠그고 자빠져 자.”

“네.”

아저씨가 집으로 가버렸다. 마음이 바뀌어 쫓아내면 어쩌지 했는데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우선 문부터 잠그고 불을 껐다. 아예 암흑이 찾아왔다면 더 나았을 테지만 유리벽을 건너온 달빛 때문에 바깥 풍경이 눈에 훤히 보였다. 사람 하나 오가지 않는 도로, 주차된 차, 멀리 보이는 횟집과 바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설프게 내려앉은 저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땅 길에서 형체 없는 사람 그림자가 비출 것 같았고, 굳게 닫힌 철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고, 문 좀 열어보라는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목소리가 마치 쇳소리처럼 다가올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끼익- 의자를 끄는 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에 엎드렸다. 눈을 꾹 감고 집 나와서 괜히 고생이라며 한탄했다. 내 가방을 가져간 그 누군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집 떠난 지 며칠이나 됐지. 머리가 회전을 멈춘 듯 돌아가지 않아서 손가락의 도움을 받아 숫자를 꼽아보았다. 사흘? 그것밖에 안 됐나? 난 또 일주일은 넘은 줄 알았는데……. 나는 손가락이 접힌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똑똑.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바람 소리인 줄 알았는데, 바로 이어 말소리가 들렸다. 고개에 힘을 주고 눈만 위로 떠 유리를 살폈다. 달빛을 등지고 웬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거대한 그림자들은 까만 눈동자로 잠든 나를 주시했다.

심장이 뛰어댔다. 유리 밖까지 들릴까 겁이 날 정도였다. 그냥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라기엔 지나치게 집요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내게 인공적인 불빛을 쏘기도, 사진을 찍기도 했다. 무슨 악취미지. 신고할까.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뒤집은 고민은 내 머뭇거림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들이 갔음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두드러기가 난 듯 양팔을 쓸었다.

귓바퀴에선 아까 그 사람들이 유리에 기대며 냈던 쿵쿵, 하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려댔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의자를 끌어당겨 뺨을 기대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잘 도망간 것이 맞을까? 벌써부터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

피아노를 연주하는 남자의 뒷모습은 아주 우아했다. 단조로운 패턴으로 뜬 검은 목 니트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떨렸다. 깨끗하게 잘린 뒷머리와 마디마디 단단한 손가락을 가진 그는 보통의 남자 피아니스트와 달리 부드럽게 건반을 찔렀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자의 저녁 연주는 그렇게 부드럽게 시작된다.

아버지가 연주를 시작할 때면 으레 그렇듯 나는 의자 끝에 조용히 앉아서 그의 손을 바라보곤 했다. 어린 눈에도 아버지의 다정함이 보였다. 눈이 안 보이는 어머니를 위해서 언제나 틀에 박힌 연주법을 고집하는, 어쩌면 집착과도 같은 다정함이었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부드러움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옆에서 연주를 지켜본 지 벌써 수십 일이 지났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눈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음악이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달려간다. 품에 그대로 안기려고 했더니만, 어머니의 곁에 앉아있던 누나가 비둘기를 쫓듯 나를 발로 찼다.

-우채민,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저리 가서 얌전히 놀아.

나는 어머니를 방해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누나는 항상 내가 어머니를 힘들게 만든다고 말했다. 마음 같아선 누나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으나 무섭게 째려보는 탓에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누나의 눈치만 살살 살피다가 소파 바닥에 늘어져 있는 어머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엄마야! 어머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손을 뿌리쳤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누나가 나를 혼냈다.

-우채민…… 엄마한테 다가갈 땐 먼저 소리부터 내라고 했잖아.

그냥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의 관심을 받으려고 했을 뿐인데. 어린 나는 왜 어머니에게 다가갈 때 소리부터 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니 당연히 까먹을 때가 많았고, 그럼 이렇게 누나에게 혼이 난다. 어머니는 누나를 말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거두어냈다. 어머니가 엄한 곳으로 두 팔을 벌리고, 어둠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애썼다.

-아가, 미안해. 이리와.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고 다가가던 나는 겨드랑이가 잡혀 허공에 둥둥 떴다.

-채민이가 연주해보자.

아버지가 나를 피아노 앞에 앉혔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아버지의 눈길이 내게 잠시 머물더니 이내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바로 하고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피아노 칠 때마다 행복하다. 연주를 할 때마다 내게 집중되는 가족의 시선 때문이다. 이 순간만큼은 누나도, 아버지도 다 나를 보았다. 나는 과외 선생님에게 배운 음악을 몇 곡 완주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연주가 길어서 지루했는지 다른 때와 달리 다들 나를 보지 않고, 서로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나는 그들을 잠시 쳐다보다 피아노에 팔을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끌어왔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나는 검은 피아노에서 조용히 내려오며 가족의 시선을 끌어올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저번에 칼에 베인 척해서 온 가족의 관심을 끌어온 적 있었는데, 그런 방법은 이제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에 누나가 아버지에게 ‘채민이 쟤 좀 징그러워요.’라고 고민처럼 털어놓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유치원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물건을 꺼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장애인 이해 수업을 받았는데, 끝나고 나서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가져온 안대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안대로 눈을 가렸다. 어둠이 찾아왔다.

“여서 잤냐?”

담배에 찌든, 칼칼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흑백 영화 같던 시야로 햇빛이 들어왔다. 아주 잠시 이곳이 어딘지 생각해보다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쿵 하고 테이블에 박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수저들이 달그락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아, 나 테이블 아래서 잤지.

“가서 물 떠온나.”

“물이요?”

이마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음용수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컵을 꺼내 정수기 물을 받아왔다. 물을 끝까지 들이켠 아저씨가 이거 말고 밖에 뿌릴 물을 가지고 오라고 성질을 냈다.

부엌 바닥에서 바가지를 찾아내 물을 받아오자 아저씨가 바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나는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바깥에 고인 흙탕물을 정리했다. 물을 뿌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어제 본 그 수상한 사람들은 없었다.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아침부터 된통 부려 먹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일은 그걸로 끝이었다. 새벽에 잡은 싱싱한 생선을 공수해온 아저씨는 손님이 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며 빈둥거렸다. 덩달아 나도 구석에 앉아서, 손님들이 올 때까지 바닥만 내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다.

오후쯤 되어서야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몇 명뿐이었지만. 근처 큰 식당엔 바다를 보러 온 여행객들이 차지하고,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자리를 잡는 단골들뿐이었다. 단골들은 특히나 가운데 자리에 몰려있었는데, 주로 매운탕에 소주를 들이켜서 매출에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진 않았다.

나는 서빙과 설거지를 번갈아 하며 바삐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사장 아저씨에게 내 쓸모에 관해 어필했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아저씨는 내가 일을 하든가 말든가 크게 관심이 없었다.

늦은 저녁쯤 되니 손님이 슬슬 정체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던 일만 대충 마무리 짓고 구석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마음의 여유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담배 생각이 났다. 담배 하나를 피우면 내 불안감이 모두 달아날 것 같았다. 지금 나가서 사올까. 참, 돈이 없지……. 머리를 벽에 툭 박고서 주머니에 꽂은 손을 정신 사납게 움직여댔다. 그런데 자꾸 뭔가가 머리 위에서 걸리적거린다. 힐끔 눈을 들어 올린 나는 달력 근처에 붙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선 분홍색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면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성수는 어째 안 보이는가?”

무심코 소리가 들린 가운데 테이블로 눈을 돌렸다가 이쪽을 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무언가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사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물어본 건가? 나는 성수라는 아주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대신 대답을 해달라는 눈으로 남자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단골손님들을 쳐다보았다. 단골이었으니까 적어도 나보단 이 집에 관해 아는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단골손님들은 마치 남자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쉬쉬하며 부엌에 있는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게 소주 한 병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주자, 여자가 고맙다며 내 등짝을 두들겼다.

“서울이 좋긴 한가베. 그 머스마가 어째 이라고 커버렸을까.”

“예?”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 여자는 목소리를 확 낮추더니 너라도 기운 차려서 다행이다, 아빠 잘 모셔라, 마누라가 그렇게 실종됐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냐, 하고 이해 못 할 소리를 늘어놓았다. 다시 내 등을 힘차게 토닥인 여자가 잔을 몇 개 가져오라며 나를 보냈다. 나는 소주잔 두 개를 꺼내며 미간을 좁혔다. 실종이라니.

혹시 납치를 당한 건가. 지난번 지하철 안에서 의도치 않게 여자의 휴대폰을 훔쳐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잔재처럼 남아있다 보니 실종을 납치와 연관시키는 것이 순식간이었다. 문득 어젯밤 그놈들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루가 지나니 내 소식이 횟집 단골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다. 다들 나를 공부를 하러 일찍이 서울로 올라갔던 아저씨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단골들은 어머니한테서 내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며 생판 처음 들어보는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정정해주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저씨가 내가 제 아들 취급을 당하거나 말거나 회만 썰어대는 통에 일단 보류해두었다.

이 집 한 부분에 스며든 만큼 나도 많은 정보를 접했다. 지극히도 성실했던 횟집 사모님은 몇 달 전 아들과의 여행 중에 사라졌다는 것. 범인도 시체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아들은 코가 높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여자의 앞에 소주를 놓아주자 그녀가 코를 어디에서 했느냐고 물었다. 어제 여자가 내 초등학생 시절이라며 웬 사진을 한 장 보여줬었는데, 아이의 코가 넓적했었다. 아들의 어린 시절과 나는 코 빼고 좀 닮은 점이 있어서 성형을 의심한 건 이해됐지만 어디서 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니까 난감했다.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나는 여자에게 웃어주고 등을 돌렸다.

“매운탕이랑 소주.”

갓 들어온 손님의 주문에 나는 주방으로 뛰어갔다. 매운탕이랑 소주 달라십니다. 내 말에 아저씨가 소주는 네가 갖다 주라며 버럭 하곤 방금 들어온 테이블 쪽을 힐끔거렸다. 안 그래도 짧은 눈썹이 더욱 일그러졌다. 왜 그런가 물어봤다가 저놈들이 이 근방에서 유명한 조폭들인데 몇 달 전부터 자꾸 가게를 기웃거린다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획득했다.

조폭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손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테이블에 소주를 가져다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잔까지 무사히 배달하곤 즉시 등을 돌렸다.

“야.”

까칠한 물음에 빠르게 돌아봤더니 가게 안에서 대놓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남자가 내게 물었다.

“지갑 주워줘서 고맙다.”

“……예, 예?”

반문했지만 남자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주지 않았다. 나는 남자와 내가 어디에서 만났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면 죽는다는 듯 머리를 굴렸다. 알아챈 것은 남자가 테이블에 지갑을 올려둔 뒤였다.

“아, 지갑…….”

천 원 줬던 그 사람. 과장하자면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여기서 친절하게 대했다가는 괜히 엮일 것 같아서 고맙다고만 간단히 말해두었다. 자주 오는 손님과는 친해져도, 조폭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남자의 조폭 무리는 다음 날에도 비슷한 시간에 가게에 들렀다. 아저씨는 저놈들이 대체 무슨 원한으로 이런 조그만 술집에 계속 들리는 건지 알아오라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테이블을 좀 기웃거려봤는데 내 귀동냥을 알기라도 하듯 조폭의 대장으로 보이는 그 남자가 내게 먼저 말을 붙였다.

“여 사장님 아들이냐?”

“…….”

“그냥 거지라며. 여기 아들이냐고.”

아니라고 즉각 답할 수 없었다. 주변 단골들이 이상하게 여길 쳐다보고 있었다. 조폭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곤 맞구나, 하고 혼자 단정 짓곤 자신이 준 천원을 갚으라고 말했다.

“……예?”

“거진 줄 알고 줬는데 아니라며. 빨리 줘. 사기죄로 신고하기 전에.”

그 말이 어찌나 쪼잔하고 황당하게 들리던지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폭이 농담이었다며 같이 낄낄거렸다. 더 웃어야 하나. 나는 하하…… 하고 어설픈 미소를 흘리다 뒤를 돌았다. 한숨과 함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담배 하나를 얻을 일이 있어 느긋한 시간에 입에 물었다. 텔레비전에선 정치 뉴스거리가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눈으로 좇아가며 연기를 삼켰다. 소음에 길들여 있다가 다시 조용해지니 어쩐지 착 가라앉는 기분이다.

아나운서가 화면에 잡히면 누나가 떠올랐고, 젊은 남자가 잡히면 지수가 떠올랐고, 매 순간마다 이세정이 떠올랐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혼은 죄다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 내 고집은 이미 그른 방향으로 휘어져 있었다. 일부러 날 놓아준 이세정이 내 시위에 눈 하나 깜짝 이라도 했을까. 문득 든 생각을 머리를 휘저어 털어냈다.

가게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랄이냐는, 아저씨의 꾸중에 얼른 끄고 다시 마감 준비를 했다. 테이블을 열심히 닦고 있는데,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기 활어가…….”

“저기……. 장사 끝났는데요.”

“아…….”

들이닥친 손님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련 섞인 눈으로 가게를 한 바퀴 돌았다. 서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언제쯤 문을 여느냐고 묻는다. 오픈 시간을 알려주자, 또 ‘아…….’라고 할 뿐이다. 나는 일단 테이블을 닦는 것에 집중했다.

“여기 새벽에 춥지 않습니까?”

내게 온 물음에 나는 걸레질을 멈추고 아니요, 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뒤늦게 눈을 좁혔다. 새벽엔 가게에서 잠을 자는데, 저들이 그걸 알고 질문한 것은 아닐 테고.

“새벽까지 장사 안 해서 추운지 안 추운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배가 고프다든가.”

“……저한테 물으시는 거예요?”

대체 뭘 하려고 온 건지 모르겠다. 나는 내일 다시 오시라며 문밖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주춤주춤 하나둘 빠져나갔다. 마지막 한 사람마저도 뒤를 따르려다가 다시 내게 쓸데없는 말을 던졌다.

“여기서 싸움 자주 일어난다고 하던데. 조심하세요.”

이 가게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는 소문은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염려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잘 모르겠지만, 무슨 조폭 분들이 가게에 계속 찾아오시는데. 그분들이 그러나…….”

“조폭이요?”

남자가 놀라 물었다. 나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내일 오겠다던 사람이 공연히 겁을 집어먹고 안 온다면, 손님만 줄어드는 격이었다. 어떻게 해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앞서 나가선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중 하나가 귀에 꽂혀 들렸다.

……이세정이.

이세정이. 이세정이. 이세정이. 나는 남자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밖을 쳐다보았다. 헛것이라도 본 양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시선을 떨어트렸다.

***

“집에 안 가냐.”

나는 찬물이 나오는 호스를 머리에 갖다 대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눈도 채 뜨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낡은 바지가 잡혔다. 목소리만으로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나는 까딱 인사를 건네고 마저 머리를 감았다.

수건도 없어서 깨끗이 빤 걸레로 머리를 문지르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집이요? 그래, 집.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며칠간 집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기에 아저씨만 괜찮다면 조금 더 여기에 있을 작정이었다. 조폭이나 실종 사건이나 밟히는 일들은 많았지만 여기서 하는 잡일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는 내가 그리 민폐를 끼치고 있던가요? 라는 얼굴로 갈 곳을 재고해보겠다고 답했다. 이제껏 내 밥값은 하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객관성을 잃은 모양이다.

가게로 돌아가 영업 준비에 열을 올렸다. 평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휴지를 채워 넣고, 정수기 물을 갈았다. 아저씨가 마음을 돌려주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한 톤 높여서 메뉴 추천도 해봤다. 나는 지금 절실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진짜로 갈 데가 없었다. 그러나 매출을 올려보려고 애쓰는 내 마음과 달리 영업장은 오늘따라 더욱 느리게 돌아갔다. 한번 온 손님들은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손님이 새로 들어오려다가도 꽉 찬 내부를 보고 다시 나갔다. 아저씨는 단골손님들을 딱히 쫓아낼 생각이 없는지 텔레비전을 보며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끝낸 나는 초조하게 가게를 서성이다, 왜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느냐고 까칠하게 쏘아대는 아저씨의 언성에 그의 주변에 앉았다. 앉아서도 테이블은 계속 주시했다. 기존의 단골들, 조폭 무리, 그리고 어젯밤에 왔다가 먹지 못하고 간 여행객들. 그들은 술에 잔뜩 취해 서로와 어우러지고 있었다.

“……음.”

대충 봐서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분위기가 좀 심상찮다. 어제 마감 시간에 왔다가 돌아갔던 사람들과 조폭들이 조금씩 폭언을 주고받으며 험악한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내가 이 가게에 조폭이 자주 출몰한다고 어제 귀띔해주지 않았나. 매치를 못한 건가. 나는 저 여행객들에게 지금 무서운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고 말해줄까 말까 고민했다. 내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기어코 일이 터졌다. 병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조폭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난 것이다. 가게는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나는 키가 짜리몽땅한 조폭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심장이 얼어붙을 듯 몹시 놀랐다. 그 조폭은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하면서 테이블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여행객들도 지지 않고 제 테이블을 발로 차 된통 성질을 부렸다. 덕분에 뜨거운 국물 하며 접시 하며 가릴 것 없이 바닥을 굴렀다. 바닥엔 깨지고 부서진 유리들이 즐비했다.

단순한 여행객들인 줄 알았더니 저놈들도 미친 사람들이다. 오가는 대화를 들어보면 시비는 여행객들이 먼저 걸고, 성질은 조폭들이 먼저 부렸으니 시시비비를 가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폭들이 하필 문 앞을 막고 있어서 누구든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들 나처럼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등이 퍽, 하고 쳐지더니 아저씨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한대! 말리지도 않냐!”

“어, 어떻…….”

어떻게 말립니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어딘가에 숨으려고 들었다. 아저씨는 다시 한번 내 어깨를 쳐서 난리가 난 곳으로 향하게 했다. 집에 안 가냐고, 아침에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사건이 정리된 직후 나를 쫓아낼 것이 분명한데. 어쩔 수 없이 나는 조심히 한 걸음 떼었다. 거기까지 가놓고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주춤거리는 나를 아저씨는 계속 부추겼다.

상식적으로 패싸움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곳에 끼어드는 멍청한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가게는 이미 난장판에, 사람들은 울고……. 아악! 여자의 비명까지 울렸다. 나는 정의의 사도도 뭣도 아니었기 때문에 민간인이 다쳤다고 해서 덜컥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단지 늘어난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여행객들은 가게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병을 깨고, 의자를 부쉈다. 나는 한참을 갈등하다 입을 막으며 울고 있는 아이 쪽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이 던져지는 것을 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난동이 난 곳으로 향했다. 심장이 시퍼렇게 질려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가 다치면 안 된다. 그럼 아저씨가 나를 쫓아낼 것이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른 조폭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그만 하세요.”

서로 싸우다가 가게를 때려 부수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유리창을 소주병으로 내려치고 있던 조폭이 나를 보지도 않고 뻥 찼다. 나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엉덩이를 박았다. 배를 맞아서인지 숨 쉬기가 어려웠다.

“커, 허…….”

몸을 낮출 생각도 못 하고 넘어진 그대로 숨 쉬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러다 그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숨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바닥을 더듬어서 무릎을 꿇었다. 몸을 웅크려서야 드디어 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나를 찬 조폭을 쳐다보았다.

“이 새끼 표정 봐라.”

조폭이 어이없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 죽였냐?”

때린 사람이 발을 들어 올리며 더 성을 냈다. 급격한 공포감에 휩싸인 나는 땅에 손을 댄 채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나 대신 그 조폭을 후려친 여행객들이 내게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계속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그때, 조폭들의 대장이 제 부하들의 머리를 퍽퍽 쳐 말리곤 테이블에 돈을 올려두었다.

“사장님, 나 갑니다. 괜히 경찰 부르지 마시고.”

밥값 위에 돈을 더 얹은 조폭은 힐끗 내 모습을 보더니 다가와 손수건을 꺼냈다. 그놈은 바닥에 있는 피를 대충 훔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어 두 사람이 기침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이 종료되자 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단골들 몇몇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까 비명을 내질렀던 여자는 괜찮은가 모르겠다. 나를 볼 때마다 어떻게 그리 자연스레 코를 세웠느냐고 물어봤던 것만 제하면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손으로 꾹 짚었다.

“아!”

주삿바늘이 손바닥을 마구 찌르는 듯해서 의아하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손에 박힌 유리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크고 작은 유리들이 쑤셔 박혀있었다. 시각이 일깨운 통각은 가감 없이 나를 닥쳐왔다. 당황스러웠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이럼 어떻게 피아노를 치지, 하고 겁이 났다. 나는 허겁지겁 유리 조각들을 뽑아댔다. 하나를 뽑을 때마다 수십 개의 핏줄이 발딱 서는 것처럼 아파 왔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싸움에 참여했던 여행객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절할 것처럼 아픈 건 난데, 지가 더 아픈 양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찌나 괘씸하던지 나는 대답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비를 맞으며 어디에 병원이 있는지 생각했다. 빗물이 자꾸 내 얼굴을 적셨다. 나는 혹여 우는 걸로 보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어이.”

병원으로 걸어가려던 나를 아저씨가 붙잡았다. 병원비라도 쥐여주는 건가 싶었더니 내 팔에 쇼핑백을 걸쳐준다.

“이거 네 옷이니께 갖고 가.”

“……왜, 왜요?”

“손 다친 놈을 뭣 한다고 데리고 있냐. 괜히 나쁜 소문이나 나불지.”

아저씨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하여 멍하게 서 있었다. 벌리고 있던 입술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등을 돌려 병원 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아저씨도 나를 이용하고, 나도 아저씨를 이용했으니 괜찮다. 이제껏 가게에서 자는 것을 묵인하고 때가 되면 밥도 챙겨주었으니까 아저씨의 몫은 충분했다고 본다. 나는 알바생이 아닌 그냥 오갈 데 없는 거지였다. 애초에 나는 사대보험도 안 들지 않았던가.

……근데 내가 거지지, 노예인가.

나는 울음을 참으면서 걸었다. 빗물은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내 손을 자극했다. 손바닥을 펼쳐보니 비에 한껏 젖어있으면서도 마치 모래사장에서 모래 장난이라도 한 것처럼 손이 반짝반짝했다. 얼마나 유리가 박혀있는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손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치료할 돈은 있나. 손을 조심조심 움직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는 팁으로 받은 현금 몇 장이 전부였으며, 부가적으로는 수표 하트와 카드가 들어있었다. 하트가 젖지 않도록 손으로 막고서 빤히 보았다.

“…….”

이만하면 추억에 나도 포함 시켜주나요? 포함이 아니라, 아마도 이것이 추억을 덮어쓴 것 같다. 고통이 자극한 귀소본능을 외면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 길을 걸으며 피가 흐르는 팔을 숨겼다. 나를 곁눈질하는 사람들의 눈초리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승합차를 타고 따라오며 나를 주시하는 조폭들의 눈길도 있었다. 아까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는지 여행객들이 검은 차로 조폭의 뒤를 밟으면서 그 좁은 길을 앞서나가겠다고 애를 써댔다. 그러자 승합차에서 나온 조폭들이 여행객들의 차로 다가가서 창을 부술 듯 두드렸다. 당분간 싸움질은 꼴도 보기 싫었기에 나는 그들을 피해 최대한 달렸다.

“재원아!”

가까운 곳에서 빵빵 클랙슨을 울리는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하얀 차를 쳐다보았다.

“이리와 봐라!”

하얀 차의 조수석 자리에 앉아있는 여자, 그러니까 내가 잘린 횟집의 단골이자 이번 사건의 희생양이 된 여자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네 아부지 참말로 징하다. 병원에 혼자 가라든?”

“사장님은 사실 제 아버지 아닙니다. 잘 데가 없어서 가게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방금 잘렸습니다. 이제 손 못 쓰니까 쓸모없어졌다고.”

억울함을 토로할 데가 없었기에 기회가 온 김에 모조리 털어놓았다. 여자가 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뭐랬냐고, 재원이의 얼굴은 넓대대한데 얘는 샤프하지 않느냐고 떠들어댔다. 코가 자연스럽게 잘 돼서 성형외과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쉽다고도 덧붙였다.

“저기, 다친 데 괜찮으세요?”

“너도 뒤에 타야. 지금 병원 가는 길인께.”

병원비까지 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승합차를 힐끗거리곤 얼른 차에 올랐다. 여자가 지혈을 하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받아드는 꺼먼 손이 바르르 떨렸다. 세게 지혈했다가 유리 조각이 깊숙이 들어갈까 봐 겁이 났던 나는 피를 닦는 시늉만 했다. 손톱까지 까맣게 물든 손은 서툰 다독임으론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곳곳에 주차되어있는 차를 피해 달리면서 말했다.

“그 양반은 정이 없어서 문제여. 지 마누라가 어디서 죽어버렸는지 어쨌는지 고기만 썰고 앉았잖어.”

“근께로 허구한 날 빼빼 마르지. 근데 재원이 너는 여기 왜 왔냐?”

여자는 내가 재원이가 아님을 알았으면서도 여전히 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낯선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는 것이 무서웠던 나는 이름을 정정해주는 대신 순순히 답했다.

“여행 왔습니다.”

“건달 놈들 내가 가만 보고 있을 줄 알았을 거여? 병원에서 진단 증명 끊어다 경찰서로 갈 텐게 말리지들 마쇼.”

내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입을 다물고 창문을 쳐다보았다. 고통 때문에 발끝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병원비를 대신 내준 여자 덕에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치료를 받고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의사는 분명 힘줄이 끊어졌을 것이니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말했다. 여자에게서 수술비를 빌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말할 만큼의 낯짝이 없었던 나는 알겠으니 일단 응급조치부터 해달라고 사정했다. 의사는 찜찜한 표정으로 눈에 보이는 유리 조각을 모두 제거하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나갈 때까지 얼른 병원으로 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응급처치한 손으로 여자의 차에 올랐다. 여자는 제 언니에게 가봐야겠다며 어느 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며, 내게 제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자신이 병원비도 내주었으니까 경찰서에서 부르면 달려와서 진술을 해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저 휴대폰 없습니다.”

“그라믄 주소라도 적어.”

“아…….”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여자가 눈치채고 탄식했다.

“집 나와부렀다해서 농담인 줄 알았지.”

여자가 차에서 내리라며 손짓했다. 쇼핑백을 주섬주섬 들고 차에서 내리자, 여자는 그대로 나를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자 사우나 특유의 냄새가 끼쳐왔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내가 이 동네에 처음 온 날 지냈던 그 찜질방이었다.

“언니- 우리 재원이 좀 재워주셔.”

“염병 났네. 여기가 여관이야?”

“갈 데가 없다는데 내가 꼭 필요한께 그라재.”

“저 가시네는 반반한 낯반대기만 보이면……. 지효가 널 닮았는갑다.”

“어마? 꼬맹일 두고 뭔 소릴까.”

나는 조금 눈에 익은 주인아주머니에게 어색한 눈인사를 했다. 아주머니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우선 나에게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나는 찜질복과 수건을 받아 들고 계단을 올랐다.

두 손이 다 망가져 버린 탓에 무엇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샤워조차 마음껏 하지 못하고 찜질방 구석 자리에 처박혔다. 붕대에 칭칭 감긴 손이 아주 잠깐의 여유도 없이 계속 고통스러웠다.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그랬다. 붕대에 물기가 닿았기 때문일까. 찜질을 하면 덜 아플까 해서 불가마 안에 들어가 보았지만 어쩐지 더 고통스러운 느낌에 십 분도 채 안 되어 뛰쳐나왔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애꿎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손에 호호 찬바람을 불었다. 힘줄이 당겨질 뿐 고통은 희석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두 손을 무릎 위에 힘없이 두었다.

“오빠.”

눈을 가만가만 깜빡이고 있는데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며칠 전 이 찜질방에서 내게 휴대폰을 빌려준 적 있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놀란 표정을 거두어내며 힘없이 웃었다. 아이가 내 곁에 앉았다.

“엄마가 잘생긴 오빠가 여기서 지낸다고 해서…….”

“…….”

“그때 왜 갑자기 없어졌어요? 나 계속 찾았는데.”

“아, 그게…….”

부담스러워서 숨은 거라고 말을 하면 상처를 받겠지. 나는 눈동자만 굴리다가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허락해준 어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여기서 계속 지낼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빨리 나갈게.”

“왜 나가요? 집도 없으면서.”

“…….”

“근데 반말해도 돼요?”

아이는 내가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딱 한 번 이야기해본 것이 전부였음에도 싱글싱글 살갑게도 다가왔다. 나는 야, 라고 해도 화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소리 내어 웃은 아이는 할 말이 동났는지 내 얼굴만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내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주먹만 한 눈이 동그래졌다.

“다쳤어?”

“아…… 괜찮아.”

“두 손 다 다쳤잖아……. 밥 어떻게 먹어?”

밥 먹는 게 문제가 아니야. 밥을 살 수 있느냐가 문제지……. 몸이 힘드니까 비관이 마구 튀어나온다. 나는 끝끝내 입을 다문 채 잘 준비를 했다. 아이는 토실토실한 몸으로도 잽싸게 움직여 매트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매트 위에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빨리 이 고통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

당분간 찜질방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호의를 권리로 써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날이 밝는 대로 찜질방을 나와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나 손 다친 사람을 써주는 정신 나간 곳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찜질방으로 돌아왔다. 외출하고 나니 손이 더 쑤셔댔다. 이제는 내 지정석이 된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빠.”

눈앞에 구운 계란과 초코우유가 차례로 내려졌다. 무릎을 꿇고 앉은 지효가 껍데기를 까서 계란을 반으로 쪼갰다. 괜찮다고 머리를 이리저리 피했음에도 억지로 턱을 붙잡고 입에 넣어주었다.

“오빠는 많이 아프니까 내가 도와줄게.”

소꿉놀이로 여기는 것이든 어쨌든 아이는 아주 친절했지만, 나는 도움을 마냥 고맙게만 받을 수 없었다. 거북한 경계심 같은 것이 조그만 아이에게 발동된 것은 아니다. 지효의 선의를 알고 있었다. 그냥 불편한 거다, 지효가.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지효야.”

조막만 한 손으로 계란을 까는 지효를 불렀다. 나는 지갑을 열어 용돈을 주려다가 텅 비어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닫았다. 아, 횟집에서 알바를 할 적 받았던 팁들은 다 어디로 꺼졌지. 나는 아끼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의아하게 나를 보는 지효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휴대폰을 빌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지효는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인터넷에 이세정의 이름을 쳤다. 이겢. 리tㅔ. 이세절. 이세정.

이세정의 기사는 뜨지 않았다. 더없이 고요할 뿐이었다. 뭐 하고 있을까.

‘알고 보니까 걘 나한테 진작 관심을 껐더라. 그냥 나 혼자 지랄발광을 한 거지.’

저번 날 배도빈이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그럴 리 없단 걸 알면서 겁이 났고, 겁이 난 내 태도에 몸서리치며 질색했다. 난 찾아주길 바라는 건가, 잊어주길 바라는 건가. 그냥 미친 건가? 휴대폰을 힐끔거리는 지효를 피해 검색창을 닫고 넘겨주었다.

하루가 더 지나서, 찜질방 아주머니의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경찰서로 바로 좀 와달라는 것인데, 나는 전언을 듣자마자 지효가 꾸깃꾸깃 접어준 차비를 가지고 경찰서로 향했다. 돈은 먹을 걸 사는 데에 쓰기로 하고, 경찰서까지는 걸어갔다.

경찰서의 공기가 삭막했다. 서 안으로 들어오고 바로, 내게 손을 흔드는 여자를 발견했다. 나는 여자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 세 명을 발견하고 발을 주춤 세웠다. 남자들의 눈매가 더러운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겁이 났다. 나는 경찰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고 목격담을 진술했다. 그런데 패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일 뿐 의도를 가지고 깨진 병을 던진 것은 아니라고 조폭들이 입을 모으는 바람에 진술이 좀 불리해지자, 갑자기 여자가 내 손을 잡더니 이 애도 폭력을 당한 피해자라고 씨근거렸다. 누군가 만지니까 기절할 것같이 아팠다.

내가 손을 다친 경위를 알게 된 경찰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조서 꾸미셔야겠는데.”

경찰이 내게 손짓했다.

“민증 있어요?”

나는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건넸다.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경찰이 의아하게 눈썹을 올렸다.

“주소가 서울이네. 여기까진 왜 왔어요?”

“……여행하러 왔습니다.”

“여행을 하러 왔다가 식당에서 일을 했다.”

“아…… 중간에 돈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집엔 바로 안 돌아가셨고.”

경찰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다른 가족들은 우채민 씨 여기 있는 거 압니까?”

갑자기 조폭들이 휙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릅니다.”

“아직 실종신고는 안 되어있네요.”

“…예?”

요즘 들어 부쩍 내게 친절해진 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캐리어에서 발견한 내 휴대폰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냥 관종짓을 시작했구나, 하고 혀를 찼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은 누나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사라진 사실은 누나를 제외하곤 이세정밖에 모를 텐데 그가 가장 기본적인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외였다. 혹시 내가 해외로 떴다고 믿은 것이 아닐까? 단지 혼란하게 할 목적이었는데 정말로 믿었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도움 요청하시면 집 보내드리니까 잘 판단하세요.”

한심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경찰에게 고개를 주억거려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한 번 몸을 웅크렸다. 조폭들이 연신 나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여자의 진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에 악심을 품고서 해코지를 하면 어떡하지 겁이 났다. 누군가의 품에 아이처럼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는 과실상해죄로 일단락되려는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계속 나를 채근했다. 나는 여자에게 술병을 던진 사람이 누구인지 손가락을 벌벌 떨어가면서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세게 밀친 사람이 누구인지도 일러바쳤다.

“합의금이고 뭐고 나는 필요 없은께요. 깜빵이나 보내주시오.”

합의금?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솔깃했다. 지금 나는 급전이 절실했다. 그러나 여기가 어떤 동네라고 감히 소란을 피우느냐고, 콩밥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할 거라고, 여자가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입 한 번 떼어보지 못하고 저들을 유치장에 보내야 했다. 두 사람이 각각 나와 여자에게 상해를 입히는 동안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었던 남자 한 명은 아무런 죄명도 뒤집어쓰지 못하고 풀려났지만.

경찰서 앞에서 여자와 헤어지고 찜질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다급하게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경찰서에서 본 그 조폭들의 형님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으며 시선이 떨렸다. 우려했던 대로 남자가 해코지를 하러 오고 있었다. 나는 남자를 피해 마구 뛰었다. 급한 대로 버스에 올라 몸을 피하려고 했는데, 버스가 오지 않은 탓에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잡혀버렸다.

“왜 뛰냐.”

“왜, 왜, 왜…….”

“왜? 반말을 해?”

남자가 숨을 후 내쉬곤 나를 빤히 보았다. 어두운 눈이 뱀처럼 훑어댈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나는 남자에게서 조금씩 떨어지며 버스가 언제쯤 오려는지 초조하게 도로를 기웃거렸다. 옆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가 물었다.

“너 그 집 아들 아니잖아.”

“마, 맞다고 한 적 없습니다…….”

“거짓말을 해. 괜히 헷갈리게.”

남자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기겁하며 팔을 뿌리쳤다가 기분이 상했다며 나를 때릴까 봐 몸을 움츠렸다. 남자가 잠시 텀을 두었다가 문득 말했다.

“AB형치고 소심하네.”

그게 아니고 당신이 만지는 게 싫은 건데. 나는 눈치를 살피며 한 발자국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대번에 붙어서는 내가 어디도 가지 못하게 다시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다리를 굽혀 키를 줄인 뒤 다시금 남자의 팔을 피했다. 남자는 내가 널 잡아먹느냐면서 웃었다.

이 사람만 보면 횟집에서의 모멸감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아 거북하다.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가지 않고 있는 건지 짜증도 났다.

“갈 데 없다고 했지. 아까 그 찜질방에서 쭉 지내냐?”

“…….”

“씨발, 대답 안 해?”

저 멀리 버스가 보였다. 남자는 계속해서 제 말을 씹는 내게 욕을 지껄이더니 바닥에 가래를 탁 뱉었다. 자칫 얻어맞을까 나는 와들와들 떨며 버스를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남자가 버스 안까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문 근처 의자에 앉았는데, 슬쩍 확인한 창밖으로는 남자와 다른 삼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삼자는 남자에게 멱살이 잡혔다가 곧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버스를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문득 저 남자가 어째서, 내 혈액형을 알고 있는지, 등줄기를 덥혀가며 의문했다. 의아함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의문을 삼켜버리고는 고개를 돌린 채 팔짱을 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듯이 팔로 다독거리며 어서 다음 정거장에 도달하기를 기다렸다. 트라우마 따위는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속 대신 손이 울렁거렸다.

찜질방으로 돌아와 구석 자리에 웅크려 앉았는데,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왔는지 지효가 물리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종이와 펜을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지효야,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나 힘줄 끊어졌대.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결국 내뱉지 못하고 펜을 쥐었다. 지효의 풀네임을 썼다. 김, 지, 효.

“오빠 글씨 초등학생 같다.”

“나 그래도 어렸을 땐 글씨 잘 쓴다는 소리 들었어.”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붕대 때문에 뚱뚱해진 손을 주물럭거렸다. 손이 찜통에서 부어오르고 있는 듯 화끈거렸다.

“오빠, 서울 언제 갈 거야?”

“어?”

일주일쯤 됐나. 쉬려고 온 건데, 쉬기는커녕 병만 얻었다. 오기와 고집도 덤으로 챙겼다.

“지효야, 나 휴대폰 좀.”

지효는 익숙하다는 듯 휴대폰을 빌려주었다.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세정을 검색했다. 그러나 어제처럼 그제처럼 삼 일 전처럼 이세정 관련 기사는 몹시 깨끗했다. 저번과 같이 공도 역주행을 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다. 뭐 따로 볼 것이 있을까 하얀 검색창을 하염없이 노려보다가 지효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오빠, 이세정은 왜 자꾸 보는 거야? 좋아하는 연예인이야?”

“아니. 아는 오빠.”

“왜 오빠가 오빠라고 불러?”

“그냥 너한테 맞춰서 말한 건데…….”

나는 펜을 쥐고 엎드렸다. 합의금도 받지 못했으니 다시 일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일을 해야 하지? 애초에 손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펜을 손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종이를 내려다보며 김지효라는 이름 옆에 똑같이 따라 썼다.

“그런데 오빠, 나 한마디만 해도 돼?”

“뭐?”

“나 김지효 아니고 임지효야.”

“…….”

“세 번째 말하는 건데.”

“…….”

“네 번짼가.”

서운한 표정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파서 정신이 없다 보니 흘려들었나 보다. 나는 이번에는 꼭 외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속으로 임지효, 임지효,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리고 엄마가 저녁 먹으러 오래.”

“날? 왜?”

“몰라. 내가 오빠 얘기 많이 해서 그런가?”

성격상 몹시 부담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기껏 내 생각을 해준 아이에게 차마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지효의 손을 잡고 찜질방 위에 있는 지효의 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저녁상을 받았다. 근래에 먹어본 저녁 중에서 가장 사람다운 식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밥을 먹는 내내 내게 은근하게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느냐는 염려를 던졌다. 나는 스물다섯이라고 주민등록증까지 보여 드렸는데 그럼에도 태도는 똑같았다. 가족들이 걱정하니까, 가족들을 위해서, 가족들이 분명 슬퍼하고 있을 테니까……. 왜 엄한 아주머니께서 나를 설득하기 위해 감정적인 호소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혹여 내가 놓고 온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일까?

주인이 나가라고 하는데 언제까지고 버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아주머니의 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잠시 머무르고 있던 곳이었으니까 경찰서 일이 다 끝난 이상 내가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꾸하곤 미리 짐을 싸놓았다.

오빠, 가지마. 아침 일찍 나가려는 내 팔을 붙잡은 지효가 엉엉 울었다. 어린애들을 달래는 것에 별로 소질이 없었던 나는 어영부영 지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내게 기차표를 사라며 돈을 쥐여준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려 오만 원권 두 장이다. 나중에 두 배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하고서 지효에게 인사했다. 오빠, 나중에 올 거지? 그래, 돈 갚아야지.

찜질방을 나오자 볕이 쬐어왔다. 나가기 좋은 날씨였다. 걸음을 옮길수록 지효의 우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다시 손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오기 전에 한 샤워로 붕대가 많이 망가져 있었는데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붕대를 사서 갈아야 하나. 나는 약국을 찾아 전전했다.

사람의 시야는 결코 좁지 않아서, 커브를 틀 때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완전히 뒤를 돌아보자 웬 사람들이 눈에 띄게 수상한 모습으로 나를 안 따라온 척 딴청을 부렸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복장이었음에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달리다시피 해서 인파가 몰린 곳으로 향했다. 휴가를 온 여행객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근방은 딱히 볼 것도 없으면서 이상하게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에 죽치고 앉아서 목덜미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내 행선지가 거기서 거기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나는 25년을 살았다. 내가 살아온 곳은 팍팍하긴 해도 정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은 마치 합심해서 나를 쫓아내려고 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방인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녹아들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는 잘 녹아들었겠느냐마는.

반나절 정도 지났을까. 나는 배고픔도 잊어버릴 만큼 욱신거리는 손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픈 손을 붙잡고 선착장 근처를 벗어났다. 내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약국을 찾아가 붕대를 구입했다. 들고 있던 쇼핑백에 붕대를 넣고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화들짝 놀라 손을 쳐내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경찰서에서 본 그 새끼 아니냐?”

경찰서에서 본 그 남자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서 쓸데없이 내 정보를 캐물었던 그 이상한 사람. 남자는 내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여기서 뭐 해.”

“……저.”

지금 내가 뭐 하는지 이 남자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 집에 갑니다.”

집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남자가 내 팔을 잡았다.

“어딜 간다고?”

“서울이요.”

남자는 의아하게 왜 벌써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멈추었던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남자에게 팔이 잡힌 상태로 얼결에 그를 따라 걸었다. 나란히 걸으면서, 남자가 내게 담배를 내밀었다. 피울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놔주세요. 아, 아프니까.”

“돈은 있냐.”

“예. 기차 탈 돈 있습니다.”

“역까지 데려다줄까.”

남자의 제안은 반갑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날 언제 봤다고. 지효 같은 어린애들이 내게 금방 정이 드는 것은 그 나이대의 순수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 남자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대뜸 호의를 보이는 것이 너무 수상했다. 더군다나 짧게나마 보아온 남자의 행실과 도덕적이지 못한 주변 사람들로 바라볼 때 그를 믿는 것이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남자를 무시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단 나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역방향으로 가야 했는데 이곳은 그 반대 방향이었다. 즉시 멈춰 서서 몸을 비틀었다.

“이만 가겠…… 아!”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는 아래쪽으로 쳐져 가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빠르게 주변 눈치를 살피는 남자의 음험한 눈동자를 캐치했다. 수상함을 느끼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 몇몇 사람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끄는 남자의 손길. 머릿속에 번뜩 아까 나를 쫓던 그 수상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뭐 하시게요.”

내가 멍하니 물었더니 남자가 픽 웃었다.

“표정 봐라. 내가 너 잡아먹는다고 했냐. 내 동생이 네 손 망가트렸잖아. 그거 미안하기도 하고, 역까지 데려다줄게.”

“…….”

“이리와. 차 저기 대놨다.”

남자가 가리킨 곳에 승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남자는 손에 힘을 준 채 나를 잡아끌고 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눈을 세 번쯤 깜빡였다.

‘우채민 씨 생각보다 나쁜 사람들은 많아요.’

‘내 곁이 가장 안전하다니까.’

‘마누라가 그렇게 실종됐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냐.’

‘AB형치고 소심하네.’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너 혹시 뭐 빚쟁이들한테…….”

나는 남자를 뿌리치고 힘껏 달렸다.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관광객들의 일부는 차를 타고 이곳을 떴고, 일부는 횟집 안에 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보았지만, 듬성듬성 주차된 차량이나 힁한 선착장이나 어딜 봐도 달리 숨을 곳이 없었다. 나는 일단 아무 횟집에나 들어갔다. 횟집 사장님이 나를 보기 전에 화장실 안내판을 따라 쭉 걸었고, 곧 뒷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지나서 수풀이 우거진 울타리를 엉금엉금 올라갔다. 울타리가 높아서 뛰어내릴 때 발로 착지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르곤 다리를 잡고 끙끙거렸다. 그러다 힘을 준 손이 아파 이번에는 손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야, 야! 채민아!”

경찰서에서 들은 내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서 주변의 경계심을 허물어보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울타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들에게 놀라, 나는 벌떡 일어났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다시 선착장 근처였다. 나는 쫓는 이들이 어디까지 왔을까 뒤를 돌아보았다가 몸이 기우뚱 기우는 것을 느꼈다. 허공에서 팔을 휘젓다가 넘어지며 계단을 굴렀다. 무릎이 모서리에 찍히면서 힘을 잃었고, 덕분에 중심을 잃은 머리가 사정없이 계단에 박혔다. 머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질 것처럼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다. 구역질과 함께 피 맛이 올라왔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갈지자로 걸으면서도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곳은 너무 광활한 곳이었기 때문에 몸을 숨기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었다. 나는 벌벌 떨며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줄지어서 주차되어있는 덤프트럭이 보였다. 나는 덤프트럭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예상대로 아득하고 더러우며 비좁았다. 몸이 들어가긴 들어갔는데 자칫 다리가 반대쪽으로 삐져나올 듯했다. 나는 좁은 틈에서 힘겹게 움직여 몸의 방향을 세로로 틀었다. 나를 찾지 못한 듯, 당혹스러운 목소리들이 몇 들렸다. 나는 희미해지는 시야를 눈꺼풀로 눌러 깨우고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게 겁을 조금만 주자니까…… 감성이 더 통할 나이 아닙니까.”

“……어디서 감성을 찾아?”

“…….”

“…….”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귀가 목소리를 채 삼켜내지 못했다. 입안에선 계속 피 맛이 났다. 고여 있는 피를 뱉고 싶어 나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때, 내 온몸을 일깨우듯 타앙! 하고 쇳덩이 같은 것들이 일제히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함께 울린 둔탁한 소음은 아마도 뼈가 부러지며 나는 소리 같았다. 납치 모의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싸움질인가. 덕분에 주체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가려져서 들킬 염려는 덜었지만, 숨어서 싸우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강심장을 타고나지 못한 나는 두 귀를 꾹 막았다. 차 밖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얼어버린 듯 웅크려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고요가 찾아왔다. 그렇다고 섣불리 나가지는 않았다. 피를 잔뜩 흘려 강제적으로 무리를 이탈한 시체들이 밖에 있을지도 몰랐고, 무엇보다도 정적 끝에 작은 목소리들이 음습하게 응집되어 있었다.

지 혼자 넘어지고, 구르고…… 병원 데려가요?

기다리는 건 계속…… 지 혼자 그랬다니까…….

…그 사이코는 물론이고 회장님한테도 맞아 죽을 텐데.

나는 코에서 흘러내리는 뭔가를 닦아내지도 못하고 계속 기다렸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새카만 어둠 속에 있었다. 내 눈을 짓누르는 누군가에 의해 나는 마구 버둥거렸다.

“우채민.”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뭐 하는 거야.”

내 목을 쥐었으니 나는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실눈으로 본 아버지는 불거진 턱을 앞세우고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조금 뒷걸음질 치니 목이 조여 옴과 동시에 아버지의 눈에 난 자잘한 실핏줄이 보였다.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대답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벌린 입을 오리 입술로 만들고서 나는 무어라 이야기해보려고 애썼다. 여보, 무슨 일이야. 어머니의 말이 들리자마자 아버지가 내 목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머니께 얼버무리곤 두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평생 피아노만 쳐온 손이 살벌하게도 나를 꽉 쥐었다. 아버지는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가 내 뺨을 후려쳤다. 방음이 철저한 탓에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두 번, 세 번 더 후려쳤다. 나는 혀는 뒤로 집어넣고 이는 꾹 물었다. 전에 혀를 이빨 근처에 두었다가 실수로 씹어버린 적이 있었다.

“방금 이걸 들고 뭘 했던 건지 설명해.”

아버지가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까만 안대가 손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시각장애인 이해 수업의 일환으로, 안대를 쓰고 걸어보는 활동을 했었다. 그때 가져온 안대로 가족들의 앞에서 내 두 눈을 가리고 눈이 안 보이는 척 연기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의 흉내를 내서 화가 난 거였다. 깨닫고 나니 입을 떼기가 무서워졌다.

“지금 묻고 있지 않아?”

“어, 엄마처럼 했어요. 눈 가리고…….”

“왜 그런 짓을 했어?”

어머니를 따라 한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족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다.

“채민아, 아빠가 묻고 있어.”

“…….”

“우채민.”

계속되는 채근에 울음이 나오려고 했는데, 뺨을 또 맞고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도 지금 뺨보다 손이 더 아팠다.

“엄마 힘들게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을까, 내가.”

“네……. 그, 그런데 엄마는 못 봤을 텐데…….”

내가 안대를 쓴 모습을 엄마는 못 봤을 테니까 힘들진 않았을 거라고, 아버지를 안심시켜주려다가 노려보는 눈빛에 움찔했다. 아버지의 귀가 몹시 빨갰다. 아버지는 화가 날 때마다 귀가 빨개지곤 했으니, 나는 이 이상으로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한숨을 내쉬었다. 낮은 목소리를 냈다.

“너 낳고 스트레스받아서 시야가 어두워진 거야.”

“…….”

“엄마 눈 어둡게 했으면 반성을 해야지.”

벌써 몇 번은 들은 말이었다. 아버지도, 누나도 다 나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성할게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 뺨에 비볐더니 아버지가 손을 내쳤다. 나는 이번에는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잠시 나를 쏘아보던 아버지가 내 손을 마주 쥐여주었다. 차가운 눈과 달리 손이 따뜻했다. 그리고 좀 아팠다. 세게 쥔 것도 아닌데.

방 밖으로 나오자 용케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두 팔을 벌렸다. 두 팔을 아래쪽으로 내린 것을 보면 아버지보다 키가 작은 나를 안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대신 어머니를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파에 어머니를 앉혀두었다.

“여보, 나 과일 먹고 싶은데.”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대번에 일어났다. 뭐 먹고 싶어? 뭘 사올까? 청포도? 복숭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궁금한 것이 많은 듯했다. 하나를 말하면 열 물음을 던진다. 질문이 관심의 척도란 사실은 그때쯤 깨달았는데, 그때 내 위치를 같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애석하게도 이 집안에서 내게 질문하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꼬치꼬치 캐묻고는 외출을 했다.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나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물론 어머니의 곁에 다가가기 전에 소리를 내서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우리 채민이는 좋겠네요. 멋진 아빠도 있고.”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숨을 색색 내쉬었다.

“아빠는 항상 다정하고, 부드럽지. 그렇지?”

“나 아빠 좋아.”

소파에 앉아있는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누나는 내 뺨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른의 단단한 손에 몇 번이고 맞았으니 뺨이 붓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누나는 뺨을 괸 채 한참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맞을 만했다는 얼굴로 소파를 벗어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머니에게 밀착했다.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는 감정들이 있다. 아버지의 눈이 그랬고, 누나의 표정이 그랬다. 누군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당시 나는 어쩌면 고집스러울 만큼 보고 싶은 것만 보았으면 싶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응집되었다. 거짓말처럼 가뿐하게 눈이 떠졌다.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에 있는지,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다 두꺼운 문이 쿵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내 차의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건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트럭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트럭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 아저씨가 이제야 일어났냐면서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오른 남자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죄송합니다.”

새벽에 몰래 탈출하려고 했는데 그만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저기가 뭐가 편하다고 이른 아침까지 잠을 잔 건지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만약 이분들이 나를 찾아내 주지 못했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저 큰 바퀴에 깔아뭉개졌을 것이다. 나는 쇼핑백을 품에 안고 남자들에게 몇 번이고 죄송하단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등을 돌렸는데, 그……횟집에서 소란을 일으킨 여행객들과 정면으로 맞닥트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여행객들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내게 해를 끼친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겁이 났다. 어젠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달린 터라 낯선 거리를 무작정 뛰었다. 평소보다 달리기가 느렸지만 고통은 잠시 넣어두고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발 빠르게 올라갔다. 좁은 골목도 빠르게 통과했다. 쫓아오는 사람들은 괴성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무어라 말하는 것 같은데 지금은 그걸 들어줄 만큼의 여유도, 멘탈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영업 준비를 시작한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힐끗거렸다. 아침부터 마구 뛰어대는 내 행동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거지꼴 때문인가 하여 나를 훑어보았다가 내 손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피가 붕대를 적시고 있었다. 가끔 이렇게 한 번씩 상처가 터지곤 했으니 호들갑스럽게 반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나는 여행객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커브를 틀자마자 좇아오는 어지럼증에 벽에 또 한 번 머리를 부딪치며 주저앉았다. 온몸을 웅크리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기침을 마구 뱉고는 코 밑을 문지르며 숨 쉬는 데에 방해가 되는 피딱지 같은 것을 떼어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그때서야 손에 휘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너덜너덜해진 쇼핑백 안에서 어제 사둔 새 붕대를 꺼냈다. 손목 끝에서부터 꼼꼼하게 감아갔다.

막 붕대를 감은 손 위로 빗물이 떨어졌다. 비가 오나 싶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더럽게도 화창한 날씨였다. 햇살이 어찌나 쨍쨍하던지 이목구비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재차 손을 움직였다. 붕대를 세 바퀴 정도 감았을 때, 또다시 물이 떨어졌다. 붕대를 감다 말고 눈가를 비볐다. 뭐야, 왜 울어. 어이없는 투로 혼잣말을 하고서 붕대를 감는 것에 몰두했다. 손이 점점 느려졌다. 눈물이 빗물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손을 완전히 떼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눈병이라도 만들어낼 것처럼 거칠게 눈을 문질렀다. 꿈 때문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가끔씩 속이 다 상할 만큼 서러움이 밀려들곤 했다. 아버지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폭력을 쏟아냈기 때문에 증오심에 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관심 좀 달라고 온몸으로 애원을 했음에도 끝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한 지난날의 그의 태도가 떠올라 급격히 미워진 것도 아니었다. 내 애정은 고작 폭력 따위에 흔들릴 만큼 얄팍하지 않았다.

언젠가 주인에게 얻어맞고도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보고 참 멍청하다고 혀를 찬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안타까움에 젖어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는데, 이제 와 다시 떠올려보면 그 강아지만큼이나 나를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내 애정은 일방적이고, 단단하고, 그리고 외롭다. 그래, 나는 그때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오랜만에 다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날짜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일주일은 됐을 것이다. 연고 없는 곳에서 생판 남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려니까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누가 좀 와줬으면 하는데, 실은 보고 싶은 사람은 당장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여기 있어봤자 내 마음이 달라지진 않을 테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갈까. 이제 와서? 약해진 마음에 일부러 고집을 붙여서 자존심을 세웠다. 붕대를 꼭 쥔 오른손을 대신해서 왼손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돌돌 말린 붕대가 바닥을 구르며 빠르게 풀려갔다. 입 밖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갔다. 문득 흐린 시야로 붕대를 집는 손길이 보였다. 까맣고 주름진 손이다. 기다렸던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그것이 너무 서러워, 그동안 겪은 서글픔까지 모두 끌어와선 아예 목 놓아 울었다. 누가 머리를 친 것 마냥 골이 울렸으나 울음을 멈출 순 없었다.

“여서 뭐 하냐.”

내가 잠시 머물렀던 횟집 사장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쳐다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자 내 앞에 주저앉은 아저씨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내게 붕대를 내밀었다.

고개를 숙이며 더듬더듬 붕대를 받아들고, 팔목으로 이마를 짚었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들썩거렸다. 흐느낌 사이로, 이 근처에 제 가게가 있는데 생각 있으면 다시 오라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너 계속 쓰고 잡았지. 근데 어디 뻔지르르한 놈들이 와서…….”

“사장님.”

나는 아저씨의 팔을 덥석 움켜쥐고,

“휴대폰 좀, 빌려, 빌려주세요.”

마구 흔들었다. 진작 돌아가고 싶었는데,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계기란 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전화를 걸어야 돌아갈 수 있다. 전에 나를 쫓아냈던 일이 미안했는지 아저씨는 순순히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고 번호를 꾹꾹 입력했다. 손이 다쳐 몇 번이고 번호를 틀렸기 때문에 전화를 걸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몇 초 뒤에 신호음이 들렸다. 모르는 번호라서 전화를 받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신호음은 금방 끊어졌다. 목소리보다 먼저 들린 울음 섞인 숨소리는 나락까지 추락한 내 감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소음이었다.

“세정이 형.”

며칠간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참고 참았던 이름을 터트려냈다. 말하고 나니 이렇게 속 편할 수가 없었다.

“저…… 저 여기 있는데, 와주면 안 될까요? 막 손도 아프고, 이상한 사람들도 쫓아오고…… 무섭고, 배도 고프고, 덥고, 너무 괴롭고, 그리고 형도, 형도 많이 보고 싶은데…….”

말꼬리를 흐리며 나머지 못한 말은 울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다 혹 내 울음 때문에 대답을 못 들을까 봐 꾹 참았다. 얼마간의 정적이 흘렸다. 분명 텀은 꽤 짧았던 것 같은데 그사이 나는 두 번이나 침을 삼켰다.

-거기 있지, 왜.

축 젖어있는 나와는 상반된, 무서울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에는 없던 여유로운 반응이라 나는 몹시 당황했다. 흐르던 눈물이 순간 멎을 정도였다.

“……저, 저 버리지 마요.”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버려요.

“…….”

-지금 난 화가 많이 나서, 우채민 씨 보면 손부터 올릴지도 모르는데 어때, 그래도 만날래요?

나는 생각도 않고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네, 라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그렇다고 정말로 맞을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더 얻어맞기에는 몹시 아팠고, 게다가 이세정이 진짜로 나를 때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때릴 거면 그때, 그러니까 내가 이세정을 마구 발로 차며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때, 그때 진작 때렸어야 했다.

-내 카드 가지고 있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나는 즉시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에는 이세정이 준 검은 카드가 있었다.

“네…… 이, 흐, 있어요. 카드.”

-그럼 택시 타고 와요.

“……예?”

-갈 때 제 발로 갔으면 올 때도 그래야죠.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목 안에 눌러 담았다. 직접 오라는 말이 너무 서러웠지만 저질러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토를 달진 않았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저씨에게 휴대폰을 건네려다 도중에 팔에 힘이 빠져 손을 떨구었다. 팔다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코도 아파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서럽고 화나고 창피한 건지 내 감정을 들여다볼 겨를도 없었다.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계속 울어댔다.

택시를 타고 지체없이 달렸다. 이세정이 만나자고 했던 장소에는 대기 차량이 하나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차를 살펴보았다. 검은 차량의 외관도 번호판도 모두 익숙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무도 차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준 택시기사는 이미 떠나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다친 손을 힐끔, 닫힌 문을 힐끔 살폈다. 그러나 차는 잠잠할 뿐이었다. 눈물이 코로 몰려갈 것만 같았다.

“안녕.”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즉각 고개를 돌렸더니 이세정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하마터면 안을 뻔했는데, 그러기엔 나를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세정은 나를 보자마자 웃는 표정 그대로 눈썹을 올렸다. 입술은 곧 비뚤게 내려갔고, 이내 굳어졌다. 이세정은 웃음기는 섞였지만, 적지 않게 당혹한 어조로 물었다.

“꼴이 왜 이래요?”

그저 묻기만 했을 뿐인데 서러움이 몰려왔다. 안아달라고 팔을 벌렸더니 몸이 깨끗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세정은 나를 막아 세웠다. 내 팔을 잡은 그대로 정적이 일었다. 내 몸을 훑어본다. 머리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팔로, 그리고 팔에서 다리로 시선이 미끄러졌다. 이세정이 ‘장 비서님.’ 하고 중얼거렸다. 뒤를 돈 이세정은 장 비서님이 곁에 없단 걸 알았는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지고, 오직…… 오직 분노만 남는다. 화를 참아내듯 이를 물고서 이세정이 내 팔을 잡았다.

“따라와요.”

별안간 끌고 가려 하기에, 나는 주춤 걸음을 세웠다.

“혀, 형…….”

“얌전히…… 얌전히 따라와요.”

힘주어 미소를 지은 이세정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이어질 뿐 아직 통화 중은 아니라서 나는 차내로 짐처럼 던져질 뻔한 것을 버티며 말을 걸었다.

“보고 싶었어요, 형… 형…….”

이세정은 대답 없이 나를 차내로 집어넣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서 웅크려 앉았다. 왜인지 몸을 벌벌 떨고 있으니, 몸 위로 담요가 던져졌다. 담요로 몸을 둘둘 말았다. 이세정이 안아주지 않았으니까 대신 내가 내 몸을 껴안았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

마취에서 깨고 나니 왼손엔 깁스, 오른손엔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나는 나흘하고도 반나절 동안 병실에서 지내다가 이른 퇴원 소속을 밟았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서 기사님뿐이었는데, 실망하려던 찰나 중간에 이세정이 픽업 되었다. 차에 오른 이세정은 가장 먼저 내게 안전벨트를 해주고는 바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쳐야 말이라도 걸어볼 텐데……. 결국 나는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주야장천 바닥만 쳐다보았다.

본가에 도착해서 이세정이 먼저 차 밖을 빠져나갔다. 나는 혼자 문을 열기 어려웠기 때문에 차의 후미를 돈 이세정이 대신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안전벨트도 풀어주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내가 내리기도 전에 내 팔을 잡아 또 짐짝인 양 끌어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취급이라서 그런지 속이 상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가 나를 용서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프, 아픕니다.”

땅끝까지 파고들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항의했더니 이세정이 건조하게 말했다.

“미안해서 어떡해요.”

“…….”

“그럼 업힐래요?”

저 말을 꺼낸 것이 정말로 나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면 나는 고민 않고 그의 등에 몸을 기대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비꼬는 투였고, 나는 명백히 내게 쏟아진 불친절을 담담히 받아들일 만큼 뻔뻔할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이세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업어준다니까.”

“…….”

“우채민 씨.”

“세정아!”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편한 분위기를 가르고서 때마침 안대를 쓴 이세정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전에 나를 째려보며 경계했던 그 도우미 분은 곁에 없었다. 이세정의 어머니는 오랜만이라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아들이 아닌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이세정은 그에 대해 지적도 않고, 한 발자국 옆으로 옮겨 제 어머니의 시야 안으로 들어갔다. 저 배려는 이세정의 어느 부분에서 나온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일하시는 분은?”

이세정의 물음에, 그때까지만 해도 어린애처럼 들떠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나 혼자 나와 있겠다고 했어. 아들이 너무 갑자기 와서, 준비할 것도 있고.”

제 어머니에게 손을 뻗은 이세정은 팔에 묻은 하얀 털 같은 것을 떼어주었다. 털이 허공에서 휙 날아가다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분명 그걸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는데 알았어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엔 의심의 싹이 전혀 없었다. 주택 안으로 들어가면서 맞닥트린 도우미 아주머니의 몸에서도 털 몇 개를 발견했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내게 어서 가라며 채근할 뿐이었다.

나는 계단 앞에서 멈추어 섰다. 눈으로 훑어본 계단이 생각보다 가팔랐다. 올라가긴 올라가야 했기에 조심스럽게 한 발을 올려두었다. 네 계단쯤 올랐을까. ‘우채민 씨.’ 하고 밑에서 부름이 들려왔다. 등을 돌렸더니 이세정이 내려오라고 고갯짓했다. 위층 말고 다른 곳에 갈 일이 생겼나. 나는 군말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조심히 내려오다가 마지막 계단 두 개만을 남기고 이세정에게 훌쩍 들어 올려졌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가, 이세정이 나를 안아 들고 한 발 한 발 걷자 힘을 풀었다.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안았다. 오른 승강기의 문이 닫혀서는 품에 얼굴을 묻기까지 했다. 가슴을 후벼 팔만큼 차가운 향이 올랐다.

“왜 치대.”

목소리는 그다지 차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치를 보며 이세정의 목에 감은 팔에 힘을 풀었다. 축 처진 깁스가 목에 쓸려 거슬렸는지, 이세정이 목을 비스듬히 기울여 내 팔을 피했다. 그러면서 깁스한 내 팔을 쓱 훑어보았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다쳤는지 물어볼 줄 알았더니 그런 물음은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러나 이세정이 무안하게 반응이 없어 그만 말을 멈추어야 했다.

이세정은 방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이세정의 방엔 전에 한 번 와본 적 있었다. 아직도 문을 달지 않아서, 들어서기도 전에 내부가 일부 보였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유리관에 갇혀있는 펭귄이었다. 유리관에 가둬놨다고 해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당분간 여기서 지내요.”

“……형은요?”

내 물음에 이세정이 나를 지그시 보았다. 시선에 악의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혹했다.

“다른 곳에서 지내세요?”

“이제 내가 궁금해요?”

나지막한 물음엔 약간의 서늘함이 있었다. 나는 무안한 눈치로 이세정을 곁눈질하다가, 다가오는 그를 피해 조금씩 물러났다. 내 쪽으로 바짝 다가선 이세정이 내 뒷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목이 잡히자마자 나는 두 팔을 감쌌다. 깁스한 팔과 부목을 댄 손을 보여주면서 내가 환자이기 때문에 심한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간접적으로 동정심을 어필했다. 내 뒷목에서 손을 떼어낸 이세정이 나긋하게 나를 책망했다.

“그러게 왜 내 말 안 들었어요?”

“…….”

“내 말 다 무시했잖아. 가지 말라고, 위험한 사람 많다고 했는데, 들은 체도 안 했잖아요.”

“……네.”

“내가 얼마나 매달렸어요, 우채민 씨.”

이세정의 눈을 피할 데 없어 대신 그의 머리로 시선을 올렸더니, 손질이라도 받았는지 미세하게 펌이 들어간 머리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눈썹은 여전히 단정했고, 셔츠엔 구김이 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모습으로 초라한 나를 원망하니, 좀 비참해졌다. 눈길을 떨어트렸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말을 잘 들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이세정이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눈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이, 언뜻 사나워 보였다.

“이상한 게 꼬이지도 않았을 테고.”

동감하는 바였기에 울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정착한 그 마을이 유독 이상한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 힘들었다. 돈이 없어 배가 주렸고, 그 와중에 몇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았다. 원래 서러우면 자신에 대한 연민이 커지는 법인지 나는 이세정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벌렸다. 그냥 잠깐의 안정이 필요했을 뿐인데 매정하게도 팔이 잡혔다.

“채민 씨 잘못한 거 없어요?”

“…….”

잘못이란 걸 꼽는 것보다 변명과 원망을 꼽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순순히 발로 차고, 밀치고…… 내가 잘못을 했다고 판단한 일에 사과했다. 다시 생각해도 발로 찬 건 너무했던 것 같다. 나는 깁스한 팔로 이세정의 배를 문질러주었다.

“그리고?”

“도망간 것도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며 다가섰다. 저쪽에선 안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가 먼저 그를 껴안았다. 나는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무서운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엉엉 울다시피 하며 누가 쫓아왔다고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세정은 등을 토닥여주기는커녕 내 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이 이상 더 말하지 못하고 가슴만 들썩거렸다. 잇새로 슬픔이 비집고 나왔다.

“이제 안 도망갈 거예요?”

울음이 거의 그쳐갈 때쯤 이세정이 조용히 물었다.

“네, 흡, 예.”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나는 짠물을 짜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세정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같이 있다가 수틀리면 또 도망가겠다고 때리고, 발로 찰 텐데. 그럼 무서워서 어떻게 같이 있어요?”

“아, 안 그럴게요.”

“한번 폭력을 쓴 사람이, 두 번은 안 쓴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이세정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이세정은 꼭 자신이 약자인 양 말을 했다. 어느 것을 비추어 봐도 이세정이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은 꽤나 이질적으로 들렸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이 될 수는 없었다. 지금껏 폭력을 행사한 건 나뿐이었으니까.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다시 한번 이세정의 배를 문질러주었다.

“우채민 씨는 한 번 한 것도 아냐. 병동에서 뛰쳐나오면서, 집에 가겠다고 날 밀치고 때렸잖아요.”

나를 병원에 가둔 이세정에게 벗어나려고 그런 적이 있었다. 생각은 난다. 하지만 그건 좀 다른 경우 아닌가. 어쨌든 부정한다고 내 잘못이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으니, 나는 이미 폭력으로 점질 된 내 몸을 내려다보며 성한 곳을 찾았다. 나는 가슴과 배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도 때리세요.”

말하면서도 부디 못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때리세요’라는 말은 발음을 뭉개었다. 예상대로 이세정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며 다시 한번 말해주길 바랐다. 나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저 때리세요.’라고 말했다. 이번엔 내 말을 똑똑히 알아들은 이세정이 조금 짜증스럽게 웃었다.

“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이세정이 나를 나무랐다. 이세정도 이제껏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지 않았나. 황당했지만,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몰래 안도했다. 각오는 했어도 고통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왜 나한테 물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 진짜 도망 안 갈게요. 이제 안 가요.”

나는 고개까지 저어가며 단호히 말하곤 이세정의 셔츠에 눈가를 비벼 눈물을 닦아냈다. 애교는 잘 못하는데 부디 애교 비슷하게라도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잘 못해서 그런가. 먹히지 않았는지 이세정이 도중에 내 턱을 붙잡아 직접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눈두덩을 살짝 누르고 그대로 눈 밑을 쓸었다.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덜컥 멈추었다. 울렁거릴 정도로 깊은 시선이다. 불현듯 이세정이 호기심이 일은 눈으로 내 두 뺨을 잡아 끌어당겨 빤히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뭐에 꽂혔는지 눈썹을 매끄럽게 일그러뜨린다.

“내가 왜 우채민 씨 우는 모습에 반한 줄 알아요?”

“…….”

“이 눈물엔 빌어먹을 죄책감이 있죠.”

죄책감. 욕설을 덧붙인 것치고 묘한 희열에 차있다. 문맥을 파악해보자면 이세정은 지금보다 좀 더 오랜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는데 나는 좀처럼 기억해낼 수 없었다. 졸업연주회에서 운 적이 없으니 아마도 다른 어느 날, 과거의 어느 순간 우린 강렬한 만남을 한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왜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애쓰느라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내 턱에 단단히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긴 이세정이 말했다.

“그러니까 우채민 씬 책임을 져야 해요. 그 눈물에 맹세해요.”

“…….”

“날 다시 떠나는 날엔, 그때 못지않은 고통을 감당해야 될 거예요.”

일갈하기만 할 뿐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 친절하게 가르쳐 줄 생각은 없는가 보다. 나는 당장 화가 난 이세정을 달래기 위해서,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이 집에 온 뒤 악몽을 꾼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서운 일을 겪은 것치고 꿈에선 그 흔한 검은 손길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아침에 눈을 뜨기 직전에 심장이 급박하게 뛰어댔다. 불쾌한 심장 박동은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 박동이 다 잦아들면 그제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퉁퉁 부은 양팔도 욱신거렸다. 처음엔 이 고통이 치료를 잘못해서 생긴 것인 줄 알고 몇 번이나 병원에 갔던지 모른다. 오늘도 역시 생긴 가짜 통증에, 나는 우울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침 날씨도 우중충했다.

“창문 닫을까요?”

어찌나 넋 놓고 있었던지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문은 언제쯤 달 생각일까. 간혹 보면 자동차 와이어나 시계나 문짝이나, 이세정은 없으면 불편한 것들을 잘만 떼어내는 것 같았다.

커튼까지 내린 아주머니는 한식을 가져왔다면서 테이블에 접시를 차례로 올려두었다. 사모님의 취향인지 여름임에도 해물과 밀면만 반복적으로 나오는 식탁이 내 위장엔 조금 버겁다고 말했더니, 다행히 주방장은 손님 주제에 주는 대로 처먹지 왜 컴플레인을 거느냐는 말 따윈 하지 않고 곧바로 한식으로 메뉴를 바꾸어주었다. 이 집에서 나는 VIP병동에서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 집 사람들은 말만 하면 무엇이든 구해주었고, 때가 되면 질 좋은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샤워도 편리했다. 머리는 숍에서 해결하고 몸은 욕조에 들어가 해결하니 못 씻어서 찝찝할 일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장 비서님에게 남극에서 오셨냐는 핀잔을 들으면서까지 찬물로 반신욕을 하고 나니 이 집이 한결 편해지기도 했다.

물론 아직 몸이 낫지 않아서 나 혼자서 완벽히 샤워를 끝내기엔 무리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누구를 불러 도움을 요청하기가 뭐했다. 한국에 있는 유일한 가족인 누나를 불렀다가는 우리 둘 다 기함을 할 것이고, 지수는 나를 걱정할 때가 아니고, 이세정은 생각해볼 것도 없이 패스였다. 부끄럼도 부끄럼이지만, 장 비서님의 말에 따르면 이세정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가는 바이크 세차시키듯 아주 난리를 펴놓을 것이라고 했다.

“혼자 먹을 수 있나 모르겠네.”

아주머니의 염려에, 나는 테이블에 앉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보란 듯이 부목이 대어진 손가락 중 멀쩡한 새끼와 약지 사이에 포크를 꿰고 먹는 시늉을 했다. 능숙해 보이진 않아도 괜찮은 자세였는데, 아주머니가 나가자마자 포크를 내팽개치고 숟가락을 들었다. 반찬을 골고루 밥에 덜어 잡탕을 만들어두고 먹었다. 밀면 같은 경우 포크 질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식이 먹기에 더 좋았다.

나는 밥을 반 공기 정도 해치우다가 문득 손이 너무 아파서 하던 일을 중단했다. 쓰기 쉬운 숟가락이라지만 나도 모르게 먹는 도중에 새끼와 약지를 제외한 다른 손가락까지 힘을 주어 움직였던 모양이다. 원래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붕대를 매두었었으나, 내가 자꾸 아프다며 징징거리는 통에 몇 번이고 붕대를 풀었다 맸다 하여 틈이 남아 있었다. 나는 또 병원에 가야겠다고 혼자 걱정하다가 돌연히 내 손을 망가트린 남자를 떠올렸다.

감옥 안은 자유롭지 못해도 팔다리는 자유롭겠지. 그 팔다리로 잘 먹고 잘 지낼 생각을 하니까 속이 막 비틀렸다. 내가 너무 못돼 먹은 건가.

“아직 저녁 먹고 있어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이세정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세정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곤 내 밥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왜 반찬을 잡다하게 섞어놓았냐는 듯 의문한다.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얼른 변명했다.

“이렇게 먹으면 편해요.”

“……글쎄요.”

이세정은 좀 이상한 눈치로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달리 간섭할 생각은 없는지 뺨을 괴고서 내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무도 없을 땐 잘만 먹었는데 그가 쳐다보고 있으니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손을 바들바들 떨어대며 음식을 끝없이 밀어 넣었다. 떨리는 손 때문에 밥알이 테이블 아래로 수십 알쯤 떨어졌을 즈음, 이세정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 먹여달라고 안 해요?”

“예? ……아….”

“아파죽겠다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