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22화 (22/130)

#21

일단 잡생각을 버리고 잠을 자기 위해 침대 위에 곧게 누웠다. 실험대에 올라간 사람처럼 뻣뻣하게 누워 있으니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최대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자세로 자기 위해서 옆으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아봤지만 역시나 잠은 머릿속을 방문하지 않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지루하고 두꺼운 수면 전용 책까지 꺼내서 읽어봤지만, 처음으로 20페이지까지 묵묵하게 읽었다. 아무 생각 없이 21페이지를 팔랑거리며 넘겼을 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책을 내던졌다.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몸은 수면 상태에 들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계속해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침대에서 일어나 반듯이 앉자마자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뉴스 조금 읽은 거로 기분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실력을 품평당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고 생각해.'

이인자라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던 녀석이 처음 내 춤에 대해 입을 열었던 날이 떠올랐다.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춤에 대한 자부심은 잘 간직하고 있었던 그때의 나에게 그날의 목소리는 큰 충격이었다.

열이 올라 떨리는 다리를 곧게 세우며 연습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노려봤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했다. 덕분에 금이 가서 부실해져 있던 멘탈은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다.

말도 안 되는 루머로 실력까지 저평가 당하는 건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더없이 서러운 일이었다. 지구의 노래 실력은 누가 봐도 충분했다.

쓸데없이 과거 회상까지 하고 나니 더 답답해져서, 침대 헤드에 걸려있던 겉옷을 걸치고 일어났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밤공기를 쐬며 산책이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다.

“세상이 말세야, 세상이!”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술에 잔뜩 취하신 아저씨의 고성이 들려왔다. 한바탕 회식을 마치고 오신 것 같았다. 세상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 취한 사람의 고성방가에 동조했다.

온갖 거짓말이 넘쳐나는 인터넷의 글들을 전부 믿고, 충분히 꾸며냈을 수 있는 말들을 사진 한 장으로 전적으로 신뢰하는 세상은, 아저씨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말세가 맞았다.

가로등이 밝히고 있는 길을 쭉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내 모교가 나왔다. 춤에 매진하고 싶어서, 통학시간이 아깝다고 부모님을 졸라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다 보니, 밖에만 나오면 학교가 보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인 전공 연습시간을 가지고 있는 듯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드문드문 보였다.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하며 학교 바로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원한 음료수로 답답한 속을 한 번 뚫어볼까 싶어 내린 결정은 얼마 가지 않아 취소됐다. 편의점 앞에 테이블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 때문에.

“…….”

누가 봐도 지구였지만 바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캄캄한 하늘 밑에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표정하게 휴대폰을 매만지고 있었다. 휴대폰 불빛에 비친 얼굴에는 눈물 자국도 없었고, 딱히 눈이 부어있지도 않았다.

멀쩡해 보이는데 왜 이상하게 위태로워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대놓고 앞을 지나갔음에도 휴대폰을 보는데 정신이 팔렸는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매일 마시는 1+1 레모네이드를 계산하고 나오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지금 저 상황에서 섣부르게 말을 거는 것보다는 모르는 척 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선배.”

레몬에이드를 양손에 한 캔씩 쥐고 아까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데 지구의 입이 타이밍 좋게 열렸다. 덕분에 걸음을 옮기기 위해서 뗐던 발을 다시 얌전히 땅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불렀는데 못 들은 척 가기도 그래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레모네이드 한 캔을 내려놨다. 마시라는 의미였지만 지구는 손을 대지 않았다.

“괜찮냐고 안 물어보시네요.”

“아, 미안.”

“…… 아니요. 물어봐달라는 거 아니었어요.”

일부러 묻지 않은 건데, 왜 안 묻냐는 소리가 나오길래 당황해서 말을 조금 더듬었다. 멍청한 반응에 지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앞에 놓인 레모네이드를 집어 들었다. 그 사소한 행동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감사합니다.”

“어?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말없이 마실만도 한데 와중에 고맙다고 하니까 너무 미안해서 절로 손이 올라갔다. 안 그래도 1+1인데. 캔을 따고, 서서히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쉽사리 말을 뱉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저는 형한테 손 벌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알지. 당연히 알지. 아닌 거.”

“진짜 오롯이 제 능력으로만 해내고 싶었어요. 어디에 말해도 떳떳해지고 싶어서요.”

공중으로 올라간 캔은 끝까지 기울여지지 않았다. 캔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여서 그냥 시선을 조용히 테이블에 박았다.

감정 표현도 똑바로 못하는 애한테 쏟아진 수많은 악플들을 생각하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입고 있는 학교 교복을 보며 새삼 아직 고등학생이라는 걸 느꼈다.

“그래서 형이랑 얘기도 했어요. 서로 아는 척하지 말기로. 제 이름 앞에 형의 동생이라는 말이 붙는 게 진짜 싫었어요. 각자 꿈을 향해서 가는 건데 굳이 형제라고 떠벌리고 다닐 필요 없잖아요.”

“그렇지.”

“이런저런 일 겪고, 힘들게 다 그만두고 나오면서도 포기를 못해서. 처음부터 그 소속사를 안 들어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힘겹게 얘기를 이어나가던 지구가 결국 캔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놨다. 양이 많기로 유명한 레모네이드가 거친 동작에 화들짝 놀라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얼굴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푹 숙인 고개 밑 얼굴을 굳이 쳐다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의자를 슬그머니 조금 더 옆으로 밀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열심히 토닥이며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오늘 하루 봤을 댓글과 기사들의 숫자만큼 우는 것 같았다.

“학교에 못 갔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교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래, 하루쯤은 괜찮아.”

지구는 몇 분 정도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감정을 쏟아내고 나서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갈무리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대충 훔친 지구가 그제야 레모네이드를 며칠 아무것도 못 마신 사람처럼 들이켰다. 가득 차 있던 캔을 단 한입에 텅 비운 지구가 발개진 눈으로 빤히 쳐다봤다.

“마침 지나가 주셔서 감사해요. 연락하고 싶었는데 민폐일 것 같아서 못 했어요.”

“아니야, 뭐가 민폐야.”

“친구들이 괜찮냐고 문자 보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선배 보니까 조금 울컥했나 봐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화면이 어두워진 휴대폰 전원을 완전히 끈 지구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집에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차마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기어코 사양하는 지구를 결국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지구가 사는 아파트는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발걸음을 빨리하면 10분이면 올 수 있을 거리였다.

“휴대폰 꼭 꺼놓고 자. 네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내일 촬영 있는 거, 혹시 알아?”

“네. 문자 받았어요.”

많이 진정한 듯 대답하는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걸 봐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내가 할 말만 하고 가기로 했다.

“푹 쉬고, 힘들면 굳이 안 와도 돼.”

삼촌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뛸 오지랖 넓은 소리였지만, 솔직히 진심이었다. 촬영장에 오면 김성원과 얼굴을 맞대야 할 거고, 그건 틀림없이 곤욕일 테니까.

삼촌에게 잘 말해서 편집하거나 뒤로 밀어서 촬영하면 될 것 같았다. 편집에 들어가는 커피값은 내가 내야지.

같은 참가자 주제에 힘들면 안 와도 된다는 근거 없는 소리를 했는데도 지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찾아온 침묵이 어색해져서 나머지 한 손에 들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무작정 지구 손에 쥐여줬다.

“잘 자.”

마지막으로 어색하게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뒤 빠르게 뒤돌아 걸었다. 왠지 되게 듬직한 선배인 척을 한 것 같았다. 그냥 별거 아닌 위로 정도로만 느껴줘도 고마울 것 같았다. 제대로 소리 내서도 못 우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김성원을 만나면 한 대 쳐주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촬영할 때면 늘 여유로워지는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어찌나 표정 관리를 잘하는지, 상대방 엿 먹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너무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집으로 가는 가로등 가득한 길을 걷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몇 걸음에 하나씩 있는 가로등 때문에 늦은 시간인데도 환했지만, 갑자기 진동이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확인한 전화의 발신자는 삼촌이었다.

“왜요?”

-어, 하현아. 방금 작가들끼리 회의하다 나온 건데 내일 몰카 하나 진행할 거거든?

그냥 노래하고 춤추는 것만 찍기에는 부족했는지 갑자기 몰카를 진행하겠다는 삼촌의 말에 얼이 빠졌다. 내가 아는 그 몰카라면 아마 여럿이서 한 명을 속이면서 자기들끼리 재미있어하는, 유쾌하지 못한 문화인데.

“무슨 몰카요?”

-김성원 생일이 일주일 남았다더라. 걔가 1위이기도 하고, 그래서 너네 조 애들끼리 깜짝 몰래카메라 해주는 거 계획했거든. 작가들이 계획은 다 짜놨는데…… 그래서 오는 길에 케이크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을까?

머쓱한 웃음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울렸다. 결국 케이크 사 오라고 전화한 거네. 조금 전까지 힘들어하는 지구를 위로해주고 온 터라, 생일 축하 몰래카메라를 해준다는 게 썩 달갑지는 않았다.

좋은 의미로 해주든, 나쁜 의미로 해주든. 몰래카메라는 원래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성원에게 해주기에는 좀 아까웠다. 케이크도 아깝고 그 몰래카메라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아깝고.

“……일단 사 갈게요.”

-그래, 고맙다. 돈은 내일 바로 줄게. 내일 조금 일찍 오고.

편집팀에게 커피 돌리기도 바쁜 삼촌 돈으로 김성원 생일 케이크까지 산다니. 전화를 끊으며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제일 싼 거로 사 가야지. 마음 같아서는 초코파이를 산 뒤에 초를 잔뜩 꽂아서 불 쇼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가성비 좋은 집 앞 빵집에서 만 원짜리 케이크를 사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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