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지구는 둥글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도 둥글게 살라고 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진짜 우주 속에 존재하는 지구도 아니고,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왜 나도 둥글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머리가 조금씩 크기 시작하면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곡선이 가득한 인생에서는 둥근 공처럼 유연하게 지나가는 게 살기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멈춰 서서 일일이 따지고,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태클을 걸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깊은 뜻을 가지고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의 생각을 항상 상기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다. 둥글게 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남들과 크게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고,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말 하나하나에 신중을 가했다.
같은 반 아이들 대부분은 이런 시시한 나를 크게 재미있어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는 친구 관계는 좋았지만,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건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PC방에 가는 것보다는 혼자 노래 연습을 하는 편이 재미있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6살 터울의 형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그럭저럭 유명한 중소 기획사에 들어가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게 연습생이라는 건 알았지만, 열심히 하던 형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이 좋아서인지 새파랗게 어릴 때부터 아이돌을 장래희망으로 정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 진지하게 말씀을 드렸다가 두 분 모두 뒷목을 잡고 넘어가신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연예계에 몸을 던질 생각을 하느냐고. 특히 나쁘지 않은 둘째 아들의 성적에 묘한 기대를 걸고 계셨던 어머니는 정말 하얗게 질린 낯으로 신까지 부르셨다.
죄책감은 느꼈지만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공처럼 둥글게 살겠다고 했지만, 고집은 고무처럼 질겼다.
“데뷔 확정됐어.
축하해.”
형은 데뷔한다는 이야기를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면서 '오늘 저녁이 뭐니?'와 같은 투로 던졌고, 나도 별생각 없이 축하한다는 소리를 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형이 더는 말을 걸지 않는 걸 보니 생각이 많구나 싶어서 그냥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은 짐을 뺐다. 데뷔를 하고 숙소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냉장고에 치킨남음?]
[없어]
[ㅇㄴ 10분잇다가 연습끝나고가니까 지금 주문 ㄱㄱ 그 라이스 새로나온거 시키셈 돈은 형아가 냄ㅋ 카드계산한다고하셈]
형제치고 자주 주고받던 카톡들도 이제는 다 옛날의 잔재들이었다. 예전 카톡을 내려보다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날짜가 벌써 한 달 전임을 알아냈다.
형은 데뷔 이후로 상당히 바쁜 듯했다. 중소 기획사 신인이라 온갖 지역으로 행사 무대를 하러 간다는데, 정말 잡다한 동네 행사까지 다 뛰는 바람에 이동에 드는 시간만 몇 시간이었다.
형이 그렇게 그룹 멤버들과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나도 소속사를 찾았다. 꽤 크고 유명한 소속사라서 한 번 오디션만 봐보자 한 건데 덜컥 붙어버릴 줄은 몰랐다. 정신이 없기도 했고 형은 바쁠 테니 굳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 계약하고, 소속사에 방문한 첫날의 위압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데뷔가 간절한 연습생들 사이에서 경쟁자가 늘어나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위아래로 싸악 훑어보는 따가운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 정도는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심하게도 스스로가 성숙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같은 나이대 애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도 했다. 남들과는 다를 거라고, 별거 아닌 일로 절대 포기 안 하겠다고. 그날 인사를 하면서, 여기서 꼭 데뷔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눈빛들 사이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속으로 혼자 세뇌를 걸었다. 둥글게, 둥글게.
“지구야. 목 안 마르냐? 마실래?
감사합니다.”
아직 열다섯밖에 먹지 않은 새파란 꼬맹이의 등장이 위협을 느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연습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둥글게 살자는 신조는 여기서도 잘 먹혀들어 갔다. 연습생 형들은 딱히 모난 곳 없고 착실한 동생을 싫어하지 않았다.
나름 화목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연습들은 순조로웠다. 솔직히 춤을 잘 추는 편은 아니라 거기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동작을 만들고 싶었고, 섬세한 춤 선을 가지고 싶었다.
음악에 대한 욕심은 다행히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금방 겨울이 깊어지고, 다음 연도가 찾아와 열여섯 살이 되자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덕분에 세 번째 월말평가에서 A-3반으로 올라갔고, 사장님께 ”요즘은 열여섯에 데뷔하는 것도 흔해.”라는 극찬까지 들었다.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싶어 혼자 집에 가는 길에 부끄럽지만 기뻐서 혼자 울었다. 소속사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형에게 연락했고, 형은 왜 그런 중요한 걸 이제야 말하냐며 조금 화를 냈다. 그 타박까지도 기분 좋아서 혼자 죄 없는 소파를 몇 번이나 걷어찼는지 모르겠다.
“민서진 이번 월말 좆됐다며.
수고.
시발, 나만 망할 줄 아냐? 정수혁 너는 담배나 끊고 말해. 목소리 점점 맛 가는 거 보여.
본인도 끊은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고나리 오지네?
이제 슬슬 목 관리해야 할 거 아니야. B반 갈래? 안 그래도 사장님 너 담배 눈치채신 것 같던데.”
아, 좆같네. 머리를 헝클던 수혁이 형이 뒤로 누웠다. 그 무기력한 모습을 서진이 형이 비웃으며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보면서 물만 끝없이 들이켰다.
월말평가마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던 A반 형들은 생각보다 행실이 좋지 않았다. 연습시간에는 정말 열심히 했지만 노래만 꺼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들처럼 돌변해서 저급한 이야기들을 늘어놨다. 혼자 남아 연습을 하고 있으면, 그만하라며 음악을 끄고 잡아당기기도 했다.
“지구 이 새끼, 존나 열심히 해 진짜.
데뷔하려면 열심히 해야죠.
요즘 아이돌 판은 실력보다 얼굴이야. 넌 잘생겼으니까 대충해도 되겠다.”
야, 그게 열여섯 살한테 할 소리냐? 동심파괴 좀 하지 마. 열여섯 살이면 그런 얘기에 동심이 파괴될 나이는 아닌데도 3반 형들은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큰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유독 그랬다. 뭔가 말만 꺼내면 어리니까, 라는 수식어와 함께 내 나이가 꼭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막내니까 챙겨주나 보다 싶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벽이 세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미 잘 만들어진 찰흙 조각처럼 뭉쳐있는 사람들은 내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구야, 이리 와봐.
네.
이 부분 한 번만 불러봐라.”
야, 잘한다. 나 여기 좀 알려주고 가라. 3반의 리더 격인 성원이 형은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랑 대화할 때는 호탕한 선배쯤이 되고 싶은 것 같았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장난을 자주 했고, 틈만 나면 이리저리에서 불러댔다.
가끔 곤란할 정도로 몰아붙이는 나쁜 습관이 있었고, 다른 형들과 어울려 저급하고 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성원이 형은 항상 본인을 사생아라고 칭했다. 부모님이 분명 결혼을 하신 거로 아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방 안에서 조용히 뒤지면 좋아할 거라고.
“이쪽은 예준이 형. 나랑 두 살 차이.
안녕하세요.
네가 그 화제의 3반 막내구나. 안녕, 나는 멋진 랩하는 형이야.”
성원이 형은 나에게 예준이 형을 소개해줬고, 간혹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안무들도 쉽게 알려줬다. 어린 나이에 발을 들인 경쟁의 세계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던 와중에 매달릴 곳은 결국 같은 3반 형들뿐이었고,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지는 걸 택했다.
좋은 사람들이 아닌 걸 알았지만 별수 없었다. 어쨌거나 같은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들이었고, 척을 지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굳이 부딪힐 필요 없다고, 둥글게 지나가야 한다고.
성원이 형은 연습생들끼리 V앱을 할 때도 워낙 말주변이 없는 나를 챙겨줬고, 그 별 의미 없는 사소한 호의에 마음이 약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비꼼은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했다.
“그룹명 스페이스라며.
대체 누가 지은 거냐.
기다려봐. space 뜻이 공간이랑 널찍함. 우주래.
널찍함 뭐냐.”
A-3반은 회사에서 준비하고 있는 대형 그룹 프로젝트에 투입될 사람들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한발 늦게 굴러온 돌이었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다.
데뷔 조인 형들은 ”우주인데 지구가 없어서 아쉽다, 야.”라며 재미도 감동도 없는 농담을 던졌다. 못 들은척하며 연습에 매진했다.
A반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또다시 다음 연도가 찾아왔고, 나는 한국예고에 입학했으며, 노블은 대박이 터졌다.
앨범 하나가 잘 돼서 드디어 빵 떴다고 형이 오랜만에 친히 전화까지 걸어왔다. 내가 봐도 형네 그룹의 성공은 거의 로또 급이었다. 한 번에 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앨범 판매량이 증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노블은 단번에 화제성 있는 아이돌로 등극했다.
-사장님도 진짜 놀라셨다니까. 이번 곡이 좋긴 했어, 누구 목소린데. 그렇지?
“축하해.”
-땡큐. 너도 열심히 하고 있지?
“응. 당연하지.”
얼마나 기뻐하는지 영상통화가 아닌데도 올라간 입꼬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형의 성장을 축하하며 집안이 거의 파티 분위기일 때, 소속사에서는 일이 터졌다.
“미쳤어? 연예인 한다는 놈이 고등학생 때 담배에, 친구를 팼다고?
여기 들어오기 전 일인데요.
너 이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해?”
사장님은 화가 많이 나신 건지 친히 연습실까지 두 발로 걸어오셔서 무거워 보이는 파일철을 집어 던지셨다. 아쉽게도 머리는 맞추지 못하고, 어깨에 맞고 떨어진 파일철이 안타깝게 바닥과 충돌했다.
절그럭 소리를 내며 떨어진 파일철이 펼쳐지며 구겨진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캡처해온 듯 썩 좋지 못한 화질이었다.
“우리나라 네티즌들 집요한 거 알잖아. 지금은 너희 아버지 입김으로 잘 덮어놔도 나중에 다 터져. 구설수 있는 놈 우리가 뭐 하러 써, 대체할 애들이 몇인데?”
분노를 한참 더 쏟아내시던 사장님은 결국 파일철을 한 번 짓밟고 밖으로 나가셨다. 성원이 형이 머리를 거칠게 넘기며 입 밖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그때 눈빛은 정말 사람 하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처럼 살벌했다. 함께 데뷔 조를 이뤘던 형들이 주춤주춤 다가갔고, 나는 물러났다. 그대로 모르는 척 연습실 문을 닫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