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25화 (25/130)

#24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바로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빠른 수면용으로 쓰던 두꺼운 책을 펼쳐 작은 글씨를 읽기 시작했지만 쉽게 잠이 올 머릿속 상태가 아니라서 그런지 4시, 5시가 될 때까지도 졸리지 않았다.

결국, 꼬박 밤을 지새운 몸뚱어리가 뻐근한 소리를 내며 약 여섯 시간 만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특별히 신경 써서 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24시간 운영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가렸다.

“저, 혹시 박하현 씨……?”

“아. 네.”

“대박. 저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팬이라는 단어가 너무 어색해서 괜히 볼을 살짝 긁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점원은 감동이 물결치는 얼굴로 입을 가린 손을 살짝 떼더니, 천천히 고르시고 주문하라며 살짝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맛있기로 유명한 케이크들이 쇼케이스 안에서 어서 데려가 달라며 달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맛있는 만큼 무진장 비쌌지만, 이 시간에 열려있는 곳이 여기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카드를 찾으며 케이크를 빠르게 스캔했다.

하나같이 김성원 주기 아까운 것밖에 없네.

“주문할게요.”

“아, 네네! 뭘로 드릴까요?”

“이거 주세요.”

그나마 가장 저렴한 케이크를 골라 결제를 마쳤다. 새하얀 빛깔의 생크림 가득한 시폰 케이크는 크진 않았지만 절로 침이 넘어갈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케이크를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던 점원이 넌지시 물었다.

“저기, 초는 몇 개 챙겨드릴까요?”

“초요?”

그러고 보니 생일인데 초는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보니 나는 김성원의 나이도 잘 몰랐다. 지구보다 형이라는 것만 빼고. 지금이라도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프로필을 살펴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그렇다고 초를 안 꽂은 케이크를 들고 나서기도 뭐 해서 어쩔 수 없이 고민하는데 바로 옆에 걸려있는 모양 초가 눈에 들어왔다.

“이걸로 주세요.”

천오백 원짜리 모양 초를 추가 결제하고, 완벽하게 포장이 끝난 케이크 상자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혹시 케이크가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들어 카페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세트장으로 가는 동안 택시 기사님은 누구 생일이냐고 세 번이나 물어보셨고, 나는 그때마다 '일주일 뒤에 생일인 인간'이라고 충실히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일부러 촬영 예정 시간보다 3시간이나 이르게 도착했는데도, 벌써 세트장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듯 이것저것 바뀌어 있는 상태였다. 한가운데 참가자 수만큼 의자가 둥그렇게 놓여 있었고, 조명이 조금 수수해진 것 같았다.

먼저 와서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던 스태프들 사이에서 삼촌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내 옷자락을 잡았다.

“웬일로 코트 같은 걸 다 입었어?”

“왠지 신경 쓰고 싶어져서요.”

“……평소에는 셔츠 하나 달랑 걸치고 잘만 오더니?”

됐고. 너 이리 와봐. 내 옷자락을 끌어당긴 삼촌이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삼촌이 멈춰 선 곳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피곤한 인상의 여자분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하현 씨.”

“안녕하세요.”

“이게 전체적인 각본이에요. 이대로만 진행해주시면 돼요.”

아무래도 작가님인 듯, 손으로 건너온 종이는 몰래카메라 내용이 적혀있는 종이였다. 심플한 그림과 함께 시나리오가 간략히 적혀있는 걸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내용이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침착하게 끝까지 다 읽고 종이를 내려놓자마자 작가님께 물었다.

“이렇게 자극해도 돼요?”

“적당히요.”

여기 적혀있는 게 이미 '적당히'가 아닌데요. 나만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지, 작가님은 ”이 정도 몰래카메라는 어느 방송에서나 다 해요.”하고 말씀하셨다. 물론 어느 방송에서나 다 나올 수 있는 수준의 시나리오는 맞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상대가 김성원이라는 점이었다.

“성원 씨 오자마자 바로 진행하시면 돼요. 쓰시던 연습실에 카메라 설치되어 있으니까.”

“네.”

김성원이 이런 몰카로 감동을 할 리는 절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작가님은 잘 부탁한다며 비척비척 안쪽으로 걸어가셨고, 나는 계속 옆에 서 있던 삼촌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거 왜 하는 거야? 원래 생일을 프로그램에서 챙겨줘?”

“당연히 아니지. 얘가 워낙 화제성이 좋아서 하는 거야.”

뭐 예쁘다고 이놈 개인 몰카를 진행해주겠냐. 자극적이고 시청률이 되니까 하는 거지, 팬들한테 욕먹는 한이 있어도. 삼촌이 두어 번 혀를 차며 종이를 손톱으로 툭툭 쳤다.

“하차 생각 없는지 한 번 물어봐요.”

“있겠냐. 본인도 더는 잃을 거 없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몰랐는데, 여기저기서 얘기 들어보니까 독기 장난이 아닌 거 같아. 근데 내가 보기에는 막는 것도 한계 있어. 여기서 데뷔한다고 해도, 은퇴할 때까지 아무 일도 안 터질 수가 없는데.”

삼촌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그동안의 태도로 미루어봤을 때, 김성원은 못해도 수 개의 루머를 낳을 타입이었다. 아무리 부모가 뒷수습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테고.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적으로 데뷔한 그룹이 얼마 못 가 구설수에 휩싸인다는 건, 확실히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대체 왜 데뷔를 하려는 걸까. 무대가 진심으로 좋아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또 실력은 출중했다. 제삼자인 조장의 입장에서 본 김성원에게는 교활함이 없었다.

그냥 관심이 필요한 사람처럼 뭐든지 눈에 띄게 행동했고, 쓸데없이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지구에게 악감정이 있다지만, 대기실 복도에서 했던 말도 정말 뜬금없었고.

“몰카 이것만 하는 건 아니죠?” “몇 개 더 있지.”

두루뭉술한 대답에 삼촌에게 진행 예정인 몰카 계획들을 자세히 물었고, 삼촌은 잠시 버퍼링이 걸린 듯 눈을 깜박이다가 하나씩 설명해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3일 뒤가 생일인 참가자에게 생일 축하 몰래카메라.

두 번째. 한 명의 참가자가 진지하게 하차를 고민하고 있다며 몇몇 참가자들에게 고민 상담.

세 번째. 방 안에 참가자 혼자 남겨두고 귀신 등장.

첫 번째는 별 내용 없이 훈훈한 내용인 것 같고, 두 번째는 감동을 노린 내용, 세 번째는 그냥 재미있으라고 넣은 것 같았다. 몰카들은 생각보다 다들 싱거웠고, 덕분에 김성원 생일 몰카가 특별히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 사 왔네.”

“네.”

“이거 너네 집 앞 그 빵집 거 아니냐? 맛있는?”

“맞아요.”

“아아…….”

삼촌이 왠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케이크 상자를 다섯 번이나 힐끔거렸다. 다음에 올 때 삼촌 몫도 하나 사와야 할 것만 같은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삼촌은 마지막 점검 작업을 해야 한다며 케이크값을 주고 케이크를 가져갔다. 돈도 받았는데 손에서 떠나가는 케이크가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참가자들이 세트장으로 밀물처럼 들어오기 시작했다. 혼자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던 내 계획은 팔을 잡아당긴 준에 의해서 와장창 부서졌고, 정신을 차리니 이미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투명인간처럼 지내다가 하차하려고 했던 게 불과 한 달쯤 전인데, 언제 이렇게 대화할 사람들을 만났나 싶어 잠시 멍해졌다.

“형, 넋 나갔어요?”

초점이 살짝 나가 있는 걸 용케 눈치챈 준이 얼굴 앞에서 손을 휙휙 두어 번 흔들었다. 그 과격한 행동에 영혼이 퍼뜩 현실로 돌아왔고, 어색하게 웃으며 처음부터 잘 듣고 있었던 척을 했다.

“어, 그래서?”

“컴퓨터 게임 하는 거면 고급시계 하고 싶어요. 저 곧 마스터거든요.”

준이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기분 좋게 웃었고, 얼굴 본 지 오래된 사촌 동생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자신이 게임 조금 한다며 허세를 부리던 모습이 똑 닮아 있어서.

내 웃음을 비웃음으로 오해한 듯 준이 안면근육을 꿈틀거리더니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랜드 마스터도 금방 찍을 거예요!”

“그래. 누가 뭐래?”

“형도 잘해요?”

“해본 적도 없다.”

내 주변 친구들은 PC방과는 다들 거리가 멀었다. 게임이라고 한다면, 연습 끝나고 쉬는 시간에 어드벤처 게임을 잠깐씩 하는 정도. 물론 그중에서도 나는 독보적인 게임치라 휴대폰에서 1년째 쑥쑥 크고 있는 농장만 빼면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와, 어떻게 해본 적이 없어요? PC방 가면 친구들 다 이것만 할 텐데.”

“우린 PC방 거의 안 갔는데.”

“하현 씨 게임 못할 거 같아 보여요.”

게임보다 춤을 더 열심히 하던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던 도중, 정을 찌르는듯한 목소리가 불쑥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접힌 채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한 낯에는 비웃음 따위가 조금도 곁들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별생각 없이 받아쳤다.

“예준 씨는 참 잘하실 것 같네요.”

“잘 보셨네요. 맞아요, 저 플래티넘이에요.”

“예…….”

랩보다 게임을 더 좋아하는 모양인지 예준은 흐뭇한 얼굴이었다. 대충 말끝을 흐리며 대꾸해주고 세트장을 한 번 가볍게 훑으며 누가 있는지 살폈다.

김성원은 아직 안 온 것 같았고, 지구 또한 없었다. 작가님이 주신 시나리오를 실천하려면 도우미들이 필요했다. 예준은 너무 재밌게 할 것 같아서 안 되고, 준은 연기를 못할 것 같아서 안 됐다.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손짓으로 휘영을 불렀다.

“휘영 씨.”

“네?”

“오늘 비하인드로 찍는 것 중에 몰래카메라가 있거든요.”

“진짜요?”

말은 분명 휘영에게 했는데 준이 더 격한 반응을 보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서 김성원의 귀로 이야기가 옮겨갈까 재빨리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내자, 얌전히 입을 앙다물었다. 그 반듯하게 다물려진 입술을 보며 휘영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다가갔다.

“성원 씨한테 깜짝 몰래카메라를 진행해야 하거든요.”

“성원 씨요? 왜요?”

“일주일 뒤에 생일이래요.”

생일이라는 말에 휘영이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적극적인 표정이 돼서는 물었다.

“뭐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작가님이 주신 시나리오 읽어봤는데 별 건 없더라고요.”

“헐, 저 몰카 이런 거 진짜 좋아해요. 전 뭐 하면 돼요?”

“저는요?”

몰래카메라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나는 듯 준과 가온이 손을 들었다. 엇박자로 이루어진 열렬한 성원이 담긴 손들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착실하게 역할을 하나씩 맡겼다. 휘영에게 갈등의 시작이 되어줄 행동을 부탁한 뒤, 다시 한번 주변을 훑어봤다. 여전히 지구는 없다.

‘학교에 못 갔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교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아, 진짜.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한 번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자 이번에는 지구에게 열심히 시비를 걸던 김성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자기가 보기 싫으니 하차하라는 억지를 부리던 장면, 지각해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카톡 보냈는데요?'라고 떠들던 장면, 필사적으로 숨기던 사실을 복도에서 큰 소리로 떠벌리는 장면.

순차적으로 떠오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전부 감상한 뒤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생일 축하 같은 걸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이구나.

간단한 결론을 내리자마자 짜기라도 한 듯 김성원이 세트장 안으로 들어왔다. 본 촬영 시작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남았다. 작가님이 부탁한 몰래카메라를 진행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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