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98화 (98/130)

10화

공연이 끝나자마자 돌아왔으니까, 아마도 자정 전에는 들어왔을 텐데. 대체 얼마나 한 건지 시간을 따져보다가 쓸데없는 짓인 것 같아서 포기했다. 사정의 여운으로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질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숨을 몰아쉬는 지구는 호흡이 불안정한 것만 빼면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팔도 못 뻗겠는데.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젊어서 그런 건 아닐 거고.

“졸려요?”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좀 느렸는지, 지구가 졸리냐고 물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푹신하고 안정적인 침대는 갑작스럽게 사람이 움직이는데도 흔들림이 적었다. 아까 바닥에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 옷들을 정리하는 건지 지구가 허리를 숙였다 폈다 반복하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나중에 치워. 피곤한데 그냥 자자…….”

사람이 너무 성실해도 문제였다. 중간에 속도 한 번 떨어지지 않고 한 시간이 넘게 했는데, 아무리 지구라도 해도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겨우 침대 밖으로 팔을 내밀어 앞에 보이는 넓은 등을 살짝 건드니 지구가 뒤를 돌아봤다.

“형. 허벅지에 흐르는 건 닦고 자야 되지 않을까요?”

“아.”

어쩐지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더니. 허리를 붙잡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무래도 땀도 많이 흘렸고, 바로 잘 수는 없을 것 같아서 졸음을 애써 몰아냈다. 샤워만 빨리하고 잘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가는데 지구가 뒤돌아있는 상태로 말했다.

“안에 남아 있는 채로 자면 내일 또 아파요.”

“그래서 씻고…….”

“피곤하면 그냥 자도 돼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항상 끝나고 나면 어떻게 대화를 할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어서 같이 씻어본 게 손에 꼽혔다. 먼저 잠드는데도 뒤처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지구 때문에 일어나서 찝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잠든 사람 씻기려면 힘들 텐데. 앞으로는 정신 차리고 샤워라도 하고 자야겠다.

“그리고 형, 머리도 감아야 되잖아요.”

아, 머리. 순간 스프레이를 뿌린 상태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살짝 붙잡아서 여전히 분홍색인 걸 확인하고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를 확인했다. 분홍색으로 물든 시트를 발견하자마자 한숨이 살짝 나왔다. 잘 안 지워지는 스프레이라서 공연장에서도 살짝만 흘렀는데. 3천 명이 보는 무대에서 가볍게 무대를 하는 것보다 더 힘들긴 했다.

“침대 시트랑 이불 빨아야겠다. 내일 아침에 내가 할게.”

“그냥 버리고 새로 사면 돼요.”

평소 지구는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편이었다. 저 멀리 해외까지 진출하면서 통장에 0이 어마어마하게 찍혔는데도 그랬다. 어릴 때부터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꼬박꼬박 저금해오던 좋은 경제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애가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트를 그냥 버린다고.

“몇 번 쓰지도 않은 건데.”

“힘들게 왜 그래요. 그냥 새로 사서 놓을게요.”

활동기랑 비교하면 빨래 따위는 그냥 스트레칭하는 수준인데도 지구는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요즘 좀 삐걱삐걱한다지만 섹스 한 번 했다고 허리 나가서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닌데.

“안 그래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는데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는 거 같고…….”

오랜만에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바닥에 떨어진 속옷 줍다가 하는 소리가 저거라니. 등을 지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할 때마다 좋다고 이 악물고 하는 게, 갑자기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고 있는데 웃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새삼 무슨 소리야.”

말을 하는데 웃음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갔다. 지구 귀에도 웃음기 섞인 게 고스란히 들렸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다가, 숨을 한 번 내뱉고는 팔을 잡아 욕실까지 데려갔다.

“내일 병원 가니까 푹 자고 일어나야죠.”

곧 따뜻한 온수가 머리를 푹 적셨다. 분홍색 스프레이가 씻겨 나가면서 머리색을 되찾았다. 이 금발도 원래 내 머리색은 아니지만. 잦은 염색으로 거칠어진 머릿결을 지구가 한참을 말없이 손으로 매만졌다.

“형 머리카락 진짜 가늘어졌어요.”

“염색해서 그래.”

지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샤워기를 들었다, 내려놨다 하면서 한참을 열심히 움직였다. 물 온도도 좋고, 머리를 살살 만지는 손도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샴푸를 세 번째 칠하기 시작했을 때는 잠이 쏟아져 내렸다. 이대로 잠들까 봐 살짝 눈을 떴는데 그 순간에 딱 거품이 들어갔다. 따끔따끔해지면서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잠깐만, 눈에 거품 들어갔어.”

“잠시만요.”

샤워기를 내려놓은 지구가 커다란 손을 섬세하게 움직여 눈가를 씻어줬다. 따가운 느낌이 살짝 없어진 것 같아서 천천히 눈을 떠봤는데, 흐릿하게 보이던 지구가 순간 가깝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이마에 입술을 짧게 부딪치고 빠르게 떨어졌다.

“졸리죠?”

“어떻게 알았어.”

“형 얼굴에서 다 티 나요. 그냥 자요, 거의 다 됐으니까.”

지구가 저렇게 웃으면서 하는 말은 항상 마법처럼 들렸다. 아직까지 눈이 따끔따끔해서 그런지 금방 다시 눈이 감겼다. 원래 이렇게 어리광부리는 성격은 아닌데, 이상하게 지구랑 있으면 꼭 이렇게 됐다.

* * *

지구가 예약했다는 병원은 큰 정형외과였다. 조만간 대형병원에 건강검진 예약도 할 거라고 하길래, 그건 해외 투어를 다녀온 뒤에 회사에 말해서 멤버들이랑 다 같이 받자고 했다.

진단표를 작성하고 나서, 일단 엑스레이를 먼저 찍었다. 지구가 이왕 검사하는 거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밀어붙여서 어쩌다 MRI까지 찍게 됐다. 이것저것 한참 검사를 받은 뒤에 마취를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두 시간을 훌쩍 넘게 지나 있었고, 몽롱한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많이 어지러워요?”

“좀 정신이 없네…….”

“일단 마스크 써요.”

의자 뒤에 있는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지구가 반강제로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 삐뚤게 턱에 걸린 마스크를 끌어올려 눈 바로 위까지 올려준 지구가 알 없는 안경까지 친절하게 씌워줬다. 방금 막 일어난 상태라 답답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알아볼 사람은 다 봤겠지만.

얼마 기다리지 않아 원무과 직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러워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2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주변 환자들을 의식해서인지 속삭이는 목소리가 작았다. 작은 배려를 받고 들어간 진료실에는 흰 가운을 걸친 의사가 있었다.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 그런가,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이유 모를 신뢰가 생겼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자, 지구가 바로 뒤에 와서 섰다. 그러더니 잘 끼지도 않는 팔짱까지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조만간 화면에 방금 촬영했던 엑스레이 사진이 떴다.

“허리 근육통이랑 허리 디스크랑 헷갈리시는 분들이 있어요. 초기에는 보통 근육통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시작부터 나온 이야기가 영 불안했다. 근육통이랑 디스크를 헷갈리는 사람이 꼭 날 말하는 것 같아서. 허리 통증은 꾸준했지만 익숙한 거라 참을 만했다. 어릴 때부터 춤을 배워서 이런 신체적 고통에 익숙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엑스레이 사진 보면 약간 의심이 돼서요. 엑스레이 검사만으로 허리디스크 진단하기엔 힘들어서 아마 MRI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이어지는 설명은 썩 긍정적이지 못했다. 허리에 문제가 있는 거로 보이는 것도 모자라서, 발목도 살짝 부은 상태라고 했다. 그나마 발목은 안정을 취하고, 몇 번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진다는 진단을 받았다.

“계속 주변 근육과 신경을 누르다 보면 통증이 점점 심해져요. 이러다가 다리도 저리기 시작하면 걷기도 힘들어지는 거 한순간이에요.”

크고 작은 병들을 여러 번 앓아봤지만 심한 디스크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리가 저린다거나 마비가 온 적도 없었고. 춤을 전공으로 했던 만큼 디스크가 얼마나 치명타인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잠도 안 자고 연습하다가 허리디스크가 심하게 와서 몇 달 제대로 걷지도 못하다가 그대로 자퇴한 애도 있었다.

“디스크는 자연치료가 되는 경우도 많지만 완치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안정적으로 쉴 시간도 없으실 것 같고.”

의사가 앞에 놓인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분이 옵니다. 운동선수, 발레리나, 댄스 가수…… 몸을 써야 하는 직업인 만큼 잃는 게 많아요. 치료에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정도로 수명이 긴 직업도 아니고요.”

맞는 말이었다. 아이돌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직업이니까. 짧게 입원할 여유도 없는데, 몇 개월 이상을 꾸준히 치료에 매달릴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당장 다음 달에 해외 투어 일정도 잡혀있고.

의사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잘 단련된 몸도 한순간의 방심으로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거라고. 거듭 반복되는 말을 듣고 있으니 순간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계속 내버려 뒀다가 정말 크게 잘못되면 어쩌지. 뭐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물리치료를 받고 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조금 더 소중히 써야 해요, 몸을 한 번에 무리해서 오래 쓰는 건 진짜 나쁜 습관이에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인사를 한 뒤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조용히 문을 닫으면서 앞으로는 연습할 때 쉬는 시간을 여러 번 끼워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끝을 볼 때까지 연습하고 나서야 쉬러 가는 피곤한 성격이 이 사단을 만든 것 같았다.

“이쪽으로 누우세요.”

물리 치료실로 들어가자마자 직원이 친절히 치료를 받을 곳으로 안내해줬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눕자마자 치료사가 커튼을 열고 들어왔다. 삑삑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발목에 닿는 차가운 온도에 짧게 몸을 떤 것도 잠시, 금방 익숙해지니까 피곤해져서 그 사이에 또 잠이 들었다.

“끝나셨어요.”

치료받다가 잠드는 환자들이 익숙한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툭툭 쳐서 깨운 치료사가 친절하게 커튼을 걷어줬다. 다시 마스크를 올려 쓰고 물리 치료실을 벗어나자마자 복도에 앉아있던 지구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끝났어요? 좀 괜찮아요?”

“한 번에 무슨…….”

허리가 따끈따끈해서 좋긴 했다. 뭔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고. 병원비 결제를 위해서 곧장 걸어 직원에게 다가가 카드를 내밀었다가 MRI 비용이 생각보다 더 비싸서 살짝 놀랐다. 금방 계산을 끝내고 직원이 카드를 돌려주며 물었다.

“MRI 결과는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드릴까요?”

앞으로 물리치료는 집 근처에 있는 곳에서 받을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다시 오기는 귀찮아서 집 주소를 적으려고 했는데 지구가 손을 겹쳐 잡으며 행동을 저지했다.

“결과 나오면 연락 주세요. 방문할게요.”

“아, 네. 연락받으실 연락처 적어주세요.”

직원에게 볼펜을 건네받은 지구는 당당하게 자기 휴대폰 번호를 적었다. 내 검사 결과인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긴 하는데, 그게 그냥 웃기고 귀여워서 그런 거라 내버려 뒀다.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지구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하자고 안 할게요.”

“뭐?”

“저 형 이러다가 진짜 어디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겁나요.”

인상을 찌푸린 얼굴은 진심으로 불안해 보였다. 심지어 안 좋은 버릇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애가 입술까지 살짝 물어뜯고 있었다.

“해외 투어도 진짜……. 마음 같아서는 안 갔으면 좋겠어요.”

해외 투어는 체력 싸움이었다. 며칠 간격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세 시간짜리 공연을 진행하는 거니까. 시차도 다르고, 기후도 달라서 자칫 방심하다가 몸에 이상 신호가 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조금만 더 푹 쉬다가 슬슬 연습도 시작해야 하니까 지금부터 몸 관리를 시작해야 했다. 회사에서 꼬박꼬박 병원도 보내주고, 활동기에는 건강식품도 준비해주지만, 개인적으로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됐다.

“괜찮아, 발목도 꼬박꼬박 치료받으러 갈 거고 해외 투어 가서도 조심할게.”

“형이 조심하는 건 안심이 안 돼요.”

대꾸가 단호했다. 물론 자기관리 철저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타입은 아니지만 정말 조금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내가 저렇게 믿음직하지 못한가 싶었다. 다시 한번 반성하며 단단한 팔을 붙잡아 옆으로 살짝 더 붙었다.

“너랑 같이 있을 텐데 뭐가 문제야.”

“아…….”

안심이 안 된다고 딱딱하게 대꾸하던 목소리가 싹 들어갔다. 갑자기 입을 다문 지구를 쳐다보다가 볼을 살짝 건드렸더니 한숨을 쉬었다.

“왜?”

“형은 몰라요.”

묘하게 살짝 힘 빠진 목소리가 엘리베이터에 울렸다. 뚜렷하게 잘 자란 얼굴을 한참 쳐다봐도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온 지구는 방에 들어가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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