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지구가 자주 저러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많을 때는 방에 들어갈 때가 있었다. 사람이 보통 잡생각이 많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재밌는 영상을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하는데 지구는 아주 차분하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을 제거하는 편이었다. 차근차근 생각해서 날선 감정들을 짓눌러버린 다음, 음악으로 그 스트레스를 모두 승화시켰다. 특이한 타입이었지만 화가 나면 10시간을 내리 게임만 하는 예준보다는 백배 나았다.
딱 하나 평소랑 달라서 의아한 점은 왜 작업실이 아닌 방으로 들어갔느냐였다. 일단 오늘의 원인은 나인 것 같고. 방해하지 않으려고 거실에 앉아서 TV를 켠 뒤에 리모컨에 이어폰을 연결했다. 보지도 않는 예능을 짧게 시청하고 다시 채널을 돌리기를 한참 반복했다.
[형 병원 갔다 왔어요??]
뭘 봐도 재미가 없어서 잠깐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마침 준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병원 다녀오고 괜찮으면 어디인지 좀 알려달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급히 답장했다.
[의사 선생님 친절하시고 괜찮더라]
[아 진짜여??? 이름좀 알려줘요 해투 가기전에 검사 함 받아보려구요]
병원 이름을 검색해서 링크를 전송해줬더니 준이 고맙다며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이번 주 안에 택시 타고 후딱 다녀오겠다는 준의 카톡 밑으로 예준이 동행을 요청했다.
[야 같이가]
[형도요????]
[ㅇㅇ 뼈 낡았나 봐야돼]
낡았다니…… 내년에 군대도 갈 사람이. TV를 끄고 멤버들과 한참 병원 얘기를 했다. 혹시 허리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안 했다. 아직 MRI 결과가 나온 게 아니니까, 굳이 속단해서 미리 말할 필요는 없었다. 최대한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았는데도 불편해서 그냥 소파에 누워서 다시 타자를 쳤다.
그렇게 지구가 다시 방에서 나온 건 정확히 2시간 6분 뒤였다. 이상하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혼자 윗몸일으키기라도 했나, 아니면 팔굽혀펴기를 했나. 주로 헬스장을 이용하는 지구가 집에서 운동하는 건 섹스할 때밖에 없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뭐 했어?”
“이것저것 했어요.”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으나 내용이 불친절했다. 평소 같았으면 들은 노래까지 알려줄 텐데. 아무래도 말 그대로 이것저것 한 모양이었다.
곧 지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아 내밀었다.
“하면 좋은 운동이라니까 해요.”
‘집에서 간단히 하는 허리디스크에 좋은 운동’이라는 제목을 가진 블로그 포스팅이었다. 안 그래도 아까 의사 말을 듣고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다시 휴대폰을 가져가 다른 검색 결과를 읊어주던 지구가 갑자기 손에 쥔 휴대폰을 소파에 내려놨다.
“해외 투어가 두 달이에요.”
“알지.”
“두 달 동안 계속 3시간짜리 콘서트를 하는 거예요. 휘영이 형 열사병 때문에 쓰러진 적도 있었잖아요.”
4년 전쯤인가, 더운 지역에 콘서트를 하러 갔을 때 많이 힘들어하던 휘영이 열사병으로 쓰러져서 콘서트에 불참했던 적이 있었다. 돈 주고 왔는데 왜 멤버 하나가 비냐고 외국 팬들 몇 명이 단체로 몰려와서 항의했던 일 때문에 아무리 아파도 불참만은 하지 않는 게 암묵적 규칙이 된 사건이었다.
“형이 해외 투어에서 실수한 적 없는 건 알지만, 계속 바뀌는 환경 적응하는 게 제일 힘든 거 알죠.”
평소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돌아온 지구가 소파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니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도 들었다.
“알지. 진짜 조심할게. 물리치료도 꼬박꼬박 받을 거고.”
“형한테 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니까 그래요.”
일순 진지한 눈으로 지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신중하게 이어질 말을 고르는지 잠깐 입이 다물렸다. 그 잠깐의 찰나에 심장이 몇 번이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저한테도 중요해요. 혹시라도 계속하고 싶은데 못 하게 돼서 형이 많이 힘들어하면 어쩌나,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고요. 그러니까…….”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못 기다릴 것 같아서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당분간 섹스는 안 하겠다고 했지만, 키스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급하게 일어났다고 살짝 찌릿거리는 허리를 무시하고 끝까지 키스를 끝낸 후에 정말, 정말 조심하겠다고 확답을 해줬다.
그렇게 훈훈하게 대화를 끝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직 아침을 시키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 왔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2시간 5분 동안 뭘 했는지 알 수 있는 택배였다. 몇 시간 간격으로 계속되는 택배 기사들의 방문에 현관 앞에 상자가 가득 쌓였다. 건강식품을 종류별로 다 산 것 같은데.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약재를 보며 지구가 이건 물에 우려서 먹는 거라고 설명했다.
“진짜 총알배송이네요.”
웃는 얼굴은 한 치의 악의도 없이 깨끗했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눈앞에 보이는 것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간단 커팅이라고 적힌 부분을 뜯어서 입안에 넣어 쭉 들이켰는데, 상상 이상으로 맛이 없어서 얼른 입을 뗐다.
* * *
그렇게 3일이 지났다. 그동안 한 일을 말해보라고 하면 단숨에 전부 읊을 자신이 있었다. 아침 먹기, 점심 먹기, 저녁 먹기, 허리에 좋은 운동하기, 건강식품 섭취, TV 시청, 음악 청취, 병원 가기, 수면. 이 키워드만으로 하루를 전부 채울 수 있었다. 맛있는 걸 시켜 먹고 푹 자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죽하면 물리치료를 받으러 집 앞 병원에 가는 그 잠깐이 제일 재미있을 정도였다.
“뭐 먹을래요?”
예전에 지구한테 밥 한 끼 해주고 싶어서 요리책 찾아보다가 프라이팬을 태워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누가 해준 밥을 먹고 싶어서인 줄 알고 지구가 요리 학원을 등록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황금 같은 휴식기에 뭐 하는 짓이냐고 뜯어말려서 하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뭐든 곧잘 배우는 애라 요리도 금방 배워 와서 취미를 붙였을 것 같긴 했다.
어쨌거나 둘 다 요리를 못하는 관계로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켜 먹는 편이었다. 요즘은 별게 다 배달돼서 매번 시켜 먹어도 질리거나 물릴 일이 전혀 없었다. 도시락이나 찌개류는 기본이고, 핫도그에 디저트까지 있어서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른 멤버들도 전부 이 어플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고 있어서 단톡방에 맛있는 집이 있으면 공유도 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먹으면 다이어트해야 될 것 같은데.”
오늘 아침 메뉴는 도시락으로 결정됐다. 달짝지근하게 양념된 비엔나소시지를 입에 넣고 있으니 불쑥 걱정이 머리를 들었다. 당장 해외 투어도 가야 하는데 지금 살이 찌면 곤란했다. 잘 안 찌는 체질인 만큼 빼는 것도 어려워서 진지하게 말했는데, 지구가 떡갈비를 입에 넣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형 지금도 충분히 말랐으니까 괜찮아요.”
“아직은 괜찮지.”
“그리고 쪄도 괜찮아요. 포동포동해진다고 형이 아닌 것도 아니잖아요.”
지구는 팬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중인 것 같았다. 감동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포동포동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돌이잖아.”
2, 3kg만 붙어도, 얼굴 조금만 부어도 귀신같이 알아보는 대중들이 있는데. 애인 눈에만 예뻐 보이면 된다는 건 일반인들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얻는 게 있다면 당연히 희생하는 것도 있어야 하니까. 연기 때문에 단기간에 체중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배우들도 있고, 아이돌들은 카메라에 담겼을 때 부해 보일까 싶어 필사적으로 물만 마셔가며 다이어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관리를 못 해서 살이 쪘을 때 쏟아지는 비난과 악플이 어마어마했다. 팬이 안티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고.
“직업이 그런데 관리해야지. 준이도 복근 만든다고 헬스 다니잖아.”
“걔 이틀 나와서 러닝머신 30분 뛰고 그만뒀어요.”
어쩐지 열심히 다닐 거라고 선포한 이후로 얘기가 없더라. 너무 준이다운 빠른 포기라서 바로 납득이 갔다. 그래도 이틀이나 나온 게 대견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먹어요. 어차피 곧 연습 들어가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공연에, 예능에, 다이어트에, 피부 관리에……활동기에는 신경 쓸 게 어마무시하게 많아지니까 쉴 때는 확실하게 쉬는 게 나았다. 푹 쉬어서 해외 투어 때까지 체력이나 비축해두자 싶어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도시락통을 씻어 분리수거하고 별점을 매겼다. 좀 많이 달긴 했는데 한 끼 따뜻하게 먹기는 괜찮았다. 단톡방에 매장 이름과 정보를 짧게 공유한 뒤에 거실로 나갔다. 지구가 켜지도 않은 TV를 정신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새카만 화면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6년을 봐온 느낌으로 지구가 저런 얼굴을 할 때는 심심해서였다.
“안 봐? 드라마라도 볼래?”
“아니요.”
제안을 잘못했다. 지구는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의 추악한 면을 보여주는 드라마,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가볍게 볼만한 드라마까지 많은 장르가 있었지만, 그 어느 쪽도 재미있지 않다고 했다. 하기야 당장 연예계 선후배에게도 관심 없는 애가 극중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오래 훔쳐보는 게 재밌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2시간 안에 모든 게 끝나는 영화는 괜찮게 보는 편이었다.
“데이트 갈까?”
그래서 새로운 제안을 냈다.
“데이트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의미 없이 앉아있던 지구가 단어 하나에 칼같이 반응했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트라는 걸 해본 게 손에 꼽히니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만 나가면 기사가 나고, 사진이 찍히고, 길목이 차단되곤 하니까. 그나마 외국에 나갈 때는 같이 쇼핑하러 나가거나, 관광 명소를 구경하거나 했다. 거기는 설령 얼굴을 아는 연예인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무조건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예전에 멤버들이랑 다 같이 옷을 사러 갔다가 준이 잠깐 답답하다고 마스크를 내리는 바람에 전력 도주했던 게 기억났다. 무슨 영화 추격 씬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한참 도망치다가 매니저 형 불러서 겨우 차에 올라타서 도망쳤었지. 그때는 정말 운이 나쁜 케이스였고.
“알아봐서 길거리에서 깔리면 어떡하려고요.”
좋은 게 얼굴에 뻔히 보이는데 역시 바로 좋다는 소리는 안 나왔다. 바로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지구의 머리를 두어 번 툭툭 두드린 다음에 설득을 시작했다.
“연예인들 다 꽁꽁 감싸고 많이 나가잖아. 유명한 곳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앞인데.”
그때는 부주의 때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잘만 감싸고 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애초에 누군가 알아봐도 목격담이 올라가는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고. 또 같은 그룹 멤버 둘이 놀러 나온 걸 데이트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 뻔했기 때문에, 큰 스킨십만 안 하면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오전 11시에 갑작스럽게 데이트 약속이 잡혔다.
“금방 올게요.”
지구가 준비하겠다며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 혼자 남은 집이 갑자기 넓게 느껴져서, 급히 거실을 떠나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놀러 나가는 건데. 집이랑 병원만 왔다 갔다 하느라 꼴이 영 별로였다. 일단 욕실에서 깨끗이 씻고 나온 다음에 급하게 머리부터 말렸다. 그리고 저번에 팬에게 선물 받은 새 향수를 써볼까 했는데 지구가 냄새에 예민해서, 그냥 평소에 쓰던 걸 살짝 뿌렸다.
신경 써서 무난하게 챙겨 입은 다음에 모자도 쓰고, 안경도 쓰고, 마침 겨울이니까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머리가 밝아서 모자 밖으로 튀어나오는 머리카락까지 숨기기는 힘들었지만, 거울 앞에 서봤는데 이 정도면 알아보는 게 더 신기하겠다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데이트라 마음이 들떴다. 뭘 할지 계획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냥 평범한 애인처럼 같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좋은 거니까. 하지만 내심 마음 한편이 불편하고 어딘가 답답해서 모자를 더 꽉 눌러썼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