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07화 (107/130)

19화

정신을 놓고 앉아있다가 문득 약 먹으라는 말이 떠올랐다. 알겠다고 했는데 또 까먹을 뻔했다. 가방 속에서 종이컵을 찾아서 물을 따랐다. 약을 먼저 입에 넣고 물을 마시려는데, 손에 힘이 빠져서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가득 담겨있던 물을 전부 쏟아낸 빈 종이컵이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하아…….”

엎질러진 물을 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아무 생각 없이 쭈그리고 앉아 컵을 주우려다가 찌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가 앉았다.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매니저 형이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줬다. 내일모레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바로 병원에 들른 다음, 몇 개월 집에서 푹 쉬라고. 애초에 해외 투어 끝나고 2주 정도는 스케줄이 비어 있었다. 바뀐 거라면 5월 초부터 시작될 다음 활동 준비가 취소된 것 정도였다.

이 시기에 공백기가 길어지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올해 7월, 12월 두 번 컴백할 예정이었던 게 한 번으로 줄게 되니까. 안 된다고 회사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가, 오랜 회의 끝에 어쩔 수 없이 결정된 일이었다. 아티스트 케어 소홀로 일 커지기 전에 쉬게 하는 게 낫다고.

“형!”

엎질러진 물을 닦으려고 휴지를 꺼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형, 하고 부르는 걸 보니 준인 듯했다. 이것만 닦고 열어주려고 했는데, 문 두드리는 손길이 멈추질 않았다. 아무래도 급해 보여서 그냥 먼저 문을 열어줬다.

“왜?”

“지구 형 왔다면서요?”

그러더니 빠르게 내 방을 쭉 훑었다. 침대 위가 텅 비어있는 걸 발견한 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형 어디 있어요?”

“자기 방에 있지. 자니까 들어가지 마.”

“와…… 진짜 온 거 맞구나. 거기까지 가서 왜 왔대요?”

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더니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저번 달에 한정판인데 겨우 구했다면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던 바로 그 운동화였다. 현관에 가지런히 벗어둔 운동화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준은 이미 소파에 앉아있었다.

“왜 들어와?”

“물은 왜 쏟았어요?”

물은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준이 말을 돌렸다. 그러더니 자기가 대신 닦아주겠다며 휴지를 뭉텅이로 뜯기 시작했다. 닦아준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조용히 소파로 가서 앉았다. 말없이 바닥을 문지르는 준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갑자기 이쪽을 휙 쳐다봐서 좀 놀랐다.

“우리 내일모레 가는 거죠?”

“어, 왜?”

“그냥. 여기 재미없어서요.”

다 닦았는지, 물을 잔뜩 머금은 휴지 뭉치를 준이 아무렇게나 던졌다. 질퍽한 소리가 났지만 그냥 내버려 뒀다.

“외국이 더 좋지 않아? 밥도 맛있다며.”

“밥은 다른 얘기고요. 자유롭긴 한데 한국인이라 그런가. 오래 있으니까 좀 힘들어요. 외국에서는 절대 못 살 것 같아요.”

준이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지금 보니 얼굴이 좀 피곤해 보였다. 어제 잠을 못 잤나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다. 초코우유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콘서트 전에 넣어둔 물밖에 없었다. 이거라도 줘야겠다 싶어서 물병을 건넸다.

“고마워요. 아, 형 부모님은 외국에 계시잖아요.”

“응, 나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가셨지.”

“전 절대 혼자 못 살 텐데.”

“지금 너 혼자 살잖아.”

“그래서 집에 있으면 좀 쓸쓸해요. 같이 숙소 살던 때가 좋았는데. 뭐, 형은 나가서 사니까 더 좋죠?”

“뭐래.”

놀리려고 꺼낸 말인 듯 준이 눈을 잔뜩 접으면서 웃었다. 확실히 준은 단체 생활이 잘 맞는 타입인 것 같았다. 독립해서 나간 뒤로 유독 외롭다는 말을 자주 하니까.

“심심해서 여기로 온 거예요.”

“왜, 예준이 형한테 안 가고.”

“그 형 피곤하다고 벌써 자요.”

“나도 잘 건데?”

“아, 형이라도 나랑 놀아줘요.”

약 먹고 바로 자려고 했는데, 준이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바람에 그냥 같이 있어 주기로 했다. 준이 좋아하는 게임이라도 같이 해주고 싶은데, 방 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대화만 계속했지만.

“허리는 금방 낫는대요?”

“꾸준히 물리 치료 받고, 휴식 취하면 자연적으로 낫는대. 수술 안 해도 된대.”

“우리 다음 컴백까지 나아야 할 텐데.”

“11월이면 다 낫고도 남겠지.”

그다음으로는 쭉 다음 활동에 대한 얘기를 했다. 7월 활동의 타이틀곡과 안무가 이미 준비된 상태라서 그걸 쓸지, 아니면 계절에 맞게 다른 게 나올지. 준과 둘이서 활동 관련된 얘기는 해본 적이 없는데 생각보다 진지했다. 항상 남들 따라오는 것도 벅차하던 애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좀 신기하기도 했다.

“이제 가야겠다. 형도 슬슬 자요.”

“그래, 너도 가서 자.”

“전 매니저 형 불러서 야식 먹으려고요.”

준이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듯 웃으며 신발을 신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인사를 했는데,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던 준이 다시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 잘 자요!”

그러더니 큰 손을 펴서 흔들고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 어느 촬영장을 가도 예쁨받는 이유가 다 있었다.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나와서, 아무도 없는 문을 향해서 손을 흔들다가 내렸다.

잘 자라는 인사를 받았으니,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씻고 자야겠다 싶었다. 가방에서 투어 내내 쓰던 샴푸와 바디워시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그냥 샤워만 하려고 했는데 크고 좋아 보이는 욕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따뜻한 물에 잠겨서 앉아있으면 좋겠다 싶어 충동적으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디자인 감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천장 디자인이 신기했다. 목이 빠져라 천장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몸이 미끄러져서 턱까지 물에 잠겼다. 물 온도를 잘 맞춰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지구는 깼으려나. 아니, 열이 오른 상태로 잠들었으니까 아직 자고 있겠지. 몸이 나른해지니까 졸음이 밀려와서 눈이 자꾸만 감겼다. 이 상태로 30분만 자고 싶다.

“아!”

그렇게 멍청하게 졸다가 기어코 몸이 완전히 미끄러졌다. 욕조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머리가 흠뻑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잠이 확 달아나서, 이제 그만하고 씻어야겠다 싶어 일어나려는데 세면대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겨우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더니 문자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자요?]

지구한테 온 문자였다. 깼나 보네. 답장을 보내는 대신,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욕조 위에 놓았다. 신호음을 들을 새도 없이 바로 지구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직 안 자고 뭐 해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작았다. 잘 안 들려서 휴대폰을 끌어와서 귀에 가져다 댔다.

-오늘 같이 자면 안 돼요?

투어 내내 방을 따로 썼다. 침대도 하나밖에 없는 방인데, 괜히 관계자가 보거나 듣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래도 오늘은 나도 같이 있고 싶었다.

“네가 올 거야?”

-네.

대답이 끝나자마자 전화 건너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전화한 거야?”

-네, 답장 안 오면 다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근데 소리가 왜 이렇게 울려요?

“욕실이라서 그래. 잠깐만.”

대충 씻고, 머리를 수건으로 몇 번 털은 다음 문을 열었다. 5분 남짓 기다렸을 지구는 별말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처럼 방금 막 씻은 듯, 머리카락이 완전히 다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앞으로 훅 다가오자마자 좋은 냄새가 났다. 호텔에 구비되어 있는 샴푸 냄새인 것 같았다. 따로 챙겨온 걸 써서 몰랐는데 향이 엄청 달달했다.

“다 씻었어요?”

“급하게 씻었지.”

뭔가 씻다가 뛰어나온 게 부끄러워서 괜히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지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욕실로 걸어가 드라이기를 들고 나왔다. 코드를 꼽고 나란히 붙어 앉아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나로 둘이 쓰려니까 드라이기가 자꾸 이쪽, 저쪽 왔다 갔다 움직였다.

“열 다 내렸어?”

“네. 심한 거 아니었어요.”

웃으면서 지구가 이마를 툭툭 쳤다. 만져보라는 뜻인 것 같아서 살짝 손을 대봤는데, 정말로 시원했다. 심한 게 아니라 안심이 되면서도 문득 로드 매니저 형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왕복 스물다섯 시간을 비행기에서 뜬 눈으로 버텼다고.

“다 마른 거 같은데 얼른 자자.”

얼른 더 재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드라이기 코드를 뽑고 불을 껐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괜히 꺼냈다가 못 잘까 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까 욕조 안에서는 그렇게 졸렸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까 잠이 안 왔다. 눈만 깜빡이다가 자세를 바꿔서 옆으로 누웠는데, 어둠 속에서 지구랑 눈이 딱 마주쳤다.

“하현이 형.”

너무 조용해서 작은 목소리인데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마주친 눈이 천천히 깜빡이는 것까지 보였다. 귓가에 조용히 내려앉은 내 이름에 숨을 한 번 집어삼켰다. 항상 형, 하고 호칭만 부르는 터라 이름을 불러주는 건 오랜만이었다.

“우리 재계약하지 말까요?”

“쿨럭.”

조용히 내뱉은 제안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당황해서 한껏 집어삼켰던 숨을 급하게 토해냈다. 놀라서 터진 기침에도 지구는 놀라지 않고 부드럽게 등을 쓸어줬다. 큰 손이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았다.

“형이 사람들 많이 신경 쓰는 거 알아요. 팬들한테 고마워하면서도 안티가 하는 말 하나 허투루 못 넘기는 것도 알고요.”

나직한 목소리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전부 맞는 말이었다.

6년을 활동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아이돌이랑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막연히 부딪혀봐야지, 도전해봐야지 했던 자리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서바이벌 ID로 먼저 인지도를 쌓아놓고 시작한 탓에 너무 높은 곳에서 출발했다. 그만큼 가파른 경사를 올라 지금 위치에 섰다. 멤버들끼리 모여서 울기도 많이 울고, 우연히 안티의 SNS 계정을 봤다가 그 자리에서 토한 적도 있었다.

“어때요. 형은 계속하고 싶어요?”

“어…….”

“형이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게요. 근데.”

지구가 숨을 한 번 천천히 내쉬었다. 다음으로 꺼낼 말을 정리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처음 계약된 게 7년이었잖아요.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팬들한테 좋은 무대 보여준다고 몸 갈아가면서 연습했고. 우리 다 정말 열심히 했잖아요.”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진짜였다. 정말로 열심히 했다. 예준도 말은 대충하자고 하면서도 한 번도 설렁설렁한 적이 없었고, 휘영과 준도 잠잘 시간 줄여가면서 열심히 연습했다. 적극적으로 물어보고 지구도 좋은 작업물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하루 종일 작업실에 박혀 있었고.

“이제 다른 거 하면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거. 아이돌이 아닌 다른 직업.

“흘러가는 스케줄에 몸 맡기고, 아픈 거 티 내지도 못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그래요.”

다정한 목소리는 세상 그 어떤 말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생각지도 못한 데뷔를 한 지 6년. 조금 더 레브의 멤버로 있을 것인지, 말 것인지.

그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마주 보고 가슴을 맞대고, 서로의 소리를 들으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꺼내고 공유했다. 그리고 아침 8시가 조금 넘었을 때,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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