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를 피하는 방법-108화 (108/130)

20화

작게 끄덕인 고개가 다시 아래로 푹 떨어졌다. 다른 멤버들도 있는데 혼자서 이런 결정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재계약한다고 하면, 우리만 탈퇴하는 게 되는데…….

“남 생각하지 마요.”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얘기해서인지 목소리가 희미했다. 피곤할 만도 한데, 마주친 눈에는 졸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목을 한 번 다듬은 지구가 단호한 눈빛으로 마지막 말을 했다.

“주변 생각하다가 스스로를 놓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지구는 음악을 정말 좋아했다. 회사에서는 항상 인성 논란만 만들지 말고, 팬들이 좋아하는 것을 적당히 해주면 된다고 가이드했는데도 지구는 항상 먼저 나서서 하나라도 더 하려고 애썼다. 팬들에게 묻고, 노래 만들고, 커버하고.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답은 항상 똑같았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더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서.

그런 애니까 분명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상상조차 못할 만큼 깊은 생각. 주변 생각하다가 자신을 놓친다고……. 얼굴을 마주 본 상태로 눈을 한 번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도 스스로를 잡기로 했다.

“그래.”

그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한 마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침묵만 쭉 이어지다가 오전 8시 28분이라는 시간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기억이 끊겼다. 나란히 누워서 죽은 듯이 잤다. 눈을 떴을 때 새벽이라서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18시간을 내리 잘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바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좋은 자리라서 편하게 갈 수 있는데도 어제 너무 많이 자서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가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비행기라 휴대폰도 안 터져서 할 것도 없었다. 어제 그렇게 자고도 지구는 잠이 오는지, 옆자리에서 작은 숨소리만 내면서 자고 있었다. 자는 얼굴이 너무 순해서 깨울 생각도 안 들었다.

“형 심심하죠?”

“어. 너는?”

“전 이제 자려고요.”

앞자리에 앉은 준이 꼼지락거리며 수면안대를 썼다. 그렇게 준을 마지막으로 모든 멤버가 다 잠드는 바람에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멍하게 정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넘어갔다.

착륙을 30분 앞두고는 옷매무새랑 머리 정리도 다시 했다.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서 입국이 3일이나 늦어졌지만, 공항에 팬이 없을 리가 없었다.

“좀 있으면 착륙해.”

“잠깐만요…….”

항상 비행기만 타면 잠들어서, 내릴 때마다 지구가 깨워주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잠든 지구를 살살 흔들어서 깨운 다음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줬다. 평소 같으면 깨우자마자 칼같이 일어날 텐데, 오늘따라 눈 뜨기가 버거운지 이상하게 꾸물댔다. 18시간을 자고도 모자란가. 하긴 제대로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열까지 올랐으니 많이 피곤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얘들아!”

“해투 잘 갔다 왔어?”

예상대로 공항에는 팬들이 가득했다.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어준 다음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서서 다가오는 팬들을 몸으로 막아준 매니저 형과 가드분들의 경호 덕분에 멀쩡히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병원에 들러서 검사와 치료를 받고, 의사와 이야기한 뒤에 자택에서 꾸준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직접적으로 과격한 활동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해서, 2주 동안 쉬고 나서 무리 없는 스케줄은 계속 진행하는 거로 일정이 나왔다. 인터뷰나, 잡지 촬영 같은 거.

일주일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쉬었을 때쯤, 멤버들에게도 말을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먹다 갑자기 떠올라서, 라면을 집어 올리던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물었다.

“멤버들한테도 재계약 안 한다고 얘기해야겠지?”

“해야겠죠.”

천천히 입안에 있던 걸 씹어 넘긴 지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얘기하는 게 좋지. 슬슬 재계약 시즌이라 너무 늦게 말하는 건 안 좋을 텐데. 괜찮은 날짜를 생각하고 있는데 지구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오늘 모여서 얘기해요.”

“오늘? 왜?”

“최대한 빨리하는 게 좋아요, 생각난 김에.”

정말? 오늘? 하다가 결국 진짜로 예준의 집에서 모였다. 또 예준의 집이 된 이유는 사다리 타기에 당첨됐기 때문이었다. 예준이 카톡으로 화남 이모티콘을 30개나 보냈지만, 그 누구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부른 거 보니까 정했나 보네, 안 하기로.”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예준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오랜 생각 끝에 결정한 일이고, 뭔가 이유도 굉장히 많았는데. 막상 멤버들에게 말을 하려니까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나보다 먼저 정리가 끝났는지 지구가 입을 열었다.

“네, 재계약 안 하려고요.”

“그래, 이유 물어서 뭐 하겠냐. 우리 다 아는걸. 안 그러냐?”

휘영은 다 안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준은 멍하게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예준이 툭툭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알죠…….”

“너네 둘 다 6년을 열정 갈아서 했잖아.”

“6년 동안 진짜 좋았어요. 근데 힘들어서…….”

“야, 넌 안 어울리게 왜 눈치 보냐?”

예준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목소리가 꽤 컸다. 깜짝 놀란 준이 탁자를 쳐서, 다 먹은 과자 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날렸는데, 보지 못한 듯 집주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무조건 재계약해야 된다고 붙잡기라도 하겠냐?”

“형.”

“아니, 그건 아니고, 그래도 한 팀인데…….”

“같은 팀이라고 인생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공감하는지 지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이 아빠 다리를 하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리고는 휘영과 준을 한 번씩 쳐다보며 물었다.

“그룹 이름은 양예준과 아이들 할까?”

“그걸로 바꾸면 전 안 할래요.”

준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말에 예준이 깔깔 웃으며 허벅지를 탁 쳤다. 요즘 나이 드는 거 싫다고 자주 하소연하더니, 하는 행동만 보면 이미 아저씨였다.

“어차피 나도 안 할 생각이었어, 재계약.”

“네?”

“내년에 군대 간다니까. 지금도 서른인데, 2년 있다 나와서 아이돌 또 못 해.”

예준답게 솔직한 말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데뷔한 선배들 중에는 벌써 30대 후반인 분들도 많았지만, 그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재계약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더 그럴 거고. 충분히 이해하는데도 예준은 굳이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머리 깎은 거 뉴스에 실리기 싫어.”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결정했을 게 분명했다. 장난스러운 예준의 말에 유일하게 웃어준 휘영이 드디어 입을 뗐다.

“셋이 나가면 남을 이유가 없지.”

“형도요?”

“우리 둘이서 어떻게 하라고.”

“……그건 그래요. 노래랑 춤이랑 랩 다 구멍 나는데.”

준이 납득했다는 듯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5인 그룹에서 세 명이 빠지면 당연히 그룹 유지는 힘들었다. 계약 기간이 끝난 후의 행보는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정하면 되지만, 준은 연예인에는 더 이상 뜻이 없어 보였다.

“그럼 저도 안 해요, 재계약.”

즉석에서 결정을 내린 준이 구석에서 과자를 한 봉지 들고 와 자연스럽게 뜯었다. 처음부터 심각해진 적 없던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 그룹의 해체가 정해진 건데, 다들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5명 전부 재계약을 안 한다면 그룹은 자연스럽게 해체였다. 계약서대로라면 내년 1월이 계약 만료였다. 그러니까 이대로라면 올해 11월 컴백이 우리 그룹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 * *

크고 작은 스케줄과 함께 여름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허리도 점점 좋아져서 이제는 움직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활동 준비도 시작됐다. 컴백 타이틀곡으로 예정되어 있던 곡은 너무 시원하고 밝아서, 겨울 분위기에 맞춰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활동인 만큼 이것저것 신경 쓰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됐다.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회사에 전달했을 때, 사장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한참 애원하다시피 얘기를 했다. 지금이 완벽한 정상인데 왜 여기서 그만두냐고, 아직 더 벌어야 하지 않겠냐고. 7년 연장이 힘들다면 줄여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이라 정중히 거절했다. 사장님이 거의 기절할 듯이 놀라서,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며 몇 번이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결국 재계약은 없는 거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체가 확정되고 나니 팬들에게 더 잘하게 됐다. 아직 재계약 관련 기사가 나가지 않았으니까 아무도 모르겠지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기쁠 때는 축하받고, 슬플 때는 위로받았으니까. 거의 모든 팬들이 우리가 이미 재계약을 했을 거라고 얘기하고 있어서 더 미안했다. 그래서 마지막인 만큼, 최근에는 소통을 위해 자주 팬들을 찾아가는 편이었다.

“아침에 얘기한 대로 잡지 인터뷰하고……아, 너네 단독 리얼리티 촬영 또 들어갈 거야.”

평소처럼 공식 카페에 글을 쓰던 도중에 매니저 형의 스케줄 보고가 끝났다. 그리고 굉장히 이질적인 스케줄을 들었다.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냐는 글을 업로드한 뒤에 매니저 형에게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리얼리티요?”

“갑자기 아니야. 너네 7주년 맞춰서 기획하던 거니까. 연장을 안 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앞당겨서 해야지. 4부작 밖에 안 되니까 촬영도 금방 할 거고…….”

4부작으로 촬영될 리얼리티는 케이블 채널에 방송된다고 했다. 개인 채널도 아니고, TV로 방송되는 리얼리티를 또 찍게 될 줄은 몰랐다. 데뷔하고 한 번, 3년 전에 한 번. 매번 주로 숙소에서 촬영했는데, 이제는 다들 독립해서 사니까 찍을 공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니저 형의 입에서 1화 기획이 떨어지기 전에는.

“일단 1화는 너네 각자 집에서 촬영할 거거든?”

“아, 왜요?”

게임을 하던 예준이 반항적으로 물었다.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집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청소를 하기 싫어서일 확률이 높았다. 데뷔 초에 숙소 거실에서 자던 게 익숙해졌는지, 예준은 넓은 집에 혼자 살면서도 거실에 모든 살림살이를 쌓아두고 사는 편이었다.

“이게 약간 내 아이돌의 생활을 엿보는 컨셉이라 그래.”

“생활이 너무 더러워서 보여주기가 좀.”

“내일 당장 촬영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촬영 전에 집 정리 좀 해놓고. 다 치우라는 건 아닌데, 그래도 사람 사는 집처럼 보여야지.”

“네.”

매니저 형의 시선이 이번에는 예준 대신 준에게 꽂혔다. 눈이 마주치니까 본인도 찔렀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행동으로 방어를 했다. 사용한 물건들을 전부 그대로 두고 치우질 않는데 집이 더러워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우리 집은 지구가 살다시피 하니까 그리 더럽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놔도 지구가 습관처럼 주워서 정리하니까. 너무 깨끗하게 치워놓으면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냥 바닥이나 한 번 싹 청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쓰는 가구 위에 쌓인 먼지도 좀 털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 벽에 걸어둔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지구가 벗어놓은 옷, 침대 위에 베개 두 개, 책상 위에 같이 찍은 사진……. 집안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동거 흔적을 보면서 생각했다. 촬영 전에 꼭 대청소해야겠다.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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