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부]
Prologue
마도력 233년. 대륙의 패권을 두고 오랫동안 대전을 치러왔던 스트라스 제국과 엘 파셔 제국이 휴전협정을 맺기로 했다. 두 세력권의 사이에 끼여 운 좋게 살아남은 아베크 중립국이 협정 장소로 결정되었다.
협정의 성사 여부에 따라 대륙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스트라스 제국의 황태자와 엘 파셔 제국의 황태자가 대표로 한자리에 모였다.
빳빳한 회백색 정장을 입은 청년이 먼저 홀에 들어섰다. 단정하게 자른 황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세련되고 잘생긴 얼굴이 보인다. 눈동자는 여름 들판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녹색이었다. 그는 홀 내부를 거니는 동안 시종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을 굽어보는 시선은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스트라스 제국의 황태자,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제 몸에 버거운 검을 움켜쥐고 피 튀기는 전장 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년티를 벗은 나이가 되었을 때는 사람들에게 전쟁귀로 불리며 열이 넘는 적장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하지만 그의 진짜 특기는 검이 아닌 마법이었다.
파브스 평원에서 보여준 4중 영창 주문은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평생 동안 마법에 골몰한 노마법사들도 3중 영창이 고작인 시대이다. 4중 영창 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대륙 역사를 통틀어 최초였다.
“흠……, ‘엘 지스카르 파셔’는 누구지?”
레브노아드는 맞은편을 유심히 살폈다. 스트라스의 주요 인사가 입장하는 가운데 엘 파셔의 일행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엘 파셔의 황태자였다.
스트라스에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있다면 엘 파셔에는 지스카르 황태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지스카르 황태자는 아직 나이가 어려 실제로 전공을 세운 것은 거의 없지만 검에 놀라운 재능을 보이며 명성을 얻고 있었다. 풍문에는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하던가.
팽팽히 대립하는 두 제국에, 비슷한 또래의 황태자들이 각각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호적수 비슷한 존재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레브노아드는 한 번도 지스카르 황태자를 호적수라고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최초의 4중 영창 마법사에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과 동격이라? 어디다 애송이를 갖다 붙이냐고 레브노아드는 자주 비웃음을 던졌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라고 억지를 쓰는데 레브노아드와 지스카르 황태자는 여덟 살이나 나이 차가 났다.
일단 나이부터 무리수가 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를 의식한 엘 파셔가 자국의 황태자에게도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여론전에 들어간 결과였다. 적국의 행태가 아주 가소로웠다. 하지만 소문이 무성한 엘 파셔 황태자에게 흥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것이다.
얼마 안 가 레브노아드는 지스카르 황태자를 발견했다. 그는 엘 파셔 황가 특유의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엇비슷한 키였고, 얼굴 생김새는 미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제법 번듯하다. 그러나 잘생긴 얼굴에는 한 조각의 표정도 없고 냉엄한 기운만 흐르고 있었다.
레브노아드는 실소했다.
“하, 어린놈이 표정 좀 보게. 엘 파셔의 황태자는 나보다 여덟 살 아래라고 들었는데 어째 나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아 보이는군.”
“아니, 그 정도까지는……. 하지만 레비 형님 말씀대로 원래 나이보다 좀 겉늙어 보이긴 하네요. 이제 갓 성인식을 치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레브노아드를 수행하던 적금발의 소년이 대답했다.
에드리히 반 스트라스. 그는 제국의 11황자이지만 모든 권리를 버린 채 레브노아드의 신하가 되었다. 그래서 열두 명에 이르는 황자와 황녀들이 모조리 숙청을 당했을 때도 에드리히만은 살아남았다.
많은 형제 중 레브노아드를 ‘레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에드리히뿐이었다. 덧붙여 세상에서 오직 레브노아드만이 애정을 가득 담아 에드리히의 애칭을 불렀다.
“에디. 나이가 어리면 사람들에게 얕잡아 보이기 쉽다. 지배자에겐 아랫사람을 압도하는 풍채가 필요한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어린 나이에 폭삭 삭아버린 엘 파셔의 황태자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습니까……?”
에드리히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레브노아드는 피식 웃으며 회장 가운데 위치한 단상에 올랐다. 수행원은 모두 뒤에 남았다. 엘 파셔 측에서도 지스카르 황태자만이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중재자는 없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단상 위에 미리 준비한 협정서가 올려져 있을 뿐이다. 레브노아드는 단상 한쪽에 놓인 황금 펜을 집어 들었다. 지스카르도 펜을 집었다. 거의 동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
가볍게 인사치레가 오갈 차례가 되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 협정서는 사실 한낱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두 제국이 실질적으로 휴전을 원하고 있어야만 협정은 성립된다. 따라서 양국의 대표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계일 수도 있었다.
먼저 레브노아드가 손을 내밀었다. 지스카르가 악수에 응하지 않고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레브노아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악수를 나눌 뿐인데도 고민이 필요하단 말이냐?”
지스카르가 딱딱하게 서 있는 것에 비해 레브노아드의 모습엔 여유가 있었다. 지스카르는 대답 없이 악수에 응했다. 그러나 레브노아드의 손을 맞잡는 순간 눈에서 파랗게 냉기가 배어 나왔다.
양국의 황태자가 악수를 하고 있지만 화기애애한 느낌은 없고 살얼음판 위에 선 것 같은 긴장감만 맴돌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그러나 한 발 내딛다 말고 레브노아드가 갑자기 지스카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쟁귀란 별명까지 가진 마당에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 나는 전쟁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왕이면 이 휴전이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군.”
“……휴전협정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처음으로 지스카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싸늘한 표정과 달리 반듯하게 존대를 하며 연장자 취급을 해주는 것이 무척 의외라 레브노아드는 다시금 피식 웃었다.
“그럼 기회가 되면 또 보지.”
레브노아드는 손을 흔들며 홀을 나섰다. 친위기사들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오와 열을 맞춰 시립해 있었다. 레브노아드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유쾌하게 외쳤다.
“돌아가자! 우리들의 조국으로! 변방의 놈들과는 작별하고 스트라스로 돌아가야지!!”
“와아아아아!!”
금속제 동상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 있던 기사들이 순간 크게 환호성을 올렸다. 레브노아드는 친위대 대장인 체르도에게 눈짓했다.
“귀환하는 동안 마차에서 눈 좀 붙여야겠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깨우지 말라.”
“제발 그 생활 습관 좀 바꾸십시오. 며칠간 꼬박 날을 새다가 한꺼번에 몰아서 주무시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내 몸 관리 정도는 알아서 한다.”
“무사히 휴전협정을 성사시켰지만 귀환하는 길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경이 알아서 대처해야지! 이 몸이 그런 하찮은 일까지 전부 신경을 써야 하는가?”
레브노아드는 그대로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 버렸다. 그의 막무가내에 체르도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마차를 뒤로하고 돌아섰을 때 그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수년간 레브노아드와 동고동락하며 불패의 명성을 쌓아온 황태자 직속 친위대다. 체르도는 목청을 돋워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렬! 스트라스로 귀환한다! 뉘 안전에 누를 끼칠 작정으로 벌써부터 해이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냐! 평생 적국에서 뒹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으며 레브노아드는 통신용 수정구를 꺼냈다. 최대 숙원이었던 휴전협정을 드디어 성사시켰다. 그는 속히 스트라스 황제에게 경과를 보고할 생각으로 수정구 위로 손을 내밀었다.
“온.”
짧은 시동어를 읊자 팔찌에 빼곡히 박힌 마정석이 진동하며 ‘우웅’ 소리를 냈다. 수정구가 바로 스트라스 황제의 모습을 비췄다. 신호를 보내자마자 연결되다니, 지금껏 수정구 앞에서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폐하, 근 보름 만에 인사 올립니다. 날씨가 찬데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짐이 건강한지 어떤지는 네 눈으로 보면 알 것이고, 그보다 오는 초하루까지 반드시 귀환해라! 알았느냐?
휴전협정의 결과는 확인도 하지 않고 난데없이 빠듯한 귀환 명령부터 내려졌다. 레브노아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생기다마다! 이 애비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노라! 오는 초하룻날 사냥 계획을 잡아놨으니 그리 알라!
“……폐하. 볼그윈 백작께 연락을 넣어보시지요. 기꺼이 사냥 친구 정도는 되어줄 것입니다.”
―이놈이 다 늙은 애비에게 효도할 생각은 않고!
“그보다 휴전협정이 어찌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호! 간만에 실패의 쓴맛이라도 본 게냐? 이번 휴전협정만큼은 반대였는데 마침 잘 되었구나!
“안타깝게도 무사히 휴전협정을 성사시켰습니다.”
―에잉!
황제는 빛바랜 금색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목소리엔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황제는 여러 자식 중에서 레브노아드를 노골적으로 편애하였다. 레브노아드가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출하고 남달리 총명했기 때문이다. 레브노아드는 제위 싸움 중에 열두 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는데, 황제가 그에 한 수 거들기도 했다.
덜컹.
갑자기 마차의 문이 열렸다. 레브노아드는 고개를 돌렸다. 에드리히가 찻잔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에디, 뭘 하다 이제 오느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신다고 사흘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지 않으셨습니까. 편히 주무시라고 수면에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만…….”
에드리히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레브노아드가 통신구를 통해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즉시 머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에드리히로군. 짐이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앞으로도 빈틈없이 레비를 보필해야 할 것이다.
황제는 레브노아드를 대할 때와 달리 무척 냉랭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모든 황자가 죽었지만 에드리히는 살아남았다. 에드리히도 황제의 아들이니 황권을 노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황제는 레브노아드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에드리히의 존재를 매우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레브노아드가 수습을 위해 나섰다.
“폐하, 에디는 제가 거두었으니 그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이놈이 다 컸다고 이젠 애비 말을 무시해? 뭐 좋다. 이제 와서 네가 하는 일에 짐이 간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모두 네 뜻대로 하거라.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 믿으마. 그리고…… 초하룻날이다!!
“알겠습니다.”
레브노아드는 수정구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황제의 영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한숨을 쉬고 에드리히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는 주지 않을 것이냐?”
“예? 아!”
에드리히가 그제야 뒤늦게 들고 있던 차를 건넸다. 레브노아드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는 동안 에드리히도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에디, 그간 검이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진척은 어느 정도인가?”
“아……, 그,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에드리히는 약간 머뭇대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레브노아드는 다시 한 모금을 머금고 잔을 내려놓았다.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하다니 배짱이 좋군.”
“예?”
에드리히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레브노아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몹시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건…….”
“보고를 듣자 하니 벌써 오라를 발현시켰다고 하더군. 나라 안에서 오라 소드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이제 겨우 열여섯이지. 이걸 ‘그저 그런 정도’라고 하던가?”
레브노아드가 혀를 차며 다리를 모로 꼬았다. 순간 에드리히가 외쳤다.
“두 번 다시는 검을 들지 않겠습니다! 아니, 몇 달 전부터 검에 아예 손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말아달라고?”
레브노아드는 물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띠면서.
그가 죽여버린 형제들이 무려 열두 명이다. 그 외에도 위협이 되는 누이, 후궁, 외척들을 깡그리 몰살시켰다. 신하와 백성들은 그를 신처럼 따랐지만, 혈육들은 그를 마귀처럼 증오하고 두려워했다.
에드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레브노아드의 시선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형님의 곁에만 있겠습니다…….”
레브노아드는 잔을 들어 나머지 차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는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권력은 일신(一身)의 강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모든 이가 나의 신하이고 너는 몰락한 황자에 지나지 않는데,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이 몸의 위치를 흔들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생각이 아주 가소롭군.”
갑자기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레브노아드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에드리히를 보았다. 여덟 살 무렵 휘하로 들어온 동생은 당시와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작고 소년처럼 어리기만 하다. 아마 스스로 그리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검을 연마해라. 이왕이면 엘 파셔의 그 애송이를 능가해 봐라. 그 애늙은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척 기대가 되는걸. 음…….”
피식 웃던 그는 미간을 쥐었다.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것을 보고 에드리히가 가까이 다가왔다.
“형님?”
“별것 아니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아니, 찬물이라도 좀 가져오겠느냐?”
“신관을 모셔오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에드리히는 물을 가져오기 위해 마차 밖으로 물러났다. 레브노아드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그 순간,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커헉!”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어떻게든 공기를 들이켜려 애썼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고 코와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레브노아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덜컥.
버둥거리는 그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찻잔이었다. 에드리히가 건네주었던 찻잔. 마비되어 가는 감각 속에서도 깨달았다. 그 차 안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에, 에디……. 네……가…….”
배신인가? 결국 그런 건가?
수많은 정적이 독살을 시도해 왔기 때문에 그는 음식에 입을 댈 때마다 항상 해독 마법을 준비해 왔다. 하지만 조금 전 에드리히가 차를 권했을 때 그는 무방비하게 그것을 받아 마셨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보다도 에드리히의 앞에서 이만큼 방심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그렇게 에디를 믿고 싶었던 걸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까맣게 잠식해 오는 감각에서 저항했지만 벗어나는 것은 끝내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암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