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43)

1.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지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스트라스 제국과 엘 파셔 제국이 경쟁적으로 정복 전쟁을 추진함에 따라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든다.’

‘영주 재판권의 축소는 황권 강화를 꾀하기 위한 정책 중의 하나다.’

‘에브라함 요새는 50년간 단 한 번도 외부의 침공에 함락된 적이 없다.’

혹시 환생을 믿는가? 원래 나도 그런 건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더군.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라고 불리던 인간이었다. 스트라스 제국의 황태자였으며 누군가에게 독살당해 한심한 최후를 맞은 놈이기도 하다. 기적같이 이 땅에 다시 태어났을 때, 나는 전생의 모든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릿속에 맴도는 레브노아드의 경험과 지식을 즉각 자신의 것으로 만들진 못하고 있었다.

갓 태어나 조막만 한 아기였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니, 배가 고팠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주 젖을 주지 않아서 괴로웠다. 이건 기억난다.

아마 여섯 살 때였던가? 그때 처음으로 스트라스 제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평원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힘껏 말을 내달리면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고 구체적으로 스트라스 제국까지 떠날 방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옆집 베티가 놀자고 그러기에 그냥 뒷산에 풀 뜯으러 갔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충동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꼬맹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사람들에게서 ‘레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엘 파셔 제국, 빈첸시오 자작의 소유물인 노예.

그래, 노예다. 하다못해 평민도 아니고 가축 취급을 받는 노예로 환생한 것이다. 그것도 적국의 노예로군.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직 레이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가끔 생각한다. 누가 나를, 레브노아드를 독살한 것인지. 스트라스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 지저분한 곳을 벗어나 과거의 신분을 되찾고 싶다든지.

쾅!

“레이!!”

갑자기 베티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엘 파셔 여자들은 왜 이렇게 사나운지 몰라.

“베티, 항상 노크를 하라고 말했잖아.”

“그런 것보다 레이! 밖에 난리야!”

무슨 일로? 설마 또 아버지들끼리 모여서 낮술을 마신 건 아니겠지? 바로 어제도 똑같은 이유로 빈첸시오 자작에게 혼쭐이 났으면서 아주 간이 부었군.

난 혀를 차고 베티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마당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어머니가 근처에 계시기에 사정을 듣기 위해 다가갔다.

“어머니.”

“레이 왔니?”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강아지 어르듯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하게 요구했지만 그녀는 어제 한 말을 오늘 또 까먹고 매일 같은 행동을 했다. 그녀의 겨드랑이가 땀에 절어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어머니의 냄새가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녀가 몇 번이나 내 요구를 무시해도 나는 쉽사리 화를 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스스로 정리하며 다시 어머니에게 질문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요? 베티가 큰일이 났다고 제게 나와보라고 말하던데요.”

“아, 베티가 널 불러왔구나. 저기 물레방아의 축대가 부서진 게 보이지? 그것 때문에 지금 난리가 났단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 낡아서 불안해 보이더니 결국 부서졌나 보군요. 그런데 물레방아가 부서졌으면 영주님께 알려야지 이런 데서 뭘 하시는 거죠?”

“평소라면 그러겠는데 저 치들이 어제 낮술을 처먹어서 영주님께 크게 혼이 났잖니. 그런데 오늘 물레방아까지 부서졌다고 하면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영주님께서 진짜로 화를 내실지도 몰라. 이러다 정말 크게 치도곤을 당하지. 이 인간들아, 그러게 왜 술을 처먹어, 처먹기를!”

“이 여편네야. 맞아 죽어도 내가 맞아 죽어. 저 물레방아가 지금 부서질 줄 내가 알았나!”

갑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로 손을 내밀어 언쟁을 중단시켰다.

“잠시만 두 분, 싸우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물레방아는 때가 되어 저절로 부서진 것뿐이에요. 아버지가 어제 술을 마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만약 어제 일을 문제 삼는다면 그건 트집일 뿐이지요. 빈첸시오 자작은 경우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가 죄도 없는 노예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주위가 조용해졌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느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레이가 하는 말이니 믿어볼 만하지 않아?”

“그렇지. 레이 말을 들어 손해 보는 일이 없더라고.”

“근데 레이! 너는 뭔 배짱으로 영주님을 자작이라고 막 부르는 거냐? 그러다가 들켜서 맞아 죽으려고?”

“저 녀석 머리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무조건 믿고 안심해도 되겠어? 물레방아 고치는 데 틀림없이 큰돈이 들 거야. 아무리 영주님이라도 저 정도 되면 화내실 거 같은데.”

잠깐 내 말에 솔깃한 것 같았으나 그들은 다시 어수선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무지렁이 노예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지.

“자, 그만하고 주목하세요! 물레방아가 망가진 것을 영원히 숨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거짓말을 하고 있다가 뒤늦게 들키면 빈첸시오 자작이 몇 배로 화를 내지 않을까요?”

나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여, 역시 그렇지?”

“이실직고하는 수밖에 없겠지? 영주님은 좋은 분이니까 이번에도 용서해 주실지 몰라.”

그러니까 이번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용서받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하지만 논리로 설득해 봤자 신통한 반응이 나올 리 없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다.

“아버지는 어서 영주관에 찾아가서 물레방아가 부서졌다고 보고하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은 부서진 축을 꺼내 한군데로 모아주세요. 수리공이 왔을 때 바로 수리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야겠군.”

“그러자고.”

“잠깐! 왜 내가 영주관에 가야 하는 건데?”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노예들이 다시 딴소리를 하면서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을까 봐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이리 와보라며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옛날부터 일하는 중간에 방해받는 것을 제일 불쾌하게 여겼다.

“후후! 역시 레이가 최고구나. 우리 아들이 없으면 이 동네는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는 게 없어요. 자, 이거 먹고 일하렴.”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마냥 웃으며 마메 뿌리를 내밀었다. 그것은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는 나무뿌리로,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이 즐겨 먹는 간식거리였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결국 받아 들었다.

“뭐, 좋아요.”

내가 황태자였을 무렵엔 이보다 훨씬 달고 훌륭한 과자를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이런 지저분한 나무뿌리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였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빈첸시오 성은 곡물이 풍족하게 나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주가 현명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평민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평화로웠다. 나를 낳아준 노예들, 아니 내 부모님은 어리석지만 다정하고 따뜻했다.

“마메 뿌리도 나쁘진 않지.”

나는 마메 뿌리를 씹으면서 베티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평범한 일상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해가 저물어갈 무렵 집사가 노예 숙소를 찾았다. 무슨 용무로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온 것인지 의아했다. 그때 집사가 노예들 사이에서 정확히 나를 지목했다.

“딱 보니 알겠군. 네가 레이지? 자작님께서 부르시니 따라오너라.”

“영주님께서 저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까?”

빈첸시오 자작은 자그마한 성을 하나 가진 하급귀족에 불과했으나 내게는 까마득히 높은, 저 하늘 위에 계신 분이었다. 어쨌든 나를 소유한 주인님이 아니신가? 그런데 나 같은 노예에게 무슨 용무가 있다는 거지?

의문이 더 깊어졌지만 노예 된 신분이라 일단 집사를 따라 숙소를 나섰다. 저택에 도착한 집사는 바로 영주에게 데려가지 않고 나를 욕실에 먼저 밀어 넣었다.

“깨끗이 씻기고 준비시켜라. 시간이 없으니까 서두르고.”

집사가 엄격하게 지시했다. 그 즉시 하녀들이 다가와 내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키기 시작했다. 묵은 때를 벗은 후에는 보드라운 셔츠에 까만 바지로 갈아입었다. 전부 노예에겐 굉장히 황송할 물건들이었다. 마지막 순서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빗질을 하던 하녀가 탄성을 질렀다.

“와! 머릿결이 부드럽기도 하지. 이렇게 예쁜 허니 블론드는 처음 봐. 시중인이 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거구나.”

하녀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시중인이 되다니?

“영주님께서 왜 저를 부르는지 아세요?”

“그게 말이야……. 넌 남자니까 좀 당황스럽기도 하겠다. 그래도 이건 둘도 없는 기회니까 잘해봐. 혹시 알아? 그분께 잘 보여서 노예 신세도 면하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게 될지도? 세상에 그분께서 이런 시골까지 행차하실 줄이야! 마물밖에 없는 애물단지 숲이 이렇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무슨 뜻이죠? 누가 왔습니까?”

하녀는 살짝 상기되어 말했다.

“그게 마물 사냥을 위해 어떤 분께서 행차하셨는데……. 아니야, 집사님께서 입단속 잘하라 하셔서 이건 비밀. 그보다 넌 누구 닮아서 이렇게 잘생겼니? 어머니 닮았어?”

“……그럴걸요.”

어머니도 금갈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레브노아드라고 불릴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직 키도 몸집도 평범한 정도지만, 앞으로 일이 년만 지나면 어머니가 애 취급하기 민망할 정도로 갑자기 키가 크고 체격도 좋아질 것이다.

머리를 빗고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 보니 나 외에도 다섯 명의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 또래부터 삼십대 후반까지 나이대가 다양했는데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것이다.

일순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쳤다. 현 상황과 하녀의 수다를 근거로 하여 나는 단숨에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렸다.

어느 지체 높은 분이 성을 방문했고 빈첸시오 자작이 그를 대접하기 위해서 침실에 넣어줄 얼굴이 참한 여자들을 불러들였다. 여자는 아니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이 남색을 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나도 황태자 시절 흥미 삼아서 예쁘장한 소년을 안아본 적이 있었다. 그다지 취향이 아니라 다시는 찾지 않았지만…….

아니 지금 태평하게 과거 떠올릴 땐가! 정말이냐? 진짜로 그것 때문에 불려가는 거냐고!

난데없이 닥친 위기에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나 생각뿐이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고, 마정석이 없어 마법도 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지금 당장 경비를 뚫고 도주한단 말인가. 게다가 노예 숙소엔 부모님이 남아 있다. 혼자 도망쳤다간 그들이 영문도 모르고 화를 당할 수 있었다.

“따라오너라.”

망설이는 동안 집사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야만 했다. 집사가 귀빈실 앞까지 나를 포함한 여자들을 데려갔다. 빈첸시오 자작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쪽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너희 중 한 명이 황제 폐하를 모시게 될 것이다. 평생의 영광으로 삼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 몸가짐에 신중을 기하도록 해라.”

그가 엄하게 얼굴을 굳히며 충고했으나 나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의 말을 반 정도밖에 듣지 못했다. 그때 귀빈실의 문이 열렸다. 그제야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앞을 제대로 보았다.

귀빈으로 추정되는 자가 등을 보이고 창가에 서 있었다. 나를 포함한 여자들이 들어오자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 표정이라곤 없는 냉엄한 얼굴.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생각은 모조리 마비되었다. 나는 앞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망연히 중얼거렸다.

“엘 지스카르 파셔…….”

다들 숨소리까지 죽이고 있던 상황이라 근처에 있던 몇 명이 내 중얼거림을 들었다. 빈첸시오 자작과 지스카르의 호위기사 두엇이 인상을 쓰며 이쪽을 휙 쳐다봤다. 웬 놈의 노예가 엘 파셔 황태자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았으니 정색할 만도 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스카르도 짙은 푸른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환생한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애송이었던 엘 파셔의 황태자도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그런 것치고 지스카르에겐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일찍 겉늙어버린 탓인가? 세월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얼굴이 거의 변하질 않았다. 휴전협정을 맺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지스카르는 내 눈앞에 있었다.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꺼풀이 벗겨지듯 모든 감각이 과거로, 황태자 레브노아드로 돌아왔다.

비루한 노예가 대제국 황태자의 시중을 들게 된다니 빈첸시오 자작의 말마따나 평생의 영광으로 삼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빠지고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치욕적인 감각을 아는가? 그러니까 지금 저놈 밑에 깔려줘야 한다는 말이로군. 몇 수 아래로 여겼던 새파란 애송이에게!

기가 막힌 상황에 나는 표정을 구겼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지스카르가 손으로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그만 남겨두고 다른 여자들은 모두 물려라.”

몇 명의 후보 중에 내가 선택됐다. 놈이 날 빤히 볼 때부터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옆에 서 있는 빈첸시오 자작을 발로 확 걷어차서 근처 기사에게 떠밀어버리고 바로 복도 쪽으로 달렸다.

“뭐, 뭐야? 거기 서!”

문 앞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친위기사가 내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방심하고 있는 손을 보니 어처구니없는 내 상황과 맞물리며 화가 치밀었다. 더러운 것을 피하듯 인상을 쓰며 옆으로 물러났다.

내가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 기사는 “어엇.” 하며 허공에 크게 헛손질을 했다. 그는 심지어 균형을 잃고 바닥에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혼란한 틈을 타서 기사 두 명을 더 제쳤다. 그러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움직이는 자도 있었다. 지스카르의 친위기사가 좁아터진 복도 가운데를 막아서며 내 팔을 비틀어 쥐었다. 낮게 욕이 튀어나온다. 보통 기사도 아니고 황제의 친위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역시 이런 식으로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소란 통에서도 지스카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처음 그 자세로 서 있었다. 기사가 나를 다시 방으로 끌고 와 어깨를 눌렀다.

“꿇어라.”

“헛소리 말고 그냥 죽여!”

내가 짓씹듯이 말하자 내내 사무적인 표정이던 기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빈첸시오 자작이 뒤늦게 몸을 일으키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이, 이,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짓을! 어전이다!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신데……!”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 하긴 황위에 오르고도 남았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를 내려놓고 모두 물러나라.”

그때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조차 과거 휴전협정 때와 아주 흡사했다.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과거를 자각시켰다. 놈의 수하에게 붙들려 있는 지금 상황이 견딜 수 없이 모욕적이었다.

기사가 내 어깨를 놓고 물러났다. 여자들도, 빈첸시오 자작도, 모든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방 안에는 나와 지스카르만 남았다. 지스카르는 내 얼굴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스카르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피했다. 놈은 예상했다는 듯 손을 더 뻗어서 내 팔을 붙들었다. 지스카르는 그대로 나를 끌고 가서 침대 위로 밀었다.

“윽!”

깃털 베개가 잔뜩 깔린 푹신한 침대였지만 나는 마치 벌레 더미 위에 쓰러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저리를 치며 상반신을 일으켜 주먹을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조금 꺾어 쉽게 공격을 피했다. 나를 이를 갈며 다시 주먹을 질렀다. 지스카르는 피하지 않고 이번엔 주먹을 붙들었다. 팔을 빼려고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윗덩어리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근육 하나 없는 내 팔다리에 주목했다. 놈에 비하자면 내 몸뚱이는 장난감 같았다. 아득할 만치, 체격의 차가 컸다. 노예로 태어나 평생 단련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소드 마스터인 놈을 육탄전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지스카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손버릇이 나쁘군. 어전임을 자각하고 예의를 갖춰라.”

“차라리 죽이란 소리 못 들었나 보지?”

내가 비아냥조로 말하자 지스카르는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거기까지는 한없이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벼락같이 손이 떨어져 내 뺨을 후려갈겼다.

뻐억!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에 얻어맞은 줄 알았다. 억 소리조차 못 내고 머리부터 침대에 처박혔다. 일순 눈앞이 희게 점멸했다. 그 한 방에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놈이 팔을 뒤로 꺾어 등을 보이게 침대 위에 짓눌렀다. 그리고 허리띠인 듯한 물건으로 팔을 강하게 묶었다.

“지……스……카르!”

충격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분노를 참지 못해 목으로 으르렁거렸다. 나를 완전히 구속해 놓고 지스카르가 물었다.

“누가 노예에게 짐의 이름을 가르쳤느냐?”

“…….”

나는 멈칫거렸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껄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

“누가 노예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쳤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네놈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모양이지?”

지스카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놈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오늘 처음 만난 노예가 난데없이 면전에서 막말을 쏟아내니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그는 단지 빈첸시오 자작이 진상한 침노를 상대로 하룻밤을 즐기려 했을 뿐이다. 따지면 지스카르야말로 아닌 밤중에 봉변을 당한 격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노예가 됐으니 그만 주제 파악을 하고 얌전히 놈의 밑에 깔려주라고?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견디기 힘든 분노와 모욕감에 움켜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끔찍하게 느꼈다.

“…….”

지스카르는 잠시 내 모습을 지켜보다가 팔을 억누르던 손을 배 아래쪽으로 넣어 허리를 들어 올렸다. 다른 손은 바지를 고정하던 허리띠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짐의 침실까지 들어와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건가?”

질색을 하며 놈의 손을 막으려 해봤지만 허사였다. 갑자기 허리 아래가 서늘해졌다. 바지가 벗겨진 것이다. 순간 전신에, 말단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끼쳤다.

지스카르는 침대맡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병이었는데 뚜껑을 열자 은은하게 향기가 났다. 놈이 그것을 내 엉덩이 위에 쏟아부었다.

“헉……! 그거……!”

차갑고 끈적대는 것.

알고 있다. 어떤 용도인지, 왜 쓰이는 건지!

“가만히. 향유가 없으면 견디기 힘들 거다.”

“머, 멈춰! 건드리지 마!”

지스카르가 꼬리뼈에 손가락을 댔다. 그대로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와 이내 엉덩이 사이의 틈을 찾아냈다.

“으……, 아! 엘 지스카르 파셔!”

“힘을 빼라.”

“닥쳐! 네놈 이런 취향이었어? 나는 남자야! 변태…… 같은 자식이…… 악!”

아프다기보다 깜짝 놀라버려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손가락 하나가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이물감.

나는 이를 으득 깨물었다. 몸을 움츠리며 그 이물감에 반항했다. 지스카르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이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럴 바에는, 이런 짓을 당할 바에는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천 배 낫겠다. 머리를 처박고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말지!

생각이 미치자마자 혀를 빼서 깨물었다. 그것을 보고 지스카르가 허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즉시 위로 뻗어 턱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윽, 컥……!”

혀를 무는 힘보다 놈의 손아귀 힘이 몇 배는 더 강했다. 견딜 수 없게도, 점점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지스카르가 어디서 손수건 같은 것을 가져와 길게 접어 혀를 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렸다.

지스카르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나를 다시 안아 올렸다. 그대로 자기 무릎에 앉히고 헐벗은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이 구멍 주위를 훑어갔다. 입구에 향유를 묻히는 것이다. 미끈거리는 중지가 다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욱! 손…… 치우……!”

재갈에 묻힌 발음을 용케도 알아듣고 지스카르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미리 풀어두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여자들과는 다를 테니.”

“……!”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버릴 테다! 엘 지스카르 파셔. 씹어 먹을 개자식이!

내가 속으로 욕을 퍼붓는 동안 지스카르는 손가락으로 마치 탐색하는 것처럼 안쪽을 샅샅이 훑어갔다. 깊게 넣었다가 천천히 빼내는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시 안쪽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온 손가락이 위쪽을 꾹 강하게 눌렀다.

“욱……으읏……!”

나는 재갈을 꽉 깨물고 억지로 신음을 삼켰다. 힘들게 헐떡거리다가 문득 지스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벌거벗은 채 벌벌 떨고 모습을 놈에게 고스란히 다 보여준 것이다. 끔찍한 수치심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스카르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안아서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 어깨에 얼굴을 묻게 하고 잠시 기다렸다. 겁에 질린 꿩이 머리만 숨기는 격이지만, 그래도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웃기게도 조금 살 것 같았다. 숨통도 조금이나마 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지스카르가 내 몸을 바짝 더 끌어당기며 다시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반항할 새도 없이 손가락이 틈을 비집고 깊숙이 침입해 왔다. 한참 내부를 훑어나가던 손가락이 살짝 힘을 주는가 싶더니 안쪽을 가볍게 긁었다.

“욱. 흐윽!”

조금 전에 저릿함을 느꼈던 그 부분이다. 마치 확인하는 것처럼 지스카르가 재차 그곳을 짓눌렀다. 반응해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다. 빤히 보이는 앞에서 온몸을 바짝 굳히고 벌벌 떨고 있었으니.

지스카르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천천히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바로 눕혔다. 등 뒤로 팔을 넣어 반쯤 안은 자세를 유지하며 다른 손으로 옷을 벗겨냈다.

나는 체념한 듯 발가벗겨질 동안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몸에 힘을 주며 지스카르의 정강이를 발로 찍었다. 체급의 차가 크지만 급소를 제대로 찔러주기만 한다면 타격이 들어갈지도 몰랐다. 방심했는지 공격이 정확히 먹혔고 지스카르도 제법 크게 움찔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절망적이게도.

“지나치게 겁이 없군.”

줄곧 무표정을 유지해 왔던 지스카르가 미미하게 눈가를 좁혔다. 처음으로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냈다. 놈이 자기 옷을 벗어 던졌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놈의 벗은 몸이 몹시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지스카르가 내 허벅지를 쥐어 위로 크게 들어 올렸다. 다리가 벌어지고 치부가 완전히 드러났다. 지스카르는 다시 사이로 향유 한 통을 모조리 다 쏟아부었다. 미끈거리는 액이 둔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원치 않게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얼굴에 피가 싹 빠졌다.

“네가 자초했으니 더 이상은 배려하지 않겠다.”

지스카르가 내 다리를 어깨에 걸치며 틈새에 바로 성기를 가져갔다. 아무런 신호 없이 그대로 단숨에 찔러 넣었다.

“크으윽!”

재갈을 꽉 깨물고 끊어질 듯 억눌린 신음을 토했다. 커다란 살덩이가 입구를 찢고 강제로 몸을 꿰뚫었다. 그럼에도 아직 전부 들어가진 않았다.

“그, 그마……!”

재갈 때문에 그만두라는 말 대신 어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때 지스카르가 다시 강하게 밀어 이번엔 끝까지 성기를 쑤셔 박았다.

“아악!!”

“크.”

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지스카르도 낮게 신음을 흘렸다.

“향유를 이렇게 썼는데도…… 저항이 심하군…….”

“으……우윽…….”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 말 대신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공언한 대로 움직임에 배려가 사라져 있었다. 놈이 깊숙이 박힌 성기를 거칠게 입구 부근까지 확 뽑았다.

“……!!”

순간 나는 비명도 못 지르고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뒤틀었다. 안쪽에 박힌 성기를 따라 직장까지 다 뽑혀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성기를 강하게 끝까지 다시 처박았다. 나는 묶인 손으로 아래쪽 침대 시트를 긁으며 발작했다.

간신히 고통을 삼키고 숨을 힘들게 헐떡거렸다. 뒷구멍과 속이 터질 듯 빡빡했다. 한계에 한계까지 확장된 내벽이 강한 압박감을 호소하며 간신히 놈의 것을 물고 있었다. 그런데 남의 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지스카르가 두 번 세 번 속을 쑤셨다.

“아아악! 윽! 아, 흐읏……!”

이런 건 흉기로 구멍을 쑤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참으려 해도 잇새로 비명 비슷한 것이 새어 나왔다. 팔이 뒤로 묶여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허리만 비틀어댔다. 파열할 것 같은 고통, 그보다 큰 수치심에 전신이 극심하게 경련했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 허억……. 제……바, 컥…….”

문득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고통에 허덕이며 흐린 눈으로 간신히 앞을 보았다. 지스카르는 뭔가 탐탁지 않은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식은땀으로 젖은 내 이마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이내 자세를 낮추며 눈썹에 입을 맞췄다. 눈꺼풀 위로도 입을 맞추려 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지스카르는 눈꺼풀 위에 오래 키스했다.

잠시 뒤 지스카르는 몸을 바로 일으켰다.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 않았다. 그는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힘을 빼거라. 긴장하면 더 힘들 것이다.”

씹어 먹을 개자식!

재갈이 없었다면 당장 욕부터 뱉었을 것이다. 이 엿 같은 상황에서 욕 말고 놈에게 해줄 말이 뭐가 있겠는가. 지스카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움직임이 느리고 부드러워졌다.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밀려갔다가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내 몸도 느슨히 아래로 딸려갔다가 위로 밀려 올라왔다.

“우으……! 으윽.”

고통이 확연히 줄었으나 여전히 둔중한 통증이 남아 허리를 울렸다. 나는 어금니를 꽉 사리물며 어렵사리 통증을 견뎠다. 바짝 긴장한 등허리로 식은땀이 배어났다. 하지만 천천히 출입을 몇 번 반복하자 살이 딸려 나오는 느낌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지스카르의 커다란 성기가 신기할 정도로 쑥 들어갔다가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몸이 편해지는데도 뭔가 그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하,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지는 거냐. 인체의 신비를 이따위로 느끼게 된다니.

지스카르는 압박이 줄어드는 만큼 조금씩 빠르게 허리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한쪽 팔로만 몸을 지탱하며 다른 손으로 내 성기를 쥐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스카르가 멋대로 음경을 주물러댔다. 놈이 만지기도 전부터 내 것은 이미 반쯤 발기해 있었다. 손으로 직접적인 자극을 주자 음경이 더욱 단단하게 팽창했다.

“하아……. 흐…….”

고개를 조금 젖혔는데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입김이 뜨거웠다. 나는 어느덧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사내새끼한테 뒤를 내주면서도 앞으로 착실하게 사정감을 느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 내 변화를 알아챘는지, 지스카르는 이참에 나를 더 몰아세우기 위해 음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플 정도로 성기를 강하게 쥐고 위로 쳐올렸다. 수치심에 억지로 사정감을 억누르는데 지스카르의 성기가 내벽을 가르며 콱 처박혔다. 자극에 버티던 나는 바로 자지러지며 허리를 뒤틀었다.

놈이 멋대로 주물럭대고 있는 성기가 뜨거웠다. 구멍 저 안쪽이 불쾌하게 질척거리고 홧홧 열이 올랐다. 전부 다 넘어가도 뒷구멍에서 전해지는 감각만은 정말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벌겋게 붉어지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읏……, 하아……!”

침대 위로 시선을 던지자 어쩐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까 호되게 얻어맞은 뺨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한 방에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당황하고 놀란 통에 잊고 있었던 충격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몸을 안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헉?”

성기를 뒤에 박은 채로 놈의 다리 위에 올라앉게 되자 그 흉물이 더 깊게 틀어박혔다. 마치 내장을 전부 밀어내듯 배 속 깊숙한 곳까지 치밀어 들었다. 끔찍함에 내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지스카르가 바로 내 엉덩이를 쥐고 위로 추어올렸다가 내렸다.

“크흑!”

깊이 꿰뚫리는 격통에 나는 화들짝 허리를 폈다. 그런데 통증 속에 쩌릿한 쾌감이 섞여 있었다. 짧은 자극 뒤에는 아랫배가 찌르르 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거리자 지스카르가 마치 달래는 것처럼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잠깐 시간을 준 뒤 놈이 거칠게 허리를 써서 다시 구멍을 찔러왔다.

“흑! 아……! 으읏……!”

나는 뒤로 묶인 팔에 죽을 듯 힘을 주고, 허리를 있는 대로 세우고 경직시켜 버텼다. 몸이 연이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저릿저릿 사정감이 치밀었다. 결국 간신히 지탱해 왔던 허리가 완전히 무너졌다. 나는 주륵 미끄러져 놈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맨살에 얼굴을 대는 것이 불쾌했다. 하지만 금방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지스카르가 양손을 쓴다고 잠시 놓았던 내 음경을 다시 쥐었다. 꽉 다문 구멍을 연속으로 후벼 파고, 음경까지 같이 쥐어 비틀어 올리자 나는 벌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헐떡댔다. 무섭게 흥분한 성기에서 거짓말처럼 투명한 액이 줄줄 흘렀다. 향유를 들이부은 사타구니가 체액과 뒤섞여 보기 무서울 정도로 번들거렸다.

“하……. 흣……. 읏! 아……!”

나는 잔뜩 움츠리고 계속 버르적댔다. 몸뚱이가 지나치게 긴장하고 예민해져 있었다. 너무 긴장이 되어 놈이 손가락만 대도 깜짝 놀라고 바르르 떨었다.

정말 한계까지 왔다. 집요한 독촉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순 지스카르가 그대로 으스러뜨릴 것처럼 내 몸을 강하게 안았다. 나도 힘껏 몸을 웅크렸다. 한계까지 발기해 있던 성기가 정액을 쏟아냈다. 내가 사정하는 순간 지스카르도 내 몸 안에서 사정을 했다.

“읏……. 흐…….”

사정을 하고도 한참 동안 얼얼한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어 힘들게 신음을 흘렸다. 전신에 힘이 없고 눈앞이 몽롱해졌다. 얻어맞은 얼굴이 유난히 욱신거렸다. 고개를 뒤로 젖혔는데 갑자기 눈앞이 까무룩 감겨들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엉덩이 부근의 묵직한 통증에 나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치욕에 턱이 덜덜 떨렸다.

“감히! 감히 그 빌어먹을 자식이!”

엘 지스카르 파셔. 죽여버리고 말 테다. 반드시 갈아 마셔버릴 테다!

놈에 대한 분노로 숨이 크게 거칠어졌다. 아니, 지스카르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에 대한 분노가 먼저 턱 끝까지 치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루한 노예 신분에 안주하고 있었단 말인가. 거지 같은 노예 숙소에 태평하게 눌러앉은 대가로 지스카르에게 끔찍한 굴욕을 당해야 했다. 놈을 욕할 것도 없다. 노예는 원래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으니까.

내 소유주인 빈첸시오 자작은 개돼지에게도 아량을 베푸는 자였으나 언제든 마음이 바뀌는 순간 이 몸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릴 수 있었다. 주인님이 발닦개가 되라 하면 발을 핥아야 하고, 밤 시중을 들라 하면 알아서 옷을 벗어야 하는 것이 노예다. 정말로 그걸 몰랐다는 거냐.

“레이?”

익숙한 목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한달음에 침대까지 달려왔다.

“레이! 레이! 이제 정신이 드니?”

어머니가 눈물을 가득 담고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익숙한 냄새를 맡자 왠지 분노와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으니까.”

“거짓말! 이렇게 다쳐서……. 이렇게…….”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다친 뺨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현 상황에 대한 분노보다도 어머니를 안심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듯이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면서 말했다.

“한 대 맞아서 얼굴이 조금 부었을 뿐이에요. 별거 아니니 진정하세요.”

어머니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내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안심한 표정을 했다. 사실 노예가 어디서 한두 대 맞고 오는 것 정도야 큰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사이 방에 도착한 아버지도 걱정하지 말라고 어머니의 어깨를 다독였다. 방이 좁아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노예들이 문 근처에 서서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약간 소란이 일었다. 베티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레, 레이……, 너를 찾아온 분이 계시는데…….”

베티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붉은색 머리칼의 기사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지스카르의 친위기사. 어제 나를 붙잡으려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추태를 보인 그놈이다.

“이제야 깼군. 일어나라.”

“…….”

나는 그자의 명령대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기사가 멋대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시 한번 폐하를 모시는 영광을 얻었으니 황공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뭐라고?”

순간 저절로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또 부른다고? 다른 여자들도 많을 텐데 어째서 또 나를?

“언제까지 지체할 셈이지?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기사가 다가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불쾌하게 그 팔을 뿌리쳤다.

“놔라! 내 발로 가겠다!”

“뭐? 아니, 내 살다 살다 네놈처럼 건방진 노예는 처음 보는군.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날뛰는 거지?”

붉은 머리의 기사가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자보다도 근처에 있던 부모님과 노예들이 더 놀랐다.

“레, 레이! 너 기사님께 왜 그래!”

“저 녀석이 또……, 저러다가 진짜 맞아 죽지…….”

“레이! 얼른 잘못했다고 말씀드리렴! 어서! 빨리!”

어머니가 특히 희게 질려서 발을 동동 굴렀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노예들을 가리켰다.

“이걸 봐라. 이게 보통 반응이잖아! 시골구석에서 별 거지 같은 일을 다 겪네.”

그때 다른 친위기사가 숙소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던필, 그만하고 그를 데리고 나와라.”

“하지만 대장님. 저놈 하는 짓 좀 보십쇼. 아오, 열 받아.”

“폐하를 기다리게 만들 셈이냐?”

던필이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기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짜증이 서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따라와!”

나는 던필의 뒤를 따르며 대장이라 불린 기사를 곁눈질로 살폈다. 곧은 자세, 고른 숨소리, 겉으로 보이는 자세만으로도 훌륭한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개 노예를 데려오는 일이라면 저 경박한 기사 놈 하나로도 충분했을 텐데 어째서 친위대장씩이나 되는 자가 이곳에 왔을까.

긴 복도를 걸어서 익숙한 방 앞에 도착했다. 기세 좋게 걸어왔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자 긴장으로 어깨 부근이 괜히 뻐근해졌다. 그사이 던필이 문밖에서 소식을 전하고 황제에게 출입 허가를 받았다.

“들어가.”

던필이 방문을 열어주고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제 같은 일을 또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것을 본 던필이 내 등을 밀었다. 나는 힘에 못 이겨 방 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동요를 숨기고 소파 근처에 서 있는 놈을 노려보았다. 지스카르는 침대를 가리켰다.

“저리 가서 앉아라.”

소파도 있는데 왜 대낮부터 침대로 가야 하지? 내가 인상을 쓴 채 꿈쩍도 하지 않자 지스카르는 친히 다가와 내 팔을 붙들고 침대로 끌고 갔다. 나는 마지못해 놈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지스카르가 가볍게 몸을 떠미는 바람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놈이 내 오른쪽 뺨에 손을 올렸다. 상처를 살피는 것뿐인데도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손 치워!”

전신의 힘을 실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간단히 그것을 낚아챘다.

“다시 묶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굴거라.”

그제야 손목에 시뻘겋게 줄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 허리벨트에 묶일 때 남은 자국이었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얌전히 굴기는커녕 붙잡힌 주먹에 빠드득 힘을 주자 지스카르는 다소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리한 요구였던 모양이군.”

지스카르가 갑자기 내 팔을 뒤로 꺾어 침대에 머리부터 처박았다. 너무 순식간이었던지라, 그게 아니라도 힘의 차이가 너무 커서 나는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 어제랑 똑같이 가죽벨트 같은 것으로 팔목을 결박당했다.

팔을 뒤로 묶은 뒤 지스카르는 나를 안아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내 허리끈을 풀어내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홑겹인 바지는 금세 벗겨져 하반신만 완전히 알몸이 됐다. 지스카르가 나를 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몸은 어떻지? 충분히 향유를 쓰긴 했지만.”

녀석이 내 몸의 어떤 부위를 염려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질색하고 있는 나를 힘으로 쉽게 제압하고 엉덩이 사이로 손을 뻗었다. 뒤를 잠깐 더듬던 손가락이 틈을 비집고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안으로 들어왔다.

“윽! 으으읏!”

툭 찢어지는 느낌. 어딘가 겨우 아물었던 부분이 다시 벌어진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바로 손을 뺐다.

“……안 좋아 보이는군.”

“헉…… 헉…….”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나는 벌써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어중간하게 앉아 있는 나를 아예 자기 무릎까지 끌어와서 앉혔다. 이것만으로도 욕이 나오기 직전인데 놈이 여기서 다리를 잡아 옆으로 벌리려고 했다. 직접 상처를 살펴보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나는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화들짝 몸을 퉁겼다.

“이런 미친!”

간신히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스카르가 내 턱을 거칠게 붙들고 위로 치켜들었다. 놈이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게 하면서 그간 참았던 노기를 드러냈다.

“너는 빈첸시오 자작이 짐에게 진상한 침노다. 네가 노예라면 주인을 두려워할 줄 알고 명령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을 터!!”

“…….”

나는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누가 봐도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내 쪽이었다.

내 안에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기억이 있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만약 잠자리 시중을 들라고 어떤 노예를 들여보냈는데 그놈이 미쳤다느니 죽이겠다느니 하며 난동을 피웠다? 나 같으면 혓바닥부터 자르고 바로 목까지 잘라버렸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여태 나를 그냥 놔두고 있는 저놈이 진짜로 대단하다 싶었다.

지스카르가 턱을 놓아주면서 한숨 비슷한 것을 쉬었다.

“가능하다면 너를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다.”

대단한 줄은 알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가능하다면 놈의 면상에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팔을 묶고 재갈까지 물려서 겁간한 주제에 뭐가 어째?

“짐의 말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너의 도를 넘는 무례를 짐이 계속 용인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네게 주어진 행운이 끝나기 전에 순순히 대답하거라. 너는 누구냐? 누가 너를 가르쳤느냐? 지금 바른대로 말한다면 네게는 아무 죄도 묻지 않겠다.”

지스카르가 본론을 꺼냈다. 나를 다시 불러들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 정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나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일반적인 노예들은 알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전혀 타격을 주진 못했지만 순간의 틈을 노려 공격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의심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고 했을 텐데?”

내가 뻔뻔하게 대꾸하자 지스카르는 침대 협탁 위에 놓인 문서를 가리켰다. 그곳에 나에 대한 모든 기록이 하나부터 열까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너는 빈첸시오 자작이 소유한 남녀 노예에게서 태어났다. 다섯 명의 노예가 네가 태어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더구나. 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예 숙소 근방을 벗어난 적이 없다. 불결한 노예 숙소에는 식기와 옷가지만 널려 있을 뿐 책 한 권 보이질 않았다. 네 주위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스무 명의 노예들만이 있을 뿐이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결코 혼자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틀림없이 많은 교육을 받았다. 대체 누가 노예를 데려다 비밀리에 황제에 대해 가르치고,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을까? 목적이 무엇이지?”

“하하……,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암살 조직의 일원이라도 되는 것 같군.”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위대장이라는 자가 노예 숙소 근방에서 얼쩡거렸던 건 내 뒷조사를 위해서였군.

“가능성은 큰 편이다.”

지스카르가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대답은?”

당연히 답해줄 말 따윈 없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놈의 무릎에 올라앉은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조금 틀었다. 지스카르가 어깨를 강하게 잡아 내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나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뭣! 그만…… 윽…….”

“대답은?”

지스카르가 똑같은 질문을 또 했다. 하, 이런 식으로 모욕을 줘서 답을 듣겠다는 거냐.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내가 몸을 웅크리며 버티자 녀석이 충고랍시고 말했다.

“노예가 노예답지 못하면 고달파질 뿐이다.”

“으…….”

압박이 가해지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성기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를 비틀어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럴수록 지스카르의 손이 사타구니 사이로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바짝 오므린 다리 사이로 낯선 손길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지스카르가 더욱 노골적으로 내 성기를 주물럭거렸다.

잔뜩 발기한 귀두에 묽은 액이 방울방울 맺혔다. 지스카르는 젖은 귀두를 엄지 끝으로 지그시 누르고 문질렀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 으으윽! 머, 멈춰! 그만! 남자 것을 쥐고 주물럭거리는 게 뭐가 좋아! 세상에 반이 여잔데, 그런데 왜……! 네놈, 남색이 취향이었나? 그래?”

밀려드는 자극을 잊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여 보였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는데 지스카르가 대답했다.

“남자를 취한 것은 네가 처음이다.”

“그, 그래서……, 읏, 좋으냐?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셨어? 황손을 보기가 어렵게 생겼으니 엘 파셔의 미래가 심히 걱정이군!”

“이미 다섯 명의 아들과 딸이 있다. 무의미한 걱정이구나.”

비난이랍시고 뱉은 말인데 지스카르가 짜증이 날 만큼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더 따지려다가 신음 소리가 섞여 나올 것만 같아서 그냥 이를 악물었다. 악다문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뜨거워지는군.”

지스카르가 내 것을 주무르면서 말했다. 터질 듯 발기한 음경을 중심으로 다리 사이에 열이 올랐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

“참지 말고 그냥 해라. 편해질 테니.”

“닥치라고! 개자식!”

내가 버럭 욕을 내뱉자 지스카르는 가만히 있더니 기습적으로 거길 확 잡아당겼다.

“……!!”

비명을 지를 뻔하다 간신히 이를 악물었다. 지스카르가 내 중심을 거칠게 비틀어 쥐고 쳐올리면서 날 몰아세웠다. 비틀린 성기가 아프고, 모든 것이 끔찍하게 수치스러웠다. 그럼에도 자극당하는 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성기가 단단히 부풀어 금방이라도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몸을 강하게 안고 있어서 웅크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놈이 팔을 붙들고 몸을 아예 바깥으로 당겼다. 내가 약간 고개를 들자 지스카르가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덮쳤다.

“웁……!”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가 빈틈없이 틀어막고 빨아올렸다. 이어서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까지 밀어 넣으려 했다. 내가 그걸 받아줄 이유가 없다. 와락 분노를 담아 놈의 혀를 깨물려 하자 지스카르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걸로 포기하진 않았다. 지스카르는 입술 대신 내 눈가에 키스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음경을 거칠게 압박하고 잡아당겼다.

“아! 싫……!”

더는 참지 못하고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지스카르의 손 안에 정액을 전부 쏟아냈다. 그 순간의 심정이란! 부끄러움에 그대로 죽어버려도 절대로 이상하지 않다.

나는 지스카르의 어깨에 기대어 몸을 벌벌 떨었다. 아찔한 창피함에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지스카르는 팔을 쓸어내리며 내가 진정하기까지 기다려주었다. 숨을 고르면서 억지로 놈의 팔을 뿌리쳤다. 썩을 놈이, 병 주고 약 주기에도 정도가 있지!

지스카르는 못마땅하게 말했다.

“조금만 순종적으로 굴어도 힘든 일이 없을 터인데. 다시 물으마. 네 배후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

“고집스럽군.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아직 지스카르가 내 것을 쥐고 있었다. 성기를 움켜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윽……! 그……!”

나는 말을 더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아무런 힘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참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는데도 턱 끝이 가늘게 떨린다. 지스카르가 아까처럼 달래듯이 내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성기를 압박하던 손까지 풀어주었다.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나를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정말 그 말처럼 지스카르는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는 일이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침대 시트를 걷어내서 허전한 하반신부터 내 몸 전체를 둘둘 감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솔직히 의아했다. 목덜미까지 완전히 시트로 덮어놓고 지스카르는 사람을 불러들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친위기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가져왔느냐?”

“예.”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친위기사가 무엇을 내미는지 볼 수 없었다. 절그럭 하는 금속음이 들렸다. 지스카르가 뭔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때야 볼 수 있었다. 철제 족쇄였다.

지스카르가 족쇄를 채우기 위해 내 발목을 잡고 몸을 낮췄다.

“폐, 폐하. 제가 하겠습니다.”

내 앞에 허리를 굽힌 모양새라 친위기사가 급히 외쳤다. 지스카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수 족쇄를 채웠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을 들으며 나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팔을 결박당한 것으로 부족해서 다리까지 묶인 건가.

흙 묻은 마메 뿌리로도 만족한다며 웃었지. 정말로 대책 없고 멍청하다. 전생의 지위를 되찾진 못해도 최소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정도는 해야 했지 않나. 대체 그 시궁창 같은 곳이 뭐가 좋다고.

지스카르는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고 친위기사를 바로 내보냈다. 족쇄를 채운 다음엔 감옥에 처박는 것이 수순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좀 의외였다.

다시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끝까지 짐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작정인가.”

“아직도 포기 못 했나 보지?”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비꼬듯이 대답했다.

“……네 비밀을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네 어미나 아비, 그 외의 노예들을 심문할 것이다. 네 덕분에 빈첸시오 성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순간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놈이 원한다면, 막을 수 없다.

그대로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싹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나는 답을 하고 싶어도 답할 수가 없었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누가 믿어주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스트라스의 황태자였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몰매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스카르가 손을 뻗어서 사색이 된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뿌리칠 생각조차 못 한 채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해 갔다. 어떻게 하지? 무엇을 하면 되지? 나는 왜 이런 일에 이렇게 동요하지? 그따위 노예들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

지스카르는 내 뺨에 손을 대고 나를 지켜보았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한참 만에 떨어졌다.

“일단은 쉬거라.”

이건 당분간이나마 내 사정을 봐주어 부모님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간신히 긴장을 풀고 씁쓸하게 자조했다. 지스카르의 너그러운 처사에 실로 감사한다. 정말로 관대한 놈이 아닌가.

몸이 너무 노곤해서 체면 불고하고 침대에 픽 엎드려 누웠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 * *

다음 날 거의 정오가 다 되어서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지스카르의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반라가 되어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보송보송한 것이 목욕까지 시킨 것 같았다.

물속에 푹 담갔다가 꺼낼 때까지도 계속 곯아떨어져 있었다니, 실은 잠든 게 아니고 기절이라도 했었나?

“아, 팔이…….”

뒤늦게 팔이 자유로워진 것을 깨달았다. 손목에 거미줄 같은 상처가 나 있긴 하지만. 그러나 발목의 족쇄는 그대로 매어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조금 걸으면서 사슬의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걷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넉넉한 길이. 하지만 뛰기는 힘든 정도였다.

이걸 단 상태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족쇄를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덜컹!

그때 방문이 열리고 친위대장이 들어왔다. 실력이 꽤 괜찮은 듯해서 눈여겨 봐두었던 자였는데 오늘 보니 얼굴도 굉장히 잘생긴 편이었다. 나는 번듯한 미남자를 올려다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아마도 나의 건방진 말투 때문인 듯 친위대장이 잘생긴 얼굴을 굳혔다.

“따라오너라.”

“어디로?”

“황성으로 돌아간다. 너도 동행하게 될 것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노예의 질문에 친위대장은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마 귀환 시기가 된 것 같았다. 나 같은 수상한 놈을 그냥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으니 끌고 가겠다는 것이고.

여기서…… 떠나게 되나? 또 이런 하찮은 걸로 고민하는군.

길게 한숨을 토하며 걸음을 옮겼다. 발목의 족쇄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무척 신경에 거슬렸으나 꾹 참았다. 나와 보니 이미 모든 일행이 떠날 채비를 마친 듯했다. 총 백여 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네 줄로 열을 맞춰 대기 중이었는데 그중에서 던필이라는 눈에 익은 기사도 발견했다. 그는 남들 몰래 입을 비죽이며 날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척 들었다.

저건 또 뭐야? 저게 진짜 황제의 친위기사가 맞긴 한 건가?

대열 끝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있었다. 화려함으로 볼 때 황제가 사용하는 물건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어째 친위대장이 나를 데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나는 당장 발을 끌며 걸음을 늦추었다.

“어째서 이리로 가는 거지? 노예는 짐마차에 싣고 가는 게 보통인데.”

“폐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들……!! 그냥 짐마차에 찌그러져 있을 테니 이것 놔.”

친위대장은 내 말을 무시하고 강제로 마차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지스카르는 이미 마차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무슨 서류를 훑어보고 있다가 내가 안으로 들어오자 시선도 안 주고 짧게 명령했다.

“앉아라.”

“…….”

좁은 마차 안에서 어중간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도 꼴이 우스워 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있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떠나는 것이다. 어머니, 눈물을 터뜨리시는 건 아닐까. 아버지는 걱정하실까. 원래부터 노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여기저기로 팔려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스카르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놈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때때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보란 듯이 그의 시선을 맞받아주었다. 어쩌라는 거냐?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뭐라도 나오는가 보지?

잠시 뒤 지스카르는 다시 서류에 눈을 내렸다. 사륵사륵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턱을 괴었다. 그리고 빈첸시오 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밖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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