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43)

10.

“뛰지 마! 벌레들은 진동을 느끼고 공격한다!”

“우아악!!”

다음 날도 마물 사냥은 계속되었다. 며칠 더 깊은 곳까지 행군하자 트윈헤드 오크 족의 부락이 나타났다. 사냥은 지금까지 그랬듯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난데없이 사람 몸뚱이만 한 벌레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이 벌레들은 사전조사를 할 땐 확인된 바가 없는 블러드웜이라는 이름의 몬스터였다. 조사에 구멍이 있을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습당한 것치고 피해가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해가 전무할 수는 없다. 사방에서 부상자가 하나둘씩 속출하고 있었다.

“블러드웜의 사체는 오크들의 식량이 됩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은 이 지역에 오크 부족이 번성했던 것은 그 탓입니다.”

나는 웃으며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말했다.

옆을 쳐다보았다. 지스카르가 바로 곁에서 표정 없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계속 보고만 있을 생각이십니까? 폐하께서 나서지 않으면 피해가 커질 것입니다.”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지스카르가 그제야 움직였다. 그런데 전투 중인 기사들 쪽으로 가지 않고 갑자기 내 등 뒤로 가며 검을 뽑았다.

순간 사방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다섯 마리의 블러드웜이 길고 징그러운 몸뚱이로 하늘까지 전부 가렸다. 블러드웜은 불시에 발밑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점 때문에 아주 위험한 몬스터로 분류되고 있었다.

“폐하!!”

근처의 친위기사들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캬아아아아아!

날카로운 포효. 블러드웜이 제 영역을 침범한 놈들을 찢어발기기 위해 칼날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돋은 아가리를 앞다퉈 들이밀었다.

지스카르는 낮게 숨을 토했다. 옅게 검날을 덮고 있던 백색 오라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는 몸을 틀면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앗!!

그것은 이미 검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성난 듯 휘황한 오라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다섯 마리의 블러드웜을 가로로 썩둑 쪼갰다.

번쩍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친위기사들이 칼을 들다 말고 어중간하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쿵. 쿠웅!!

검에 잘린 블러드웜의 사체가 뒤늦게 하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소음을 내며 내 발 바로 앞에 뭉텅 잘려나간 블러드웜의 대가리가 처박혔다.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지스카르가 한쪽 발로 블러드웜을 밟고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놈을 마주 응시했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내 턱을 잡고 예고도 없이 입술을 덮쳤다.

키스는 처음부터 사나웠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아픔에 벌어진 입 속으로 마음대로 혀를 집어넣고 헤집었다. 입 안에 침이 고여들자 턱 끝을 당겨 강하게 빨아당겼다. 입으로 잠깐 호흡한 뒤 지스카르는 다시 격렬히 입 맞추었다.

한참 후에야 지스카르는 입술을 떼어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친위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크리스티안. 감시와 호위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라. 일전과 같은 실수는 용납지 않을 것이다.”

“예!”

크리스티안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스카르는 이어서 호명했다.

“럼포드 백작.”

“예, 맡겨주십시오.”

일전의 사고는 마법사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데 충분했다. 계곡에 떨어질 때 도움 받은 것을 인연으로 럼포드 백작이 나의 개인 호위 역을 맡았다. 원래 지휘관까지 했던 이에게 일개 남첩의 호위나 하라는 명령이 불쾌할 수도 있을 텐데 백작은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그리하겠다고 말했다.

지스카르는 가죽 망토를 거칠게 젖히고 돌아섰다. 친위기사 중 반이 나를 호위하기 위해 남고, 남은 반은 지스카르의 뒤를 따랐다.

지스카르가 저만치 멀어지자 럼포드 백작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하하! 정말 폐하의 총애가 대단하군. 원래는 사람들 앞에서 낯 뜨거운 행동을 하는 분이 아니신데 말이네. 내게만 살짝 귀띔해 주지 않겠나? 어젯밤에 뭘 해서 폐하의 마음을 녹였는지…….”

“어젯밤에 혹시 폐하랑 싸웠냐?”

그때 던필이 대뜸 럼포드 백작의 앞을 가로막고 서면서 물었다. 당황한 럼포드 백작이 던필의 커다란 등 뒤에서 얼쩡거렸다. 던필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마정석에 손을 대려고 할까 봐 마법사인 럼포드 백작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던필 경,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싸우다니.”

럼포드 백작이 멀찍이서 말도 안 된다면서 한 소리 했다. 나도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던필은 내 반응을 보고 손을 딱 퉁겼다.

“역시 싸웠군! 죽을 뻔하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자마자. 둘 다 지기 싫어하는 데다 고집은 또 얼마나 센지.”

나는 던필을 무시하고 다시 상황을 살폈다.

과연 소드 마스터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했다. 지스카르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그의 영향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기사들은 어느새 전열을 갖추고 블러드웜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홀로 희미하게 웃었다.

“어딜 가지?”

내가 한 걸음 내딛자 크리스티안이 물었다.

“블러드웜은 동족의 피가 스며든 땅을 꺼립니다. 좀 역겹더라도 사체가 많은 곳에서 대기하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제지는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블러드웜을 도륙하고 떠난 장소에 멈춰 섰다. 스무 마리나 되는 벌레들의 사체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바로 아래 땅은 물렀고 충분히 피로 젖어 있었다. 블러드웜에게 블러드웜의 사체는 기피물이다. 하지만 ‘그놈’에게 블러드웜의 사체는 탐스러운 먹잇감이다. 이 정도면 ‘놈’을 꾀어내기 위한 준비는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하고 고개를 돌려 럼포드 백작을 보았다.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 럼포드 백작은 나를 마주 보며 마정석이 박힌 스태프를 앞으로 슥 내밀었다. 자신이 아니라 그 스태프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정석에 정말로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부정은 않겠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일 테고 말이다. 내 대답을 듣고 럼포드 백작은 더욱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대체 마정석 가지고 뭐 하려고? 아니, 정말로 궁금한 것은 황제 폐하의 의도구나. 어째서 네가 마정석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시는 거지?”

럼포드 백작은 내 호위 역을 맡으면서 절대 마정석을 건네주지 말라고 지스카르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들은 바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째서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티안 경.”

갑자기 호명되자 크리스티안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뜸을 들였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솔직하게 생각하던 바를 털어놓았다.

“마탑 사건이 있었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너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 지금까지 네가 보여준 능력을 감안한다면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폐하께서 마정석의 소지를 금한 것은 그 탓이 아닌가?”

“제가 마법사인 것이 큰 문제입니까?”

나는 반문했다.

대답이 없었다. 크리스티안이나 친위기사들, 럼포드 백작까지 모두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애써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제법 괜찮은 수준의 검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제가 검을 쥐는 것을 크게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검술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정석은? 제가 마법을 사용해 봤자, 마정석을 손에 쥐어봤자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다고 그렇게 경계를 한단 말입니까?”

“…….”

나는 잠시 크리스티안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는 끝까지 해답의 실마리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긴 이제는 아무래도 관계없는 일이었다.

발밑에서 미약하게 진동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번 럼포드 백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친위기사들의 감시가 삼엄한 이때 그의 마정석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걸겠다.

드드드드.

“뭐, 뭐지?”

“블러드웜?”

기사들이 검을 뽑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때 던필이 크게 외쳤다.

“아니, 훨씬 크다!!”

드디어 도착했다. ‘그놈’이 블러드웜의 피 냄새를 맡고.

순간 바닥이 움푹 꺼졌다가 다시 치솟았다. 거무죽죽한 구렁이 같은 것이 블러드웜의 사체를 한입에 삼키고 허공 위로 튀어나왔다.

“스토어웜! 어째서 이놈이!”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스토어웜은 전설 속의 생물인 드래곤의 아종이라 분류될 만큼 대단히 강력한 마물이다. 사실 드래곤을 들먹이기엔 놈은 날개도 없고 발도 없으며 지능은 오크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20미터의 거대한 몸체를 가지고 있으며 드래곤처럼 강력한 산성 브레스를 뿜을 줄 알았다.

어째서 놈이 이런 곳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스토어웜은 블러드웜을 먹이로 삼지만 황야 근처에 출몰하지,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서식하는 마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계곡물에서 빠져나와 숲을 헤매다가 우연히 목격했을 뿐이다. 스토어웜이 블러드웜을 집어삼키고 땅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숲에서 그 광경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이 마물들을 이용해 마정석을 손에 넣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전조사에서 블러드웜이 서식한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놈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면 마물 사냥에 약간 차질이 생길 것이다.

블러드웜을 제압하기 위해 지스카르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놈의 부재를 틈타 블러드웜의 사체를 미끼로 드래곤의 아종이라 불리는 스토어웜을 꾀어낸다. 스토어웜을 상대하느라 기사들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순간, 그 빈틈을 잘 활용한다면 럼포드 백작에게서 마정석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리 만들고 말겠다.

계곡물에 빠진 뒤 도주의 기회를 얻고도 제 발로 돌아온 것은 족쇄를 단 채 빈손으로 도망쳐 봐야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시 내게는 마정석이 필요했다. 힘이 필요했다. 충분한 힘을 손에 넣고 그 즉시 엘 파셔를 뜨는 것, 그것이 내 계획의 골자다.

“레이, 괜찮은가?”

크리스티안이 바로 내 신변을 걱정하며 다가왔다. 순간 나는 다급히 그의 등 뒤를 가리켰다.

“뒤쪽!”

스토어웜이 다시 지상으로 튀어나오며 몸을 뒤틀었다. 놈이 딱히 우리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덮쳐 오는 몸뚱이가 너무 거대해서 이대로는 다들 깔려 죽을 판이었다. 사람들이 퍼렇게 질린다. 나도 살짝 이를 사리물었다. 계획이 있다며 스토어웜을 끌어들였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놈의 몸통에 깔려 죽으면 얼마나 그 꼴이 우습겠는가.

“다들 물러서!”

그때 크리스티안이 크게 소리치며 스토어웜의 집채만 한 몸뚱이를 막아섰다. 그가 든 검에서 휘황한 백색 빛이 터져 나왔다. 지스카르의 그것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오라 소드였다.

스토어웜의 몸뚱이에 크리스티안의 오라 소드가 반 이상 박혔다. 크리스티안은 그 상태로 1미터가량이나 뒤로 밀려났으나 끝내 스토어웜의 움직임을 막는 데 성공했다. 몸집의 차이가 이만큼이나 큰데 잘도 혼자 스토어웜을 저지했다.

그때 스토어웜이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반대로 휘둘렀다. 오라 소드가 몸통에 깊게 박힌 채였기에 크리스티안은 찰나에 놈의 꼬리에 휘말렸다.

“그거 내려놔!”

던필이 소리치면서 검에 오라를 쏟아부어 스토어웜을 겨냥하여 집어 던졌다. 오라 소드가 정확히 스토어웜의 턱 아래에 틀어박혔다. 스토어웜은 꼬리를 휘두르길 멈추고 머리를 뒤틀었다. 덕분에 크리스티안은 중간에 튕겨 나왔다.

그는 저 멀리에서 바닥을 몇 번 구르다 금방 땅을 짚고 일어났다. 무사한 것 같았다. 이 정도에 죽을 정도로 약골이라면 머릿속에 기억해 둘 가치도 없다.

우오오오오오오!!

그때 두어 번 몸을 뒤틀던 스토어웜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산성 브레스. 그 한 방으로 이 일대의 모든 생명체는 잿더미가 될 터였다.

“마법은 아직이오?”

아까부터 럼포드 백작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피해를 입히자면 검보다는 마법을 쓰는 것이 확실했다.

공기 중에 잔뜩 압축된 붉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2중 영창으로 화염 마법에 증폭 마법을 걸어 파괴력을 올린 상태였다. 럼포드 백작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정신을 집중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증폭 마법을 사용했다. 3중 영창. 주먹만 했던 붉은 기운이 단숨에 열 배 이상 부풀어 올랐다.

콰콰콰광!!

럼포드 백작이 만든 거대한 불덩이가 정확히 스토어웜의 오른쪽 눈에 직격했다. 스토어웜의 머리통 절반이 부서졌고, 브레스를 만들기 위해 들이켜던 숨도 흐트러졌다.

친위기사들도, 럼포드 백작도 모두 대단히 유능했다. 그들은 바쁘게 싸우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스토어웜…….”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순간 거의 숨통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던 스토어웜이 하나 남은 눈을 희번덕이며 부서진 머리통을 바로 들었다.

샤아아아아아.

놈은 뱀 같은 소리를 내며 럼포드 백작을 향해 꼬리를 힘껏 휘둘렀다. 친위기사들이 유일한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백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처럼 거대한 몸체를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그들로서는 불가능했다. 가까스로 궤도를 틀었으나, 한 사람이 꼬리에 깔렸다가 멀리 튕겨 나가 바닥에 처박혔다.

죽었나? 아니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정신 차려!! 아직 브레스가 흩어지지 않았다!”

저쪽에서 크리스티안이 달려오며 외쳤다. 스토어웜이 좀 전에 들이켜다가 말았던 숨을 다시 머금고 있었다. 순식간에 브레스 준비가 끝났다.

“안 돼!”

“럼포드 백작! 방어 마법!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선 모든 자가 죽음의 끝자락을 조금이나마 엿보았다. 막지 못하면 정말로 죽는다. 그 순간만큼은 크리스티안도 던필도, 모든 친위기사가 스토어웜을 저지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비로소 움직였다. 누구도 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으으, 빨리빨리.”

기사들 덕택에 살아남은 럼포드 백작은 급하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호 마법 기반에 증폭 마법을 더했다. 그는 시간이 모자라서 2중 영창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스토어웜의 브레스를 막기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스토어웜의 입에서 브레스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럼포드 백작이 만들어낸 투명한 보호 장막이 머리 위에 펼쳐졌다. 방어용 마법이 시커먼 산성 브레스를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장막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내, 내가 막겠소! 모두 피하시오!”

럼포드 백작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소리 질렀다. 장막을 펼쳐 놓은 채 기사들과 같이 피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백작이 발을 떼는 순간 집중력은 흐트러지고 보호 장막도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질 것이다. 그는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는 동안 정신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세 가지 주문을 동시에 사용하는 3중 영창의 실체는 간단하다. 마법사가 고도의 훈련을 거쳐 세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3중 영창을 하면서 달리는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면?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4중 영창을 하라는 말과도 같았다.

“훌륭한 자세로군.”

나는 럼포드 백작의 희생정신을 치하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럼포드 백작의 마정석을 움켜쥐었다.

우우우웅!

나의 손 안에서 마정석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4중 영창으로 숨을 한 번 들이켜는 짧은 시간에 대마법이 완성되었다. 순간 하늘이 열렸다. 거대한 빛줄기가 스토어웜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직격하는 순간 땅바닥까지 뒤흔들렸다.

럼포드 백작의 보호막은 완전히 부서져 사라졌다. 그러나 브레스가 사람들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스토어웜이 저 위에서 폭포수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다. 머리통은 형체도 없이 으그러졌고 몸통만 남아 있었다.

죽은 몸뚱이가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기우뚱 옆으로 무너져 내렸다. 똬리를 틀었던 꼬리가 풀리면서 일행의 머리 위를 덮쳤다. 나는 럼포드 백작의 손에서 마정석을 완전히 빼앗아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집채만 한 꼬리는 간단히 튕겨 나갔다.

쿠웅!!

스토어웜은 완전히 쓰러졌다. 워낙 덩치가 커서 엄청난 소음이 있었다. 그리고 고요가 찾아왔다.

“레이…….”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은 아직 영문을 몰라서 나를 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스태프를 부러뜨려 마정석만 손에 쥐었다. 서늘한 촉감.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마정석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손 안에서 매우 익숙한 감각을 선사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나는 마정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드디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참지 않고 웃었다. 손바닥에서 팔을 타고 심장까지 전율이 강타했다. 참을 수 없는 유쾌함에 커다랗게 웃어 젖혔다.

“후후……후하하하하하하!!”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마침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지스카르!

그는 얕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스토어웜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뜀박질을 하느라 숨이 거친 것은 분명히 아니다.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지스카르를 똑바로 보면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쩌엉!

발목에 찬 족쇄에 금이 갔다. 다시 한번 귀를 찡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드디어 족쇄가 산산조각이 났다. 나를 옭아매던 모든 것과 함께 바닥에 흩어졌다. 발목부터 온몸이 지독하게 가벼웠다. 나는 가차 없이 지스카르에게서 등을 돌렸다.

“거기 멈춰!”

지스카르가 소리쳤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

“마정석을 내려놔!”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숨을 조금 들이마셨고 다음 순간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발밑에서 바람이 치솟았다. 모래와 나뭇가지 따위가 끌려 올라와 사납게 휘몰아쳤다. 목구멍 저 아래서부터 들끓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담아, 나는 노성을 터뜨렸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지스카르는 검을 뽑아 나를 가리켰다.

“그에게서 마정석을 빼앗아라! 지금 당장!”

모든 이가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으나 어느새 기계적으로 황제의 명령에 복종했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포위를 시작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즉시 마법 시동어를 말했다.

“온.”

우우웅!

마정석이 제각기 다른 네 개의 소리를 냈다. 왼팔을 중심으로 여러 가닥의 얼음 실이 나선으로 회전했다. 한 번 증폭되면서 회전이 빨라졌고, 두 번, 세 번 더 위력이 더해져 회오리의 크기가 수백 배 이상 커졌다. 왼팔이 조금 뻐근할 정도로 묵직한 기운이 모였다.

“주, 주문이…… 말이 안 돼. 진짜로 주문이 네 개잖아……?”

럼포드 백작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망연히 중얼거렸다. 나는 기꺼이 그 경악성을 만끽했다. 다중 영창은 실로 멋진 것이다.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다중 영창이 가능하면 어중간한 위력의 마법을 거듭 강화함으로써 단시간에 대마법을 구현할 수 있다.

갑옷을 겨우 뚫던 마법이 나무기둥을 부수는 마법으로 변하며, 다음 단계엔 바윗덩어리를 박살 내는 마법으로 변한다. 4중 영창에 다다르면 이 근방의 숲을 초토화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높이 우러러 칭송하는 것이다.

“이 몸을 막아보시겠다? 어디 한번 막아보시지.”

왼팔을 던지듯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순간 손아귀의 얼음 회오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폐하!!”

“안 돼!!”

지스카르는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혼자 피하는 것이야 쉽지만 그랬다간 직선거리의 부하 기사들이 몰살당할 판국이다.

지스카르는 손에 힘을 더하고 검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오라 소드가 폭발하듯 엄청난 양의 빛을 발했다. 소드 마스터의 검이 자를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만들어낸 마법이 지스카르의 오라 소드에 찢어지고 있었다. 검에 막혀 궤도가 뒤틀린 마법이 산등성이 위로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지렁이 같은 흔적을 남겼다.

쿠콰콰앙!!

쿠구구궁.

굉장한 소음. 딱 거기까지만 확인했다.

지스카르의 발을 묶어놓고 나는 즉시 뒤돌아서 달렸다. 포위망이 허술한 쪽을 노린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마법사가 잔뜩 포진하고 있는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헉?”

“마, 막아야……!”

마법사들은 제대로 대처를 못 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놀라고 당황한 부류가 다름 아닌 마법사였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고 칭송받는 자도 현재 3중 영창이 한계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방금 두 눈으로 내가 4중 영창을 하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4중 영창이 가능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낱 노예에 불과한 놈이 그걸 해냈다.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지휘관인 마법사가 서둘러 혼란을 털고 소리쳤다.

“당황하지 마라! 저렇게 움직이면서 중복 영창하는 건 불가능해!”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해 준다면 나로선 정말 감사할 일이다. 나는 마법사들을 노리면서 일단 정면의 방어에 치중했다.

“온.”

우우우웅!

마정석이 두 가지 음역을 내면서 진동했다. 강화된 반투명한 막이 파라락 펼쳐졌고 무수히 쏟아지는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했다.

과연 엘 파셔의 정예 마법사, 공격 패턴을 달리하는 자도 있었다. 나의 좌측으로 뛰어간 마법사가 바늘 같은 얼음조각을 쏘아 보냈다. 나는 힐끗 뒤를 노려보았다. 남은 주문으로 짧은 시간에 작은 화염구를 다수 구현했다. 화염 마법과 빙계 마법은 서로 맞부딪힌 뒤 상쇄되어 사라졌다.

세 개의 주문을 동원하면서 전속력으로 돌진해 단숨에 마법사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그러고도 주문은 아직 남아 있었다.

콰즈즈즈즉!!

“으아아악!! 이런 건 있을 수 없어!”

네 번째 주문으로 왼손에서 빛을 뽑아내어 마법사들의 보호막을 찢어발기자 당황하지 말라고 독려하던 지휘관 마법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즉시 그자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방어에 할애한 마법을 거두어 신체를 순간적으로 강화하는 주문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신물을 주르륵 토해내며 마정석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허공에서 마정석을 낚아챘다. 그리고 옆에서 어어 하며 도망치려고 하는 마법사를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

근접한 상태에서 마법사를 제압하는 것은 코 푸는 것만큼 쉬웠다. 스무 명의 마법사들에게서 마정석을 전부 빼앗았다. 일련의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후우!”

나는 기분 좋게 깊은숨을 내쉬면서 돌아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기분이 별로인 모양이다. 입을 추하게 벌리고 완전히 경직되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너는…… 너는 대체……!!”

바닥에서 뒹굴던 마법사가 끄르륵대는 음성으로 물었다. 친절하게 대답해 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안 좋았다. 나는 가볍게 몸을 긴장시켰다. 마법을 완전히 걷어내고 지스카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 안에서 오라가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극도로 가라앉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마정석을 버려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생각하느냐?”

럼포드 백작에게서 빼앗은 마정석을 바닥에 툭 던졌다. 강력한 마법을 연이어 사용한 탓에 마정석 내의 마력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다. 마력의 고갈.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의 마정석을 빼앗으면서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스태프나 장식은 모조리 부수고 손 안에 마정석만 남겼다. 나는 그것을 양쪽 소매 안에 나누어 집어넣고 매듭을 지었다. 간단히 조치를 취하면서 이야기했다.

“백 명의 수하만 데리고 오천 명의 적을 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기 직전인 공성무기 하나만 들고 천혜의 요새를 공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몇 안 되는 병력 사이에서 나 혼자 몸만 빼내면 끝날 일.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로군.”

“컥!!”

도둑고양이처럼 뒤에서 접근하던 기사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고, 그의 검을 빼앗았다. 마정석에 검까지 수중에 잘 챙겨 넣었다. 지스카르는 노성을 터뜨렸다.

“전부 내려놔라! 당장!”

“너는 더 이상 내게 명령할 수 없다……!”

나는 이를 으득 갈며 다시 움직였다. 적 기사의 많고 적음은 더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그냥 일직선으로 모조리 돌파할 뿐이다.

앞을 가로막는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근력 강화. 나는 더 이상 진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있었다.

“괴, 괴물 같은 놈이!”

몇 번 내 검을 막아낸 기사가 창백해져서 외쳤다. 근력 강화는 둘째치고, 내 검술이 자신만큼 강하다는 데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 특기는 이딴 날붙이나 쥐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위로 불의 창을, 얼음의 화살을,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간신히 검으로 방어 중이던 기사는 망연히 마법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모든 마법을 한꺼번에 난사하면서 훌쩍 기사를 뛰어넘었다.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베고, 찌르고, 막히면 즉시 불덩이를 날렸다. 기습적으로 찔러오는 공격은 방어 마법이 가로막았다. 수십 명의 정예 기사들이 단 한 사람을 막지 못하고 바람 앞의 낙엽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포위망을 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방식이었기에 기사들에게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추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검은 인영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불쑥 튀어나왔다.

“레이!!”

지스카르가 목에 핏대를 올리고 소리 질렀다. 그게 아주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입꼬리가 옆으로 당겨 올라갔다. 짜증인가? 아니면 지금 웃고 있나? 그래, 나는 웃고 있다. 다시 한번 온몸에 전율이 일고 있었다.

“상대해 주마……!”

네놈이 언제까지고 나를 밟고 내려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것을 지금 가르쳐 주겠다.

“온!”

처음부터 네 개의 주문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첫 번째 주문에 빛무리가 응축해 모여들었다. 일순 눈을 감아야 할 만큼 강렬한 광선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효과가 요란했던 것치고 지스카르는 너무 간단하게 공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머리를 노리는 불덩이는 피하고, 우측의 공격은 다시 오라로 베었다.

“이건 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지스카르가 마법을 전부 무효화시키고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주문이 완성되고 있었다. 3미터에 달하는 바람 칼날. 나는 일부러 방어할 수 없도록 시간 차를 주고 하나씩 교차해 휘둘렀다.

“이거나 먹어!”

하지만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오라 소드가 찰나의 순간 5미터까지 늘어졌다. 한 번 휘두른 것으로 두 개의 바람이 두 동강 났다.

닥치는 대로 모조리 베어버리고 지스카르는 단숨에 들이닥쳤다. 방금 폭발적인 힘을 내느라 오라 소드는 잠시 기세가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일반 강철 검만 들었어도 넘칠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력을 보여준다.

나는 운용 가능한 주문을 최대한 회수하면서 검을 들어 지스카르의 공격을 막았다.

캉!!

“으으윽.”

일순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법으로 근력을 강화 중이었지만 그것으론 지스카르의 엄청난 힘을 버티기에 한참 모자랐다. 지스카르가 대치하고 있는 검 사이로 나를 노려보았다.

“포기해라. 접근전에서 소드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스카르의 오라가 다시금 기름을 부은 것처럼 휘황하게 피어올랐다. 쩌저적 하며 내가 쥔 검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이 박살 나기 직전 나는 입꼬리를 올려 픽 웃었다. 지스카르가 내 표정에 의문을 느꼈다.

부웅!

순간 지스카르는 크게 허공에다 칼질을 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바로 눈앞에서 사라졌고 다음 순간 지스카르의 등 뒤에 섰다. 아주 짧은 거리지만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마법이다. 나는 놈의 뒤를 점거하는 즉시 팔을 뻗었다.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모였다.

“네놈 수준이야 뻔하다. 제자리에 못 박혀 인상을 찡그리는 마법사밖에 본 적이 없겠지.”

마법사는 다중영창을 하는 동안은 꼼짝도 못 한다. 언제 이런 식으로 마법을 이용해 이동하고 동시에 다른 마법으로 공격하는 마법사를 보았겠는가.

과연 지스카르는 허를 찔려서 뒤늦게 뒤를 보았다. 놈이 대처하기도 전에 등 위로 잔뜩 압축된 불덩이가 폭발했다.

콰앙!!

“큭!”

지스카르는 간발의 차로 몸을 틀어서 피했다. 그러나 검처럼 타격 범위가 좁은 공격이 아니다. 지스카르는 폭발에 휘말려 오른쪽 어깨에 화상을 입었다.

“폐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사방에서 기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쪽의 움직임을 따라올 수도 없는 잔챙이는 아무래도 좋다. 검지를 꼽아 하늘을 가리켰다. 어깨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나던 지스카르가 그때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 작게 압축된 공기가 잔뜩 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끝도 없이 수가 추가되는 중이었다. 한참 이전부터 주문 두 개를 할애해 눈 깜빡할 순간 완성할 수 있는 간단한 공격 마법을 무한정 구현하고 있었다. 직격당해 봐야 주먹으로 얻어맞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시한 주문이라도 수십 발 이상을 맞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이를 갈았다.

“몬스터나 때려잡고 한가롭게 살던 애송이 주제에……!”

바람이 일었다. 허공에 띄워둔 압축탄이 한꺼번에 비처럼 쏟아졌다. 이 마법으로 패색이 짙었던 전투를 단숨에 역전시킨 일이 열을 넘는다.

“이 몸에게 충고라니 백만 년은 일러!!”

집중포화.

지스카르는 급히 땅을 박차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괜히 접근했던 애꿎은 기사들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도 이 모든 마법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바닥에 검을 힘껏 내리꽂았다. 오라가 폭사하며 마치 방어 마법을 펼친 것처럼 광범위한 공격을 막아냈다. 그 광경에 나는 흐음 콧소리를 냈다. 저런 것도 가능한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은 감탄일랑 뒤로하고, 나는 과감하게 지스카르의 공격 범위 안으로 뛰어들어 어깨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즉시 땅에 박힌 검을 뽑아서 꺾어 들고 내 공격을 막았다. 못 막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반응속도였다.

나는 잠깐 동안만 검으로 대치하다 즉시 빠져나왔다. 그사이에 자그마한 공기 탄환이 다시 머리 위를 잔뜩 메우고 있었다. 백 개? 아니 이백 개? 한 개의 주문으로 근력을 강화하면서 검으로 지스카르를 공격하고, 남은 세 개의 주문을 쉴 새 없이 가동하여 수 분 만에 또다시 엄청난 수의 마법을 완성해 냈다.

“이깟 잔재주!”

지스카르가 같은 방식의 마법을 보고 소리쳤다.

“철 쪼가리나 휘두르는 깡통 따위가!”

나도 핏대를 세우고 소리 질렀다.

쿠구구구궁.

공기 탄환 수백 발이 바닥을 강타하며 지진이 일어난 듯 대지가 흔들렸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뒤섞였다. 나는 바람을 일으켜 다리에 휘감고 즉시 뒤로 몸을 빼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리에서 지스카르가 튀어나왔다. 놈이 쥐고 있는 보검이 바닥에 채 닿지도 않았는데 갈퀴가 지나간 것처럼 땅바닥이 깊이 패었다.

“레이!!”

지스카르가 전력으로 내 뒤를 쫓았다. 두 다리로 그냥 뛰어서는 당연히 따라잡힌다. 나는 바람을 타고 반쯤 날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돌풍을 일으켜 바닥에서 한 바퀴 미끄러지듯 돌며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고 돌아섰다.

간단한 응용 같지만 이 세상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급선회다. 몸이 재빠른 기사들은 애초에 마법을 쓰지 못하고, 마법사는 마법을 쓰면서 급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에도 지스카르는 대처가 늦었다.

나는 지체 없이 전방으로 두 개의 주문을 쏟아부었다. 눈앞에서 모였던 사람 머리통만 한 바람이 삽시간에 수십 미터 크기로 거대해졌다. 거대한 회오리가 지스카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쿠웅!

콰콰콰쾅!

귀청을 찢을 듯 굉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지스카르는 분명히 방어 동작에 들어가는 것이 늦었다. 절대로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스카르는 이번에도 막아냈다.

그러나 오라 소드를 앞세우고 간신히 마법을 버텨낸 것일 뿐이다. 이전처럼 단칼에 두 동강 내지 못한 것은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그에 반해서 내겐 아직 주문이 두 개나 더 남아 있었다. 지스카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두 눈에서 동요를 보았다.

평생 동안 수십 개 이상의 전장을 정복해 왔다. 네 개의 주문을 초 단위로 끌어와서 위력적이거나 변칙적인 마법을 거의 무한정으로 쏟아붓고, 그 와중에 기사들과 똑같이 검을 휘두르며 심지어 몇 배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몸 앞에서 혼비백산하지 않는 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나는 진정으로 노여움을 담아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새파란 애송이 따위가 감히…….”

다시 바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째 토막 내버리는 바람으로 만든 칼날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뒈져 버려!!”

지스카르는 어중간한 오라 소드로는 이 마법을 막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늦게나마 옆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피하려던 순간 뭔가를 보았다. 나도 볼 수 있었다. 허겁지겁 쫓아오던 시라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뒤쪽에 있었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피하지 않고 오라 소드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런 엉성한 짓으로는 절대로 막을 수 없다. 피했으면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했을 것을, 이제 놈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찢겨나가리라. 이것으로 정말로 완벽하게 마지막이다.

“……!”

나는 마법을 발동시키기 직전, 잠깐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고쳐 쥐었다. 아주 순간이었다.

“폐하!”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든 자가 있었다.

눈에 익은 은발. 크리스티안.

필사적으로 달려왔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황급히 남은 주문 하나를 끌어와 불덩어리를 날렸다. 동시에 크리스티안도 움직였다. 그는 자세를 낮춰 마법을 피하고 아래쪽에서 몸을 틀어 전신의 힘을 실으며 내 허리를 걷어찼다.

“커헉!!”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

내 육체가 약해빠졌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절실하게 느낄 순 없을 것이다. 4중 영창으로 아무리 수백의 마법을 퍼부어봤자 맨몸에 공격 한 방만 먹으면 그 순간 끝이다. 크리스티안의 공격 한 번에 나는 족히 4미터는 날아가서 땅에 처박혔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충격과 고통이 머릿속까지 진창으로 만들었다.

“컥! 쿨럭쿨럭!!”

“죽어! 이 악마 새끼!”

피거품을 토하며 버르적대고 있을 때 근처에 있던 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그가 마구잡이식으로 나를 힘껏 걷어찼다. 다시 옆구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크게 흥분한 기사가 이미 기절한 레이를 향해 다시 한번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그때 던필이 급히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멈춰라!!”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그 무슨 꼴사나운 짓이냐! 먼저 마정석부터 회수해!”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사들을 제치고 마법사들이 떼로 달려들어 레이의 손안에서 마정석을 빼앗았다. 혹여 숨겨둔 것이 남았을까 봐 몸 곳곳을 철저하게 뒤졌다.

던필은 한숨을 토하면서 돌아섰다.

“폐하.”

지스카르는 치열한 전투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던필은 소드 마스터인 황제가 저렇게 지친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일개 노예가 일백이 넘는 기사들 사이에서 단신으로 황제를 여기까지 몰아붙였다. 갑자기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오싹한 기분을 털어내고 입을 열었다.

“폐하, 처분을 명해주십시오.”

“…….”

처분.

그는 황제를 공격했다. 황제를 시해하려고 한 중죄인이었다. 또한 그의 공격으로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큰 피해를 당했다. 분명히 사실이었다. 이 자리의 모든 이가 그것을 목격했다.

지스카르는 화상을 입은 어깨를 쥐고 천천히 레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는 기절한 레이를 보면서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던필이 일부러 나선 것은 이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조치든 취하고 봐야 한다. 그는 다시 한번 재촉했다.

“폐하……!”

“묶어라…….”

던필은 즉시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들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뒷정리가 시작되었다.

* * *

해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부상자도 수습하고 정리가 끝났다. 병영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고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황제의 남첩이라고만 생각했던 자가 보여준 능력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대처가 늦었다손 치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백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손도 쓰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될까? 소드 마스터인 황제까지 상처를 입었다. 이제 갓 솜털을 벗은 나이라는 사실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믿을 수 없는, 너무 기괴한 일이었다. 뭐라 설명하기가 힘든 일이기에 다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했다.

하지만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자도 있었다. 바로 황후파 인사들이었다. 레이가 황제를 시해하려 든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레이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과연 마크시 공작의 주장이 옳지 않았냐고 반문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아,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던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일이 꼬일 대로 꼬였다.

마크시 공작이 매일 종알종알 떠들어대곤 했었다. ‘그 노예는 수상하니까 쫓아내야 한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 큰일을 당할 것이다.’ 정말 그 말대로 되었다. 마크시 공작이 이 소식을 듣고 좋아 죽으려 할 것이다.

레이 자체도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레이는 절대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황제조차 레이를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던필은 옆을 보았다. 크리스티안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친우의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어 던필은 일부러 웃음을 가장하며 등을 툭 쳤다.

“네가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했군. 또 훈장 다는 거냐?”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뭐, 그래. 레이는 어떻게 되려나…….”

던필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때 크리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자다! 당장 참수를 해 마땅할 일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던필은 반문했다.

“레이는 폐하께 진짜로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손을 멈췄지. 너도 알 텐데?”

“…….”

크리스는 자신의 다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레이를 걷어찼을 때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레이가 잠시지만 망설였기에 자신이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던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레이의 편이라도 들어주자는 건가?”

“화가 났다고 사실을 왜곡하지는 말라는 거다.”

던필은 혀를 차며 크리스티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은 좀 쉬어. 너는 항상 지나치게 진지한 게 탈이야. 나는 레이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그때 근처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럼포드 백작이 다가왔다. 그는 무척 조심스러운 자세였다.

“저기,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죄인 이야기로 긴히 할 말이 있네만.”

“백작, 지금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자네들도 분명히 보았지? 그 마법 말이네. 그는 4중 영창을 했어! 3중 영창도 아니고!”

“…….”

던필도 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보았다. 레이는 네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냥 4중 영창을 한 게 아니야! 그는 마법을 다루며 동시에 검을 들고 순식간에 아군을 유린했네. 대륙 역사상 오직 한 사람만이 그런 일을 가능케 했지! 스트라스의 레브노아드 황태자.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그자는 황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네. 아는가? 그자도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를 하고 있어.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럼포드 백작의 이야기를 듣고 던필은 깊이 고심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았다.

“크리스?”

크리스티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기억 저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아주 작은 파편 조각이 그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 * *

엄청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질렀다. 갈비뼈가 왕창 부러진 것이 틀림없는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꽁꽁 묶여 있었다. 온몸이 뜨겁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계속 정신을 잃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싶다.

아니, 그전에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싶었다. 사실 왜인지 잘 알고 있다.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건재하던 엘 파셔의 황제가 갑자기 죽으면 그 파장이 실로 엄청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탐욕스러운 외척이 득세하면서 엘 파셔는 필히 기울어진다. 스트라스와 엘 파셔 간에 국력 차가 심해지면 다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지.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또 있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시라크를 지키겠다고 물러서지 않는 지스카르를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흔들렸다.

또 있다. 이제 와서 지스카르를 죽이자니, 저런 놈도 인간이라고 그냥 마음이 흔들렸다.

그따위 것들. 내 알 바가 아니거늘!

마음이 흔들려도 좋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할 때엔 망설이지 않고 행해야만 했다. 마정석을 쥐었을 때 가차 없이 지스카르를 죽이고 그곳을 떠났어야 했다. 노예라는 굴레에서, 강제로 짓밟히는 굴욕에서 벗어날 가장 확실한 기회였다. 그것을 붙잡았어야만 했는데!

“으으…….”

괴롭고 뜨거웠다. 머리까지 열이 올라 생각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보름달이 구름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정말로 최후의 기회만 남았다.

익숙한 손이 다가와서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스카르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스카르는 자주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낮은 음성으로 그가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내가 하는 말엔……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해서는 의미가 없다. 내가 스스로 레브노아드라고 주장해 봤자 허황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다. 때문에 지스카르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 확신해야만 한다. 지스카르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나 자신을 전부 드러냈다.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황성에 도착했던 그 날 나는 도박을 걸었다.

놈이 몇 번이고 내 얼굴을 응시했기 때문에. 똑바로 노려보고 건방지게 맞먹으려 드는 것을 용납했기 때문에. 짓밟아 흙탕 구덩이에 처박을 수 있으면서 매번 그만두었기 때문에. 지스카르가 천한 노예에게서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발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지스카르가 ‘나’를 인정한다면 도박은 성공이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이윽고 움직였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지스카르의 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듣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첫 말을 뗀 뒤 지스카르는 한참 만에 다시 말했다.

“너는 그의 아들이냐?”

나는 피식 웃었다. 대충 이렇게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 상황에서 그나마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추측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울컥하고 속에서 치솟았다.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올리고 소리 질렀다.

“웃기지 마! 누가 누구 아들이라고? 나도 십 년 이상 실전을 거치고 연구에 매달린 끝에 4중 영창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노예 숙소에 처박혀 있던 내 아들이 핏줄이란 이유만으로 4중 영창을 해?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느냐?”

지스카르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래. 그냥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는 지나치게 그자를 닮았다. 얼굴도, 성격도, 과실주를 좋아하는 술 취향까지도. 검술에 마법까지. 철저하게 그자와 같아! 대체 뭐지? 누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레브노아드와 똑같은 인물을 만들어서 무엇에 쓰려고! 스트라스의 누군가가 황실을 전복하기 위해 레브노아드의 재래라도 연출하고 싶어 하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엘 파셔에 있었던 거지? 정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몸을 낮추어 얼굴을 가까이했다.

“짐을 만난 것은 정말로 우연이냐?”

턱이 바르르 떨렸다.

“뭐라고…….”

목소리까지 떨렸다.

“뭐라고. 강제로 끌고 온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레브노아드와 취향까지 똑같은 인물을 일부러 키웠다고 치자! 어떤 놈이 무슨 수를 써서 4중 영창까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그런 놈이 있으면 지금 내 앞에 데려와 봐!”

“그래, 누구냐! 어떤 수를 썼지? 단지 우연이었나? 또는 약물인가? 자질이 뛰어난 자를 선별할 수 있는 기술이라도 얻은 것인가?”

“닥쳐, 개자식아! 그런 게 있으면 누가 그 고생을 해서 마법사를 육성해! 매일 천재 소리 듣던 나도 4중 영창에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피를 토했는데!”

“하면 대체 뭐야! 너는 대체 누구냔 말이다! 말해!!”

밤하늘에 메아리가 쩡 하고 울렸다. 아는 것을 확인 차 묻는 게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내게서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무엇을 더? 이미 대놓고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할 참인가?

달은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지스카르는 대단히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철저하게 감상을 배제하고, 확실한 증거가 밑받침된 검증된 의견만 받아들였다. 그 검푸른색 눈동자로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인 것만 보았다.

깨달아야만 했다. 도박은 실패였다.

“꺼져…….”

“짐이 묻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누가 관계되었는지 전부 실토해라!”

“꺼지라고 말하는 게 들리지 않느냐?”

지스카르는 내 멱살을 잡은 채 위로 끌어 올렸다.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온통 헤집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더 이상 너를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살고 싶으면 대답을 해!”

아찔한 고통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숨을 가까스로 몰아쉬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크윽! 하악! 혀, 현명한 판단을 했다, 엘 지스카르 파셔……. 하아, 그 허황한 망상 따위를 함부로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너는 한 나라의 황제이니까……. 철저히 계획된 첩자일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믿을 순 없지. 너는 옳았어!”

가슴이 타는 것 같다. 지독한 고통으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레이!”

놈의 행동이 모두 무의미하다. 독촉이 이어졌으나 이제 대답할 것은 정말로 없다.

한참 후에 지스카르는 나를 내려놓고 떠났다. 홀로 남자 밤공기가 더욱 싸늘했다. 나는 힘들게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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