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43)

11.

“4중 영창? 설마 그럴 리가. 부풀리기 내지는 무슨 눈속임이었겠지.”

“일백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착각을 한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부상까지 당하셨답니다.”

“그 노예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폐하께서 유난히 집착하셨던 것은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호오라, 단순한 남첩은 아니었다는 게로군요. 폐하께서 선견지명이…….”

“바로 그겁니다!! 폐하께서는 그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족쇄까지 채우신 거죠. 아니 그렇습니까?”

“하면 자객인 것을 알면서도 곁에 두셨다는 겁니까?”

“본인이 듣자 하니 그자는 스트라스와 관계가 있다는 모양이더이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시려고 그런 노예를 첩으로 삼으셔서…….”

“놈의 미색에 넘어가서 이성을 잃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래서야 마크시 공작의 충언이 고깝게 들릴 밖에요.”

소문은 날로 부풀려져 갔다. 어느새 레이는 스트라스의 자객으로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황제가 귀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증거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당연히 조작된 증거였으나,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진실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예전과 달리 이 같은 위증도 효력을 보이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은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간악한 스트라스의 끄나풀이 폐하의 눈을 흐리고 급기야 해하려 들었으니 이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폐하!! 하루라도 빨리 그 악독한 놈의 목을 치고 나라의 위신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폐하!”

“폐하!”

황후파가 아닌 대신들까지 한목소리로 결단을 촉구했다.

“폐하, 설마하니 아직도 그 노예를 감싸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마크시 공작이 물었다. 무엄하게도 그는 황제를 비꼬고 있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치를 떨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냉막한 얼굴을 들어 대답했다.

“마크시 공작. 먼저 어떤 자의 사주였는지 밝혀내야 하오. 심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죽이라는 뜻이오?”

“하하, 그건 그렇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신이 그저 마음만 앞섰습니다. 그 노예를 비틀어 짜고 가죽을 벗겨내어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진실을 토설하기 전에 숨이 끊어지는 일이 없게 긴히 주의를 기울여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리할 것이오.”

지스카르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심 황제가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마크시 공작은 그가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직접 회의를 주관하자 속이 꼬였다. 그러나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마크시 공작은 기분 좋게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오셨군요.”

마크시 공작이 황후궁에 도착했다. 브뤼셀 황후가 시라크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성급하게 질문했다.

“아버지! 그 노예는 어찌 되었습니까? 제가 직접 그 발칙한 놈을 주리를 틀어 심문을 하고 싶은데.”

“심문은 행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황제가 아무도 죄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막고 있습니다. 하하, 그래 봤자 결국 그 노예는 죽게 될 것입니다. 혹시 황제가 끝까지 죄인을 보호하려고 든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남첩에게 정신이 팔려 앞뒤 구분도 못 하는 황제를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때야말로 우리의 천하입니다!”

“호호. 맞습니다! 천벌이 내린 게지요! 목숨 바쳐 충성한 우리 가문을 토사구팽하려고 들었다가 지금 그 죗값을 치르는 겁니다! 시라크 전하까지 그토록 업신여기고 모욕하다니, 전 아직도 그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진 않군요. 하하하하!”

화기애애한 가운데 한 사람만이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라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저를 지켜주려고 레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브뤼셀 황후와 마크시 공작이 대화를 멈추고 시라크를 보았다.

시라크는 다시 말했다.

“게다가 레이는 사실 폐하께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에, 레이가 손을 멈추는 것을 저는 봤습니다. 크리스티안 경이 막아서지 않았더라도 아마 그 녀석은 공격을 멈췄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라크 전하! 전하께서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노예는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습니다. 황제의 앞에서 검을 들고 공격을 했지요.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마크시 공작이 매섭게 눈을 뜨고 말했다. 시라크는 한참 후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후, 시라크 전하께서는 너무 마음이 약한 것이 탈이에요. 황제께서 그동안 얼마나 냉대를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라고 공경하는 게죠.”

“옳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황태자를 폐하려 들다니! 시라크 전하,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은 마십시오.”

“…….”

시라크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레이가 말했다. 자신은 무력한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브뤼셀 황후와 마크시 공작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지스카르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길은 갈수록 좁고 가파르게 변했다. 간수가 작은 철제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불쾌한 냄새가 전해졌다. 비린내와 피 냄새였다.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지스카르는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화, 황제 폐하!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예까지 오셨습니까.”

늙은 간수가 허둥지둥 달려와 지스카르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는 차가운 음성으로 짧게 물었다.

“성과는?”

“예, 예……. 그, 그놈이 보통 독종이 아니라……. 잘못 건드렸다가 덜컥 죽어버릴 가능성도 있어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반드시 실토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때 좁은 통로를 타고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스카르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늙은 간수가 얼른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지스카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레이가 갇혀 있는 감옥은 가까웠다. 창살 앞에서 그는 멈춰 섰다. 레이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미려한 금발은 겨우 이틀 만에 어둡게 빛이 바래 있었다. 하얗던 몸이 끔찍한 고문을 겪고 넝마처럼 변했다.

“예에, 여기서 지켜보시겠습니까?”

늙은 간수는 괜히 굽실대면서 문가에 함께 섰다. 고문관이 아직 황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피 묻은 막대기로 레이의 머리를 쿡쿡 찍고 있었다. 레이의 입술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식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 고문관은 의자를 앞다리만 들리도록 뒤로 당겨서 벽에 기대놓았다. 의자 다리에 묶인 다리도 함께 들어 올려졌다.

“너를 사주한 놈이 누구냐. 지독한 놈, 빨리 대답 안 해?”

“그, 그……놈이 누군지……. 나도 알고 싶군…….”

레이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면서 입을 열었다. 고문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한번 볼까.”

고문관은 옆에서 넓적한 통을 가져와 의자 밑에 밀어 넣었다. 방금 끓여낸 기름이 통 안에서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레이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숨이 크게 거칠어졌다.

고문관은 레이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

“기대되나 보지? 두 번 다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감상은?”

순간 지스카르 황제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일부러 의식해서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창살 너머를 보았다. 자신이 죄인을 심문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상기했다. 그는 결국 끝까지 고문관을 막지 않았다.

고문관이 의자를 앞쪽으로 떠밀었다. 의자 다리에 묶인 발이 끓는 기름통 속에 떨어졌다.

“……!!”

레이는 비명을 삼키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숨을 멈추고 필사적으로 견뎠다.

“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끝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고 지르다 레이는 제풀에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직 기절하지는 않았다. 고문관은 기름통을 발로 슬슬 밀어서 옆으로 치우고 레이의 머리채를 쥐고 들어 올렸다.

“너를 사주한 자는 누구냐?”

“어……. 아…… 헉…….”

죄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고문관은 머리채를 마구 흔들었다. 여전히 효과가 없어 그는 찬물을 한 바가지 퍼 와서 레이의 얼굴 위에 뿌렸다. 그리고 다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물었다.

“너를 사주한 자는?”

“커……. 아……. 어, 없어. 그런 거…….”

여간해도 소득이 없으니 고문관은 짜증이 났다. 그는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잠깐 생각하던 고문관이 갑자기 두꺼운 손으로 레이의 다리 사이를 덥석 쥐었다.

“……!!”

힘없이 늘어져 있던 레이가 순간 온몸을 경직시키고 눈을 크게 떴다.

“소, 손……. 치워……!”

“왜? 남창 새끼 주제에, 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고문관이 피투성이인 바지 위로 음경을 움켜쥐었다. 레이는 몸을 앞으로 확 구부렸다. 끓는 기름 속에 발을 집어넣을 때도 잠잠하던 레이가 격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치, 치워! 치우라 했다!”

“이거 반응 좋은데. 누가 남창 아니랄까 봐.”

“누가……!!”

고문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음경을 쥐고 주물럭거렸다.

“치워! 치우라고! 그만……!”

레이는 소리 지르길 멈추고 눈을 꽉 감았다. 손 치우라고 백번을 말한들 고문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눈을 감고 참으면 끝날 일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지만 마음먹는 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턱에 경련이 일어나고 이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고문관은 꽤 흡족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이 정도로 괜찮은 반응은 처음이었다.

“어떠냐. 겨우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드냐?”

고문관의 얼굴이 갑자기 가학적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만져 주니까 좋아? 엉? 손에 아주 착착 달라붙잖아. 황제가 네놈만 보면 죽고 못 산다고 아주 옆에 끼고 살았다던데 다 이유가 있었군!”

고문관은 옷 위로 지분대던 것을 멈추고 아예 바지를 벗겨버릴 심산으로 일어났다. 레이는 고개를 숙인 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 추잡한 손길이 갑자기 멈추었다. 레이의 얼굴 위로 뜨겁고 비린 액체가 확 쏟아졌다.

레이는 눈을 뜨고 흐린 시야로 앞을 보았다. 그를 모욕하던 고문관이 머리를 잃고 몸뚱이만 남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목이 잘린 몸뚱이 너머에 지스카르가 하얗게 일렁이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각상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에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저, 저런 미친놈이…….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가지고.”

창살 문 옆에 선 늙은 간수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다.

레이는 지스카르를 응시하다가 다시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턱을 손으로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거칠게 다루지 않았음에도 레이는 고통스럽게 몸을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어 그냥 움직이기만 해도 비명이 났다.

“…….”

지스카르는 턱을 쥔 상태로 잠시 기다렸다. 고개를 든 레이가 겨우 진정하여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이야기해라.”

대답은 없었다. 기껏 얼굴을 들게 했으나 레이는 아무것도 없는 앞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다시 한번 죄인에게 질문했다.

“대답해라……. 네 배후가 뭔지. 어디 출신인지. 적어도 어떤 대책이라도 세울 수 있도록!”

“꺼……져…….”

레이는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지스카르는 턱을 쥔 손에 힘을 더해서 다시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도 죽고 싶은가? 짐도 더 이상은 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외척을 축출하려 했던 계획까지 전부 무산되어 버렸다. 때마침 좋은 때에 네가 분탕질을 친 덕에!”

“하……. 그건…… 네놈 사정이고. 그럼…… 평생…… 네놈 곁에…… 붙어…… 고분고분 살아줄 줄…… 알았더냐?”

레이가 어두운 감옥 안에서 처음으로 지스카르를 똑바로 보았다. 남은 힘을 짜내 조롱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지스카르는 턱을 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제로 지탱하던 손이 없어지자 레이는 힘없이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수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스카르가 위에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레이는 다 체념하고 땅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수치라는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놈이 무엇을 할지 두려웠다. 그냥 기름 세례나 당하고 가죽이나 벗기는 것이면, 견디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견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수치를 당하는 것은 정말로 참기 힘든 일이었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머리를 옆으로 눌러 목이 드러나게 했다.

“성노의 낙인을 몸에 새긴 채로 살 수 있겠느냐?”

레이는 입을 다물고 바닥만 보았다. 다른 곳을 보는 체했으나 시선이 떨렸다. 지스카르는 늙은 간수에게 명령했다.

“가져와라.”

늙은 간수는 서둘러 황제가 언급한 손가락만 한 크기의 인두를 가지고 왔다. 그것을 화덕에 넣었다가 시뻘겋게 달궈졌을 즈음에 황제에게 바쳤다. 길게 드러난 목에 열기가 어른거렸다.

“그냥…… 죽여…….”

레이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그냥…… 죽이라 했다!! 기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

지스카르는 고함을 지르는 레이의 목덜미에 인두를 눌러 찍었다.

“큭. 크으으으윽!!”

살이 타들어갔다. 레이는 전신을 경직시키고 목구멍 안으로 끓는 듯한 신음을 냈다.

“허읏…….”

인두가 떨어져 나간 뒤 레이는 간신히 공기를 들이켰다. 목덜미에 더러운 낙인이 찍혔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체념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이런 것 하나 찍힌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눈앞이 일그러지고 심하게 현기증이 났다. 그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레이가 실신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지스카르는 시선을 내려 자기 손에 들려 있던 인두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속이 들끓으며 이유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인두를 신경질적으로 벽에 집어 던졌다.

그는 이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간의 무거운 평정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신경이 찢어질 듯 예민해지고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은 감각.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아.”

그는 억눌린 숨을 낮게 뱉으며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렸다. 레이가 끈이 떨어져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형처럼 넝마가 되어 늘어져 있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검을 들어 레이의 팔다리를 묶은 밧줄을 잘라냈다. 레이가 옆으로 기우뚱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지스카르는 반사적으로 레이를 붙잡았고, 이어서 끌어안았다.

수상한 자가 황제를 시해하려 했으니 응당 심문을 해야 했다. 심문을 끝내면 극형에 처할 일이었다. 그러나 죄를 물어야 할 자를 품에 안고 메마른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스스로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지스카르는 레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자꾸만 바늘 끝처럼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조금이라도 날 선 감각을 가라앉히고자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레이가 계속 몸을 뒤척였다. 전신에 빈자리 없이 상처가 뒤덮여있었다. 그는 바로 눕지도 못하고 엎드리지도 못한 채 괴로움에 허덕이다가 곧 의식을 되찾았다.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천 때문에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낯익은 창문과 벽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는 갑자기 몸에 힘을 쭉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틀림없이 안도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스카르는 조소를 던졌다.

“무엇을 안심하고 있지?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건가?”

정곡이 찔린 레이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감옥이 아니라 침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고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도 애써 비아냥대면서 물었다.

“아니……라고…… 말할 참인가? 그럼 왜…… 감옥에서…… 데리고…… 나온 거냐? 고문관을…… 죽여버린 이유는?”

“짐을 도발하지 마라!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지스카르가 레이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고 언성을 높였다. 순간 레이가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하면서 자지러졌다. 손이 닿은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아아악! 크으윽!! 거, 건드리 마! 허윽…….”

지스카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피투성이인 셔츠의 앞섶을 열었다. 시뻘건 화상 흔적이 팔뚝부터 팔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손톱 발톱은 예전에 다 뽑혔다. 온몸이 흉측한 상처들로 가득했고 멍들었고 곪아 있었다.

“……네가 바른 말을 한다면 지금이라도 신관을 불러주겠다. 편해지고 싶지 않으냐?”

“때려……쳐…….”

레이는 쿠션 위에 얼굴을 묻으며 씹어뱉듯 말했다.

지스카르는 상처투성이인 몸에서 손을 뗐다. 레이가 비아냥대며 한 말은 다 옳았다. 그는 더 이상 레이를 고문하고 심문할 수 없었다. 레이를 감옥에서 꺼내와 침대에 눕힌 순간부터 그것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꽤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지스카르는 입을 열었다.

“좋다. 정 그렇다면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을 하나씩 문초해 보겠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군. 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것들을 먼저 잡아넣었어야 했다. 너를 봐서 지금까지 계속 눈감아왔으나 더 이상은 그럴 이유가 없군. 네 어미와 아비까지 소금칠을 해가며 심문해서 그때도 성과가 없으면 다시 오겠다.”

레이는 흠칫 눈을 떴다. 그러나 다시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좋을…… 대로…….”

피곤한 목소리로 레이는 대답했다.

지스카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려!”

지스카르는 뒤돌아보았다. 레이가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과 다리를 버둥거려 문 쪽으로 기어왔다. 문드러지다시피 한 발이 시트에 긁혀 더러운 자국을 남겼다.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레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지금이라도 당장 방을 떠날까 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하, 하지 마…….”

지스카르는 말없이 레이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침대맡으로 되돌아와서 걸터앉았다.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레이는 서둘러 입을 떼었다. 지스카르가 원하는 대로 대답을 해주고자 했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을?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손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라. 저, 정말로……, 정말인데…….”

레이는 바보처럼 비실 웃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약하다. 약하다. 끝도 없이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부모든 무엇이든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흔한 감상에 젖기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엔 항상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하였다. 한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왜 더러운 노예들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는 건가.

“부모님을…… 용서해……. 제발……. 제발……!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지스카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것이 레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스카르는 대답이 없었다. 차가운 얼굴이 저 위쪽에 있었다.

레이는 눈치가 빨라 침묵 속에서도 금방 그의 속내를 읽어내곤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오직 입으로 뱉는 확답만이 필요했다. 부모님을 해치지 않겠다는 그 말을 직접 듣는 것이 중요했다.

“지스카르…….”

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팔 힘으로, 다리로 어떻게 무릎을 꿇어 일어섰다. 레이는 지스카르의 입술에 키스했다.

차가운 입술에 메말라 찢어진 입술이 어색하게 겹쳐졌다가 다시 떨어졌다. 레이는 가늘게 떨면서 이번엔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고 그저 동상처럼 차갑다.

레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지스카르의 손을 붙들었다. 그것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끌어왔다. 쓰라리고 괴로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레이는 더욱 안쪽으로 손을 끌어당겨 스스로 움직였다. 다른 손으로 지스카르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써 다리를 움츠렸다. 안간힘을 다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지스카르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듯 레이는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기어갔다. 잘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바지를 열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스카르의 것을 입 안에 넣었다. 아직 서지도 않았는데도 턱이 빠듯할 만큼 크게 벌려야 전부 삼킬 수 있었다. 서너 번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다 숨이 막혀서 뱉어냈다. 그러나 숨을 몰아쉬며 기둥을 핥고 다시 삼켰다. 이가 닿지 않을까 염려하며 열심히 핥았다. 문득 지스카르의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사납게 끌어당겼다. 그대로 레이는 침대에 나가떨어졌다.

지스카르는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럽게 두 손으로 목을 쥐어서 짓눌렀다. 레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버둥거렸다. 손톱도 없는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긁었다. 혈흔을 남기고 미끄러져 떨어진 손으로 자꾸만 버둥댔다.

“꺼억……헉…… 지……!!”

입가로 침이 흘러나왔다. 그 자존심 높던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지스카르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레이처럼 그도 숨을 거의 쉬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여버린다면, 그리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겠지. 이 쥐어짜는 듯한 심장의 고통도 가시지 않을까.

“쿨럭쿨럭! 커헉! 쿨럭!! 콜록콜록!”

하지만 지스카르는 결국 손을 놓았다. 레이는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떨었다.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레이가 그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잡았다.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입술을 움찔거려 가까스로 말했다.

“제……발……. 부탁…….”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레이는 실신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레이를 내버려둔 채 그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심하게 갈증이 났다. 그는 근처 테이블에 놓인 술을 병째로 집어 들었다.

콰앙!!

그러나 술은 마시지 않고 병을 쥔 채 침대 기둥에 강하게 후려쳤다. 기둥이 부르르 떨렸다. 손에 쥐고 있던 병은 산산조각 나고 유리 조각이 손바닥에 박혔다. 그는 손을 약간 풀었다가 다시 강하게 움켜쥐었다. 유리 조각 하나가 살을 찢고 튀어나왔고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지스카르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아무렇게나 털어내고 방을 나왔다.

* * *

“폐하!”

던필은 간만에 복도에서 마주친 황제를 놓칠까 봐 서둘러 내달렸다. 그리고 아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엇? 손은 어찌 되신 겁니까?”

본론을 말하기 전에 던필은 화들짝 놀라 황제의 손에 주목했다. 왼손에서 옅게 핏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다니 당장 호위와 시종 전부를 불러 모아 문책할 일이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었으나 지스카르는 대답이 없었다.

던필은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황제의 대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그가 아는 황제는 결코 이런 사람이 아니었건만. 그는 일단 화제를 바꾸었다. 머리 아픈 일이 산적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폐하. 지겨울 만큼 들으셨겠지만 그래도 들어주십시오. 레이를 다시 감옥에 가두십시오! 명분도 없이 계속 죄인을 감싸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감싸고 있는 게 아니다. 심문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을 뿐.”

지스카르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던필의 말처럼 지겨울 만큼 그 이야기를 들어왔고 지겨운 요청에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던필은 절박하게 외쳤다.

“더 이상 배후를 캐내야 한다고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런 구실로 언제까지 레이를 살려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 이제 진상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 판국에 누가 배후인지 아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다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그 노예를 죽이라고 명해주십시오!!”

“던필. 입조심 해라……! 너라도 두 번 용서는 없을 테니까.”

지스카르는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는 던필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던필은 뒤에 남아 초조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맙소사, 맙소사! 이런 식으로 가다간……. 말도 안 돼.”

“먼저 레이를 두둔하고 나선 것은 네가 아니었던가?”

크리스티안이 걸어오면서 차갑게 물었다. 던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크리스. 나는 단순히 진실이 그러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레이는 황제 시해범이나 스트라스의 첩자 따위가 아닐 거야. 하지만 레이가 일백이 넘는 기사들 앞에서 폐하를 공격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안타깝더라도 레이를 처형시켜야만 해. 빌미가 될 일을 없애고 최대한 빨리 이번 사건을 일단락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도 황후와 마크시 공작의 위세를 누르기가 벅차단 말이다!”

“그래. 이대로는 그랜트 공작이 과거의 껄끄러운 관계를 묻어두고 황제 폐하의 편에 선 의미가 없겠지.”

“그건 울펜가모트도 마찬가지잖아! 크리스! 그깟 노예 때문에 대의를 그르칠 생각이냐?”

“그깟 노예라고? 이제 와 그 입으로 잘도 지껄이는구나!”

쾅.

던필이 순간 크리스티안의 어깨를 움켜쥐고 벽에 거칠게 밀어붙였다.

“뭣……!”

“크리스티안! 제발! 제발!! 레이는 놀랍도록 강인하고 현명하다. 그 신비로움이 너나 폐하를 그토록 현혹하는 거겠지.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봐라. 권력욕에 눈이 벌게진 마크시 공작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너와 우리 가문의 쇠락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외척이 득세하는데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엘 파셔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단 말이다!!”

크리스티안은 가만히 던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던필은 황급히 머리를 뒤로 젖혀 주먹을 피했다. 그러나 피하는 것보다 크리스티안의 두 번째 공격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왼쪽 주먹이 배에 꽂혔다. 던필이 억 하는 사이에 크리스티안은 그의 팔을 붙잡아 아예 바닥에 메다꽂아버렸다.

쿵.

“으윽!”

“그런 실력으로 나를 제압하려 들어?”

던필은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티안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차갑게 돌아섰다. 순간 던필이 소리 질렀다.

“레이는 황제 폐하의 것이야!”

번뜩 크리스티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새파랗게 빛났다.

“그게 무슨 뜻이냐?”

던필은 입술을 잠시 깨물다가 억지로 말했다.

“너란 녀석은…… 고지식한 척하면서 마지막 순간엔 언제나 감정적이 되지. 레이와 관련된 일에서는 더욱 그래. 나설 때가 아닌데도 나서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크리스, 크리스.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다오.”

“이미 충분히 들었다. 충고 새겨듣도록 하지.”

“듣고 있지 않잖아!”

크리스티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던필은 괴롭게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네 곁에 있었던 것은 언제나 나다. 그런데 어째서 항상…… 내 이야기는 듣지 않는 거냐. 크리스…….”

던필과 대화를 나눈 뒤로부터 불쾌한 기분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애써 찜찜한 기분을 외면하고 황제궁을 찾았다. 특별한 용건 같은 건 없지만 황제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대장님. 폐하께서는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방을 지키고 있던 친위기사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문을 응시했다. 문 너머에 레이가 있을 것이다.

“……나가셨지만 돌아오시겠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문 앞에 서서 대기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보초를 서던 친위기사 둘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내 기사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대장님. 이 방 안에 그 노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이 매서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기사는 움찔했으나 자세를 다잡고 다시 말했다.

“저는 저런 노예 하나 때문에 폐하의 위명에 흠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친위기사들은 젊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황제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들의 황제는 위대한 기사였으며, 동시에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나라를 통치해 온 훌륭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군이었던 그가 노예 하나 때문에 계속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말을 꺼낸 기사들뿐 아니라 황제의 친위대 모두가 그 사실을 대단히 침통하게 생각했다.

“제발 노예를 내치라고 대장님께서 탄원해 주십시오. 저희가 감히 폐하께 그런 말씀을 올릴 수는 없지만, 대장님께서는 폐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

진심을 다해 청원하던 기사는 크리스티안의 얼굴에서 노기를 읽고 당황했다. 너무 주제넘은 소리를 한 것일까. 그는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티안은 문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멋대로 황제의 침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친위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크리스티안 대장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미처 저지하지도 못했다.

기사 한 명이 몹시 당황해서 그를 붙잡으러 움직였다. 하지만 동료 기사가 그를 붙잡았다.

“처벌을 각오하더라도 일단 지켜보자.”

동료의 의도를 깨달은 기사는 망설였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침소에 멋대로 드나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절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장이 방 안에 있는 노예에게 경고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크리스티안 친위대장은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이고 절친한 친우였으므로 멋대로 침소에 발을 들인 것도, 그 안의 노예를 만난 것도 용서받을지 몰랐다.

막무가내로 방 안에 들어온 크리스티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뭔가 있었다. 레이였다. 마치 핏덩어리처럼, 더러운 옷을 걸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일순 숨을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레이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는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움찔.

레이가 손길을 느끼고 몸을 조금 움직였다. 크리스티안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레이.”

조용한 목소리에 레이는 깜빡거리며 점멸하던 의식을 되찾았다. 낮게 신음을 내며 그가 눈을 떴다. 레이는 크리스티안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녹색 눈동자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으득 소리 나게 이를 깨물었다.

“왜…… 왜 이러고 널브러져 있느냐. 숨은 뭣 하러 쉬고 있느냐. 이렇게 치욕을 당할 바에 차라리 죽어버리지! 대체 왜!”

“…….”

레이는 다시 힘들게 눈을 감았다. 크리스티안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나 바스러질 것 같은 촉감에 깜짝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레이는 손이 닿았던 어깨가 고통스러운지 움츠리며 신음을 흘렸다.

“레이!”

크리스티안은 소리 질렀다. 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쾅!

크리스티안은 당장 문을 박차고 침소에서 나왔다. 기사들이 놀라며 무슨 말을 했으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불쾌함이 어느새 지독한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 * *

깊은 밤 촛불 하나만 켜진 침실은 무척 어두웠다. 지스카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힘을 준 탓에 겨우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지스카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부스럭.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가 침대 위에서 약간 뒤척였다. 힘겹게 숨을 토하다 입술을 안타깝게 움찔거렸다.

문득 생각했다. 며칠이 지났지? 레이가 아무것도 없이 저곳에 방치된 지는 얼마이고?

덜컹.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줄을 당겨 시종을 호출했다.

잠시 후 시녀가 물과 따듯한 죽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고 물러났다. 지스카르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쪽 손으로는 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레이를 안아 일으켰다.

“으…….”

레이는 괴롭게 신음하다가 눈을 떴다. 그러나 초점이 불명확했다. 그는 아직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지스카르는 물잔을 레이의 입가에 대어주었다. 물이 입술에 닿자 레이는 무의식중에 한 모금 마셨다. 순간 움찔 놀라더니 얼굴을 내밀고 허둥지둥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며 먹던 물을 다 토해냈다.

“커헉. 쿨럭쿨럭! 우욱!”

레이는 계속 구역질을 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지라 쓰디쓴 위액만 올라왔다. 숨도 쉴 수 없고 목구멍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침대 시트를 붙들고 고통에 경련했다.

지스카르는 레이가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잡아주었다. 구역은 한참 후 가라앉았다. 지스카르는 그 상태로 좀 더 기다렸다. 그리고 입이라도 헹구라고 다시 물잔을 대어주었다. 레이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더 이상 물을 머금지도 못했다. 그는 괴로워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물도 못 마시는데 죽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할 상황으로 보였다. 지스카르는 충동적으로 가져오라 했던 죽을 그냥 협탁 위에 밀쳐 놓았다.

잠시 의식을 차렸던 레이는 다시 몸을 늘어뜨리며 기절했다.

“…….”

지스카르는 레이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날이 밝았으나 흐린 날씨 때문에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밝지 않았다. 어둑한 침실은 죽은 자의 무덤보다 적막했다. 레이는 간밤에 눕혀준 모습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자주 아파하면서 뒤척였는데 어젯밤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밤새 자리에 앉아 검게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를 지켜보았다. 레이는 아주 천천히 숨을 쉬었다. 손을 뻗어 뺨을 만지니 살갗이 차가웠다. 얼굴부터 온몸이 하얗게 식어 있었다. 뺨을 톡톡 두드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갑자기,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그는 레이를 만지던 손을 간신히 거두었다.

치료도 없이 방치되어 레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굳이 처형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숨이 끊어질 터였다. 뒤틀린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레이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심문을 중단하고 레이를 그냥 방에 데려다 놓은 것만으로도 그는 커다란 곤경에 빠진 상태였다. 그래,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였다. 말도 안 되는 짓을 그만둘 때도 되었다.

“……하!”

지스카르는 허공을 향해 실소를 터뜨렸다. 되지도 않을 헛소리! 그게 마음대로 될 것이었으면 애초에 곤경에 빠질 만한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적국의 황태자를 닮은 이가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렸다. 잠도 잘 수 없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어전 회의나 중요한 사무를 내팽개친 지도 며칠이 되었다. 평생에 걸쳐 행해온 황제의 책무, 몸에 아예 배어버린 일과들. 그것을 하나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었다. 상처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레이를 보노라면 숨통이 짓눌려 숨쉬기도 힘들었다.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깐 비틀거리며 왼손으로 침대 기둥을 붙들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밤낮을 지새운 탓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찾아올 것이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 * *

레이는 뺨을 때리는 둔탁한 통증에 눈꺼풀을 들었다. 지스카르가 그를 깨우기 위해서 가볍게 뺨을 치고 있었다. 레이가 눈을 뜨자 지스카르는 그를 안아서 일으켰다.

레이는 주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을 조금 몰아쉬다가 버틸 힘이 없어서 몸과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미칠 듯이 괴롭고 쓰라린 통증이 있었는데 그것들도 어쩐지 아득했다.

문득 레이는 손 안에 무언가가 굴러들어 온 것을 느꼈다. 그냥 딱딱한 돌조각이었다. 아니다, 강력한 힘으로 박동치는 마력의 근원이었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손바닥에 마정석을 건넸다. 그리고 자기 손을 위에 덮어 꽉 쥐여 주었다.

“네게 주겠다.”

레이는 마정석을 손에 넣고도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온…….”

마정석이 소리를 내면서 진동했다. 레이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마법으로 만들어낸 빛무리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몸을 감쌌다. 그러나 성치 않은 몸으로 강력한 회복 마법을 구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기초적인 마법만 몇 번 사용하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그 정도로는 몸에 남은 깊은 상흔을 쉽게 치유할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약한 치유 마법을 시행했다. 레이는 가쁜 숨을 내쉬었고 손에 쥐고 있던 마정석을 스스로 침대에 내려놓았다.

비록 다 죽어가는 몸이지만 수중의 마정석으로 치료 외의 많은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정석을 얻기 위해 골몰한 적도 있었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레이가 놓아버린 마정석이 아무렇게나 침대 위를 굴렀다.

레이는 눈을 감았다. 얼마 안 가 잠에 빠지듯 의식을 잃었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레이는 또 잠에서 깨어났다. 지스카르가 일부러 그를 깨운 것이다. 지스카르는 레이를 일으켜 앉히고 다시 손 안에 마정석을 쥐여 주었다.

레이가 작게 시동어를 읊자 치유가 시작되었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발부터.”

“…….”

레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화상을 입은 두 발이 검게 문드러져 있었다. 빛무리가 발목 아래에서 좀 더 강하게 발광했고 상처가 겉이나마 아물기 시작했다. 아직 한참 더 지나야겠지만 그래도 나아가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마법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다. 레이도 오래 그렇게 있었다.

서서히 빛이 줄어들었다. 마법이 끊어지자 레이는 다시 잠에 빠졌다. 지스카르는 침대에 굴러다니는 마정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든 레이의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지스카르는 자신이 지독하게 비겁하다는 것을 알았다. 레이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해를 입을까 봐, 스스로 만든 족쇄에 묶여 이제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 * *

비가 지나간 뒤 단풍잎이 많이 떨어졌다. 세상이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스카르는 창가 근처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이리로.”

레이는 침대 기둥을 쥐고 일어섰다. 그새 비쩍 마른 다리가 힘들게 떨렸다. 그것보다는 발에서 오는 통증이 극심했다. 레이는 한 걸음 내딛었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고 다시 움직였다. 걸을수록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바로 앞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리는데도 지스카르는 지켜만 보았다. 도움을 주면 걷는 연습이 성립되지 않았다.

레이는 끝까지 걸어가서 가까스로 지스카르의 옷깃을 붙잡고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스카르는 레이를 조금 강하게 끌어안았다. 품 안에 느껴지는 몸이 아직도 바스러질 듯 많이 약했다.

그는 그대로 레이를 들어 올려 침대로 향했다. 깨끗한 침대에 레이를 눕히고 직접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황제가 손수 할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어지간하면 시종에게 레이를 맡기지 않았다. 땀을 닦아주자 레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금 편한 얼굴을 했다.

레이는 이제 픽픽 기절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신 하루 중 아주 많은 시간을 잠든 채 보냈다. 이불을 덮어주자 레이는 다시 조용히 잠들었다.

“…….”

레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지스카르는 방을 나섰다. 레이가 조금이나마 회복된 뒤로 그도 다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딱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나 기계적으로나마 국정을 살폈다.

황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거의 한 달 넘게 마비되었던 엘 파셔의 국정이 겨우 정상화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의욕이 없었고 황후파는 야심만만했다. 명분까지 갖춘 황후파가 그의 부재를 틈타 나랏일에 손을 뻗쳤다. 마크시 공작이 친인척과 측근을 멋대로 요직에 앉혔고, 황후는 황실 재산을 사금고처럼 멋대로 유용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라의 거의 모든 중대사에는 아직 황제의 재가가 필요했다. 엘 파셔는 지난 십여 년간 지스카르 황제의 강력한 통제력 아래에 있었던 나라로, 아예 국가법에 황제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사업이 많았다. 그래 봤자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법은 대신들의 동의를 얻어 바꾸면 되는 일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황후파의 입김에 넘어가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

지스카르는 집무실에서 문관들의 보고를 듣다가 이유 없이 하던 일을 멈추었다. 항상 칼같이 일을 처리하던 황제였는데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아졌다. 관리들은 몹시 걱정되었으나 어전이라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추워졌군…….”

지스카르는 다시 펜을 쥐고 의미 없이 말했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 * *

엘 파셔 황실은 일 년에 네 번 정기적으로 마물 사냥을 시행했다.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세 번의 마물 사냥이 있었다. 가을이 깊었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 네 번째 사냥을 시작해야 했다.

시기가 되어 황제는 정기적으로 행했던 마물 사냥에 나섰다. 십수 년간 안정기를 구가했던 엘 파셔는 현재 극단적인 혼란 속에 있었다. 많은 황제파 귀족들이 황제의 체면이 깎일 것이 분명함에도 마물 사냥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냥은 결국 속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출발하는 날, 지스카르 황제는 레이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수많은 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레이에게 꽂혔다. 그 날 또 다른 마차에는 시라크 황태자도 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이동하여 일행은 마물 서식지가 위치한 지역에 도착했다. 마차를 산 아래에 세워두고 행군이 시작되었다. 레이는 땀을 흘리며 뒤를 쫓다가 힘이 빠져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으나 발에 감각이 없었다.

“하아. 하아……. 지스카르…….”

레이는 바닥을 짚으며 어렵사리 지스카르의 이름을 불렀다. 황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위 중이던 친위기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목소리를 듣고 앞서가던 지스카르가 되돌아와서 레이를 안았다. 레이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어 있어서 소매로 얼굴이나마 닦아주었다. 그도 레이가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그럴 순 없었다. 그대로 황성에 두고 왔다면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황후파가 아니라 황제를 따르는 둘도 없는 충신들의 손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레이의 상태가 걱정되었으나 이대로 품에 안고서 마물을 소탕할 수는 일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충직한 기사들이 많았으나 레이를 믿고 맡길 만한 자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지스카르는 생각 끝에 크리스티안을 불러들였다.

“예, 맡겨주십시오.”

크리스티안은 레이를 건네받아서 안았다. 레이를 안는 순간 크리스티안은 갑자기 흠칫 어깨를 굳혔다. 지스카르도 그 반응을 느꼈다. 답을 원하는 황제의 시선에 크리스티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무 가벼워서…….”

“……네게 맡기겠다.”

지스카르는 레이에게 잠시 시선을 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동안 마물이 나타나지 않아 지루한 산행만 계속되었다. 크리스티안에게 안긴 채 레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그러나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몸이 뜨겁고 연신 숨을 거칠게 쉬었다.

“……대장님. 무거우실 텐데 잠시 동안 제가 들겠습니다.”

던필이 다가와서 대신 레이를 안겠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단호히 거절했다. 레이가 죽기를 바라는 던필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겁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과거에 비하자면 레이는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손에 닿는 몸이 부서질 듯 약했다.

크리스티안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쉽지 않았다.

마물 사냥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만큼 사기가 높진 않았지만 마물 몇 마리를 사냥하는 정도에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꾸웩!!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마법사들이 재빨리 마법으로 발을 묶었고 기사들이 연이어 그들을 학살했다. 그런데 근처 수풀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오크 서른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갑자기 머릿수가 많아져서 대처하기가 난감하게 되자 지휘관이 전방의 기사들에게 방어태세를 명하고 후방의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때 지스카르 황제가 검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

기사들은 실책을 범해 황제에게 폐를 끼친 것이 송구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소드 마스터인 황제에게 오크 몇 마리 정도는 길가의 걸림돌 수준도 되지 않는다. 신기에 가까운 황제의 검술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기사들은 내심 기대를 품었다.

지스카르가 단신으로 무리를 향해 걸어가자 오크가 본능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두 마리가 각기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크게 휘둘렀다. 지스카르는 옆으로 물러서 도끼를 피하는 즉시 한 마리를 베고 이어서 다른 한 마리의 뱃가죽을 쑤셨다. 딱히 힘도 들이지 않는 듯 무심하게 검으로 베는 동안 오크 다섯 마리가 더 죽었다.

동족이 순식간에 죽어나가자 남은 오크들은 멈칫거렸다. 지스카르는 쫓지도 않고 먼저 공격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상념은 오라를 흐리고 집중력을 앗아갔다.

그것 때문인지 이전 같았으면 벌써 겁을 먹고 도망갔을 오크들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지스카르는 검을 다시 바로 세웠다. 한 번에 한 마리씩. 그가 검을 들 때마다 장난감 인형처럼 오크의 목이 날아갔다. 그러나 세 마리째 목을 베었을 때 오크는 즉사하지 않았다. 오라가 충분하지 않아 오크의 두꺼운 목을 완전히 잘라내지 못했다.

놈이 피거품을 물면서 온몸으로 지스카르의 허리께를 붙들었다. 지스카르는 오크가 아직 살아 있음을 모르고 무방비하게 걸으려다가 덜컥 몸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남은 오크 두 마리가 그를 공격했다. 한 놈의 도끼가 황제의 어깨부터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허리를 붙잡혔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밀어낸 덕분에 그냥 스친 상처로 그쳤다.

“폐하!”

하지만 기사들은 기겁했다. 십 년 이상 황제를 쫓아 사냥을 다닌 기사도 있었는데 그들조차 지스카르가 몬스터를 상대로 피를 보는 것은 처음으로 보았다.

뻐억.

지스카르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붙잡고 있는 오크를 검대로 내리찍어 아예 머리를 부숴버렸다. 그동안 오크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순간 성가시다는 감정이 불쑥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여 평소에 몇 배가 넘는 오라를 전신에 쏟아부었다. 그의 손 안에 있던 오라 소드도 필요 이상으로 강한 빛을 뿜었다. 백색 오라가 검신을 넘어 아예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사납게 검을 들어 휘둘렀다.

콰구구궁.

막대한 양의 오라가 전방을 부채꼴로 크게 휩쓸고 지나갔다. 더 이상 살아 있는 오크는 없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오라를 휘두른 대가가 뒤따랐다. 얕았던 상처가 크게 벌어져 바닥에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지스카르는 가만히 그 꼴을 보았고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자해나 다름없는 방식이라니 세상에 이런 엉터리 검술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는 던지듯 보검을 바닥에 꽂고 근처 바위에 몸을 기댔다.

“맙소사. 당장 신관을 불러와! 마법사 중에 치유 마법을 쓸 줄 아는 자는 없는가?”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지스카르는 이 모든 소란에서 관계없는 사람처럼 그저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란을 피우던 기사들이 조용해졌다.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었다. 레이가 크리스티안의 도움을 받아서 걸어오고 있었다.

“치유 마법에 능한 마법사가 필요한 모양인데.”

레이는 창백한 낯빛으로 웃었다. 애초에 독살을 피하기 위해 배운 마법이라 그는 해독이나 다양한 치료 마법을 많이 알았다. 레이는 손을 뻗어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손 안의 마정석이 떨리면서 소리를 냈다.

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레이가 마정석을 소지한 채 마법을 썼기 때문이다. 레이가 마법으로 공격하던 모습을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대부분 기사가 목격했다. 당시의 일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악몽 그 이상이었다. 어떤 기사는 성급하게 검을 쥐고 경계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이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스카르의 상처만 보았다. 상처는 마법으로 금세 아물었다.

지스카르가 불쑥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네가 지금 남을 치료할 상황이 아닐 텐데.”

레이는 곧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크리스티안의 부축 없이는 서지도 못했다.

“네게 뭐라도 빚을 지우고 싶어서. 이번 일을 대가로 부모님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다면?”

레이는 웃었다. 사실 지스카르가 입은 부상은 피만 많이 났지 애초부터 대단치도 않은 것이었다.

“무린가?”

레이는 손바닥을 펼쳤다. 손 안에 있던 마정석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주변에 과민 반응하는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기사들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던 마정석이 그의 손을 떠나자 그나마 안심했다.

레이는 얌전하게 후방으로 물러났다.

“레이,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크리스티안이 레이에게 자리를 권해 앉게 하며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레이는 스스로에게 치유 마법을 걸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했던 말대로 그는 정말로 남에게 마법을 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레이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다가 갑자기 전신을 경련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레이!”

크리스티안은 황급히 레이를 안아 들었다. 레이는 그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실신한 상태에서 계속 거칠고 달뜬 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티안은 반사적으로 근처에 있는 신관을 보았다. 하지만 어떤 신관도 죄인을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고열에 시달리는 레이를 그저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해가 넘어가며 야영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다른 친위기사들이 레이에게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일부러 그들을 멀리 물렸다. 그리고 약간 외진 곳에서 레이를 눕혔다. 레이는 고열에 시달리며 계속 몸을 뒤척거렸다. 이마에 손을 대려고 하자 그것마저 고통스러운 듯 피했다.

“레이…….”

“하아, 하아…….”

나지막한 부름에 가쁜 숨만 되돌아왔다.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레이의 머리칼을 넘겼다. 매끈거리며 흘러내리던 머릿결이 퍼석거렸다. 크리스티안은 여태 참고 또 참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억누르기 힘들어 바닥을 퍽 내려쳤다.

황제는 레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런데도 신관을 부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죄인을 신관의 힘으로 치유해 주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이미 죄인이라는 말은 유명무실했다. 그런데도 이게 뭔가. 어중간하게 지키고, 아무렇게나 방치했다. 그래서 레이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그때 수풀 사이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시라크 황태자?”

“크리스티안 경.”

크리스티안은 인상을 썼다. 황태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어떤 자도 레이의 곁에 접근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라크는 뜻밖의 말을 했다.

“혹시 그 노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건가?”

“…….”

“만약 그렇다면 그 녀석이 여기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줘.”

크리스티안은 도무지 시라크 황태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시라크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레이를 데리고 멀리 떠날 거다. 경은 모르는 척해주기만 하면 돼.”

“무슨 생각입니까?”

“저 녀석이 사라지면 폐하는 분명히 동요하시겠지. 그렇게 되면 나를 폐위하실 생각도 못 하실 거 아냐? 꼴 보기 싫은 녀석을 치워버릴 수 있게 되는 것도 기쁘고!”

시라크는 일부러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레이를 쳐다보았다. 고통스럽게 움츠리는 모습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시라크가 아는 노예는 오만방자하고 황태자조차 거침없이 내려다보는 놈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경, 이들에게 레이를 넘겨!”

검은 옷의 사내들이 다시 한 걸음 나왔다. 저런 수상한 놈들에게 절대 레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크리스티안은 레이를 끌어안았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시라크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고 솔직히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말을 길게 하기엔 상황이 너무 급했다.

“그럼 떠나! 최고 한 시간, 폐하께서 너희의 부재를 모르게 해줄 테니까!”

크리스티안은 즉시 레이를 안고 일어났다. 그가 떠나기 직전 시라크가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크리스티안은 공중에서 낚아채었다. 잘그락거리는 다섯 개의 보석. 마정석이었다.

“녀석에게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해!”

“…….”

크리스는 잠시 시라크 황태자를 보다가 돌아섰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 * *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어 레이는 눈을 떴다. 주위 풍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열 때문에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레이는 주위를 확인하려고 애쓰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으…….”

레이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만 해도 낮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깊은 밤이었다. 그냥 낮에서 밤이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하루 이상 시간이 지났고 아주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보이는 것은 발치의 작은 모닥불뿐이었다. 레이는 애써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더 둘러보았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 크리스티안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이 있어야 할 텐데 모든 것이 너무 고요했다.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크리스티안이 바로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주었다.

“정신이 드나?”

“여기는?”

레이는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눈을 연이어 끔뻑이며 묻자 크리스티안이 대답했다.

“너는 자유다. 아직 완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좀 더 멀리 이동하지 않으면…….”

“아……? 무슨 소리…….”

레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눈을 떴다. 그는 크리스티안의 팔을 붙잡았다.

“뭐, 뭐야. 지스카르는……? 뭐, 뭘 한 거냐,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전혀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는 어쩐지 화까지 나서 소리쳤다.

“아니면 그대로 있는 게 좋았다는 거냐?”

“시끄러워! 당장 돌아가야 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도망쳐 버리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형당할 거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은 일이 있을지도……. 어쨌든 돌아가야 해. 지스카르에게 돌아가야……!!”

“뭐라고? 그런 것 때문에 여태 이러고 있었던 건가? 기회가 오면 언제고 부모를 버릴 수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거 놔! 빌어먹을!!”

레이는 크리스티안을 쳐내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일이 쉽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인 팔이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너무 무력해서,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크리스티안은 소리 질렀다.

“레이! 어째서!”

“시끄러워. 시끄러워!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어서,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지만 자상한 사람이라서……. 나는 행복했다. 행복했어. 그러니까 그들은 내게서 대가를 받아갈 자격이 있어. 내가……. 내가……!”

녹색 평원이 펼쳐진 아름다운 대지, 스트라스여! 어린 레이는 가끔 오래된 고국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도 낡아빠진 노예 숙소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쓰디쓴 독차를 마셨을 때의 기억 따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꿈만 꾸었다.

버둥대던 팔에 힘이 풀렸다. 레이는 기력이 다해 의식을 잃었다. 크리스티안은 실신한 레이를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일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를 안는 것 외에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뜬눈으로 얼마나 시간을 보냈던가.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들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일단 품에 안고 있던 레이를 바닥에 누였다. 레이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기에 옷으로 간단히 닦아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작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원래는 해가 뜨기도 전에 떠나려고 했지만 계획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다. 그는 무작정 근방을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웠다. 대충 양이 차자 그는 다시 레이를 눕혀놓았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우뚝, 크리스티안은 멈추어 섰다.

인상적인 역광이었다. 아침 해를 받으며 그가 서 있었다. 레이는 천천히 돌아섰다. 녹색 눈동자가 크리스티안을 발견하고 웃음기를 띠었다.

“이제 왔군. 혹시 마정석은 가지고 왔느냐.”

“떠나겠다는 뜻인가?”

크리스티안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딱딱한 태도와는 반대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레이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내가 요 근래 너무 감상적이 된 모양이다. 좀 추했더냐?”

여전히 상처투성이였기에 레이는 부축을 요구하며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황족을 대하는 예우로 매우 정중하게 레이를 수행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어디로…….”

레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스트라스에 가볼까?”

크리스티안이 흠칫하자 레이는 어깨를 들썩였다.

“왜? 정말로 스트라스의 첩자를 도주시켰다 싶어서 신경이 쓰이나?”

“……이제 와서 무슨.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가?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이번에는 레이도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이름에 대해 시시하게 질문이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싱긋 웃었다.

“글쎄다. 고향이라.”

레이는 고개를 들어 널리 굽어보았다. 아침 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났다. 크리스는 그 모습이 이를 데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만 가자.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은 기꺼이 명을 받들었다. 태양이 대지에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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