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43)

12.

던필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밤이 되자 그림자가 늘어져서 주위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시체만 남은 무덤처럼 모든 것이 끔찍하게 적막했다. 던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이 엘 파셔의 중심이며 정점,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리던 황제궁이 맞단 말인가?

이윽고 황제의 침소 앞에 당도했다. 친위기사들이 던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떤 자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폐하의 분부십니다.”

던필은 보초의 말을 무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독대를 허락해 주십시오!”

“던필 경. 돌아가 주십시오.”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폐하!”

던필은 갑자기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친위기사 둘과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버럭 소리쳤다.

“지스카르! 나 좀 보자고!!”

그가 무엄하게도 반말로 소리 지르는 걸 보고 친위기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였다. 던필이 황제의 친우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계속 반응이 없자 던필은 갑자기 황제의 침소 문을 발로 냅다 걷어차서 열어젖혔다. 보초를 맡은 기사들은 일순 자기 본분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던필은 즉시 방 안으로 뛰어들어 가 문을 닫았다.

“던필 경!!”

“그냥 소란 떨지 말고 밖에서 대기해. 나 무기 없이 들어왔다! 소드 마스터인 폐하께서 나 하나 제압 못 하실까!”

밖에서 소리치던 기사들이 조금 잠잠해졌다. 어쩔 수 없이 황명을 따르고 있지만 그들도 던필처럼 답답한 심정인 것이 분명하다. 잠깐이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던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난 뒤 던필은 겨우 지스카르를 발견했다. 그는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피딱지가 붙은 왼손이 눈에 뜨였다.

언제부턴가 그의 왼손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언제부터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레이를 지켜줄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레이가 상처 입을 때마다 그의 왼손에 상처도 늘어났다. 누구도 감히 황제를 해할 수 없었다. 그를 해할 수 있는 오직 그 자신뿐이다.

던필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자해라니.

“지스카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네가 이 방 안에 처박혀 있은 지 벌써 보름째다. 지금 나라 꼴이 어떤지 알고 있어? 마크시 공작이 마치 자기 세상인 양 날뛰고 있단 말이다!”

지스카르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던필을 보았다.

“짐이 언제 네 출입을 허락했지?”

“네 허락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어. 네가 그따위니까 기사들 기강도 다 흐트러진 거지.”

“입 닥치거라. 좋은 말로 할 때 여기서 나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던필은 와락 주먹을 쥐고 지스카르에게 달려들었다.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로 선 자리에서 그의 주먹을 붙잡았다. 던필은 잠깐 놀랐다. 황제가 워낙 피폐해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주먹이라도 조금은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스카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던필의 주먹을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일순 뼈까지 부서질 것 같아 던필은 간신히 비명을 삼켰다. 그때 지스카르가 그의 주먹을 쥔 채 팔을 아래쪽으로 꺾었다. 인간 같지 않은 엄청난 힘 때문에 순간적으로 팔을 꺾은 것만으로도 던필은 균형을 잃었고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혔다.

“으악!!”

쿠당탕.

던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냥 엎드린 채로 바닥을 쾅 내려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상대가 안 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제기랄. 제기랄!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힘은 지랄 맞게 세서.”

“짐에게 지금 검이 없는 것을 행운으로 알아라.”

지스카르가 머리 위에서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던필은 연이어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머리를 쾅쾅 땅에 박았다.

“빌어먹을. 어째서!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괴로운 것이 너 하나뿐인 줄 알아? 나야말로 죽어버릴 것 같단 말이다. 크리스, 크리스티안.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지? 너는 내 마음을 알고 있잖아.”

던필은 바닥에 처박은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크리스티안에게 연심을 품었지만 딱 한 번 입이 무거운 황제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을 뿐 그는 모든 것을 어둠에 묻었다.

남자와 남자 간의 성애는 흔하지만 그래 봤자 뒤에서 횡행하는 일일 뿐 남녀처럼 정식으로 부부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남자 간의 사랑엔 자식도 없었다. 때문에 현실을 깨달은 던필은 일찌감치 모든 것을 포기했다.

마음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항상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그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것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단 말인가.

크리스티안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크리스티안이 레이를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황제의 첩을 데리고 도주. 울펜가모트의 주인이 될 인물이고, 황제의 친위대장인 자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죄였다.

던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제발, 제발……. 들어주십시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그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어 올렸다.

“제가…… 크리스를 죽여서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감히…… 신하 된 몸으로 주군의 것을 탐한 그놈을, 군주를 배신한 그 파렴치한 놈을! 제가 이 손으로 죽여서 폐하의 발밑에 바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레이를 죽이십시오. 그를 죽이고, 다시 엘 파셔의 위대한 통치자가 되어주십시오!”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으나 던필은 끝까지 성대를 쥐어짰다.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소리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해야 할 일은 명약관화했다. 죄인들은 죽어야만 하고, 엘 파셔는 강력한 전제 군주가 다시금 군림하는 것으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갈라진 목구멍으로 피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그것만이 틀림없는 바른길이었다.

지스카르는 깊이 조아린 던필을 극히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크리스티안을 죽이는 것은 네가 아니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네게 보여주지.”

던필은 무릎을 꿇은 채 황제의 뒷모습을 보았다. 등줄기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 * *

실로 오랜만에 지스카르 황제가 조의에 얼굴을 내밀었다. 마크시 공작이 가장 먼저 나서서 황제의 복귀를 반겼다.

“황제 폐하! 그간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제 쾌차하셨습니까?”

마크시 공작이 황제의 우환을 미친 듯이 기뻐하며 새롭게 판을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지적하는 자가 없었다. 황제파의 최고 수장인 그랜트 공작마저 입을 다물었다. 울펜가모트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한 노예와 크리스티안은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소 놀란 눈으로 시라크 황태자를 보았다. 황제의 앞에만 서면 항상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던 황태자가 매우 불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이 시라크 황태자의 당당한 성장을 크게 기뻐하며 말을 이어받았다.

“크리스티안 그놈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당장 놈을 잡아들여 오체분시하고, 특히 울펜가모트 가는 풀 한 포기까지 모조리 불태워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울펜가모트에 죄를 물어야겠지.”

지스카르 황제가 처음 입을 열었다. 마크시 공작은 말은 저렇게 해도 울펜가모트 공작가에 관대한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울펜가모트 공작은 황제의 가장 큰 우방 중 하나였다. 아무리 후계가 미친 짓을 했다 해도 그냥 버리기는 아주 아까운 패다. 황제가 울펜가모트를 싸고도는 동안 그는 또다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을 터였다. 마크시 공작은 몹시 흡족했다.

그때 황제가 죄인을 들이라고 명령했다. 회의장의 문이 열리자 귀족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근위병이 울펜가모트 공작을 끌고 와서 무릎을 꿇렸다. 며칠간 고초를 겪어 언제나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은발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공작이 스스로 고개를 들도록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병사가 공작의 턱을 잡아서 강제로 얼굴을 들게 했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수치심에 이를 으득 물었다.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군신을 거느리던 엘 파셔 3대 공작 중의 하나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올린 긍지와 명예가 일거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크리스티안이 황제의 첩을 데리고 달아났다고? 악몽이다. 악몽이라면 이보다 더 끔찍한 악몽은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가 손짓을 했다. 그제야 병사는 공작을 놓고 물러났다.

“울펜가모트 공작. 크리스티안은 그대에게 어떤 존재인가?”

지스카르 황제가 물었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놈은…… 송구하옵게도…… 저의 친자식입니다.”

“그래서 놈을 어떻게 처분해야겠는가?”

황제는 여전히 무심하거나 냉담해 보였다. 하지만 울펜가모트 공작은 황제의 진노가 엄청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차가운 시선이 통증처럼 뜨끔뜨끔 느껴졌다.

황제는 무수히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죄를 범한 노예를 내놓지 않았다. 그자를 지키기 위해서 사실상 황권까지 내팽개쳤다. 그런데 권좌보다 아꼈던 자를 가장 신뢰하던 기사에게 뺏겨버렸다.

크리스티안. 울펜가모트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황제의 분노가 없었더라도 공작 본인부터 아들의 만행에 치가 떨렸다.

“폐하. 그놈을 찾아내어 사지를 찢어 죽이십시오. 감히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다니. 그놈이 울펜가모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놈의 시체는 전부 개의 먹이로 줘버리십시오!”

“잘 말해주었다. 공작이 진정으로 이 일을 수치로 여긴다면 크리스티안을 그 손으로 찢어 죽여라. 네 손으로 놈의 찢어진 시체를 개의 먹이로 던져라. 바로 짐의 눈앞에서!”

몹시 분개하던 울펜가모트 공작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장내의 귀족들도 모두 아연실색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아비에게 친아들을 찢어 죽이라고 한 것인가?

울펜가모트 공작이 본인의 입으로 크리스티안을 능지처참하라고 말했다.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흔히 내려지는 형벌이다. 하지만 형의 집행을 아비인 그가 직접 행하는 것은 또 이야기가 달랐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떨리는 눈으로 황제의 진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농담 삼아 그냥 해봤을 리 없다. 그는 어렵사리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마, 말씀대로……. 그것으로 가문의 수치를 씻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말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연히…… 명심할 것입니다…….”

“가둬라.”

병사들이 다가왔고 울펜가모트 공작은 퀭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스카르 황제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죄인의 신분으로 두 발로 당당히 걸어 나갈 생각은 마라. 근위병은 창으로 공작의 다리를 꺾으라.”

병사가 황명을 받고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창으로 울펜가모트 공작의 오금을 내려쳤다. 공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병사들은 공작의 팔을 붙잡아 질질 밖으로 끌어냈다.

엘 파셔를 호령하던 3대 공작, 그의 말로가 매우 비참했다. 귀족들은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 회장 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크시 공작조차 안색을 굳혔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폐하……. 폐하께서 격분하신 이유를 저 역시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울펜가모트를 엄벌하겠다고 결심하셨다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공작의 목을 치는 편이 낫습니다. 당대 가주가 처형당하는 것, 그것이 울펜가모트에 내려지는 가장 큰 벌이 될 것입니다.”

공작이 황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먼저 시작하자 다른 귀족들도 나섰다.

“폐하, 이성을 찾으십시오. 공작의 처벌은 제국법에 따라야 할 줄로 압니다.”

“마크시 공작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회의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황제파 귀족들조차 황제의 결정에 이견을 제기했다. 그때 말석에 서 있던 자가 분위기가 과열된 틈을 이용해서 과감히 앞으로 나섰다. 평소엔 발언권도 거의 없는 군소 귀족 중 하나였는데 야욕이 과해져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님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하명하신 방식은 지나치게 잔인해서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자칫 역사를 통해 전해져 후세에 수치로 기억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울펜가모트 공작은 마크시 공작 각하의 말씀에 따라 깨끗하게 목을 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는 어느새 자기 말에 취해 제법 길게 발언을 이어갔다. 지스카르 황제는 그가 말을 모두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상석에서 몸을 일으켰고 허리에서 느리게 검을 뽑았다.

“재미있군.”

황제는 즐겁다고 말했다. 그리고 턱을 들고 낮게 웃었다. 과묵한 황제가 소리 내서 웃는 일은 정말로 드물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귀족들은 소름이 끼쳤다. 결코 웃을 만큼 즐거운 상황이 아닌 탓이다.

황제가 웃음을 그쳤다. 그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지고 죽음보다 차가운 분노가 떠올랐다.

“크리스티안도 그렇고, 짐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으면 이런 놈들까지 방자하게 입을 놀리는 것이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충심에서 올린 말일 뿐……!”

귀족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황제는 단번에 칼을 들어 내려쳤다.

퍽!

귀족의 머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목을 잃은 몸통이 한 박자 늦게 바닥에 넘어지고 피가 쏟아졌다.

“으아악! 허헉!”

어린 시라크가 가장 먼저 기겁하고 비명을 질렀다.

“폐하!”

“으억! 어, 어떻게 이런!!”

시라크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마크시 공작도 소스라치게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는 간신히 체통을 지키면서 목이 없는 시체를 한 번 더 보았다. 안색이 다소 파리해졌지만 그는 곧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그는 작위를 가진 제국의 귀족입니다. 비록 어전에서 모독죄를 범하였으나 정식으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여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몸뚱이와 머리를 가져가서 개의 먹이로 던져줘라.”

지스카르 황제가 마크시 공작의 말을 무시하고 명령을 내렸다. 근위병들이 서둘러 시체를 끌고 나갔다.

“폐하……!”

마크시 공작은 황제의 말도 안 되는 행태를 비판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제의 손에 들린 피투성이 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황제가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해 또 같은 짓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명분이 그의 손에 있지만 그걸로 당장 눈앞의 칼을 막지는 못한다. 지금은 때가 안 좋았다. 마크시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 상석에 앉았다. 귀족들이 마크시 공작과 똑같은 심정으로 머리를 더 조아렸다. 회의장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황제가 적막을 깨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수배령을 내려라. 그 두 놈의 손가락을 하나 가져온다면 50만 골드를 포상으로 내리겠다. 팔 하나, 다리 하나에 100만 골드를 하사하겠다. 산 채로 끌고 오는 자는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을 것이다. 그러나 죽여서 시체를 가져온 자는 머리를 으깨고 삼대를 멸할 것이다. 반드시 숨이 붙은 채로, 그 두 놈을 잡아와야 한다.”

황제는 결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다만 메마르고 무감각한 음성으로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침묵 속에 어전에 흐른 피가 번지고 있었다.

* * *

오전 회의에서 보여준 황제의 모습은 엄청난 파장을 남겼다. 던필은 귀족들을 제치고 급히 지스카르를 쫓았다.

“폐하, 이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는 대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네게 의견을 물은 기억이 없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친위기사들이 던필을 뒤로 끌어냈다. 지스카르는 더 이상 어릴 적 친구라 하여 던필을 상대해 주거나 하지 않았다.

던필을 외진 곳까지 끌고 온 친위기사들이 당분간 자제해 달라고 걱정스럽게 부탁하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던필은 얼굴을 짚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황제는 무척 냉엄하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자주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곤 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사는 동시에 존경도 받아왔다. 그는 경외받는 군주이지 절대로 폭군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명분을 얻고 제도의 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귀족들이 황제의 폭정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마크시 공작은 기세등등하던 차에 날개까지 얻은 격이 되었다.

“노예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폐하께서 다시 예전처럼 강인해지실 줄 알았더니.”

“시라크 전하?”

퍼뜩 던필은 고개를 들었다. 시라크가 주먹을 꽉 쥐고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폐하를 설득하는 게 좋을 거야. 폐하께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도 폐하를 적대하고 외조부님의 뜻을 따를 테니까!”

던필은 멍했다. 그가 아는 시라크는 황제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철없는 어린애에 불과했는데 언제부터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던필은 즉시 쓸데없는 감상을 털어냈다. 지금 같을 때 시라크의 성장은 황제에게 독이 될 뿐이다.

“입조심하십시오, 황태자 전하. 지금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발언을 문제 삼는다면 전하도 무사치 못할 것입니다.”

던필은 일부러 가장 무서운 죄인 반역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주눅이 들 거라 생각했던 시라크는 반대로 크게 분개했다.

“나는 폐하의 잘못된 행동에 화를 내고 있을 뿐이야! 내게 아버지는 하늘과 같았다. 그분이 항상 무서웠지만 그래도 존경했어. 그런데 지금의 폐하를 존경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시라크는 숨을 씩씩 내쉬다가 거친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

그가 떠난 뒤 던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복도를 지키고 있었다.

* * *

납작해서 앉기 좋게 생긴 바위를 발견했다. 나는 바위를 톡톡 두드리고 그 위에 앉았다.

“흐음, 평화로운데?”

“평화롭다고?”

마지막 오크를 베면서 크리스티안이 반문했다. 주위에 오크 시체가 열 구 정도 널려 있었고 코가 삐뚤어질 것 같은 역한 피 냄새를 풍겼다.

잠깐 소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엘 파셔에서 지스카르 다음가는 강자이면서 오크 정도는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잖아. 나는 크리스티안의 항의를 무시하고 산 아래를 가리켰다. 나무 사이로 작은 성과 영지가 보였다.

“마을마다 논과 밭이 기름지고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마물이 많은 것이 흠인 것 같지만, 황제가 주기적으로 직접 사냥에 나서던 것으로 봐서 관련 정책도 잘 갖춰놓은 것으로 보이는군. 내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이런 나라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몇 년 사이에 엘 파셔가 아주 살기 좋아졌어.”

“물론이다.”

크리스티안은 검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자니 괜한 심술이 났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로군. 지스카르가 수차례 황후파에 빌미를 주고 실정을 거듭했으니 곧 민간에도 그 여파가 있을 것이다. 그놈이 제 손으로 쌓아올린 영예를 제 손으로 망치고 있구나.”

“…….”

크리스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자 바로 다가와서 부축해 주었다. 몸을 일으키면서 낮게 한숨을 토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특별히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크리스티안이 귀신같이 그 사실을 눈치챘다.

“레이, 몸이…….”

“어쩔 수 없지……. 좀 쉬면 나을 거다.”

시들어버린 나뭇가지처럼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힘없이 크리스티안에게 의지했다. 그러다가 퍼뜩 몸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어. 어디서 신관이라도 납치해야지.”

“진짜 납치라도 해서 치유력을 빌리고 싶을 지경이군.”

“그래, 내일 마을에 내려가자.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괜찮은 신관을 물색해야겠다.”

“……진심이었나?”

크리스티안이 오랜만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삐딱하게 그를 보았다.

“뭘 정색하고 그러지? 황제의 정부를 데리고 도망친 전적도 있는데 신관을 납치했다는 죄목이 하나 더 붙는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농담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쫓기고 있는 도중이라는 것을 잊었나? 신전의 추격까지 받고 싶은 건가?”

“이래 봬도 나는 꽤 절실해. 몸이 약해지니까 정신도 자꾸 약해지려고 하잖아.”

내 말에 크리스티안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긴말할 필요 없이 지금 누구보다도 내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준비를 좀 해서, 일단은 마을로 내려가자.”

답이 없는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나는 산 아래를 가리켰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이견을 냈다.

“레이, 너무 길을 돌아왔다. 스트라스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 쪽으로 내려가서는 안 되고 여기서 남으로 이동해서 산을 더 넘어야 한다.”

“나는 이래저래 스트라스와 인연이 많지. 추적자들도 내가 스트라스로 돌아가리라 추측하고 남쪽 관문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지금 곧장 남하해서 그들의 예상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지 않으냐? 대륙의 반이 스트라스다. 북으로만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스트라스가 나오게…… 되어 있어…….”

크리스티안은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내가 열이 올라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등에 업고 급히 쉴 곳을 찾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갑자기 도망치느라 모포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밤을 보내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오늘은 운 좋게도 바람을 피할 얕은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나뭇잎을 최대한 많이 깔아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도 어느 정도 차단했다. 하지만 모포 대용으로 쓸 만한 것은 크리스티안이 두르고 있던 친위대 제복의 망토 하나뿐이었다.

처음 하루는 내가 망토를 사용했고 크리스티안은 맨몸으로 밤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강건한 기사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늦가을 산중의 밤을 버티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결국 망토를 같이 덮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품에 안고 망토를 둘렀다. 만약 평범한 성인 남자 두 명이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면 남자 새끼 둘이서 끌어안고 있어야 하다니 정말 토 쏠린다며 틀림없이 욕설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한 번씩 얼굴을 붉히고 계속 손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어정쩡한 자세 때문에 망토가 벌어져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내가 생각보다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나 보지?”

“무슨?”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 크리스티안은 의문을 표했다.

“대답부터 하시지.”

“……그다지 여자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본다만.”

“그런데 뭘 그렇게 의식하는 거냐?”

“무슨 뜻이지?”

“아니라고? 넌 던필과 끌어안을 일이 생겨도 수줍게 눈알을 굴릴 생각인가 보지.”

짜증 섞인 반문에 크리스티안은 즉시 방황하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팔과 어깨가 뻣뻣했다. 나는 한숨을 토했다.

“그래, 뭐 아무려면 어떤가. 일단 쓰러뜨려서 안아버리는 놈보단 백배 낫지.”

“나는…….”

크리스티안은 쓸데없이 변명을 하려고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다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당기고 목덜미 위의 상처에 손을 댔다. 순간 머리 꼭대기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사납게 크리스티안의 팔을 뿌리쳤다. 하지만 금세 과민 반응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목을 짚고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 그건?”

크리스티안은 표정을 크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목에 찍힌 낙인을 정확히 본 모양이다.

“성노의 낙인이다. 그래, 네게도 이 몸뚱이를 즐길 권리가 있겠군.”

“레이!”

크리스티안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산이 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지금 우리가 도망자 신세라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바로 앉으라고 손짓했다.

“농담이다.”

“해서 될 말과 안 될 말이 있어!”

“그래? 이건 지스카르가 손수 찍은 낙인이다만.”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말을 잃었다. 나는 낙인을 만졌다.

“평생 못 잊을 굴욕이었지.”

“…….”

크리스티안은 여전히 동상처럼 선 채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나는 웃으면서 다시 손짓했다.

“됐으니까 진짜로 그만 앉아.”

“폐하께서…… 그런 일까지…….”

“한심한 놈이거든.”

지금까지 엘 파셔를 잘 꾸려온 것을 보면 그렇게 한심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놈은 아주 멍청하다. 오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매번 내 앞에서 폭군 흉내를 낸다. 감당도 못 할 짓을 저지르고 매일 후회하지. 멀쩡한 왼손은 왜 뭉개나 몰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지울 수 없는 건가?”

“왜 없을까 봐. 더 심한 상처를 치료하는 게 급해서 미뤄두고 있는 것뿐이다. 다친 몸으로 치유 마법을 쓰자니 몸에 무리가 가서 기껏 아물었던 부분이 다시 벌어지고, 이래서야 도대체 진척이 없군. 역시 상처 치료는 신관이 최고인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밤이 더 깊었다.

오늘 밤만 산에서 보내고 다음 날은 마을에 내려가기로 합의했다.

* * *

거의 보름 넘게 산길만 골라 다니다가 실로 오랜만에 마을 구경에 나섰다. 나는 크리스티안의 부축을 받으며 한동안 길거리를 배회했다. 길 좌우로 가지각색의 가판대가 잔뜩 늘어서 있었다. 시장을 오고 가는 인파도 굉장히 많았다.

“산 위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뜻밖에 대단히 번화한 마을이었군. 하긴 덕분에 염색약 같은 것도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마을 구경을 하기 전에 크리스티안을 먼저 보내서 염색약을 구했다. 나나 크리스티안의 인상착의 중 가장 큰 특징이 머리색이기 때문이다.

나는 잡색이 일절 섞이지 않은 황금색 머리카락을 타고나서 평소에도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편이었고, 크리스티안도 대륙에서 매우 귀한 축에 속하는 은발을 가졌다. 반짝거리는 금발과 은발. 이래서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크리스티안이 구해온 염색약은 품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는 데는 다행히 큰 문제가 없었다.

“레이. 이렇게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걱정 마라. 실제로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있지 않은가.”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바뀌자 우리를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어졌다. 준비도 없이 산행을 강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저분해졌는데 그것도 인상을 많이 바꾸어주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씻을 수 있을 때도 일부러 씻지 않고 머리 손질하는 일도 소홀히 했다.

특히 크리스티안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세상 어디를 뒤져 봐도 크리스티안만 한 미남자는 찾아볼 수 없는데 한때 시대를 풍미하던 절세미남이 지금은 상거지가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최근 사소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인간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거 한순간이라는 것.

“음. 거지라니 실례군.”

“크리스티안, 자신을 과소평가 마라. 너는 이미 훌륭한 걸인이야.”

그때 비쩍 마른 사내가 크리스티안과 어깨를 가볍게 부딪쳤다. 사내는 당장 욕부터 했다.

“제기랄. 웬 거지들이 아침부터 시장바닥을 어슬렁거려! 냄새 밴 거 아냐?”

“…….”

사내가 지나간 뒤 나는 감상이 어떠냐고 어깨를 쿡쿡 찔렀다. 크리스티안은 웃기게도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옮겼다.

시장을 다니며 여행 시에 가장 필요했던 모포를 샀다. 원래는 무일푼이었으나 산에서 사냥한 짐승을 적당히 팔아서 그것으로 돈을 만들었다. 염색약도 그 돈으로 산 것이다.

배낭과 먹을거리, 여행에 필요한 다른 물품도 구매하며 좀 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손짓했다.

“크리스티안, 저쪽으로 가보자.”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는 게 좋다.”

“여기나 저기나 다를 게 뭐지? 내 성격 알 텐데? 기어코 내 발로 걸어가게 만들 작정이냐?”

하는 수 없이 크리스티안은 나를 부축해서 인파가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새로 벽보가 나붙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보겠다고 모여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대문짝만한 초상화부터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크리스티안과 내 얼굴이었다. 크리스티안은 그 즉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좀 기다려. 수배가 떨어진 지 꽤 되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

나는 크리스티안의 팔을 잡고 유심히 벽보를 살펴보았다. 크리스티안과 내게 현상금을 건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상금 내역이 굉장히 특이했다. 그냥 잡아오라는 게 아니다. 손가락 하나만 가져와도 50만 골드, 팔 하나, 다리 하나에 100만 골드의 상금이 붙었다.

크리스티안은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선 채 벽보에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굴색이 천천히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근처에 서 있던 노인이 불안하게 지팡이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여. 드디어 황제 폐하께서 크롬 산맥의 고블린을 퇴치하러 와주시나 싶어 좋다 하고 뛰어나왔더니…….”

노인과 아는 사이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툭 대꾸했다.

“영감. 내가 들어보니까 엄청 아끼던 남첩이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더라.”

“뭐? 그게 무슨 소리여?”

“나도 뜬소문으로 들은 거지만 저 미친 벽보를 보니 진짜인 모양이네. 그 남첩은 심지어 스트라스 첩자였대. 황제는 미치고, 울펜가모트 공작가도 첩자와 손을 잡았다고 멸문 직전이라 하고. 정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하는지. 에잇, 퉷!”

사내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런데 노인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사내의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우앗? 뭐야! 이 노인네가!!”

“닥쳐라, 이눔아! 우리 나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깟 첩자 놈들 따윈 단칼에 베어버릴 분이란 말이여! 미치긴 누가 미쳐!”

“아니 이 영감이 진짜 미쳤나!”

사내는 노인의 지팡이를 뺏어 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위 사람들이 노인처럼 아주 못마땅한 분위기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퉁퉁한 중년 여인이 주먹을 휘두르며 으름장을 놨다.

“너 함부로 그런 소리 하다간 큰일 난다. 폐하께서 안 계셨어봐. 너 같은 건 벌써 어릴 때 고블린한테 물려가 죽었어!”

“이익. 나는 그냥 소문 들은 대로 말한 것뿐이란 말이다!”

사내는 빽 소리를 지르곤 멀리 도망쳐 버렸다.

잠시 소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능한 한 빨리…… 마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군. 위장을 해도 언제 눈에 띌지 알 수 없다.”

“뭐, 일단 다른 데로 이동하지.”

시장을 벗어나자 큰 광장이 나타났다. 중앙에 분수대가 있고 의자도 배치되어 있었다. 크리스티안에게 잠시 앉아서 쉬어 가자고 요구했다. 우리가 의자 쪽으로 걸어가자 근처의 다른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치로 보아 지저분한 거지들과 같이 있기 싫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주변에 듣는 귀가 없어져서 오히려 일이 잘 되었다.

크리스티안은 나를 부축해서 먼저 앉히고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그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벽보를 본 뒤로 계속 기분이 안 좋은 것 같군.”

“원래는 그런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이런…….”

“너는 어째서 황제가 패악을 일삼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지? 지스카르를 배신한 주제에 이제 와서 다시 그의 기사 역을 하겠다는 것이냐?”

“그건…….”

크리스티안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쓰게 웃으며 크리스티안을 괴롭히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는 녀석인데 계속 기운이 없으면 나만 손해다.

“벽보의 내용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너는 당장 잔인함에만 주목하는 것 같은데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나?”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들어 내 말에 주목했다.

“사살하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부상이 심하긴 하지만 마정석이 있는 한은 절대 만만치가 않을 텐데 이 몸을 생포하겠다고? 심지어 황제의 친위대장이었던 네가 함께 행동하고 있지 않나. 여기에 마지막 단서를 봐라. 만약 생포하지 못하고 사살해 버리면 머리를 으깨고 삼대를 멸하겠단다.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 자살하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스카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미처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한 것인지, 일단 나를 산 채로 붙잡는 게 최우선이라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것인지, 또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내가 신이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처음 수배령이 내려졌을 때보다 내가 훨씬 안전해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벽보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턱을 괴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침묵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크리스티안은 의문을 표했다. 그렇지만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말이 나올 때까지 대기했다.

나는 일을 하는 동안 방해받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크리스티안의 신중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것 외에도 그는 여러 면에서 참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크리스티안.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무슨?”

“현재 스트라스의 정세는 어떠하지? 그래, 이참에 내가 죽은 직후부터 스트라스가 어떤 식으로 돌아갔는지 대략적으로 알려다오.”

크리스티안은 새삼 신기한 눈으로 날 보았다.

“그간 스트라스의 상황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던가?”

“물론 궁금했지. 그런데 어쩐지 기회가 안 닿아서. 어쨌거나 나는 노예가 아닌가?”

“그래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소식을 알아낼 수 있었겠지.”

“나는 빈첸시오 성에서 태어나 당시의 생활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예였지만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나도 그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스트라스의 모든 것이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 그냥 그뿐이다.”

부모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잠시 미뤄두었던 현실이 차갑게 닥쳐왔다. 나는 끝내 지스카르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될지 몰랐다. 어쩌면 벌써 예전에 처형당했을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래서 스트라스는?”

크리스티안은 입을 열었다.

“휴전협정 직후 레브노아드 황태자가 암살당한다. 당시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온 나라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독살한 범인으로 에드리히 11황자가 지목되었다. 11황자는 극구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동기나 정황이 너무 뚜렷했다. 그는 꼼짝없이 처형당할 상황에 처했지. 그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적극적으로 에드리히 11황자를 두둔하고 나선 것이다.”

“폐하께서?”

나로서도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되물어보았다.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몹시 총애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정말 11황자가 황태자를 독살하였다면 누구보다도 분노할 사람이 바로 황제였지.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11황자의 결백을 믿는다고 했다. 다시 한번 범인을 색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캘러웨이 대공이 진범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후 대공은 알몸으로 성난 군중에게 던져져 몰매를 맞고 죽었다.”

크리스티안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지. 캘러웨이 대공은 단지 희생양일 뿐이라는 걸.”

나는 약간 눈을 내리깔고 다시 말했다.

“계속해 봐.”

“황태자가 죽고, 11황자가 죽으면 황실의 혈통이 끊긴다.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엘 파셔와 스트라스는 바로 수일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치르던 사이였다. 스트라스의 황제는 레브노아드의 원수를 갚는 일에 앞서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이야기를 멈추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진실은 어떻지? 너를 죽인 것은 에드리히 11황자가 아닌가?”

“……글쎄. 아마도. 나는 에디에게 죽었지.”

자신도 모르게 에디라고 불러놓고 껄끄러움에 입을 닫았다. 크리스티안도 습관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애칭에 주목하고 있었다. 날 죽인 놈이 잘나간다고 생각하니 썩 좋은 기분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드리히가 처형당하지 않고 황제로 즉위한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엘 파셔를 적으로 둔 채 황위가 비어버리면 스트라스는 뿌리부터 흔들렸을지도 몰랐다.

“옛날이야기는 그만 됐고 스트라스의 최근 상태는?”

“사실 스트라스는 예전부터 정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11황자, 즉 에드리히 현 황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계속 공포정치를 펼쳐 왔다. 피 냄새가 가실 날이 없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가 없지.”

“공포정치? 그 유순하던 녀석이?”

“유순……? 내가 아는 에드리히 황제는 유순함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다.”

내 기억 속의 에드리히는 항상 주눅이 들어서 제대로 큰 소리 한 번 내질 못하는 아이였다.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게 본성이었다는 말이 되나.”

“재위 초기부터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많았던 탓도 있겠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복수를 명분으로 열 번 이상 난이 있었다. 반란은 모두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강압적인 정책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 감히 내 이름을 내세워 반란을 획책해? 이 씹어 먹을 것들이!”

“……단순한 명분이었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복수를 원했을 수도 있지. 사실 레브노아드 황태자를 진심으로 따르던 충신이었을 확률이 훨씬 높을 텐데?”

“어차피 스트라스에 황족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놈을 황좌에 앉혀놓고 스트라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수밖에. 재위 초기에 반란이라니, 엘 파셔 놈들이 아주 좋아 죽으려 했겠구나. 그런 일에 내가 찬성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

크리스티안은 미묘한 입장인 듯했다. 바로 자기가 엘 파셔 놈이니까.

“너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스트라스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는 않나?”

“배신당한 것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내가 무수히 형제들을 죽였듯이 내 차례도 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스트라스 근황 이야기를 하랬는데 왜 자꾸 죽은 지 십 년은 넘은 내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다 지난 일에 무의미하게 감상에 젖는 것은 그쯤하고 나는 정보를 정리했다.

“확실히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구나. 아주 평화로워. 전에는 기침이 나기만 해도 적국의 상황을 살펴보고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스트라스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스카르가 허튼짓을 계속해도 시간이 있겠어.”

“시간이 있다니?”

“바로잡을 시간.”

나는 턱을 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마을 주민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벌떡 일어나 지스카르의 욕을 냅다 날리면 적어도 십수 명 정도는 날 노려보는 자가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지스카르, 현 황제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일반 백성들이 많다. 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한 덕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마물 사냥이 크게 주효했던 것 같다. 마물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이 지스카르의 무위에 직접적으로 혜택을 보았고 그 상태로 십여 년이나 흘렀다는 거지.”

“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백성들이 황제를 지지하고, 귀족 중에도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일단 소드 마스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봉자들이 상당하겠지. 황권이 많이 위태로워졌지만 아직까지는 바로잡을 기회가 있어.”

“레이.”

크리스티안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폐하께서 황권을 되찾길 원하는 건가? 조금 전에 네가 했던 질문을 이번에는 내가 하지. 어째서 황제 폐하에 관해서 신경을 쓰는 거지?”

나는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내게 지스카르에 대한 질문을 하는 그의 얼굴이 자못 진지했다.

검지를 딱 펴서 크리스티안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질투? 다른 남자는 생각지 말라 이거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크리스티안은 크게 정색을 했다.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이 아주 웃겼다.

좀 아쉽긴 했다. 단순한 질투라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르겠는데. 크리스티안은 꽤나 탐나는 인재니까.

“그냥 두루두루 생각해 보았다. 자칫하면 지스카르만 망하는 게 아니라 온 나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 아니냐. 스트라스가 당장은 여유가 없다지만 만에 하나라도 군사를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고. 에드리히가 포악하다면서?”

“그냥 생각만 해보았을 뿐이라고?”

나는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냥 다른 곳을 보았다.

광장 한가운데의 분수에서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분수 꼭대기에는 멋지게 조각된 드래곤의 석상이 있었다.

오랜 옛날 대륙 여기저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종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번성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그들은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정령을 부리는 아름다운 엘프, 뛰어난 광부이며 대장장이인 드워프, 장난을 치길 좋아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페어리 등. 시간이 지날수록 이종족에 대한 환상은 부풀려져 갔는데 그중에서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연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수십 미터의 거체를 가지고도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하며, 고차원의 지식이 요구되는 신비한 이능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오랜 옛날 인간들이 드래곤의 전능한 힘을 따라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마법의 원류가 되었다.

“나도 아직 드래곤은 본 적이 없는데. 내겐 그런 행운이 오지 않으려나.”

“말하는 방식이 특이하군. 드래곤 외에 다른 건 본 적이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만.”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어쩐 일로 크리스티안이 날카롭게 핵심을 찔렀다. 나는 시침 뚝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아. 어디서 신관을 하나 구해야 할 텐데…….”

분수를 올려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웬 사내가 바삐 지나가다가 어깨를 세게 쳤다. 다 죽어가는 내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윽!”

“레이!”

크리스티안이 서둘러 달려와서 나를 부축했다. 가만있는 사람을 친 사내는 적반하장격으로 먼저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이익, 재수 없게……! 이거 아까 본 그 거지새끼들 아냐?”

짜증을 내던 사내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소리쳤다.

“잠깐. 이거 낙인이잖아?”

쓰러질 때 옷이 흐트러지면서 목이 드러났다. 사내와 동행하던 순한 인상의 청년도 다가왔다.

“정말인데요? 제이크 씨, 이거 성노 낙인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벌써부터 밑바닥까지 굴러먹었군요.”

순간 크리스티안이 주먹을 빠득 쥐고 일어서려고 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놈들을 때려눕히는 곳은 곤란했다.

제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키 크고 비쩍 마른 사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노예가 왜 이런 곳에서 거지꼴을 하고 어슬렁대고 있지? 주인은 누구냐?”

“…….”

“왜 말을 못 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 이 새끼들 도망쳤지?”

주위 사람들이 웅성대며 이쪽을 주목했다. 일단 주눅이 든 척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봤다. 현상수배범이라고 생각지는 못하고 단순히 도망친 노예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아직은 주목받아도 괜찮았다. 그때 유순해 보이는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도망친 노예가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요? 이런 소식은 즉시 우리 쪽에 날아오잖아요.”

“그것도 그러네.”

“…….”

두 놈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황제를 시해하려고 숨어든 스트라스의 자객으로 수배되었지 도망친 노예로 수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놈들이 좀 덜떨어진 놈들이라 삽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끌고 가자. 이놈 눈 좀 봐.”

제이크는 내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또 한 번 크리스티안이 움직이려 하는 순간 뒤에서 안 보이게 팔을 붙잡았다. 자기 목이 날아갈 뻔했다는 것도 모르고 제이크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눈동자가 녹색이다. 이거 진짜 귀한 색인데. 게다가 꾀죄죄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목구비가 번듯한 게……. 옳지! 경매가 코앞인데도 아직 괜찮은 물건을 못 구해서 진땀을 빼고 있었는데 하늘이 주신 기회군!”

“겨울 경매에 내시려고요? 얼굴색이 창백한데다가 비실거리는 것이 무슨 병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

“비실대는 건 못 처먹어서 그런 걸 테지. 한두 달 잘 먹이면 금방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를 거다. 아서, 저놈들 다 끌고 와.”

이제 보니 이놈들 노예 상인인 모양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노예를 경매에 내놓겠다고 말하는 꼴을 보니 질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나는 으슥한 곳을 눈짓하고 손으로 목을 가리키며 적당한 데서 처리해 버리라는 뜻을 전했고, 크리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들 재수도 오라지게 없구나. 어찌 용케 도망을 친 모양인데 이런 데서 갑자기 붙잡히다니.”

아서라는 이름의 청년이 키득거리면서 말했다. 그는 어느새 단검을 꺼내 내게 일어나라며 위협하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장소까지만 얌전히 따라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으.”

하지만 아까 조금 부딪히고 바닥을 굴렀다고 그러는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아래가 어지럽고 열도 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이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부축했다.

기분 좋게 먼저 출발했던 제이크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내 상태를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 녀석 다 죽어가잖아? 좋다 말았네. 저런 건 못 팔아먹는데.”

“제이크 씨가 먼저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시끄러워! 데려가서 상회의 돌팔이 놈한테 한번 보여보자.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있겠지. 으으, 별 탈 없어야 할 텐데.”

제이크는 투덜거리면서 돌아섰다. 그 순간 머릿속에 번쩍하고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크리스티안을 바짝 끌어당겨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따라가자.’

‘뭐라고?’

크리스티안은 당연히 매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이크가 벌컥 소리 질렀다.

“뭐야! 네놈들 어디서 귓속말이야!”

“형에게 업어달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연약한 소년 연기를 하며 크리스티안에게 매달렸다. 제이크는 짜증 어린 얼굴로 노려보다가 내가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는 이내 허락해 주었다. 크리스티안은 내 말을 따르기로 결심한 듯 잠자코 나를 등에 업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4층짜리 거대한 건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상회였다. 직원들이 제이크가 들어오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제이크는 보기와는 달리 상회에서 제법 직위가 높은 인간 같았다.

“뭘 꾸물거려?”

주위를 탐색하고 있자니 제이크가 성질을 부렸다. 제이크가 독촉을 하면서 곧바로 직행한 곳은 씁쓸한 고약 냄새가 가득한 약방이었다. 크리스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등에 기대어 피식 웃었다.

노예를 파는 것이 목적인 노예상회는 손해가 나지 않을 정도로 노예의 건강 상태를 관리했다. 또한 가격대가 높은 노예는 의원이나 때로는 신관까지 불러 제대로 관리를 하기도 했다. 제이크가 나를 아주 비싸게 쳐주는 것 같기에 거기에 기대를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규모가 큰 노예상회인 만큼 투자도 많이 하지 않을까.

“고약사 어딨어! 돌팔이 놈아!”

제이크의 고함 소리에 낡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서둘러 뛰어나왔다.

“무슨 일입니까?”

“저놈 상태 좀 봐라. 어디가 아픈 거지? 진짜 무슨 병에 걸린 거냐?”

“아, 예.”

고약사가 내게 다가와서 옷을 벗기려고 했다. 물론 순전히 진찰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여기에 또 반응했다. 그는 약사를 거부하고 나를 내려놓지 않으려고 했다. 제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저놈은!”

나는 크리스티안을 밀어냈다.

“형, 치료해 주신다잖아.”

“하지만…….”

나는 어렵사리 걸어서 스스로 약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겉옷을 벗고 셔츠까지 반쯤 벗었을 때, 약방은 적막감에 빠졌다. 성한 곳 없이 몸을 가득 새기고 있는 상처들 때문이다. 특히 양쪽 손의 손톱이 모두 빠진 것을 보고 제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병도 아니고 사고로 생긴 상처도 아니잖아. 어떤 잡놈의 새끼가 이런 짓을…….”

“왜 도망쳤는지 대충 알겠네요. 주인 새끼가 아주 더럽게 썼잖아?”

아서가 실소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크리스티안은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아주 불같은 인간이다. 덕분에 나는 크리스티안이 판을 다 엎어버릴까 봐 내심 굉장히 긴장했다.

“제이크 씨, 저런 취미를 가진 놈 주인이니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이래저래 지저분한 사정이 얽힌 거죠. 애초에 노예가 도망쳤는데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신고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마 코앞에 들이대도 자기 노예라고 주장 못 할 겁니다.”

“오! 그건 좋은 소식이구만!”

두 놈이 희희낙락하며 자기 희망 사항을 마음껏 늘어놓았다. 그동안 약사는 한눈팔지 않고 꼼꼼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제이크 님. 상처가 너무 심합니다. 내장도 다친 거 같고, 제 선에선 안 되겠는데요.”

“으으……. 좋아! 공짜로 최상급 노예를 얻었는데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누가 튀어가서 신관을 불러와라!”

그 말을 1초만 늦게 했어도 크리스티안이 모조리 뒤엎어버렸으리라.

아서가 신관을 부른다며 약방 밖으로 나갔고 제이크도 무슨 일이 있는지 급작스레 뒤를 쫓아 나갔다. 고약사도 잠시 자리를 비웠다. 둘만 남게 되자 크리스티안이 즉시 입을 열었다.

“레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레아드라고 불러라. 나는 체르도라고 부를 테니까.”

“차라리 내가 신관을 납치해 오겠어.”

“그만둬. 내 입으로 꺼낸 말이지만 신전을 적으로 돌리면 뒷감당이 정말 만만치 않아. 그것들은 신성력 외에 대외적인 이미지로 먹고사는지라 한 번 공적으로 삼겠다고 공표하면 곧 죽어도 말을 물리지 않는다. 정상적인 루트로 신관을 불러서 치료해 준다는데 감사해야 하지 않겠어?”

그때 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제이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무슨 얘길 했지? 이놈들이 심심하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데 말이야…….”

나는 급히 일어나며 우연을 가장해 탁자 위를 팔로 쳤다. 십여 개의 약병이 한꺼번에 요란하게 깨지자 제이크는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 달려왔다. 내가 약병을 전부 깨먹었다는 것에 화가 나서 나와 크리스티안이 나누던 대화는 완전히 그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 새끼가!”

제이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서가 뒤따라 들어오다가 난리통을 보고는 혀를 찼다.

“저놈이 첫날부터 일을 치는군.”

“겁도 없이 도망까지 쳤으니 처음부터 싹수가 노랬던 거지! 아서. 채찍을 가져와라. 이놈에게 잘못을 하면 어떤 벌을 받는지 이참에 보여줘야겠어!”

“제게 맡겨주십시오. 곧 신관도 오겠다, 손 사릴 것도 없네요.”

나는 아서의 손에 밖으로 끌려나갔다. 못 이기는 척 발을 끌면서 뒤편의 크리스티안을 보고 일을 망치지 말라고 눈에 힘을 주었다.

크리스티안이 과하다고 항의할 만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설혹 중간에 우리 신분이 노출되어 병사가 들이닥치더라도 부상만 회복된다면 그런 것쯤은 하등 문제도 되지 않는다.

원상복구는 바라지도 않고 여기서 조금만 몸이 나아져도 진짜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온몸이 걸레짝 같아서 뭔가를 좀 하고 싶어도 일을 시작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기다려……주십시오!”

그때 크리스티안의 입에서 조금 어색한 존대가 흘러나왔다. 제이크는 짜증스럽게 크리스티안을 노려보며 외쳤다.

“저놈은 지하방에 처넣어!”

“동생 대신 저를 벌해주십시오. 보시다시피 동생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채찍질까지 당하면 신관분이 오셔도 치료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네가 뭘 안다고 주둥이를 놀려대?”

제이크는 언성부터 높였다. 하지만 내심은 크리스티안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실대고 있는 나를 힐끗 훑어보았다. 신관이 오면 다 될 것처럼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신관이 만능인 것은 아니다.

“형은 그냥 기다려.”

제이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여기서 상처를 더 늘리긴 싫었지만, 크리스티안에게 떠넘기는 것도 좀 탐탁지 않았다.

그때 아서가 싱긋 웃으면서 나섰다.

“작은 놈이 보는 앞에서 큰 놈을 채찍질하는 건 어떻습니까? 제법 우애가 깊은 형제 같은데.”

나는 아닌 척했으나 처음으로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순하게 생긴 놈이 제이크보다 몇 배 더했다.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방법을 채택했다.

체벌은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처형당하는 광경, 체벌을 받는 장면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 노예들이 잔뜩 모인 사방이 탁 트인 뒷마당에서 크리스티안은 웃통을 벗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서가 직접 채찍을 들고나와서 이죽거렸다.

“이놈은 몸이 엄청 좋은데? 약간 느낌이 오는데. 이거 혹시 노예 병사였나?”

“체벌 받은 적도 없나 본데요. 동생과 극과 극이네.”

철썩.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살을 찢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나는 제이크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었는데 역시 보고 있기가 영 꺼림칙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제이크는 그것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야, 잘 참는데. 끝까지 잘 참는지 한번 볼까?”

“…….”

고개를 돌려도 아서의 불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는 계속 귀에 들려왔다. 스무 대를 치고 아서는 특유의 싱글대는 얼굴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구경하러 모여든 이들도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에 제이크가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크리스티안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크리스티안이 선수를 쳤다.

“별것 아니다.”

“하기야 정말로 별건 아니군.”

나는 피식 웃으며 크리스티안의 등을 툭툭 쳤다. 등가죽에 거미줄 같은 상흔이 남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진짜 상처는 별것 아니다. 내 상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기사니까 상처에도 익숙할 것이다. 그래도 채찍질을 당해 등이 찢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이 걸렸다.

나는 물끄러미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중에 흉터까지 깨끗하게 없애주마. 그동안은 좀 참아라.”

“두 놈 다! 언제까지 꾸물대고 있을 셈이냐! 따라와!!”

제이크가 목청을 돋워 외쳤다. 크리스티안은 방금 얻어터진 주제에 오히려 나를 부축해 주면서 일어섰다. 몇 대 맞은 놈보다 내가 더 죽을 지경이긴 했다. 제이크가 한 번 더 독촉해서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