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회: 환상현이 되다 -- >
웨일은 스스로의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했다. 비록 볼품없는 신체를 가지게 됐지만 일단 자신은 이 새로운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이다.
환상현의 옷과 바지를 걸치고 그는 학교로 향했다. 오늘부터 출석하지 않으면 학점에 지장이 있을것이란 문자가 핸드폰에 와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용건을 처리할 수 있는 물건이라니 웨일은 과학은 좋은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대학교에는 많은 강의실이 있었지만 환상현의 기억속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웨일은 하루가 다르게 환상현의 기억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얻은 사실은 공부라는 것이 자신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평화로운 시대다보니 이런 문제가 있군.'
이게 대체 어떤 곳에 도움이 된다는 걸까. 취직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답변이 도출됐다. 그러나 기억을 샅샅이 뒤진 결과 이미 능력자가 된 자신은 굳이 학과를 졸업하여 전공지식을 살리지 않아도 먹고살 길이 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능력자들은 얼마든지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돈을 벌 수 있었다. 디멘션 홀을 처리하는 것은 D.SWAT의 전담업무가 아니다. 그들은 국가기관 소속이었고 세간에는 많은 수의 민간인 처리반이 존재했다.
실적을 많이 올린팀은 거한 보상액을 거머쥘 수 있었다. 괜히 일반인들이 위험해도 좋으니 능력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능력자로 각성하는 경우는 매우 희소했다.
천 명중에 한 명 꼴, 0.1퍼센트였다. 8천만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는 약 8만여명이 능력자로 분류되었다.
"여어. 안 죽고 살아왔네? 난 또 뒤진줄 알았지 뭐야."
쉬는 시간, 앞으로의 계획을 고민하며 턱을 괴고 있던 환상현에게 한무리가 다가왔다.
덩치좋은 남학생 둘을 좌우로 끼고 나타난 남자의 이름은 박현도, 환상현이 살아생전에 증오했던 놈이었다.
그는 머리는 멍청했지만 집의 빽이 든든했다. 그리고 심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박현도는 만만한 환상현을 주기적으로 괴롭혔다.
대학생씩이나 되가지고 폭력을 행사한다는게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제 잘난맛에 사는 인간이었고 평생을 그래왔듯 만만한 환상현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빽도 없는 고아 환상현이 빽이 든든한 박현도에게 대항할 수단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성적은 환상현이 앞섰지만 저 돌대가리 자식은 성적에는 코빼기도 신경을 쓰는 놈이 아니었다.
퍽-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웨일은 화장실 벽에 몰아붙여져 한대 맞고 시작했다.
"내가 학교에 오면 나한테 인사부터 하라고 했냐. 안했냐."
'인사? 이놈과 주종관계라도 맺었나?'
다급하게 기억을 뒤진 결과 개소리라는 것이 판명됐다. 눈앞에 서있는 박현도란 놈은 그냥 쓰레기였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남을 때리는 그런 속물이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것은 겉모습만 환상현일뿐 이계의 기사 웨일이었다.
처음엔 멋모르고 한대 맞았지만 계속 맞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나저나 처참할 정도로 수련이 안된 몸이군. 저런 상대에게 한 대 맞은 것만으로 내장이 울릴 지경이라니.'
환상현의 빈약한 몸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웨일은 눈에 힘을 줬다.
"어쭈? 이새끼가 꼬나봐?"
박현도의 말에 덩치들의 주먹이 쏘아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육체는 형편없었지만 전생의 전투경험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웨일이 이런 형편없는 전투에 당해줄리 없었다.
가볍게 상체를 틀어 주먹을 피하자 덩치는 벽에 주먹을 찧었고 씨발! 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돼지들의 발차기를 피해 그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 웨일은 얼어붙은 박현도를 그대로 지나쳐 화장실 문으로 향했다.
"마지막 경고다. 다시 한 번 이 몸을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침묵, 적막이 흐른 가운데 박현도가 이마에 손을 얹고 크게 웃었다.
"이새끼가 지금 뭐라는거야. 저세상 갔다가 간신히 살아돌아오니까 눈에 뵈는게 없어졌나?"
그와 동시에 박현도의 몸에서 붉은 오라가 퍼져나왔다. 오라에 닿은 돼지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5레벨 전투오라 소유자였다. 5레벨이면 제법 준수한 수준의 능력자였다. 그런 녀석이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은 순전히 집안의 강요 때문이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졸업장은 따야한다는 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치라고?"
박현도가 능력을 발휘한 것을 본 돼지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현도에게 붙어산다고 해도 살인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평소에 박현도는 자신이 5레벨 능력자임을 과시하고 다녔는데 5레벨이면 사람을 죽이고도 남는 수치였다.
"안죽이게끔 잘 해봐."
"알았어."
떨떠름하게 대답한 돼지는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웨일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빛에는 그냥 한대만 맞고 알아서 쓰러지라는 눈빛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웨일은 그 한대조차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끼익-
화장실 문을 열고 웨일은 사라졌다. 그대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불필요한 싸움은 하지 않는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 있다면 피한다.
이것이 웨일의 지론이었다. 당연히 박현도 일행이 벙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환상현 제적 시키세요."
과사무실에 들러 쿨하게 탈퇴를 부탁하는 멘트 한마디만을 남긴채 그는 집으로 향했다. 학과에서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귀가길에 나섰다.
집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능력자 조합소를 방문했다. 병원에서 건네준 안내책자에 따르면 이곳에서 능력자들의 많은 정보가 오간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능력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레벨 3짜리 능력자가 일을 찾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능력자의 레벨은 준 민간인 취급되는 1~2단계, 그리고 제대로 능력자로 취급받기 시작하는 3~10레벨이 존재했다.
10레벨급 능력자는 전세계에서도 단 한 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미국의 10레벨 능력자는 마음대로 공기를 조종할 수 있었는데 진공으로 만드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몬스터를 살상할 수 있다고 했다.
"3레벨, 재생능력자, 검색."
자신의 능력치를 검색 키워드에 조목조목 연결시켜 검색을 누르자 하급던전 청소가 검색되었다.
하급던전은 말그대로 하급의 던전, 위험성이 낮으며 보상으로 얻을만한 것도 그만큼 좋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초보 능력자가 갈만한 곳은 이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능력이란 것은 쓰면 쓸수록 얼마든지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 1위의 진공능력자도 처음엔 3레벨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하급던전이라."
웨일이 살던 곳에서 던전은 아무 이상할 것도 없는 곳이었다. 이제 겨우 던전을 마주한지 10년밖에 되지 않는 지구의 인간들은 아직도 던전의 최하층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하며 탐사를 나섰지만 웨일은 던전의 생성의미를 잘 알고 있는 자중에 한 명이었다.
던전은 단순히 신의 변덕, 그리고 그중에는 악신과 같은 위험한 놈들이 묶여있는 감옥이었다.
현대의 인간들은 던전의 수많은 아이템들을 노리고 탐사에 목을 맸지만 웨일은 그것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깊은 던전일수록 더 위험한 것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의 실상도 이해는 해야했다. 디멘션홀의 발생빈도는 증가하고 있었고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 고열량의 열병기를 때려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던전의 아이템들은 그런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줄 중요한 열쇠였다.
때문에 요즘은 레이드팀보다도 탐사쪽이 돈을 더 잘번다는 결과도 있었다.
"저는 3레벨의 재생능력자입니다."
집에서 약 두어시간 거리에 있는 하급던전 청소일을 예약하며 자신의 스펙을 기입한 웨일은 배가 고픔을 느꼈다.
집앞 편의점에 가기 위해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안녕히가세요."
점원의 인사를 들으며 가게를 나섰고 집으로 가는 경사낮은 오르막길을 걷고 있을때 뒤에서 부다다당 하는 소음이 들렸다.
'뭐지?'
고개를 돌린 순간 웨일은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리는 밝은 빛에 눈쌀을 찌푸렸다.
콰앙-!
끼이익-
먹거리를 담고 있던 봉투가 공중에 흩뿌려지며 웨일은 공중에서 3바퀴 정도를 굴렀고 땅에 풀썩 하고 떨어졌다. 전신을 달리는 엄청난 격통, 손가락 하나 꿈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브레이크도 밟지 않은채 그대로 멀어져 가는 스포츠카, 운전석의 남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웨일은 왠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낮에 본 그 자식인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몸의 주인이 무슨 원수를 졌다고 사람을 죽이려든단 말인가. 실소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지금 자신은 절대기사 웨일이 아니었다. 그저 경험만 남은, 완전히 새로 시작을 해야하는 웨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환상현이기도 했다.
'그래. 일단 내가 환상현임을 인정하겠다.'
3레벨의 미약한 재생능력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좀 전의 스포츠카는 족히 80은 되는 속도로 엑셀을 밟아 달려들었으니까.
인적이 드문 거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투성이로 땅에 쓰러진 환상현을 확인한 주민이 앰뷸런스를 불렀다. 응급차에 실려가던 그는 생각했다.
몸을 얻은 이상 환상현의 거지같은 과거를 청산해 주겠다고.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여 주겠다고 말이다.
============================ 작품 후기 ============================
10년전 몬스터의 대공습으로 사회의 상식도 많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권력자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빽이 좋아도 같은 학과동기를 차로 치고 다니는 망나니는 1대공습 이전이었으면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