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10화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 걷는다면 다 리가 아프다. 마찬가지로 드래곤의 몸도 오래 날면 날개가 저렸다.
어린 신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 겠다는 것인지 고작 1시간 정도 비 행을 했을 뿐인데 날개에 쥐가 날 것처럼 격한 통증이 몰려왔다.
천영은 쉬엄쉬엄 날면서 숲을 쏘아 다녔다. 한계까지 비행을 하다가 휴 식을 취하면 그 피로도 때문에 몬스
터와 조우했을 때 제대로 피할 수 없으므로 짧게 30분 씩 끊어서.
그렇게 3시간 정도 적당히 몬스터 를 사냥하며 날다보니 저 멀리 천영 이 처음 깨어났던 장소가 시야에 들 어왔다.
온통 황토색의 세상. 먼지가 휘날 리고 모래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자연 현상이 가끔 발생하는 곳. 처 음에는 몰랐지만 도시에서 책을 읽 으면서 알아보니 천 년도 더 전에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흔적이라고 한다.
이곳은 대도시 레덕슨과도 꽤나 가 까운 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고자 하
면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인간들은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 다.
과거 대규모의 전쟁 이후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려 더 이상 식물도 자 랄 수 없게 되고 짐승이나 몬스터조 차 서식을 하지 않게 된 죽음의 땅. 물론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하는 천영에게 있어서는 그저 쉼터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지만 레덕슨 대도서관에서 읽은 역사책에 의하면 이곳에 출입한 자들은 저주를 받아 금방 목숨을 잃게 된다는 미신이 떠 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물론 전부 구라겠지만.’
이곳에서 먹고 자고를 반복한 날짜 만 따져도 거의 2주는 넘게 지냈는 데 천영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 다.
그런 미신이 전부 거짓말이라는 소 리. 물론 인간들이 그런 것들을 모 를 이유는 없었다. 다만 굳이 찝찜 한 저주가 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도 이곳을 찾아올만한 이유가 없 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 이기도 했다.
전쟁으로부터 천 년,이미 폐허가 된 이곳에 올 이유가 대체 뭐가 있 겠는가?
하지만 천영에게는 다시 돌아올 만 한 이유가 하나 존재했다. 바로 던 전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넥스트를 플레이할 때와는 다르다. 이 세상에서의 던전이란 자연적인 현상이기도 했고 망자의 원한이나 강력한 몬스터에 의해 공간이 뒤틀 려 발생하기도 했으며 대마법사가 마법적인 수를 써서 만들어낸 곳이 기도 했다.
다만 던전이라는 것은 발생하는 원 인이 현재에 와서도 제대로 밝혀지 지 않았을 정도로 상당히 미스테리 한 존재이다. 하지만 단 하나는 확
실했다. 던전을 돌파하게 되면 엄청 난 보상과 더불어 넥스터들에게만 적용되는 경험치라는 것이 무지하게 쌓인다는 사실.
안시르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벌 써 그리픈에 도착해서 던전 공략에 성공한 넥스터들이 꽤 있다는 모양 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엄 청난 재화와 힘을 손에 넣었다고 했 다.
“여긴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천영은 짧은 팔로 귀를 후비적거리 며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석판 을 내려 보았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르겠지만 드래곤이 되어 민감한
마나 감지를 할 수 있게 된 천영은 알 수 있었다.
이 석판의 아래는 공간이 뒤틀린 장소 즉,던전이라는 사실을. 처음 이곳을 발견하고 뭣도 모르고 들어 갔다가 레벨 70이 넘는 해골 병사 들이나 바위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도 망쳐 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사냥이 가능했다.
천영은 석판을 가볍게 밀어내고 안 쪽으로 뛰어들었다.
[‘에스넨 전장의 잊힌 기억’에 진입 하였습니다!]
[낡고 바스라지고 먼지처럼 휘날리 며,언젠가는 잊힐 이곳을 찾은 당 신.]
[당신에게는 1032년 전,그 전장의 상처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자격이 있습니다.]
던전으로 진입하자 알림이 떴다. 넥스트에서와 별 다를 것 없는 문구 였다. 천영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 았다.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그냥 아까와 똑같은 장 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한 느낌의 폐허가 사방에 가득 했다.
다른 점이라고는 무너지는 건물이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었으며 가끔 가다 어디에선가 폭음이 들려왔고 아직까지 건재한 건물이 꽤나 많다 는 사실이다.
‘전에 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진전 된 모양인데?’
바로 옆쪽에 폭삭 무너져 내린 건 물을 보며 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분명 멀쩡하게 세 워져 있던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그때보다 상황이 많이 바 뀐 것 같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3주 전에 찾아왔을 때 보다도 한 두어 시간 정도 흘렀다는 느낌. 아무래도 이 던전은 바깥과는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모양이 었다.
‘흐음 역사 보존형 던전인가.’
가끔 전쟁터에 던전이 발생하면 과 거의 그 현장을 직접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갑작스레 던전이 발생된 그 순간부 터 ‘사건’이 서서히 흐르게 된다. 그 것이 전쟁이든 테러든 몬스터들의
습격이든 할 것 없이 사건이 발생된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 고 그 던전은 느리게 시간이 흐르다 가 사건이 모두 종결되면 흔적도 없 이 사라진다.
만약 누군가가 던전을 발견하게 되 면 그 순간부터는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갖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는 꽤나 느리게 사건이 진행된다는 소 리였다.
[Lv. 71 토우백인장]
바위로 이루어진 신체에 낡아빠진
창 하나만을 꽉 쥐고 반쯤 박살난 몸뚱이를 애써 움직이고 있는 토우 백인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렇게 약해보여도 레벨이 무려 70대이다. 보통 27레벨은 상대는커 녕 도망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수 준의 상대라는 소리.
하지만 천영의 레벨은 비록 27이 지만 그는 드래곤이다. 인간일 때에 는 감히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이지 만 드래곤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 하게 만들었다.
천영은 스킬도 하나 없는 몸뚱이지 만 오로지 자신의 신체 하나만을 믿 고 이곳에 다시 찾아왔다. 아무리
레벨이 깡패인 RPG였지만 그보다 더한 깡패는 역시 ‘종족’이 아닐까 싶었다.
‘레벨이 초기화 된 건 조금 거지 같지만……
그럼에도 드래곤이 가지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도 관심이 없 었던 탈태 시스템에 게이머들을 미 치게 만든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었 다.
몇 년 전,당시에 PVP로 꽤나 유 명한 어떤 마법사 유저가 자신보다 30레벨이나 낮은 무명의 마법사에 게 패배한 사건.
당시 패배했던 마법사는 PVP에 관 련 된 모든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고 그 전략적인 마법 선택이나 뛰어난 지각 능력,강력한 히든 스 킬들 하나하나가 그의 강함을 증명 하는 듯 싶었다. 실제로도 수많은 탱커들이 그 유저의 앞에서 패배를 선언하고 그의 힘을 인정했을 정도 였으니.
그런 유저가 30레벨이나 낮은 무 명 마법사에게 패배했다? 어이가 없 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가 밝혀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승 리했던 마법사는 ‘달빛의 마녀’라는 희귀한 종족으로의 탈태를 했던 것.
RPG 에서는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레벨조차 가볍게 상회해버리는 종족 탈태에 대해 일깨우게 해주는 중요 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유저들이 탈태를 시도했다. 정말 각양각색의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전설 속 에서만 보이던 종족들까지 나타났 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천영은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으로의 탈태에 성공했 다. 물론 흔히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드래곤은 샌드백과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강하고 위엄 있고
똑똑하면서도 고작 스무 살쯤 되는 용사 일행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는 정도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천영 은 그렇게 될 생각이 없었다. 용사 가 강한 이유는 인간으로써 끊임없 이 노력한다는 점이 한 몫 할 것이 다. 그리고 천영은 드래곤이지만 인 간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멍청한 드래곤과는 다르단 말이지.’
드래곤은 강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힘을 너무나도 믿은 나머지 소설 이나 영화 속에서는 약삭빠르고 지 능적이고 전략적이며 협동적인데다 가 끊임없이 발전하는 인간들에게
어처구니없게 털리고야 마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천영은 인간 이기 때문에 드래곤이면서도 그러한 인간의 장점을 모두 이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천영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을 랐다. 정면 승부를 시도하면 아무리 스렛 깡패인 천영이라지만 낮은 HP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던전의 상황에 맞춰 상대를 한 다.
“헉! 저기 해골 병사가 사람을 해 친다!”
천영의 외침에 토우백인장의 시선 이 서서히 돌아갔다. 그리고 토우백
인장의 눈에 구석에 처박혀서 금이 간 뼈를 어루만지며 회복을 하고 있 던 해골 병사가 들어왔다. 토우 전 사와 해골 전사들의 전쟁. 그 둘은 서로 마주치게 되면 죽을 때까지 싸 우게 된다. 비록 서로 휴식을 취해 야만 하는 약해진 신체였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그럴 여유는 없어졌다. 해골 병사가 녹슨 검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토우백인장이 창 을 앞으로 겨누고선 쿵쾅대며 돌진 했다.
비록 낡아빠진 신체라지만 그 돌진 자체는 매섭기 짝이 없었다. 50m를 5초 만에 주파하는 그 무식한 속도
에는 파괴적인 괴력까지 담겨있었기 에 해골 병사는 정면으로 맞서기보 단 공격을 홀려내기를 선택했다.
토우백인장은 만들어진 생명체 즉 로봇 같은 존재. 이곳의 언어로는 골렘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그것에게 는 지능이 적었다. 하지만 해골 병 사에게는 지능이 어느 정도 남아있 었다. 그렇기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신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꽤나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직선적이고 묵직한 토우백인장의 공격을 해골 병사는 주변 지형지물 을 이용해 피하고 반격해낸 다음 빈 틈을 찾아내 공격한다. 하지만 그렇
다고 해서 해골 병사가 완벽하게 공 격을 피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뼈가 갈라지 고 검의 이가 날아간다.
그럼에도 토우백인장을 쓰러뜨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누가 보면 그 용맹함에 눈물이 다 나을 장면이었지만 천영 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어부지리를 떠다 먹여주는 멍청이들에 불과했 다.
‘지금이다!’
해골 병사와 토우백인장의 체력이 서로 한계에 다다른 순간 천영은 온 몸에 마나를 휘감고 일직선으로 돌
진했다. 처음으로는 해골 병사에 의 해 갑옷이 박살나 완전히 들어난 토 우백인장의 가슴을 둘째로는 다리뼈 가 완전히 박살나 스피드가 현저히 떨어진 해골 병사의 머리통을.
쿵,콰앙!
투두둑,털썩.
토우백인장이 모래가 되어 사라지 고 해골 병사가 즉사해버려 자리에 무너졌다. 천영은 고생 하나 하지 않고 쭉쭉 오르는 경험치를 보고 음 흉한 미소를 흘렸다. 예상대로 정상 적인 경험치가 들어왔다. 다른 사람 즉 유저가 사냥을 하던 것을 잡는다 고 해도 경험치가 오르지는 않는다.
막타를 친다고 해서 ‘공적’을 그대 로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
하지만 경험치와 전혀 관련이 없는 몬스터가 서로 치고 박고 싸우던 것 에 끼어들어서 막타를 치게 될 경우 정상적으로 경험치가 오른다.
이 방법은 꽤나 유용해보이지만 써 먹을 기회가 별로 없어서 인기가 없 는 방법이었는데 당장 천영에게는 본인의 힘 하나 안 들이고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 다.
그는 드래곤 탈태를 하기 위해 만 났던 선조 드래곤의 영혼이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드래곤이 된다면 그에 걸맞 은 위엄을 가져야만 하고 하늘 아래 제일 고귀한 종족이라는 것에 대해 긍지를 가져야만 한다. 드래곤에게 는 드래곤에게 어울리는 명예가 있 고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품위 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절대로 비 겁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구차하 지 않고 당당해야 하며 자신에게 닥 친 불행마저도 웃어넘길 수 있는 넓 은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야.’
하지만 천영은 그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 드래곤의 위엄? 그딴 거 알게 뭐야. 드래곤의 명예? 지킨다고 경험치 안 오른다.
비겁하지 않게 정정당당히 싸우겠다 고 품위 지키다가는 인간들에게 사 냥당할 것이 뻔하다. 뭐든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단 살고 봐 야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 답게 압삽한 게 최고다.
천영,그는 겉모습만 드래곤일 뿐 누구보다도 인간답게 살아남는 법을 아는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