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42화
혜밀은 루벤 대상단 로그마티아 지 부에 속해있는 작은 상점의 관리자 였다. 루벤 대상단이라는 말만 들으 면 ‘와,정말 대단해!’라며 출세했다 며 박수를 쳐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만 그렇게 반응할 것이고 아무리 루벤 대상단이라도 급이라는 게 있다. 로 그마티아는 규모가 큰 도시이지만 정작 상인으로서 뭔가를 해내기엔
실속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돈 이 안 되는 도시라는 말이다.
이곳에서 팔리는 물건이라고 해봐 야 끽해야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도구뿐이다.
조각칼,붓,도화지,물감 등등 조 금이라도 비싸면 예술가들은 그 도 구마저도 전부 수제작을 해서 쓰기 때문에 온갖 싸구려를 전시해놓는 수밖에 없었다. 기껏 사냥꾼들을 저 격해서 장비를 진열해 놓으면 그들 은 전부 마티아 공방으로 가서 장비 를 맞추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 었다.
즉 로그마티아 지부에서 일을 한다
는 사실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루 벤 대상단에 뭔가 큰 잘못을 저질러 서 이곳으로 좌천당했다는 것.
루벤 상단 로그마티아 지부장인 예 그넘의 비서였던 그녀는 나름 대도 시에서 잘나가던 인물이었다. 하지 만 예그넘은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내였고 결국 뭔가 상단주에게 눈 도장이 잘못 찍힌 것인지 어느 날 이곳으로 쫓겨나다시피 이사 온 것 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곳에서 상인으로 서 더 자라기에는 이곳의 시장은 너 무나도 좁았다. 그나마 장비를 맞추 기 위해 방문하는 사냥꾼들이나 모
험가들은 죄다 마티아 공방으로 가 서 장비를 구입한다.
‘그것도 곧 끝이겠지만.’
그녀는 무료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늘어졌다. 여전히 손님이 없는 이 상점을 보면 대체 왜 망하지 않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혜밀은 예그넘을 믿고 있었다. 자 신의 상관인 그는 아주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내였다.
처음 이 도시로 좌천되었을 때 혜 밀은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했지만 예그넘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이곳의 시장 정보를 싹싹 긁
어모아 뭔가를 골똘히 궁리했다. 그 리고 내놓은 해답은 마티아 공방을 차지하는 것. 그것은 혜밀의 생각보 다도 훨씬 간단했다.
예그넘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 마티아 공방을 압박했다. 대상단이 라는 이름을 내세워 거래처를 모두 끊어버리는가 하면 마티아 공방에 재료를 판매하는 곳을 찾아가 자신 이 모두 강제로 매입해버리기도 했 다. 그리고 일부러 망가진 부품을 섞어서 마티아 공방에 넘긴 다음 우 르르 실패작이 나오도록 한 적도 있 었다.
예그넘의 인맥은 제국의 수도에서
일했던 만큼 상상 이상으로 넓은 발 을 자랑했다. 귀족,하청 업체,각종 용병 센터와 클랜이 그의 말에 어렵 지 않게 움직였다. 나름 튼튼한 힘 을 가지고 있던 마티아 공방일지라 도 조금씩 조금씩 흔들릴 수밖에 없 었다.
범인이 예그넘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렇기 에 마티아 공방의 장인들은 예그넘 을 찾아와 항의했지만 아무런 증거 도 없었기에 뭔가를 얻어낼 수는 없 었다. 오히려 예그넘은 이 일을 빌 미로 자신의 변호사를 데려와 ‘명예 훼손’이네 뭐네 알 수도 없는 법을
들먹이며 마티아 공방을 더욱 심하 게 압박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트집 을 잡아가며 돈을 뜯어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마티아 공 방은 정말 간신히 명목만을 유지한 채 시스템만 돌아가는 껍데기가 되 어버렸다. 예전만큼의 우수한 장비 는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기껏해야 양산형 작품을 찍어내 어 떻게든 밥벌이를 간신히 하는 수준 이었다.
그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목 표였던 ‘최고의 장비를 만들자!’라는 대장장이의 모토마저도 바스라진지 오래였다.
점점 더 수입이 적어지고 거래가 끊어지자 더 이상 마티아 공방을 유 지하기도 힘들었던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예 그넘에게 손을 벌리기에 이르렸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존재는 루벤 대상단 소속의 예 그넘밖에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떻게든 좋은 장비를 만들 어 내서 손님을 끌어 모을 계획이었 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마저도 예 그넘의 공작과 방해 끝에 망해버렸 다. 명품이 되었을 터인 장비에는 어찐지 불순물이 잔뜩 섞여있었고 마법 장비는 불량으로 작동하는데다
가 그나마 멀쩡한 장비가 만들어져 도 그것을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혜밀은 조만간 마티아 공방이 예그 넘의 손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다. 마티아 공방에서 예그넘에게 빌린 돈을 갚을 방법은 전혀 없었기 때 문. 날이 갈수록 빚은 점점 더 부풀 어 오르고 있었고 마티아 공방의 수 입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마티아 공방이 루벤 대상단의 손 에 들어오면 회장님도 우릴 다시 봐 주실 거야!’
그 유명한 마티아 공방이다. 비록 지금은 볼품없는 공방으로 전락해버 렸지만 루벤 대상단의 손에 들어오
는 순간 예그넘은 그곳에 다시 거액 을 쏟아 부어 그 크기를 키울 것이 다. 그렇게 되면 혜밀은 이런 돈 안 되는 도시에서 벗어나 다시 수도에 자리를 잡아 생활할 수 있을 것이 다. 이전처럼 풍족한 삶을 살 수 있 으리라.
딸랑.
손님이 오지 않아 멍하니 잡생각에 빠져있던 혜밀은 상점의 문이 열리 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원체 손님이 찾아오질 않아 아예 장사하길 포기한 상태였기에 누군가 가 찾아오는 일이란 정말 부끄럽게
도 드문 일이었다.
전직 비서였지만 지금은 상점의 종 업원이나 마찬가지인 혜밀은 웃는 얼굴로 손님을 반겼다.
‘어머나,예쁜 아이.’
손님은 작은 소녀였다. 아니,어쩌 면 소년일 수도 있는 그 아이는 풍 성한 긴 생머리에 흰색의 브릿지가 한 줄 나있는 특이한 머리색을 가지 고 있었다. 단발머리를 즐겨하던 혜 밀이 순간 머리를 길러볼까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매력적인 머리칼이 었다.
그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금색 눈
동자로 가게를 둘러보더니 뭔가를 발견한 듯 눈동자를 빛내며 구석을 향했다.
혜밀은 평소에 손님이 오지 않아 청소를 전혀 해두지 않았던 것을 후 회하며 그 아이가 하는 행동을 지켜 보았다.
‘저렇게 어린데 마법사 지망생인 가?’
아이가 보는 것은 마법사들이 사용 하는 지팡이가 진열되어있는 곳이었 다. 비록 아무도 사가지 않지만 나 름대로 비싼 것들을 진열해놓았기 때문에 꼬마가 사기엔 턱없이 비싼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구경을 하려
는 모양인지 진열대 근처에 가서 쪼 그려 앉은 그 아이는 한참이나 지팡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는 누가 오던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이나 하던 혜밀이었지만 왠 지 저 아이에게는 말을 걸고 싶어졌 다.
“꼬마야, 뭐 찾는 거라도 있니?”
꼬마라는 단어에 순간 움찔 몸을 떤 천영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지팡이요. 근데 이것들 왜 이렇게 비싼 거예요?”
그 말에 혜밀은 아이의 순진무구한
질문이 귀엽다고 생각하여 근처에 가서 같이 쪼그려 앉았다.
“여기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지팡이에는 ‘고독 나무의 원액’이 들어가 있단다.”
“고독 나무요? 그게 뭔데요?”
“응…… 그게 뭐냐면. 하여튼 엄청 비싼 나무야.”
고독 나무에 대해 자세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던 혜밀은 대충 둘러 댔다.
‘평소에 공부 좀 해둘 걸!’
하지만 이 지팡이가 비싼 이유에 대해서는 마치 매뉴얼처럼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설명해줄 거리는 아직 몇 가지 더 있었다.
“이건 지팡이 제작에 관해서는 누 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실력을 가진 ‘로동 넝팔로우’가 수제작을 했다고 해. 여기 이 회오리 마크 보이지? 이게 그 증거야.”
혜밀은 예그넘이 알려준 것들을 마 치 자신의 지식인 마냥 자랑하며 늘 어놓았다.
“이거 어때? 엄청 예쁘지? 보석처 럼 보여도 엄청 비싼 마정석이야. 마법 발동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한 다고 해.”
등등 혜밀은 지팡이에 대해 설명했 고 천영은 웃으면서 그것들을 들었 다.
“자,이제 궁금중이 좀 해소되었 니?”
지팡이가 비싼 이유에 대해 물었던 것에 대해 전부 설명을 끝마친 혜밀 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천영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요.”
천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지팡이 하나를 집었다.
“고독 나무 원액이 들어가 있는 지 팡이가 비싼 이유를 아세요?”
“그,글쎄? 하여튼 엄청 비싼거라
고……:’
우두둑!
그 질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혜밀이 둘러대는 도중 천영은 그 지 팡이를 두 동강 내버렸다. 혜밀은 입을 쩍 벌렸다.
“너,너 지금 뭐하는 짓이니!”
“이거 가짜네요. 고독 나무 원액이 들어간 지팡이가 비싼 이유는 이렇 게 부서져도 금방 재생이 되기 때문 이거든요.”
“그게 무슨……
“그리고 또. 로동 넝팔로우가 만든 지팡이가 비싼 이유를 설명해드릴게 요.”
박살나버린 지팡이를 바닥에 내던 진 천영은 또 다른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의 끝부분에는 회오리치는 마 크가 있었는데 천영은 그 부분에 손 가락을 가져다 대어 마나를 불어넣 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뭔가가 지팡 이를 감싸자 혜밀은 그제야 뭔가 잘 못됐음을 깨달았다.
‘서,설마 진짜 마법사야?’
그럼 여태까지 지팡이에 대해 전문 가인 마법사에게 어설픈 지식을 자 랑하고 있었단 말인가?
천영은 지팡이에 마나를 불어넣더 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 참,이상하네요. 로동 넝팔로 우가 만든 지팡이라면 마나를 주입 하자마자 ‘인공 마정석’이 마법진이 끝부분에 생성되거든요. 근데 이건 마나를 주입해도 별 반응도 안 하고 그냥 빛나기만 하네요. 흐음,비싼 이유를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이것도 가짜라 못해주겠네요.”
그렇게 말하고선 그것을 내려놓더 니 이번엔 비싼 마정석이 들어갔다 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천영은 그것을 잠시 응시하다가 끝 부분에 달려있는 그 마정석을 손으 로 톡 잡아서 쥐어뜯었다.
투둑!
너무나도 쉽게 떼어진 마정석은 마 나 회로를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바 람에 응응거리며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자,잠깐만!”
“에헤이. 비싼 마정석이라면서요.
이거 순 싸구려인데요? 이런 걸 팔 아도 되는 거예요? 루벤 상단에서.”
혜밀도 차마 이 지팡이들이 싸구려 가짜일 줄은 몰랐기에 입을 다물었 다. 어린 아이에게 싸구려를 팔려고 했단 걸 들킨 것보다 방금 전까지 그것들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던 자신 이 부끄러워진 혜밀은 살짝 고개를 들렸다. 그리고 그 행동이 아직까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뜻이 되 었다.
천영은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혜 밀이 고개를 돌린 쪽으로 걸어가서 눈을 마주쳤다.
“누나,이거 상당히 이미지에 안 좋은 거 아시죠? 이런 가짜를 가져 다 놓고 팔려고 했단 것 자체가 마 법사들에 대한 모욕이에요.”
“……그,그래서 뭐 어쩔 건데? 빨 리 치워버리면 금방이야.”
천영이 강한 태도로 나오자 혜밀도 자존심이 상해 강하게 대응했다. 어 차피 이런 꼬맹이의 입막음을 하는 것 따위 예그넘에겐 일도 아닐 것이 다. 이런 지팡이들 재빨리 치워버리 고 없던 것으로 해놓으면 이 꼬마는 루밴 상단에서 싸구려 지팡이를 비 싼 지팡이로 속여 판다고 헛소문을 내고 다니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
고.
“에헤이,손님한테 사기 치려고 해 놓고서는 그런 식으로 나와도 돼 요?”
그렇게 말한 천영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뒤쪽에 계단이 있다는 사 실을 알아낸 천영은 그곳을 손가락 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주인을 만나봐이^겠는데요. 저 계단으로 올라가면 있나요?”
“지금 지부장님 안 계셔. 나중에 오렴.”
혜밀은 상당히 귀찮은 꼬맹이가 걸 렸다면서 속으로 불평했다. 지팡이
에 대해 조금 유식한 것은 별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봐야 꼬마는 꼬마 다. 지부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귀찮게 할 생각이라면 상 대를 잘못 골랐다.
혜밀은 상인의 비서로서 일하며 이 런 불만을 접수하려는 손님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대부분은 ‘지금은 관계자가 자리에 계시지 않아…… 라는 만능 대사로 철벽 방어를 하면 제 풀에 지쳐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흐음,그래요? 그럼 할 수 없네. 지부장이랑 직접 이야기 해보려고 했더만 그냥 회장님한테 바로 연락 때려야겠네요.”
“뭐? 네가 무슨 자격으로?”
혜밀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루벤 대상단의 회장에게 직접 연락을 하 겠다는 천영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 어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천영이 꺼내든 카드를 보고 혜밀은 숨이 턱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저건…… 루벤 대상단의 WIP카 드라고? 저런 꼬맹이가?’
붉은색의 테두리에 흰색의 네임드. 금색 별 마탑의 메이지 서천영이라 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그 명함은 분명히 ‘루벤 대상단의 WIP’를 증 명하는 카드였다.
루벤 상단에서 몇 년이나 일한 그 녀가 진짜 WIP카드를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단번에 저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깨 달아버린 혜밀은 순간 사고가 정지 되었지만 이내 방금 전 천영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 았다.
‘안 돼! 회장님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 죽은 목숨이야!’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선에서 끝 을 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혜밀 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자,잠깐만요. 생각해보니 지
부장님이 볼일을 아직 못 끝내셔서 위층에 계시던 것 같은데……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변명이었지만 천영은 아무래도 좋다 는 듯 빙그레 웃었다.
“뭐 좋아요. 안내해 주세요.”
천영이 그렇게 말하며 거만하게 고 갯짓을 하자 혜밀은 허둥지둥 뒷문 을 열어 계단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의문 을 되감기했다.
‘대체 어떻게 저런 꼬맹이가 우리 상단의 WIP인 거냐고!’
혜밀은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다.
루벤 대상단의 회장 ‘알루벤’은 천 영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다는 사 실을.
예그넘은 눈앞에 앉아있는 예쁘장 한 소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망할. 왜 WIN} 여기에 찾아온 거냐고!’
VIP도 아니고 WIP란다. 저 정도 면 정말 루벤 대상단의 본부에 가서 대충 이름만 대도 고위급 간부들이 직접 나와서 모셔가야 될 정도로 높
은 사람이었다.
예그넘은 눈앞의 아이가 WIP인 이유에 대해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금색 별 마탑의 메이지 서천영? 설마 꼬맹이 본인은 아닐 테고. 회 장님의 숨겨둔 딸인가? 아니면 며느 리의 자식? 그것도 아니면 친분 관 계가 있는 누군가의?’
하여튼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 든 WIP 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WIP급 손님에게 가짜 지팡이로 사 기를 치려했다는 사실이 회장의 귀 에 들어가면 정말로 끝장이다. 하지 만 예그넘은 그나마 눈앞의 WIP가 꼬맹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일단
은 어리니까. 자신의 말빨로 어떻게 든 커버를 치면 될 수도 있다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그넘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선 옆 쪽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혜 밀에게 눈짓을 했다.
‘뭐하는 거야! 빨리 뭐라도 좀 가 져와!’
그 눈빛을 알아들은 혜밀은 허겁지 겁 고급스러운 바구니에다가 비싼 캔디와 케이크,쿠키 등을 담아서 가져왔다. 거기에 설탕이 듬특 들어 간 핫초코까지 가져오니 달콤한 냄 새가 순식간에 접대실을 가득 메웠 다.
천영은 핫초코를 입에 가져다 대었 다가 생각보다 온도가 높아 혀를 빼 고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뜨거운데요.”
그러자 혜밀은 잽싸게 핫초코를 받 아들고서는 발이 보이지도 않을 정 도로 잽싸게 냉동실에 박아버렸다. 그 다음 몇 초가 지나고 다시 꺼내 니 아주 조금 미세하게 미지근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천영에게 가 져다주니 이번에도 뭔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너무 차가운데요.”
혜밀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
을 다물었다. 그녀가 느끼기엔 솔직 히 아까 전과 온도가 달라졌는지조 차 모르겠는데 자꾸만 불만을 얘기 하니 그냥 꼬장을 부리는 것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갑은 천영이었고 혜 밀과 예그넘은 을이었다. 결국 핫초 코를 다시 데우려 하자 천영이 손으 로 낚아챘다.
“그냥 제가 하는 게 낫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천영은 손가락 위에 불꽃을 하나 피웠다. 예그넘은 그 순간 침을 꿀적 삼켰다. 사전 준비 도 없이 저렇게 마법을 바로 발동할 수 있는 마법사는 결코 흔치 않다.
저런 어린 나이에 마법사일 리는 없 다고 생각한 예그넘은 자신의 추측 대로 비싼 집에서 태어난 꼬맹이가 아티팩트라도 하나 들고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귀한 집 자식인게로군.’
천영이 핫초코를 마시며 케이크까 지 떠먹기 시작하자 예그넘은 슬슬 이야기를 꺼냈다.
“고객님,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 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천영은 케이크에 있던 딸 기를 반쯤 깨물어 먹고서는 말해보 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 건방
진 태도에도 예그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주문을 한 다음 배송되는 과정에 서 물건이 뒤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사용 설명서나 제품 증명서 같은 것 들은 멀껑히 배달되었는데 배달지에 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지요. 안 그래도 지금 문의를 넣은 상태고 저희도 피해를 입었다고 봐야하니 손해 배상을 요구할 예정입니다.”
한 마디로,‘나도 속은 것이니 내 잘못은 아니다.’ 라는 의미가 되겠 다.
이렇게까지 변명을 한 이상 천영이 할 말은 딱히 없었다. 저들이 속았
다는데 그걸 거짓말이라며 지적할 만한 거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고 있는 예그넘은 자신의 변 명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사실에 은 근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천영은 아무래도 좋다는 둣 입 안에 들어있는 딸기를 우물거렸 다. 실제로 천영의 목적은 그런 지 팡이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것들 은 정말 우연히 발견했을 뿐인 사소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뭐,이제 상관없구요.”
“예?”
딸기를 꿀끽 삼킨 천영은 달콤한
것을 먹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간에 일이 잘 풀리겠다 싶은 예그넘도 따 라서 미소를 지으려는데 천영이 포 크로 접시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제가 여기에 와서 며칠 동안 조금 알아본 게 있거든요.”
“뭐를……
“물건 독점,거래 방해,강제 매입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돈까 지 빌려줬던데요? 이것 참.”
움찔.
예그넘은 천영의 말에 찔리는 부분 이 있던지라 순간 몸을 떨었지만 애
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무슨 소리신지 그게 잘……
“예스맨 상단과 마티아 공방의 거 래를 강제로 끊어버린 게 벌써 반 년 전. 마티아 공방에서 매달 장비 를 구매해주던 ‘철혈의 기사단’과 ‘동도의 서해’ 클랜과의 거래를 끊 어버리고 다른 공방과의 계약을 주 선 하셨더라구요. 심지어는 마티아 공방과 거래를 하던 업체의 마정석, 강철 등등을 아예 강제로 매입하셨 던데.”
천영의 날카로운 지적에 예그넘은 입을 다물었다.
‘저걸 다 어떻게……?,
예그넘은 모르겠지만 천영에게는 WIP라는 카드뿐만이 아니라 꽤나 발이 넓은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색 별 마탑에 의뢰를 하기만 하면 정보가 속속히 들어올 뿐만이 아니 라 서부 지역에서 경찰청장으로 일 하고 있는 ‘마르백’에게 전화를 한 통 때리자 이 지역에 있는 탐정들에 게 연락해서 순식간에 막대한 정보 를 천영에게 배달해준 것이다.
덕분에 천영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장소 에서 예그넘이 해왔던 불편한 거래 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게,그건…… 그러니까……
“이거 또 대출까지 하셨던데. 이자 가 법으로 정해진 한도보다 20%나 높더라구요. 아 그리고 애초에 루벤 상단에서는 대출을 안 하는 걸로 알 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인가요?”
그 말에 예그넘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아닙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눈을 질 끈 감았다. 이제 와서 들킨 건 둘째 치고서 이 눈앞의 꼬마가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구석에 있는 상단까지 찾아와 서 치부를 낱낱이 들춘 다음 대체 뭘 요구할 것이란 말인가? 그에게는 돈도 별로 없고 줄만한 물건도 없 다.
‘대체 왜 하필 지금……
조금만 더 있으면 마티아 공방이 손에 떨어질 터였는데. 왜 하필 지 금이란 말인가. 예그넘이 그런 생각 을 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천영 은 케이크를 다 먹은 다음 핫초코를 마저 홀짝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상당히 푹신하고 감촉이 좋은 의자 였다.
“다 없던 걸로 하죠.”
천영의 그 말에 예그넘이 눈을 번 쩍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무슨 특이한 말이라도 했 냐는 둣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제가 이런 쪼끄만데서 뭐 얻을 것 도 없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구요.”
“지,지금 그 말은……
“예? 싫으세요?”
“아뇨! 좋습니다. 얼마든지요!”
혹여나 마음이 바찔까,예그넘이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천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 상큼한 미소에
예그넘의 마음이 절로 사르르 녹아 내렸다. 작정하고 조사해서 왔기에 뭔가 엄청난 협박이라도 할 줄 알았 는데 모든 걸 없던 일로 해주겠다 니!
예그넘은 천사라도 만난 것처럼 헤 벌쭉 미소를 지었고 천영도 같이 웃 어주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마티아 공방의 빚도 없던 걸로 하죠.”
예그넘은 그제야 천영의 한 마디에 자신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잃었 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