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067화
이 도시가 음침하다는 말은 정정 해야겠다. 이 도시는 몽환적이다. 365일 사시사철 항상 도시의 위를 가리고 있는 검은색 먹구름과 더 불어 달빛이 구름을 관통할 때마 다 발생하는 기묘한 보라색의 빛 무리는 이곳에서만 살고 있는 특 별한 생명체를 탄생시켰는데 이름 하야 퍼플 페어리. 실제로 요정은 아니지만 마치 지구에서 보던 반
딧불처럼 보라색의 빛 덩어리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신기한 생 명 체였다.
보라색이 주는 울림이란 어떤 느 낌인가. 어둠이 내려앉은 거대한 고성은 보라색으로 환하게 빛났고 그 신비로운 분위기는 정말 흡혈 귀들이 왜 감성적인 마음을 가지 고 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다.
“이런 걸 보면 지구에 있던 건축 물들이 초라해져.”
유럽이나 그리스를 가보면 역사 속에서 나름 위대하다고 알려져 있던 건축물들이 있었지만 그것들
은 그리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지구를 비하 할 생각은 없지만 과 학 대신 마법이 발전한 이곳의 문 화 속에는 자연스레 ‘예술’이라는 것이 함께 파고든 모양이다.
고성의 주위에는 거대한 강물이 원의 형태를 그리며 빙글빙글 돌 고 있었다. 그것을 건너기 위해서 는 적당한 절차를 밟아 허락을 받 고 거대한 다리를 내려 연결해 건 너가야만 한다. 하지만 로비탄은 그러한 과정을 모두 생략해버리고 다짜고짜 다리를 지키는 경비에게 찾아갔다.
“문을 열거라.”
“나 이런 사람이다.”
얼마나 오래 됐으면 나름 이곳에 서 살았다는 로비탄을 사람들이 못 알아볼까. 하지만 그럴 줄 알았 다며 로비탄이 품에서 동그란 메 달 같은 것을 꺼냈다. 그러자 경비 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내려라!”
끼기기깅,쿵!
올려져 있을 땐 건물 하나가 서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이나 커다랬던 다리가 연결되었다.
천영은 그곳을 건너가며 강물을 살펴보았다. 물속에는 이빨이 날카 로운 붉은색의 물고기들이 서식하 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식인 물고기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면 큰일 난다. 뛰어올 라서 사람을 물어뜯거든.”
“으엑”
로비탄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천 영은 빼꼼 내밀고 있던 고개를 쏙 집어넣었다. 오로지 파트라슈만이 강물 아래로 내려가서 그것들을 마음껏 관찰할 수 있었다.
보라색의 아름다운 빛무리와 그
사이에 이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듯한 다리를 건너가자 안쪽에서 대기하던 반듯한 복장의 흡혈귀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안내하기 시작했다.
성은 정말로 넓고, 또한 높았다. 어째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 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하지만 뭔 가,이곳 분위기가 상당히 싸늘해 서 천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앞서 가는 로비탄 조차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천영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기 그림이 상당히 예쁘네요.”
복도에는 일정 거리마다 그림이 걸려 있었다. 사소하게는 사과,수 저부터 시작해서 성이나 숲,달이 나 사람을 그려놓기도 했다. 그것 들은 예술에 대해 전혀 문외안인 천영이 보기에도 상당히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로비탄이 말했다.
“그래,현재 이 집의 주인이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거든.”
“흐음.”
그림 덕분에 이 성을 걷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정말 홀딱 빠 질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이 늘어
서있는 것은 흡사 누군가만을 위 한 전시회에 온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참이나 위로 쭉쭉 안내하던 흡 혈귀 남자는 어떤 방에 도착하더 니 로비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 이고선 귀신같은 발걸음으로 사라 졌다. 기척을 죽이는 것에 아주 능 숙한 듯싶었다.
로비탄은 문을 열고 과감하게 들 어갔다. 안쪽에는 어떤 여인이 쇼 파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자세는 얌전했지 만,그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로비탄과 눈을 마주친 그
여자는 잠시 그를 째려보더니 손 바닥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오랜만입니다,로비탄 님. 앉으 시죠.”
“그래,오랜만이다,예할텐. 피렌 체는 어디에 있지?”
“오라버니는 지금 굉장히 바쁘십 니다.”
“홈,내가 왔다는 것을 들었을 텐 데. 건방지군.”
툭.
로비탄의 그 말에 예할렌이 커피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당신?’ 이제는 나를 부르는 호 칭도 아주 깜찍해졌구나,예할텐.”
“저희를 버리고 떠났으면서 아직 까지도 대우해주길 바라신 겁니 까?”
“후후후,내가 여기를 떠났어도 왕이었던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 니지.”
묘하게 신경전이 시작되자 네청 은 한숨을 쉬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는 둣. 천영이 무슨 일이냐며 속삭이자 네청이 작게
말했다.
“로비탄은…… 흡혈귀들의 영웅이 었다. 혼란스럽던 모든 흡혈귀 부 족을 단 하나로 휘어잡고 이곳에 도시를 세워 평화를 만들고 타종 족에게서 저들을 지킬 터전까지 만들었지. 하지만…… 모든 흡혈귀 부족이 통합되자마자 그는 이곳을 버리고 떠났다. 아직 제대로 틀이 완성되지 않았던 차에 이 도시를 물려받게 된 저 아이들이 했을 고 생을 생각하니 딱하기 그지없구 나.”
그러니까. 즉,집안싸움에 괜히 끼어들게 생겼다는 소리였다.
“피렌체를 데려오거라.”
“……싫습니다. 당신은 오라버니를 만날 자격이 없습니다.”
“흥,자격? 이 도시에서 내게 자 격을 운운할 놈은 없다.”
“당신,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는 건가요!”
“내가 그걸 왜 모르겠느냐.”
예할렌과 로비탄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하자 천영과 네청은 구석에 틀어박혔다. 괜히 끼어들어서 좋을 건 없다.
그렇게 한참이나 진행 된 말싸움
의 승리자는 결국 로비탄이었다. 예할텐은 로비탄의 1500년 동안 다져진 뻔뻔함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후…… 당신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 물건을 받으러 왔겠지요. 하지 만 오라버니를 설득할 수 있을까
요?”
“당연하지. 내가 그 놈을 직접 후 계자로 길렀으니까. 그 성격은 내 가 뻔히 잘 알고 있다.”
로비탄은 묘하게 자신만만한 표 정이었다. 예할렌은 당신이 많이 알아봐야 나보다 더 잘 알겠느냐 며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그는 귀
를 후비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이보게,오라버니를 모셔와. ‘로 비탄 디렌스 칼리체니아’의 이름을 대면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예할렌이 말하자 그림자 속에서 어떤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창문 밖으로 사라 졌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외모 를 가지고 있었지만,하는 행동은 전혀 인간답지 않았다.
‘묘하게 인기척이 느껴진다 했더 니 호위 무사를 저런 식으로 데리 고 다니는 건가.’
묘하게 흡혈귀답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귀족이 움직이는 시간이라고 보기엔 너무 나도 짧은 시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무 과격하지 않게 예의범절을 준수하며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문을 닫은 남자 역시 상당히 창백 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천영과 네청은 아예 방의 구석에 숨어서 과자를 깨작대고 있던 차 라 그 남자는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로비탄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로비탄 님.”
“그래,마지막으로 네게서 듣던 내 호칭은 ‘폐하’였는데 이렇게 들 으니 참으로 신기하군. 이제는 내 가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피렌체?”
피렌체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 를 저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영과 네청은 몰래 그들의 대화 를 지켜보았다. 아까 전의 이상한 여자가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설 명했던 것에 비해 피렌체는 굉장
히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피렌체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 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다시 찾아오신 이유는 ‘용의 약 속’을 받아가기 위해서겠지요.”
“그래,맞다.”
“하지만 돌려줄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
“그건 로비탄님과 용의 약속일 뿐 저와는 무관한 일. 그 물건은 이제 제가 가보로 삼기로 결정했습니 다.”
“가보? 그것은 우리의 물건이 아
니다.”
“후후,드래곤이 노하겠지요. 하 지만 어쩔 겁니까? 드래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그리고 라며 피렌체는 눈을 감았 다.
“……저는 설령 드래곤이 찾아온 다고 해도,목숨 걸고 싸울 것입니 다. 설령 용의 약속이 아니라,이 도시에 굴러다니는 바나나 한 조 각이라도 가져가겠다고 해도. 저는 사소한 그 어떤 것도 내어줄 생각 이 없습니다.”
로비탄은 묵묵히 커피를 홀짝였
다. 그는 어째선지 굉장히 흐뭇하 다는 표정으로 피렌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피렌체. 어리숙하 고,어리석고,어리던 피렌체는 사 라지고 한 명의 위대한 왕이 이 자리에 앉아있구나. 아주 훌륭하게 자라줬어.”
그 칭찬에도 피렌체는 아무런 반 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방식은 너무나도 지독합 니다. 저에겐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세월이었습니다.”
“나도 안다.”
“제가 당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 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그건 모른다.”
“뻔뻔하시군요. 이럴 땐 그것도 안다며 위로라도 해주셔야하는 것 아닙니까?”
“모르는 건 모르는 것이다. 모르 는 것을 안다며 위로하는 것은 기 만이다.”
“말은 잘 하시는군요.”
피렌체는 독기가 가득한 눈으로
로비탄을 쏘아보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알아두십시 오. 저는 당신에게 그 물건을 절대 로 내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거래를 하지.”
거래? 그 단어에 피렌체는 눈썹 을 꿈틀거렸다. 애초에 로비탄은 그 물건을 공짜로 받을 생각이 없 었다. 로비탄은 피렌체라는 남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디 거래 조건을 꺼내보시지
요.”
피렌체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
다. 그 어떤 것을 가져오더라도, 절대 응하지 않겠다는 그 단호한 의지가 들어있어 천영은 침을 꿀 쩍 삼켰다. 과연 로비탄은 대체 어 떤 조건을 내세울 것인가. 천오백 년이나 살아온 로비탄이 저렇게나 자신만만하게 내세울만한 귀중한 물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고 있 는데 어째선지 로비탄이 천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선 소파 뒤에 숨어있던 천영을 잡아 서 번쩍 들어 올리더니 피렌체를 향해 말했다.
“이 녀석을 그리게 해주지,마음
껏
“네? 잠깐,아저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냐며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는 순 간 쿵! 하고 뭔가가 바닥을 내려 찍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피렌 체가 폭발 했겠거니 싶어서 천영 은 찔끔하여 피렌체 쪽으로 시야 를 돌렸다. 하지만 네청도 파트라 슈도 심지어 드래곤인 천영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벌어져 있 었다.
테이블은 반쯤 뒤집어져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는지 소파는 뒤로 넘어갈 뻔하다가 간신히 중
심을 잡는 중이었다. 커피와 주전 자는 바닥에 널브러져 엉망진창으 로 쏟아져 있었고 유리잔은 진작 깨져버렸다.
여기까지 보면 다음의 장면을 누 구라도 상상할 수 있겠지만 정작 피렌체의 행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피렌체가 덜덜 떠는 눈으로 무릎 을 꿇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네청과 천영,파트라슈가 멍한 얼 굴로 피렌체를 쳐다보았다. 이 상 황에서 오로지 로비탄만이 의기양
양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크크크,이거 참.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래인 것 같은데?”
“부탁드립니다, 로비탄님. 아니, 폐하. 하,한 번만 그리게 해주십 시오.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응? 아까는 바나나 껍질 하나도 안 준다면서?”
“아닙니다,제가 허언을 했습니 다. 이 도시는 여전히 폐하의 것입 니다. 저는 그저 그림만 그리면 됩 니다!”
그렇다. 피렌체는 예술가였고 로 비탄은 전투광이었다. 그런 예술가
피렌체를 정치의 길로 인도한 것 이 바로 로비탄. 하지만 정치의 길 에 들어섰다고 해서 피렌체의 본 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피렌 체를 따라 백성이 전부 예술가가 되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예술을,아름다움을, 그것들을 넘어서는 환상적인 무언 가를 사랑하고 있음을.
과거 로비탄이 이 도시를 떠나기 전,피렌체의 유일한 낙은 단 하나 였다.
아름다운 것을 그리는 것.
그리고 로비탄은 그것을 거래 조 건으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