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14화
외전 만 년의 희망
늙은 노인은 자신이 갈 때가 되었 음을 직감했다. 그는 힘없이 껄껄 웃으며 자신의 젊은 손자에게 말했 다.
“애야,네게 물려줄 것이 있단다.” 노인이 희게 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하자 손자가 결연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힘겹 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비밀창 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종이 더미 뭉치가 들어있었다.
“이건…… 대마법사 서천영의 잊혀 진 마법 문서란다.”
“서,서천영의 문서라구요?”
노인의 그 말에 손자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나 그 서천영이 작성한 논문 이라니. 손자가 말도 안 된다며 고 개를 저었지만 노인은 끌끌 웃을 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못 믿을 만도 하지.
“이,이것을 어째서 저에게……
“대마법사 서천영은 이것을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다. 새까닿게 잊었을 수도 있지.”
노인은 작게 웃으며 과거를 회상했 다. 그 옛날,서천영이 작성했던 마 법 문서를 홈쳤을 때는 얼마나 겁에 질렸던가. 그는 배짱 좋게 문서를 훔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산골로 잠 적해버렸다.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 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그대로 개죽 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숲속 생활이 생각보다 괜찮았고 그곳에서 우연찮 게 사랑하는 이까지 만나 결혼을 해
버린 노인은 더 이상 이 마법 문서 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노인은 죽음의 순간 자신의 손자에게 이것을 쥐어주며 말했다.
“대마법사이자 대현자인 서천영께 서는 당시 말씀하셨지. 이것은 ‘희 망’이라고.”
그러니까,
“절대 함부로 공개하지 말고 소중 히 간직하거라……
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손자는 눈 물을 펑평 쏟아내며 맹세했다.
“할아버지…… 몾거김 할아버
지…… 제가 반드시 이 문서를 집안 대대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렇게.
만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싸움에 승산은 없어.”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실 리아가 그렇게 말하자 레드 드래곤 렉칼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렇겠지.”
실리아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지금도 이계에서는 수많은 괴수들이 쳐들어오고 있었고 갈수록 그리픈의 군세는 줄어들고 있었다.
문명은 이미 수천 년 전으로 퇴보 한지 오래고 적을 한 번에 소멸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병기들은 전부 파 괴당했으며 마법기술 역시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였다.
렉칼리온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실리아와 렉칼리온은 그리 픈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드래곤에게 선택받은 용사 실리아 그리고 그녀를 수호하는 어린 드래
곤 렉칼리온.
그 둘은 그리픈의 영웅이었으나, 고작 두 명 가지고는 이 세계를 구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고 싶 지는 않아.”
렉칼리온은 고민한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적의 군세를 물리칠 전략을. 모두에게 용기를 줄 수 있 는 무언가를.
문득 자신의 서랍에 눈이 간다. 그 곳에는 서천영 전집이 있었다. 한 시대를 찬란하게 빛냈던 위대한 드 래곤이자,영웅이었던 자의 이야기.
렉칼리온은 서천영을 본받기 위해 닥치는 대로 서천영과 관련 된 모든 것을 수집해놓은 채 보관하고 있었 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것에 의존 하지 않는다. 까마득한 과거의 시대 를 살아가던 서천영에게 메시지를 받았으니까. 자신의 발자취를 쫓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라고.
‘그래도……
서천영이라면 모두가 포기해버린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렉칼
리온은 자신의 서재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서천영과 관련된 수많은 문 서들. 그는 복잡한 얼굴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문득 이상한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비싼 종이도 아니다. 마법 각인이 새겨진 것도 아니다. 낡고 또 낡았 으며 몇 번의 코딩과 재생,복원을 거쳐 아직까지 정말 간신히 살아남 아있는 문서. 렉칼리온은 저도 모르 게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을 포장하고 있는 파일의 이름 은 ‘희망’이었다. 왜 그런 이름이 붙 어있는지는 몰랐으나 렉칼리온은 침
을 꿀적 삼키고서 파일을 펼쳐들었 다. 그러자 안에 있는 내용물이 드 러난다.
“마법이 아닌가……?”
만 년 전의 언어이지만 어렵지 않 게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을 만드는 데에는 그 어떤 마법적인 무언가가 일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말인 즉 특별한 훈련을 거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미. 지금껏 그런 마법 시약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가?
심지어 재료는 또 어떤가.
“돼지고기? 고작 이런 재료 따위로
매직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다고?”
마법사이자 드래곤인 렉칼리온은 자신의 상식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본디 마법 재료라고 하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재료로 쓰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렉칼리 온이 만들어온 시약 또한 그러지 않 았던가? 백 년 묵은 벼룩의 간,악 산 곰의 세 번째 눈,도둑 두더지의 양심 등등.
하지만 서천영의 문서에 적혀있는 이 레시피의 재료는 모두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렉칼리
온은 눈을 부릅뜬다.
‘설마 서천영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접근성을 올린 마법 시약을 개발했던 것인가……!!’
심지어,이 상황에 딱 알맞게도 문 서의 커버가 ‘희망’이라니. 마치 모 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 하 는 렉칼리온의 현 상황을 서천영이 정확하게 예견이라도 한 듯한 느낌 이 들지 않은가?
렉칼리온은 경직된 얼굴을 한 채로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연구실을 향 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수많은 문 서들을 모두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서천영의 마법 문서를 좌르륵 펼쳐
놓는다.
“……이건 마법 시약의 제작법이 군. 그런데 어째서 이게 희망이라는 거지?”
그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10번을 넘도록 정독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효과가 적혀있지 않았다. 마지막 부 분에 ‘이것만 먹으면 만병 예방! 두 유 노우 김치?’라는 문구가 적혀있 긴 했지만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 다.
‘만병을 예방하는 시약이라니. 들 어본 적도 없어.’
하지만 서천영이다. 무려 서천영의
문서이다. 만 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도 보존되고 있는 서천영의 마법 문 서. 그런 것이 괜히 보관되어 있지 는 않을 것이다. 렉칼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곳에다가 시간을 허비할 새는 없다. 하지만 하지
0♦이 ♦♦.
“……서천영이니까.”
서천영이니까,라며.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문서에 마지막 희망 을 걸어본다.
그로부터 며칠. 렉칼리온은 레시피 에 쓰여 있는 것을 완벽하게 이행하 기 위해 재료를 잔뜩 준비했다. 배 추를 지하실의 구석에 산더미만큼이
나 쌓아놓았으며 고추라는 것과 비 숫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동 방국에서 찾아온 상인에게 비싼 대 가를 지불하고 잔뜩 구매하기도 했 다.
처음에 이 붉게 물든 괴물 같은 물체를 만들 땐 얼마나 힘들었던가.
‘여,역시 서천영의 마법 재료. 보 통이 아니야!’
그저 대야에다가 배추를 담고,괴 상한 야채 몇 개를 적당히 조리해서 집어넣었을 뿐인데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렉칼리온은 이것에 대해 빠르게 정의했다. 가까 이에 두고 있기만 해도 생명체의 눈
물을 강제로 뽑아가는 무시무시한 마법 재료를 만들었다고.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냄비에다가 물 1.6kg을 받으라고?’
렉칼리온은 ‘초계량 2.0형 물레탄 식 비커’를 준비해서 정확하게 1.6 kg의 양을 맞췄다.
‘소금 2g?’
렉칼리온은 0.0001 g까지도 감지 하는 마탑의 고급 계량기를 가져와 소금의 무게를 쟀다.
‘두부 100g에 파 2〇g…… 이것 들은 조금 어렵군.’
하지만 이 마법 시약 레시피에서 단 0.1 용이라도 어긋나면 문제가 발 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렉칼리온 은 재료의 무게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장장 6시간이나 애를 썼다. 그 결과 마침내 모든 재료를 완벽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식칼을 가져와 적혀있는 대로 재료 를 썰고 순서에 맞춰 물을 부은 다 음 눈물이 나오도록 만드는 음식 재 료를 집어넣는다. 그는 단 0.001 초 의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계를 3개나 준비해 나란히 세워놓았다.
‘정확하게 18분 30초를 끓이라고 적혀 있군. 단 1초도 틀리지 않는
다. 마법진을 깔아서 시계의 알림이 끝나는 순간 불이 꺼지도록……
비싼 마정석까지 구해와 마법진을 완성한 다음 타이밍 마법까지 걸어 가며 렉칼리온은 신중에 신중을 가 했다.
‘불의 세기가 관건이군. 이것에 대 해서는 제대로 적혀있지 않아. 하지 만 약하게 틀었다가 10분이 지났을 때 더 강하게 틀라고 적혀있어.’
렉칼리온은 천영이 제대로 적어놓 지 않은 부분에 대해 해석하기 위해 무려 12시간이나 머리를 싸매고 고 민했다. 어떻게 하면 천영이 의도했 던 시약이 완성될 것인지.
마법 재료의 특성까지도 전부 분석 했다. 얼마나 열을 가하면 어떤 식 으로 변화하는지. 어느 정도의 열에 노출되면 안에 들어있는 성분이 빠 져나오는지. 그 모든 것을 일일이 실험한 뒤 완벽하게 분석을 끝낸 렉 칼리온은 자신의 추측을 문서에 추 가로 적어 넣었다.
‘마나 번 팬 기준으로,35.7%의 세 기로 8분 30초간 끓인 다음 51.98%의 세기로 1분 30초를 더 끓인다. 그 다음 나머지 시간은 다 시 83.4%로 끓이면……:
보글보글.
•완성이다.”
렉칼리온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 신히 진정시키며 냄비의 뚜껑을 열 었다. 그러자 화악! 하며 엄청난 냄 새가 뿜어져 나왔다. 허기진 배를 요동치게 만드는 정말로 향긋한 냄 새였다.
‘시약에서 이렇게나 맛있는 냄새가 나다니.’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마법 시 약은 본디 쓰고 역겹고 맛이 없을 터인데 이렇게나 맛있는 냄새를 풍 기는 마법 시약이라니!
침을 삼킨 렉칼리온은 조용히 위층 으로 올라갔다.
잠시 뒤 숟가락을 하나 챙겨서 내 려온 렉칼리온은 냄비에 그것을 가 져다 대었다. 숟가락으로 붉은 물을 한 스푼 떠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글보글 끓는 시약은 처음 보는군.’
침을 꿀꺽 삼키고서 렉칼리온은 눈 을 질끈 감았다. 그는 다른 차원 어 딘가를 활보하며 여전히 세상을 구 원하고 있을 영원의 드래곤 서천영 을 향해 기도했다.
‘제발 성공이기를……
눈을 꼭 감고 렉칼리온은 덜덜 떨 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자신의 입으 로 가져갔다. 마법 시약이 실패라면, 몸에 부작용이 오거나 죽을 수도 있 지만 렉칼리온은 이것이 실패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감이 말해주고 있 었다.
당장 이것을 먹어야만 한다고.
후룩.
..nr
고작 한 입이었다. 렉칼리온의 입 에 들어간 그 액체는 고작 그 정도 의 양으로도 그의 이성을 날려버리
기에 충분했다.
‘아,아아…… 대체 뭐란 말이 냐……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렉칼리온은 멍하 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서 한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 린다. 아니,렉칼리온은 천장을 바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또 다른 세상이 보였다.
서부에 위치한 갈라만지로 산맥의 수많은 돼지와 그 사이를 뛰어노는 작고 어린 소녀 하나. 그 소녀는 까 르록 웃으며 돼지 한 마리를 보살폈
다.
‘알렉산더! 우린 영원히 함께야.’
화면이 전환된다. 천둥벼락이 내려 치고,소나기가 내리는 날 밤. 소녀 가 바닥에 엎어진 채 엉엉 운다. 소 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알렉산더가 진흙탕에 쓰러져 있었다. 살리지 못 했다. 구해내지 못했다. 알렉산더는 소녀를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의 몸 을 던진 것이다!
소녀는 결심한다.
‘알렉산더,내가 널 먹어서 영원히 기억할게!’
렉칼리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나 의자에 앉았다. 멍하니 숟가락으 로 그 액체를 떠서 다시 입에 집어 넣는다.
그러자 맞은편에 누군가 나타나서 의자에 앉는다.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소녀였다. 그녀 역시 눈물을 흘 리며 렉칼리온이 만든 마법 시약을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었다.
“어흑,흑흑……
렉칼리온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 다.
“알렉산더…… 나도 널 기억할 게……
그러다 정신을 퍼뜩 차린 렉칼리온
은 뭔가를 깨닫고 말았다.
결국 서천영이 또 옳았다.
“아아 당신은 대체……
어찌하여 이렇게 만 년의 세월을 건너 또다시 자신에게 희망을 준단 말인가! 렉칼리온은 눈물을 간신히 머금은 채 결의에 찬 붉은 눈동자를 부릅떴다.
“……이 마법 시약은 장차 그리픈 차원을 구원하는 희망이 될 거야.”
렉칼리온은 이 시약의 이름을 ‘만 년의 희망’이라고 명명하여 전 세계 에 퍼뜨릴 것을 지시했다. 그의 적 극적인 지지에 의해 자유와 희망의
상징하게 된 마법 시약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종족을 막론하고서 레시 피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역 시 ‘희망’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후,만 년의 희망을 복용한 그리 픈 원정대는 모든 전쟁에서 승승장 구했다. 용기를 얻자 없던 힘이 솟 아났고, 재능을 가진 이들이 속출했 으며,절망에 빠져있던 천재들이 자 신의 가치를 깨달았고,수많은 사람 들이 이를 악물고 살아남기 위해 발 버둥치고 마침내 제 3차 차원전쟁에 서 승리하기에 이르렸다.
전쟁이 끝난 뒤,그리픈의 모든 생 명체들은 눈물을 줄줄 홀리며 무릎 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자신들에 게 용기를 심어준 위대한 드래곤 렉 칼리온을 향하여 만 년의 세월을 건 너 희망을 선물한 서천영을 향하여.
다시 만 년 전.
지옥불 마수왕의 성채를 박살내고 여관으로 돌아온 서천영은 비어있는 테이블을 보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부스럭 형,내 레시피 못 봤어?” “아…… 그거?”
바시락은 졸린 눈으로 잠시 고민하 더니 간신히 생각났다는 둣 말했다.
“돗거김이 주워가던데.”
“……그걸 왜 주워가?”
황당하다는 둣 되묻자 바시락이 귀 찮다는 둣 손을 휘이 저었다.
“알게 뭐야.”
그렇게 말하며 바시락이 몸을 엎어 버린 채 잠들자 천영은 시무룩한 얼 굴로 중얼거렸다.
“그리픈 음식계의 마지막 희망이 담긴 김치찌개 레시피였는데……
-근데 왜 그게 그리픈 음식계의 희망이야?
왜냐니,당연한 걸 묻는다.
"그냥 내가 제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