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18화
금색 별 마탑,서천영의 집무실.
아니,원래는 서천영의 집무실이 었을 공간. 제이나는 그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아무도 없는 게 아니었 다. 서류가 쌓인 높이가 서천영의 비서인 로서진의 앉은키보다도 높 아서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 다. 성큼 걸어서 책상에 다가간 제
이나는 로서진의 무덤덤한 표정을 확인했다. 전혀 피곤해 보이는 기 색이 없었다.
‘정말 괴물 같은 체력이야.’
이 모든 서류들은 모두 로서진이 스스로 떠맡은 것들이다. 심지어는 제이나가 주기 싫다며 양손으로 끌어안고 공공 수비하던 일거리마 저 억지로 벳어가기도 했다. 정말 독한 여자였다.
“어라,언제 오셨어요?”
“방금이요. 전달해줄 일거리가 생 겼거든요.”
사실 지금 로서진이 처리하고 있
는 일거리는 대부분이 서천영과 관련된 업무가 아니라 금색 별 마 탑 그 자체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비록 이 마탑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로서진 은 그 뛰어난 능력으로 벌써부터 이곳에 단단히 입지를 다지고 있 었다.
오죽하면 이제 몇몇 동료 직원들 은 로서진 없이 일하는 환경이 상 상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할정도 니까.
“일거리요?”
제발 좀 쉬엄쉬엄 하라며 최근에
들어서는 오히려 로서진에게서 일 을 뺏어가려고 하는 통에 그녀는 자신에게 직접 제이나가 일을 전 해주러 오는 일이 조금 생소했다. 그것은 제이나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는지 ‘이 구도 뭔가 이상 한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아니,이게 원래 당연한 걸까……라며 뭔가를 깨달은 제이 나는 그 서류더미를 책상에 올려 놓았다.
“로서진 씨가 마법에 능통해서 다 행이에요. 얼마 전에 메이지 서천 영이 학회에 발표할 논문을 보냈 거든요.”
로서진은 제이나가 건네준 서류 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다른 마탑 의 정말 어린 아이라도 그 이름만 말하면 바로 얼굴이 떠오를 법한 유명한 마법사들이 서천영에게 직 접 보내는 자신들의 이론이 한가 득 있었다.
‘이,이게 말로만 듣던……
마법의 세계는 넓고 광활하다. 하 지만 이 그리픈 대륙의 정점에 위 치한 마법사들,즉 세간에서 ‘현자’ 라고 불리는 이들은 저들끼리 서 로의 마법을 공유한다고 한다. 서 로가 서로에게 지식을 보내고,또 한 배울 점을 찾으며 도저히 답이
생각나지 않을 땐 조언을 구하며, 비상한 타개책을 대신 생각해내주 기도 한다.
과연 로서진의 예상대로였는지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번에 메이지 서천영이 발표할 데오론의 거짓 정리를 증 명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찾아 왔거든요. 이것과 관련된 서적들의 정리가……
제이나가 뭐라뭐라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로서진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저 감격한 얼굴로 이 칙칙한 종이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찐지 그곳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만 같 았다. 제이나 역시 자신의 말을 전 혀 듣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서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자도 천상 마 법사란 말이지……
하지만 천영은 떠나기 전 로서진 에게 검술을 꼭 배워보라고 신신 당부했다. 제이나는 아직까지 천영 이 왜 로서진에게 그런 말을 했는 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딜 보나 로서진은 학자 타입이었기 때문.
그녀는 벌써부터 정신없이 서류
를 파고들기 시작한 로서진을 보 며 한숨을 내쉬더니 그 예열을 가 로막았다.
“잠시만요.”
“네?”
“그 전에 처리해야 될 것들이 조 금 더 있어서요.”
그러면서 제이나는 다른 서류 뭉 치를 쿵 내려놓는다.
“메이지 서천영이 여기저기서 사 람들을 홀리고 다니는 건 아시죠?”
이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 니라 조금은 뻔하고 흔한 이야기 였다.
얼마 전 서천영이 발표한 ‘언령’ 은 마법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 도로 엄청난 대발견이었다. 그렇다 면,이 마법은 어디에 쓰일까?
정답은 모든 곳에 쓰인다.
의료 기술에도 마법이 들어가 있 으며 건설 작업을 할 때에도 마법 도구를 써야만 하고 하다못해 가 정집에서 돌아가는 밥솥이나 불을 켜주는 전등까지도 모두.
서천영의 언령 마법이 이 모든 기술에 접목되기 시작하자 마정석 의 효율이 몇 배나 상승했으며 사
람들의 돈이 쓸데없이 빠지는 것 이 줄어들었고 병원비는 더욱 더 저렴해졌으며 귀족들만이 특권으 로 가지고 있던 비싼 아티팩트 또 한 일반 시민들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마법의 평등화.
공화국의 유명한 전문가가 말했 다.
서천영에 의해 몇 천 년 전에 멸 망했을 ‘대마도시대’가 또 다시 재 림 했다고.
마법이란 더 이상 귀족들의 특권 이 아닌 누구에게나 손쉽게 다가
갈 수 있는 도구가 되었고 언령에 의해 복잡한 마법 공식이 몇 배나 간편화되어 기초 마법은 공부를 조금만 하면 누구라도 손쉽게 배 울 수가 있게 되었다. 이 기현상을 대마도시대라 칭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시대에 마도 시대라는 단어 를 붙이겠는가?
서천영의 ‘언령’은 발표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오지에 숨어 사는 이종족까지 손을 뻗어서 구 입하겠다고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 다. 몇 백 년 전에 모습을 감추었 다는 이방인들까지 직접 금색 별 마탑을 찾아와 화제가 될 정도였
으니 그 여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는 굳이 설명해봐야 입만 아플 뿐 이었다.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모 든 의사들이 입을 모아서 포기했 던 대부호의 병을 서천영의 마법 과 결합해서 치료했대요.”
“그,그래서요?”
“그 대부호가 선물로 작은 땅 문 서를 보냈던데…… 여기,문서에 도장도 찍어야 되고.”
“그건 본인이 오면……
“안 오잖아요.”
그러면서 제이나는 어쩐지 한이
맺힌 것처럼 말한다.
“유능한 마법사를 모시고 있을 땐 이런 것들은 비서가 알아서 처리 해야 돼요.”
원래 이런 중대사는 본인이 해야 맞는 일이다. 하지만 제이나는 이 미 레이븐의 모든 일을 떠맡은지 오래였다.
심지어는 그의 본가에서 청구되 는 가스요금도 제이나가 처리하고 있었다. 가끔 비용이 많이 나올 때 면 제이나는 레이븐을 구박하곤 했다. 제발 가스 밸브 좀 잠그고 다니라고.
“으,음…… 갑자기 땅이라니. 본 인은 알까요?”
“아,그거 말고도 많아요. 사실 서천영 전용 창고를 두 세 개 정 도 개방했는데…… 거기에 선물을 쌓아놓았거든요. 별 게 다 있어
요.”
“네 에?”
“다 수령 확인 해놓으셔야 해요.”
선물은 정말 종류도 많고 그 형 태도 다양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언령’에 의해 구원받았 고,희망을 얻었으며 더욱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고 미래를 약속받 았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 유 난히 경제 사정이 뚜렷한 이들은 아예 통 크게 서천영에게 선물을 왕창 쏟아 부은 것이다.
“으와…… 아멜레네 해안 절벽의 별장을 선물로 주다니…… 여기 가 보고 싶었는데.”
“이 분은 대도시 쿠멜척에 있는 저택 하나를 통째로 줬네요.”
“누가요?”
“음,계급이 대공이라고 되어있는 데…… 볼래요?”
“아,아뇨! 조금 있다가 볼게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평범하 게 자라고 평범하게 공부하고,평 범한 인생을 보내왔던 로서진에게 있어서 지금 이 상황은 정말 꿈만 같았다.
당연히 비서가 모시는 사람의 어 깨가 높을수록 비서의 어깨도 함 께 올라간다. 아마 서천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쯤 로 서진을 만나지 못해서 안달일 것 이다.
심지어는 예전 직장 동료들이나 아주 먼 과거에 연을 끊은 친구들 까지 찾아와서 달라붙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제이나는 로서진의 뿌듯해하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태껏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지독한 회의감을 느끼 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로서진이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뭔가를 하는 보람이 있는 일을 떠맡았으 니 이렇게 미친 듯 과제에 집착하 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제이나가 로서진을 높게 평가하 는 이유는 그녀의 집무 능력이나 비상한 두뇌,혀를 내두르게 만드 는 노력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사 소한 일 하나하나를 하면서 보람 을 느끼는 그 소박한 마인드. 이
일을 정말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한 다는 느낌의 그 마인드가 너무나 도 마음에 들었다.
도크멘 알렌드 크루즈는 서대륙 에서 아주 유명한 비행선이다. 도 크멘 크루즈가 지나치는 루트는 하나같이 영혼을 쏙 빼앗아갈 정 도로 아름다운 절경인 장소가 가 득했으며 일반인으로서는 가기 힘 든 오지까지 살짝 발을 담그고 올 정도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할 필
요가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그 유람선의 내부는 또 어떠한가. 천영은 지구에서 유람선 을 타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적어 도 유람선이라는 것이 이렇게 거 대하지 않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 었다. 지구에 있던 유람선의 2배 아니,4배는 되어 보이는 이 무지 막지한 사이즈에 혀를 내둘렀다.
‘원래는 이걸 탈 계획은 아니었지 만…….,
도크멘 알렌드 크루즈의 ‘환상 경 로’는 목적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대도시 흘렘. ‘용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 장소.
천영은 그곳까지 갈 비행선을 찾 던 와중 유람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금색 별 마탑의 특권으로 티켓을 쉽게 구할 수 있어 백화연 과 함께 이곳에 탑승할 수 있었다.
백화연 역시 이 크루즈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지 정말 넋이 나간 것 처럼 정신없이 뱃머리에 서서 풍 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쩔 때 보 면 정말 혼이 빠진 사람처럼 보여 천영이 불안할 정도로.
“어때? 유람선 탈만 하지?”
그냥 의례적으로 물은 말이었다. 사실 천영은 백화연쯤 되는 냉혈
안이 이런 여행을 좋아할 것이라 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는 마치 삶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살아갔고 광적으로 강함에 집착했 기 때문. 지금도 시간 낭비라며 하 루라도 빨리 사냥하러 가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반응은 180도 달랐다.
“응,아름다워.”
마치 눈물을 한 방울 홀릴 것처 럼 말하는 백화연의 그 모습에 천 영은 처음엔 얼떨떨했지만 이내 기분 좋게 웃었다. 자신이 직접 시 켜주는 여행에 백화연이 좋아하면 해주는 사람도 기분이 업 되기 마
련이니까.
천영은 잘 알지 못했지만 백화연 은 지금 ‘삶의 의미’라는 것을 하 나씩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저 지 구로 돌아가야만 했던 그녀의 삶. 하지만 지구로 돌아가야할 이유도 찾지 못했던 아이러니함. 하지만 백화연은 천영을 만난 뒤로 처음 으로 그리픈에 머물고 싶은 이유 를 하나 찾아버렸고 이후 그와 함 께 돌아다니며 그런 이유를 하나 씩 하나씩 계속해서 찾는 중이었 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찾은 또다른 이유. 그리픈은 그녀의 차갑게 식
은 감성을 촉촉하게 적실만큼 굉 장히 아름다웠다.
백화연은 멍하니 상체를 기대고 발밑에 펼쳐진 장관을 구경하다가 천영을 슬쩍 돌아보았다. 현재 그 는 풍성한 흑발을 동그랗게 말아 서 닿아놓은 상태였다. 원래는 누 군가가 해줘야만 가능했던 머리 모양이었다. 얼마 전부터 연습하기 시작해 오늘 처음으로 저 머리를 한 것에 성공한 천영은 꽤나 마음 에 든 모양이었지만 백화연은 영 탐탁지 않았다.
슬쩍 손을 뻗어 천영이 단단하게 묶은 머리끈을 한손가락으로 간단
히 풀어버리자 흑색의 폭포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자,잠깐…… 이거 묶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당황하여 허겁지겁 머리끈 하나 를 더 꺼내서 묶어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저 모양을 만드는데에만 해도 거울 앞에 앉아서 30분이나 실랑이를 벌여야했다. 지금처럼 바 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 장소 에서 초보자인 천영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결국 포기한 다음 천영이 백화연을 째 려보자,그녀는 연한 미소를 띠웠
다.
“머리 풀고 있는 게 더 예뻐.”
“……아니,기왕이면 멋있다고 해 주면 안 돼?”
“나는 보이는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그렇게 말하면 더 상처받아……
천영이 백화연과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파트라슈는 그의 어깨 위 에 앉은 채 눈을 감고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천영이 이쪽 방향으로 향하는 이 유 중 하나는 용의 큐브가 이쪽 방면에서 느껴진다는 파트라슈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천영은 파트라슈가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면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하지만 파트라슈가 말없이 무언 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상하군. 미묘한 시선이 느껴져. 아니,살기인가? 엄청 희미해서 약 해진 지금 상태로는 감지해내는 것조차 힘들어.’
사실 파트라슈는 드래곤의 수호 정령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라는 위대한 존재에게 닥칠 모든 위험 요소와 재앙을 감지할 수 있 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수호
정령이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하 지만 문제가 있다면 서천영이 현 재 너무나도 약하다는 사실.
과거의 드래곤들이 말 한 마디에 산을 통째로 들어 올리고 바다를 증발시켜버리며 차원계의 문을 자 유롭게 열어서 드나들던 것에 비 하면 천영은 정말 발톱의 때만큼 도 못했다. 그렇기에 파트라슈 또 한 그 힘이 미약해 할 수 있는 일 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분명 뭔가 있기는 한데…….,
확실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없 었기에 파트라슈는 입을 꾹 다물 고 있었다.
백화연과 실랑이를 하던 천영은 결국 머리카락을 모자 위로 숨겨 버린다음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그는 이미 백화연에게 지폐를 한 가득 쥐어준 채였다. 그 액수는 가히 이 유람선을 며칠 정 도는 빌릴 수 있을 정도로 고액이 었지만 그녀는 그 돈의 가치를 잘 몰라서 간식 몇 개 사먹을 정도라 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가는 건가,주인?
“책이나 읽게.”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풍경도 좋겠다. 천영은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장소에 가서 책을 펼쳐들었다. 파트라슈도 그것 에 관심을 가져 슬쩍 같이 읽어보 려고 했지만 제목부터가 ‘당신의 인생에 특이점이 필요하다면 그것 은 당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라는 잠이 오는 것이었기에 파트라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으윽,그런 걸 봤다가는 정신이 피폐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천영도 경험치가 아니었다면 이 런 책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파트라슈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비행선에는 천영을 주시하고 있는 7쌍의 눈동자가 있 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