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25화
천영이 굳이 신성대회의장에 따라 온 이유는 별 뜻은 없고 그저 교황 4명의 면상이나 구경할 겸 따라왔 다. 대체 어떤 놈들이 칼라할 교단 을 귀찮게 구는지 또한 천영을 귀찮 게 만드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으 니까. 천영은 지금 적을 물리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적을 설득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적 을 물리치는 것보다도 더욱 어려운
것이 적을 설득하는 것인 만큼 아무 리 머리가 좋아진 천영이라지만 정 보도 없이 무턱대고 나댈 수는 없었 다.
‘사실 용의 큐브는 이미 챙겼는 데…… 귀찮다 진짜.’
용의 큐브는 어쨌든 천영의 물건이 다. 그리고 리우펠리우스는 천영이 오자마자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하다 고 사과를 해대며 그것을 건네줬다.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인 성물 따위 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둣 아니,오 히려 이것밖에 없다는 게 너무나도 죄송스럽다는 둣 건네주는 교황의 얼굴을 보니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
다.
‘하아,진짜 어딜 가나 인간이 있 는 곳은 똑같단 말이지.’
4대 교단은 이번에 발생할 예언으 로 칼라할 교단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문,공표,정치적,범국가 적으로 사방팔방으로 예언에 관한 내용을 퍼뜨릴 것이다. 그리고 예언 대로 드래곤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 들은 칼라할 교단의 정체성을 부정 할 것이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천영이 드 래곤 폼으로 하늘을 열어서 등장해 야만 한다. 어중간하게 드래곤 폼으 로 하늘을 날아봐야 의미가 없다.
그것에는 신성한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기 때문.
하지만 천영은 하늘을 열 줄 모른 다.
아주 간단한 결론이 도출된다.
‘교황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예언 은 나도 이행할 수 없어. 다른 방법 으로 저들을 납득시켜야지.’
이곳까지 굳이 따라온 이유도 다른 교단을 어떻게든 납득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운이 좋으면 굳이 삼대월식날 밤하늘을 훨훨 날아다니 며 쪽팔린 원맨쇼를 펼치지 않아도 될 터이니까. 제 딴엔 멋있어 보이
려고 날아다니는데 정작 멋도 없고 밋밋해서 다른 교단이 한심하게 쳐 다보면 어떡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똑같이 정치를 시전하^ 건데……
천영은 정치를 할 줄 모른다. 하지 만 유리한 카드가 있다면? 천영은 스스로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본인이 드래 곤이라는 사실만 밝히지 않을 뿐 드 래곤이 실재한다는 증거만 제출하면 분명 칼라할 교단이 공격받는 것 만 큼은 피할 수 있을 터다. 천영이 그 런 떡밥을 던져준 뒤로는 칼라할 교 단의 교황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다.
“신성대회의는 내일부터입니다. 하 지만 오늘은 여러 가지의 이유 때문 에 다섯 교단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인사를 나누지요.”
“정치적인 이유로?”
“허허,콕 찔려서 할 말이 없군요. 맞습니다.”
다섯 교단의 교황과 성녀가 한 자 리에 모인다. 그들이 신성대회의장 을 등지고 서로 악수를 하거나 인사 를 하는 모습은 사진 기자들이 찍어 서 신문에 실리게 된다. 먼 과거 신 성대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다섯 교 단이 이렇게 평화적인 모습을 유지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교회는 피를 싫어하고,평화를 중시한다!’라 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이미지를 구 현해낼 수가 있다.
대회의장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작 교황들이 모이는 장소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나 싶었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람들에 게 성녀 4명의 존재는 지구로 따지 면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름다운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그들 을 보기 위해 멀리서 이곳까지 찾아 오는 경우도 흔한 일이라고 한다.
‘사람 되게 많네
성기사들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 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새하얀 제 복을 입은 성기사들의 보호를 받으 며 신성대회의장의 새하얀 대리석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속속히 도착 하고 있는 인원들이 보였다. 각각 다른 신을 숭배하는 교단이 모인 만 큼 사제복도 제각각이었다. 천영의 머릿속 이미지에서 사제복은 그저 하얀색이 정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는 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빛의 신 루몬을 포함하여 12명의 신을 숭배하는 교단은 직책에 따라 사제복이 제각각이었다. 교황은 루 몬이 입었던 옷을 본떠 노란색이었
으며 성녀의 사제복은 루몬의 여동 생 루니아스가 입었던 옷과 같은 색 인 하늘색이었고 추기경의 옷은 어 떤 신을 따라한 것인지는 몰라도 붉 은색이 었다.
이처럼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을 입 은 교황 5명과 성녀 4명이 전부 보 이자 그들은 아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올해도 ‘구호-난민 구제법’을 이 행하십니까?”
“물론이지요. 아직까지 한 끼 식사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새싹 들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이 아픔니다.”
“저는 일주일 뒤부터 성지순례를 할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도 성지에 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자들 이 있다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제가 두 눈을 감을 때까 지 부조리는 절대 용납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퍽 정상적인 교황들의 것이었기에 천영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룹은 두 개로 나뉘었다. 5명의 교황이 서로 악수를 하는 자리와 4명의 성녀가 다소곳하게 모여 얌전히 대화를 나 뉘는 자리로.
마치 보여주기 식으로 그런 자세를
일부러 배치했다는 둣,또한 기자들 역시 그런 구도가 익숙하다는 둣 열 심히 사진을 찍어나간다. 천영은 참 속보이는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누구입니까?”
하에안 교단의 교황,말베슨 하에 안이 묻자 썬 제스트 교단의 교황 모클제나가 추리했다.
“칼라할 교단의 새로운 성녀가 아 니겠습니까?”
“허허,과연 맞는 말이군요.”
“크흠. 그런 것이 아니라……
칼라할 교단의 교황 리우펠리우스 가 아니라며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
미 그들의 시선은 모두 천영에게 향 해있는 상태였다. 성녀들 역시 새로 운 성녀 후보가 등장했다는 말에 호 기심 어린 시선을 두었다. 교황 5명 이 신경전을 벌이는 만큼 성녀들 역 시 신경전을 벌인다. 성녀들은 모두 한 송이의 꽃처럼 가녀리고 아름다 웠으며 청초했지만 그 안에는 작은 칼날을 품고 있어야 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적에게 제압되지 않으려면 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했다.
‘예,예쁘긴 예쁘군… ‘어디서 저런 아이가-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성녀보다 도 어린 나이였지만 사제복을 입은 그 작고 가녀린 몸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어째서인지 이 자리에 있 는 4명의 성녀보다도 훨씬 성숙한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실제로 맞았다. 그녀들의 나 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지 만,천영의 실제 나이는 20대 후반 이니까.
본디 심미안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 운 것에 절대로 현혹되지 않으면서 냉정함을 뚜렷하게 유지하는 것에 능통한 교황들 역시 잠시지만 천영 의 큼지막한 눈망울이 반짝이는 것
을 보며 그 냉정을 잃을 뻔했다. 교 황들은 생각한다.
‘리우펠리우스가 어디서 큼지막한 물고기 하나를 건져왔군……
‘그나저나 성녀라니. 각성한 성녀 라면 곤란한데……
‘그래도 상관없다. 이번 대회의 때 공개적으로 예언에 대해 언급할 예 정이니까.’
천영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아니,오해는 둘째 치고 애 초에 천영은 신을 믿지 않는다. 사 제의 기본인 금욕 생활을 전혀 하지
않을뿐더러 지금도 주머니 속에는 천영의 최애주인 드래곤 브레스의 와인병이 굴러다닌다.
“저기……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열자,그 목소 리를 알아챈 성녀들이 귀신같이 천 영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소일레스 교단의 성 녀 하넬린이라고 해요.”
“저는 기레알-희릴 교단의 성 녀……
그녀들이 천영에게 훌쩍 다가와 바 로 수다통의 뚜껑을 따버리자 천영 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성녀는 무슨…… 그냥 동네 여고 생들이랑 똑같구만.’
천영은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 었다.
“서천영입니다. 금색 별 마탑의 마 법사죠.”
“네?”
그의 말에 성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지만 별로 믿는 것처럼 보 이지는 않았다.
‘왜 사람이 말을 하는데 믿지를 않 는 거야?’
그러면서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라
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팔목의 소 매를 걷으려다가,깨닫는다. 그는 현 재 칼라할의 ‘성자 혹은 성녀’들만 입을 수 있는 사제복을 걸치고 있었 다.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어찌 보 면 당연했다.
‘젠장,그래도 일단 시계를 보여주 면……
그렇게 손목을 걷으려는데 갑자기 사진 기자가 우르르 몰려오자 성녀 들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자세 를 취했다. 그 익숙함과 포즈의 자 연스러움,표정 변화의 다채로움까 지. 천영은 경악했다.
‘이 여자들,성녀가 아니라 프로
모델인 건가!’
하지만 사진을 찍게 놔둘 수는 없 었다. 저 사진 기자들이 어떤 내용 으로 신문에 내용을 실어버릴지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새로운 성녀의 등장 어쩌고 하면서 난리를 피울 것이다. 하지만 서천영은 이미 서대륙에서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 로 유명해진 얼굴이었다.
괜히 오해 짙은 기사가 났다가 천 영이 금색 별 마탑의 마법사라는 사 실이 뒤늦게 알려져도 칼라할 교단 의 이미지에 하등 좋을 것이 없었 다.
그는 아주 민첩한 몸놀림으로 소일
레스 교단의 성녀 하넬린의 등 뒤로 숨었다.
“어머,수줍음이 많으신가보네.”
“하지만 성녀가 수줍음이 많으면 못쓰지요.”
“흐음,아직 어리신데 신성력은 제 대로 사용하실 수나 있는 건가요?”
마법사인 천영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조용히 고개를 젓자 성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저런. 예쁘다고 해서 누구나 성녀 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천영은 깨달았다. 이 여자들 지금 서열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명백
히 천영을 무시하는 말투,어리다고 조롱하는 어조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우위를 뽐내는 그 자기과시까지. 그 녀들의 어린 재롱잔치에 천영은 뭐 라고 답해주기도 묘해서 입을 꾹 다 물고 있었다.
“나 마법사라고……
그렇게 충분한 양의 사진이 찍히고 (천영은 끝까지 얼굴을 보호하는 것 에 성공했다.) 교황들의 의례적인 인사가 모두 끝났다. 고작 몇 분 동 안 이곳에 서있었을 뿐이지만 천영 은 아주 기가 전부 빨릴 지경이었 다. 하지만 이곳에 온 덕분에 교황 들의 특성과 그 속내에 숨겨둔 독기
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서천영은 판단했다.
‘우선 그들에게 직접 드래곤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의미해.’
‘차라리 다른 교단이 아닌 시민들 을 설득할만한 정보 기관을 이용하 는 편이 낫겠어.’
‘이곳에 신문사가 모여 있는 게 신 의 한 수다.’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정보를 뿌린 다음 특정한 날 드래곤의 사진을 찍 게 만들어서 그것을 제출한 다
•모든 신문사에서 드래곤을 목
격했다는 증언이 퍼지면 4대 교단이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효력을 잃 게 돼.’
’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도 되고 동시에 칼라할 교단을 도울 수 있게 되지/
‘그렇다면 당장 신문사를 꼬시러 가야겠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 어.’
계획은 완벽하다. 하지만 시간이 터무니없이 적다. 천영은 아직까지 도 자신에게 들러붙어서 종알대는 어린 참새 4마리에게 대충 인사를 한 다음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각 형의 형태로 이 도시의 각 꼭짓점에
위치한 작은 탑이 교황들의 숙소이 다.
‘숙소에 돌아갈 시간은 없다. 당장 대회의가 내일이야. 지체할수록 불 리해진다. 일단은 점찍어둔 대로 이 전부터 안면을 익혀뒀던 신문사부터 가야겠지. 그쪽이 대화하기 편할 테 니까.’
천영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생각을 정리하며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사진 기자 중 한 명이 하늘을 올려다보더 니 외쳤다.
“저,저게 뭐지?”
그 외침에 교황과 성녀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한다. 천영 역시 얼떨결에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곳엔,태양을 등진 채 달리는 한 마리의 새하얀 백마가 있었다. 허공 을 밟으며 유유히 날아다니는 금색 뿔을 가진 신성스러운 생명체,유니 콘. 굉장히 잘 단련된 근육을 가진 유니콘 한 마리가 신성대회의장의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쉽사리 볼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닌 만큼 모두가 기대한다.
유니콘은 아름다우며 순결한 소녀 를 좋아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 에는 그런 후보가 4명 아니,5명이 나 있다.
성녀들은 재빨리 정치적으로 판단 한다. 이 자리에서 저 유니콘에게 선택받으면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과 신문사의 기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 는 자리에서 선택받으면 과연 이미 지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아마 소 문은 이렇게 날 것이다.
5대 교단의 성녀 중에서 유일하게 유니콘에게 선택받은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성녀라고.
그녀들은 괜히 머리카락을 어루만 지고 사제복을 정돈했다. 어떻게든 아름다움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유니콘은 성녀
들 중 한 명을 택하기 위함인지 서 서히 고도를 낮춰 대회의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기대한 다. 유니콘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조금씩,천천히 그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등장한 유니콘은 망설임 없 이 어디론가를 향했다. 성녀들은 그 유니콘이 향하는 방향을 보며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서,설마……
이윽고 바닥에 내려선 유니콘은 다 른 누구도 아닌 서천영에게 다가가 더니 머리를 내밀어 마치 애교를 부 리듯 주둥이를 그의 가슴팍에 비볐 다.
히힝 하며 울음소리를 낸 유니콘, 하성이 들러붙자 천영은 굉장히 짜 증난다는 티를 팍팍 내며 서둘러 그 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 다음 하성 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다.
“이 망할 새끼야,빨리 날아!”
-응? 나야 좋지! 하핫!
“젠장,젠장. 너 때문에 다 망했 어……
사진 기자들이 멍하니 쳐다보느라 사진을 채 찍기도 전에 간신히 날아 오르는 것에 성공하자 천영은 아래 쪽을 쳐다보았다. 하성의 도약력은 꽤나 강하기에 벌써부터 아래쪽 인
원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안 봐도 뻔했다. 사람들을 포함해 성녀 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