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44화
그 악마에게 있어서 그리픈 차원의 생명체를 먹어치우는 것이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대상에게 달라붙는 순간 악마의 앞에 ‘문’ 하나가 나타 난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많 은 옷장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그 리픈 차원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각 자의 정신에 지니고 있는 어떠한 정 신체 이미지였다.
처음 인간을 접했을 땐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명의 인간에게 기생
하는 순간 이 악마는 모든 것을 이 해했다.
옷이라는 것은 겉에 두르는 장신구 같은 것이다. 문은 손잡이를 잡고 열면 된다. 그저 문고리를 잡아 돌 려 열고 들어간 다음 몸에 걸치기만 하면 끝이다.
인간의 정신체라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들의 정신에 기생하는 것은 정말 로 간단했다. 옷은 종류별로 늘어져 있었다.
감각을 상징하는 것은 장갑,기억 을 상징하는 것은 상의,버릇을 상
징하는 것은 모자,말투를 상징하는 것은 마스크. 각각의 옷에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종류가 여러 개 로 나뉜 인간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입어보면 금세 적응할 수 있 었다.
즉 인간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 던 버릇이나 잊힌 기억조차 악마는 모두 꺼내서 읽을 수 있었다. 악마 가 옷을 모두 착용하는 순간 대상의 의지는 완벽하게 잠들어버린다. 그 리고 깊은 꿈을 꾸게 된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몸을 마음 대로 조종하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도 끔찍한 ‘악몽’을.
이 꿈 속에 등장하는 자신은 스스 로의 의지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 을 행위를 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명예로운 성기사가 의미 없는 살생 을 하거나,한 나라의 고고하고 위 대한 왕녀였던 여자가 길거리 창녀 로 전락하거나,자신이 끔찍이도 사 랑했던 가족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갈기갈기 잔인하게 찢어죽이거나.
악마들은 자신이 지배한 대상의 기 억을 읽는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짓을 벌인다. 그럼 으로써 대상에게서 의지를 완전히 지워버려 악마는 대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된다.
-너무 쉬워,인간들은.
과거에도 인간들이 머물던 차원은 몇 번이나 연결된 적이 있었다. 하 지만 현재,천영의 몸에 진입하고 있는 이 악마는 아직 나이가 어려 인간들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그렇기에 ‘기생’이라는 것 의 짜릿함을 알아버렸다.
천영을 완전히 덮친 악마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문을 쳐다보았다. 여 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문과도 비교 되지 않는 호화찬란하고 끝없이 솟 아올라있는 거대한 문이었다. 그것 이 악마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었다. 저렇게 예쁘고 커다란 문이면
뭐하나 간단히도 열려버릴 것을.
악마는 손잡이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천영의 몸을 지 배하기 위해.
-어라?
하지만.
손잡이가 없었다.
악마는 당황하였다. 문손잡이가 없 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병사와 기사 심지어는 마법사 의 기억마저 습득한 상태. 문에 손 잡이가 없더라도 들어갈 방법은 얼 마든지 있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몸을 마치 인간의 것과 비슷하게 만든 뒤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부딪힌다.
쿵!!
소리 없는 소음이 이 정신체 공간 을 울린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 지 않았다. 한 번,두 번,세 번. 악 마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하지 만 열리지 않았다.
-망할,어떻게 된 거지?
문이 이렇게 거대한 것도 처음 보 고,손잡이가 없는 경우도 처음이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자그마한 구멍이라도 있
다면 그곳으로 스며들어갈 텐데 그 어떠한 작은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 다.
마치 절대로 무언가의 침입을 허락 지 않겠다는 듯한 난공불락의 요새 를 보는 듯 했다.
요새가 그저 성이라면 정신체 악마 들은 비행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높 게 쌓아올린 성이 무슨 소용이랴 하 늘에서 미사일을 퍼부으면 싸움은 끝날 텐데. 그만큼이나 인간과 악마 의 정신의 격에는 큰 차이가 있었 다.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아니,가만.
인간이 맞던가?
정신체는 이 거대한 문을 올려다보 며 문득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여 태 다른 차원에 다녀온 또 다른 악 마들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어떤 차원에는 정신체가 너무나도 강력하여 도저히 지배가 불가능한 위대한 생명체가 있다고. 몇 백 년 넘도록 살아온 지고한 존재들을 지 배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그들의 정신방벽은 다른 평 범한 생명체와는 달리 몇 배나 ‘거 대한 형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눈앞의 문을 쳐다본다.
다른 인간들의 문은 고작해야 2m 남짓. 하지만 악마의 앞에 고요히 서있는 문은 하늘과 땅을 이을 정도 로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 다.
‘위험해.’
그리 판단한다. 이 정신체는 도저 히 건들 수가 없다. 악마는 뒤를 돌 아보았다. 그곳에 출구가 있을 것이 다.
……그랬을 터였다. 그곳에도 문이 있었다.
-어,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곳에도 문이 있다.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곳에도 역시 문이 있다.
손잡이가 없는 문.
이곳은 사실 악마가 생각하는 정신 체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건 문이 아니다. 그보다도 훨씬 이전 그러니 까.
-……애초에 나는 문의 근처에 가 지도 못했던 것이로군.
정신체이므로 정신의 공간에 갇히 게 되면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악 마가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으며 주 저앉자 목소리가 울렸다.
서천영이었다.
‘기생몽(寄生夢). 너무 욕심을 부렸 구나. 잠이나 자라.’
타인의 몸에 기생하여 그 대상에게 영원한 악몽을 꾸게 만드는 끔찍한 악마,기생동.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 신이 도리어 지배당한 이 상황은 기 생몽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끔 찍한 악몽일 것이다.
-‘그 자식들’을 뚫고 어떻게 빠져 나왔는데…….
다른 기생몽들과 달리 사회에 숨어 들어 완벽히 그 인물과 동화되어 유 희를 즐겨보기는커녕 제대로 된 기 억을 포식하기도 전에 붙잡혀버렸 다.
기생몽은 서서히 자신의 몸이 어디 론가 빨려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림자가 옅어지고 작게 뭉쳐지더 니 이윽고 천영의 손바닥 위로 올라 왔다.
야구공 정도의 크기로 변한 그 검
은색의 구체덩어리를 손에 쥔 천영 은 주머니에서 크리스털 병 하나를 꺼냈다.
“이,이럴 수가.”
러셀 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천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그마한 크리스털 병 안에다가 검은색의 그 림자를 집어넣었다. 여태까지 나이 트급 기사와 5클래스의 마법사조차 간단하게 무력화시킨 ‘악마’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손쉽게 제압하 여 자그마한 병에 수납하고 있었다.
“이게,대체……
크리스털 병은 그 크기가 소주잔만
했다. 양손으로 그것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푹 내쉰 천영은 러셀 리를 바라보았다.
멸망한 도시. 그곳에 세워진 높은 건축물. 구멍이 송송 뚫린 벽 사이 로 해질녘의 황혼이 스며들어와 천 영의 얼굴을 어스름히 비춘다.
러셀 리는 넋을 놓은 채 천영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영혼 마저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이 매혹적 인 얼굴이었다. 이대로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움직이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만도 같았다.
하지만 천영은 금방 고개를 돌려버 렸다. 아직까지도 쓰러져 있는 황자
일행에게 다가가더니 혀를 삐죽 내 밀어 검지에 침을 바르더니 그들의 이마를 쿡 찔렀다. 그러자 움찔 하 며 한 명씩 깨어난다.
정신을 침식당해 영혼이 피폐해진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천영이 러셸 리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자. 이제 갑시다.”
네청은 멸망해버린 도시의 창공 위 를 고요히 날아 거대한 돔 형태의 건물을 내려 보았다.
그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것은 애초에 살아있던 적 이 없는 무언가다. 그럼에도 네청은 꼭 저것이 오랜 벗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어렸을 적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볼 수 있었던 저 무언가 는 네청에게서 향수를 떠올리게 했 다.
그녀는 어쩐지 익숙한 양식의 그 건물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교회인가? 아니면 신전?’
꼭 그런 느낌의 건물이었다. 백화 연은 건물의 틈새 사이로 몸을 숨긴 채 아래쪽을 훔쳐보았다. 총 79개의 거대한 기둥이 정렬되어 있는 내부 가 훤히 드러난 건물은 꼭 지구에 있을 적 그리스의 신전과 매우 비숫 했다. 아니,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새겨진 무늬만 다를 뿐 건축 양식은 동등하다고 봐야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점은 상관 없었다. 그리픈이 지구와 밀접한 연 관이 있다는 사실은 진즉 알았으니 까.
‘저 자들은-
백화연이 눈을 가늘게 좁히자 시력 이 매의 눈처럼 향상된다. 신전의 안쪽에는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마 법사 5명이 둥그렇게 앉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저곳에서 똑바로 주문 을 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 한 기운이나 소리가 느껴지지 않았 다. 마치 저곳만 다른 차원인 것처 럼. 눈앞에 보이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상 이상의 차단막이군.’
물론 차단막으로서의 기능은 나이 트급 기사에게 들켜버린 이상 거기
까지였다. 기운과 소리를 모두 죽여 주는 이 차단막은 최소 7클래스의 마법사가 개발한 마법으로 그 어떤 대마법사가 와도 찾을 수 없도록 ‘마법적인 기’을 모두 배제한 마법 이었다. 즉 바람이 살짝 흔들릴 때 발생하는 자연적인 마나의 유동만큼 이나 적은 마나를 사용한다.
대신 차단막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제로. 그저 기운과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 전부였는데다가 백화연이 조금 만 접근을 하니 그마저도 무의미해 졌다.
“하암,귀찮네. 아,행님. 집중 좀 하시라니깐.”
“닥쳐 이 자식아. 지금 누가 누구 보고 집중하래? 너야말로 하품 한번 만 더 했다가는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라.”
“흐아아암……
“이 썩을 자식이.”
마법사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백화연은 지척에 있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서서 그들을 바라보았 다. 꽤나 젊은 것 같은 목소리도 있 었고 늙은이의 목소리도 있었다.
“근데 행님. 이만한 차원을 연 다 음 안에 살고 있는 정신체를 꺼낼 거면서 고작 이 도시에 있는 저 쓰
레기더미에다가 부여하는 이유가 뭡 니까?”
“쓰레기더미라니. 옛날에는 그래도 잘 나가는 마공학 전술 골렘이었 어.”
“그건 옛날이죠.”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 같냐? 지금도 움직이기만 하면,어지간한 도시 하나는 초토화된다.”
그에 젊은 마법사가 손뼉을 쳤다.
“아하! 그럼 저희는 저 골렘을 움 직여 세계정복을 하려는 겁니까?”
“너는 너무 소설을 많이 봤어.”
그래,그런 가능성도 있을 수 있 다. 저 골렘의 힘은 터무니없이 강 력했고 심지어 현재 그들이 열고 있 는 ‘차원’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 로 강력한 ‘기생몽’ 하나를 빼내와 그것에게 집어넣으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전력을 보여주겠지.
하지만 일곱 다리의 연결자들에게 고작 저런 골렘 따위는 필요치 않 다. 저 골렘은 그저 쓰레기통이다.
“우리는 그리픈의 ‘차원 경계’가 더욱 허물어지도록 차원만 찢으면 된다. 그래서 저 정신체를 꺼내려는 것인데 마땅히 담아둘 곳이 없으니 저 ‘쓰레기통’에다가 집어넣는 것이
“으엑,아깝습니다요. 행님,저거 제가 가지면 안 됩니까?”
“저걸? 참나. 종합 특수 통제실이 기능을 멈춘 지 천 년이 지났는데 무슨 수로 통제하려고? 게다가 기생 몽이 잠식한 이상 불가능해.”
그리고 저 골렘은 이 멸망한 도시 와 함께 근방의 나라로 날아가 그대 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저건 그런 골렘이다.
여차하면 이 도시 전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있는 괴물. 천 년 전 과거의 인간들은 너무나도
무서운 마법 병기를 만들어버렸다.
“흠흠. 기생몽이 그렇게 위험합니 까? 아까 ‘한 마리’가 빠져났는데 그건 어쩝니까?”
“뭐,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신력이 약한 일반인들 인생에 기생해서 살 아가겠지. 정신머리 글러먹은 놈이 아닌 이상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거 다. 그리픈의 기술과 문화를 이해했 다면 그저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낫 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다행이면서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생몽이 티를 내지 않는 이상 주변 사람들 혹은 가족들조차 피해자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것도
모를 것이다. 대상이 너무나도 강력 한 존재여서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평소에 하지 않던 행위를 통해 ‘잠 식 작업’을 하게 된다면 또 모를까.
“참 재미있는 종족이지. 기생몽은.”
자신이 사랑하던 이가 타차원의 악 마에게 기생당해 몸을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인 간이 얼마나 될까. 아마 절대로 없 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 소멸하겠 지. 기생동들은 번식 능력이 없으니 까.’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질문은 했지만 별로 궁금하지 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웨지스턴은 왔답니까?”
“신호를 보니 거의 도착한 모양이 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답니까? 진작 왔어야 하는 것을.”
“다른 일이라도 하다가 오래 걸렸 나보지. 아니면 이 도시가 지속적으 로 하늘 위를 움직여서 제대로 못 찾았을 수도 있고.”
그들의 내화 내용을 들으며 백화연
은 검을 빼들었다.
‘일곱 다리의 연결자.’
백화연은 표정을 굳혔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들의 대 화 내용만 듣더라도 정체를 유추하 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뭘 하려 는 건지는 몰라도 제지해야 한다.
하지만 검을 들고 내려서려는 순간 소름끼치는 감각이 본능을 자극했 다. 심장이 쿵광대며 뛰기 시작했다. 백화연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황혼이 내리고 손톱처럼 생 긴 초승달 두 개와 보름달 하나가 휘영청 떠올랐다.
저 멀리 첨탑의 옥상.
어찐지 거대하게 보이는 보름달을 등진 채 새하얀 털을 휘날리는 ‘은 빛 늑대 인간’ 하나가 백화연과 눈 을 마주쳤다.
‘들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늑대 인간은 그 자리에 이미 없었다.
대신 그녀는 심장을 향해 쇄도하는 날카로운 감각에 대응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