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1부터 시작하는 드래곤 라이프 181 화
크렐 텔리움 포레스트.
얕은 강을 따라 걷다가 한적한 오 솔길을 지나쳐 얇지만 늙은 나무 사 이로 들어가다 보면 작은 오두막 하 나가 나온다.
케일런은 땀을 살짝 홈치면서 그 오두막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군.”
뒤쫓던 렌디가 헉헉대면서 숨을 몰
아쉬었다.
“산은 너무 힘들어.”
“여긴 산이라도 하기도 좀 그렇지 않나요?”
렌디의 뒤를 살펴주던 검사 한 명 이 그리 말하자,케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막길도 별로 없었고.”
“……아냐,마법사한텐 엄청 힘들 어.”
“나도 마법사인데 별로 안 힘들었 다. 네 체력 문제야. 만날 마법서적 보지 말고 운동 좀 해라.”
케일런은 렌디를 쏘아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햇살도 아름답게 비춰 들어오고,야생 동물들도 온순했으 며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정말 평화로운 장소였 다.
어째서 이 노인네가 여기로 숨어들 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은 채 케일 런은 오두막의 문들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비록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여
전히 힘이 우직하게 담겨있는 노인 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케일 런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보 니,2층짜리 건물이었다. 계단으로 뒷짐을 진 호리호리한 인상의 노인 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곳까지 손님이라니 별 일이군. 앉으시오.”
케일런과 렌디 그리고 그들을 호위 하기 위해 찾아온 검사까지 해서 작 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애초에 손님이 찾아올 것을 생각지도 않았 던 것인지 의자의 높이와 크기가 제 각각이었다.
“한참 찾았습니다,장명국 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케일런이 말하자 노인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일이라면 뻔했기 때문 이었다.
현,케일런의 위치는 누군가에게 쉽사리 고개를 숙일 만한 인물이 아 니었다. 얼마 전 창설된 ‘넥스터 연 합’의 초대 연합장이기도 했으며 수 많은 상단과 클랜을 받아들이고 그 하위에 만 단위가 넘어가는 인원의 용병단을 구축하고 있는 초거대 그 룹의 우두머리였다.
이계에서 찾아온 존재인 ‘지구인’
들을 이 그리픈에 완벽하게 동화시 키기 위해 케일런은 굉장히 과격한 ‘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런 케일런에 비해 현재의 노인은 보잘 것 없었다.
레벨은 고작해야 100대 중후반일 까,어떻게 ‘위대한 여행자’를 얻었 는지조차 의심스럽고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아이템을 가진 것도 아니었 으며 특별한 비밀도 없었고 클래스 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 ‘넥스트’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넥스트라는 게임에 접속하기 전, 현실에서의 장명국이 어떤 인물이던 가.
20년 전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초거대그룹이 었던 ‘은밀’의 회장이었던 사내이다. 그리고 케일런은 그 장명국의 경험 과 지식이 뼈저리게 필요했다.
‘사람은 직접 피를 봐야 안다고 했 던가.’
케일런은 나름대로 똑똑하고,전략 적이었고 사람을 아래에 둘 줄 알았 으며 계획과 목표가 올곧은 사람이
었다. 그래도 경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금색 별 마탑과 각 국가의 연합, 또 ‘팔리 다리에르’의 힘으로 인해 현재 일곱 다리의 연결자와 관련된 거대기업들이 대거 숙청당하고 있었 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경제에 구멍 이 송송 뚫리기 시작하자 케일런은 즉시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넥스터 연합의 힘을 모두 쏟아부은 채로.
안시르엘과 셀라임이 그리픈의 ‘믿 음’의 상징이 되었으며 서천영이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면 케일런은 곧 ‘힘’을 상징하는 넥스터 집단을
만들어서 이 그리픈 대륙에 지구인 들의 토대를 단단히 굳힐 생각이었 던 것이다.
“거기에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경 영가였던 남자가 힘을 쓴다면 어떻 겠습니까?”
지구와 그리픈은 엄연히 다른 세계 이다.
또한 사업의 세계 역시 다를 것이 다.
하지만 장명국이라면? 다 쓰러져가 는 회사를 일으켜 세워 명실공히 대 한민국 최대의 그룹으로 끌어올렸던 사내가 이곳에서 또다시 사업을 시
작한다면? 지구의 지식과 그리픈의 지식을 모두 합쳐 장명국 만의 새로 운 경영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낸다면?
“크흐흐흐.”
장명국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순박한 노인네가 손주의 재롱을 보 며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케일런의 눈에는 제대로 그 진면목이 비춰지고 있었다.
“넌 이미 실패했군.”
“……그렇습니다.”
“그래,넌 기초조차 제대로 되어있 지 않아.”
“기초…… 말씀이십니까?”
“그래,기초.”
장명국이 뭔가를 달라는 식으로 손 을 쭉 뻗었다. 그러자 렌디가 황급 히 가져온 서류가방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 마치 그들이 이것을 가져왔 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던 것처럼, 장명국은 자연스레 행동했다. 서류 몇 장을 읽어보던 장명국은 피식 웃 었다.
“사업가의 기초가 되는 것. 그건 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이야. 근데 넌 그게 없어.”
그 순간 장명국의 입가에 ‘욕망’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욕심이란 건 늙을수록 커지는 법이지.”
“그 여자,우리 교단의 성기사로 섭외해야겠어.”
야채 ‘있는’ 야채 호빵을 으적으적 씹으며 셀라임이 말했다. 안시르엘 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둬. 금색 별 마탑의 제의도 거절했잖아.”
“아냐,사실 장래희망이 성녀님을 지키는 기사님일수도 있는 거잖아?”
“……글쎄. 최소한 성녀는 아닌 것 같은데. 천영 오빠면 몰라도.”
셀라임은 야채 호빵을 거칠게 물어 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굉장히 뛰 어난 인재였다.
검선 백화연,떠돌이 검객.
얼마 전 금색 별 마탑에서 나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 여인은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 도 아무 대가 없이. 금색 별 마탑에 서 지속적으로 그 여자에게 뭔가를 지원해주는 모양이었지만 백화연은
그 마저도 부담스러운지 최대한 마 주치지 않도록 도망치고 있는 지경 이라고 했다.
물론 서천영은 백화연을 붙잡으려 고 했다. 차기 마탑주의 호위기사로 사는 것은 어떠냐고.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백화 연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백화연이라는 분은 방랑벽 (放浪 痛)이 있어.”
“그런 것 같긴 한데……
백화연에게 있어서 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긴 교단의 생활은 맞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클래스도 성기사가 아니잖 아.”
“우리 르엘이 알고 있잖아. 이제 클래스라는 ‘시스템’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건…… 그렇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지구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게임 시스템 에 관해 여러 가지의 연구를 지속해 왔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 하나는 ‘클래스’라는 것이 사실상 그 틀을 잡아주는 뼈대일 뿐 ‘스킬’이나 기 술을 배움에 있어서 별 제약이 되지 않는단 사실이었다.
실제의 게임을 할 때에는 절대로 클래스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이라는 시스템에 갇힌 곳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고, 이 곳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한도 에 따라서 클래스 변경이 가능했다. 무작정 마법사가 검사로 바뀌는 것 은 그리픈을 살아가던 주민들도 불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안 되겠지만 검사가 신성기사로 클래스를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야 ‘믿음’만 충분하면 될 테니까.
비록 그 믿음이라는 것이 클래스
없이 가지기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문제였지만.
‘하지만 백화연이라는 여자는 믿음 이 아주 충분한 상태야.’
누구에 관한 믿음이겠는가.
서천영에 대한 믿음이다.
셀라임과 안시르엘은 백화연과의 첫 대면을 생각했다. 그녀들은 서로 마주치는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동질감,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 가.
“그럼,그 여자를 섭외하면서 조건 을 걸자. 지금 백화연이 하고 있는 ‘선행’이 너무 아깝단 말이지.”
“무슨 조건?”
안시르엘이 되묻자 셀라임은 호빵 을 한 덩이 채 꿀꺽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교단에 속하기만 하라고. 우리에 게 가장 중요한 건 이미지 메이킹이 야. 그리고 우리 교단에 속한 떠돌 이 성기사가 그리픈 곳곳을 돌아다 니며 ‘구원’을 행하는데 이보다도 더 좋은 이미지 메이킹이 어디 있 어?”
“……셀라임, 선행을 이용하자는 거야?”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안시르엘이 그
렇게 말하자,셀라임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신을 믿는 성기사가 할 만한 발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신자가 아닌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부여하는 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이용하는 거야. 그렇게라도 해서 이 대륙의 사람들이 조금이라 도 이 평화에 대해 믿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불안에 떨지 않 을 수 있다면.”
5대 교단의 이미지가 ‘평화’에 자
그마한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다면.
“나는 순수한 선행이라도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어.”
셀라임은 그렇게 말했다.
정치는 미친놈들만 하는 것이 틀림 없다.
로서진은 그 생각을 단단하게 굳혔 다. 전 세계의 최정상들이 모이는 장소답게,무수히 많은 또라이들 역 시 몰려들었고 그들의 ‘정치질’에
로서진은 아주 기가 빨릴 지경이었 다.
서로서로 그저 툭,던지는 말 한 마디에 가시가 담겨 있었고 자칫 했 다간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말도 과감하게 날리고 본다.
팩트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다른 이 들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서천영 식으로 비유하자면 정치판 은 선빵이 필승이라고 한다. 지구에 살던 누군가가 말했다고 한다. 먼저 선동과 날조를 날려주면 상대방은 그것을 대응하기 위해 긴 시간을 들 여 반박문을 준비해오지만 이미 대
다수의 사람들은 선동을 믿게 된다
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잘 할 수 있을까.’
로서진은 서천영을 믿는다. 정말 광적으로,그의 모든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정상회의는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 인사 를 나누던 사이의 틈새에 껴있었을 뿐인데도 탈진 직전까지 몰렸을 정 도이니.
-야,주인 부하. 표정이 왜 그렇게 썩어있어?
“네? 아,그게……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인간’들이 펼치는 정치질에는 견딜 수 없을 것 이다. 로서진은 그런 걱정을 파트라 슈에게 말했다. 그러자 파트라슈가 피식 웃었다.
-그래,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 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걸.
또한 금색 별 마탑과 ‘거래’를 하 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수많은 왕족 들과 정치인들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드래곤이 상대라도, 정치에 있어서 그들은 단 한 발자국 도 물러설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근데.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영웅 몇 명 달랑 데리고 세상에 희망을 부여하는 건 할 수 없어. 하지만 걱 정할 필요가 없지. 드래곤이란 본디 그 세계의 모든 이들을 다룰 수 있 는 능력을 타고났거든.
“예? 그게 무슨 소리죠?”
-생각해봐. 평화로운 지금 이 상황 에도 윗대가리들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지. 하물며 만약 세계 전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차원이면 어떨까. 서로가 원수인 상황에 아무 리 ‘재앙’이 발생한다 해서 손을 잡 을 것 같아?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그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뻗고 화해를 하지 않는다면 그 세 상은 구원받을 수 없다.
역대의 모든 ‘용’들은 그러한 경험 을 사무치게 깨달았고 모든 생명체 가 진화하듯 드래곤 역시 진화에 진 화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현재 드래 곤이 가지게 된 능력 중 하나가 있 었다.
벌컥.
파트라슈의 이야기를 들으며 로서 진은 서천영이 머물고 있는 귀빈실 의 문을 열었다. 귀빈실의 내부에는 서천영이 반쯤 피곤한 얼굴로 펑퍼
짐한 로브를 입은 채,거울 앞에 있 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 다. 문이 열리자 서천영이 고개를 돌려 로서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용안(龍顔).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대상의 마음을 녹여버리 지.
나라를 뒤흔드는 미색을 갖췄다 하 여,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단어 가 생겨났다. 어쩌면 그것은 용을 두고 만들어진 단어일지도 모른다.
서천영이 그저 잔잔한 눈으로 본인 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모 든 피로가 물로 씻어 내린 듯 깔끔
하게 날아가 버린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이렇게 피곤 하고 힘들지만,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로서진은 생각한다.
삶의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