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 #25. 푸쳐핸섭!
간만의 호출이었다.
“얼마만의 출근이야.”
마루가 쓰게 웃으며 혜성 길드의 건물을 올려다 본 뒤, 주변을 쭈욱 훑었다.
‘이젠 몇 없네.’
두 번의 승급현상으로 인해, 몰려들었던 각국의 헌터들이 진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는 던전 주변만이 아니라 길드 주변도 포함되는 이야기로써, 간혹 이 주변을 들를 때면 빽빽한 시선들이 전신을 두드리는 탓에, 마치 마사지하는 기분을 맛보고는 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기세들이 너무도 뜨거웠다.
하지만 광호 길드의 승급현상 때문인지, 인원이 대거 빠져나갔고, 덕분에 느껴지는 감각이 예전만 같지 않았다.
물론, 없진 않았지만 미지근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몇몇 시선들을 지나쳐 길드로 들어간 뒤, 특수 1팀의 회의실로 찾아가니, 김연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왔어요?”
그녀는 전장이 아니기에 존대로 맞아줬다.
“차가 좀 막혀서 늦었습니다.”
마루의 이야기에 김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딱 정각이잖아요.”
그러며 밖으로 호출하니 간단한 다과세트가 들어왔다. 근 한 달만의 만남이다 보니, 간단한 입가심과 함께 밀렸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간혹 뒷문으로 길드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정식 출근은 아닌데다가 이소희와 김연희는 워낙 바빠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약간 어색한 감도 있었지만, 소소한 대화를 통해 지난 공백을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었다.
김연희는 그의 몇몇 방문을 언급하며 물었다
“지원 품목들이 제법 되던데. 여기 일반 장구류도 제법 보이네요.”
가끔씩 나온 이유는 사실 별 거 아니었다.
‘회사 지원금으로 장비를 사야 싸지.’
마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용 장비만 구입하는 것보다. 상황별로 간단히 대처할 수 있는 장비들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가드 분들이 계시겠지만, 저희 같은 총기류 각성자는 단숨에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시간 지연용으로 일반 장구류도 좀 요청했습니다.”
그 말에 김연희가 눈웃음을 쳤다.
“굳이 이런 거 없어도 충분하시겠던데요.”
그녀의 이야기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아는 까닭이었다.
‘망할 리튜브!’
그의 건가드 영상을 언급하는 것이리라.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일단 장구류가 있는 방면이 좀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김연희가 웃어보였다.
“걱정 마세요. 물품 청구는 전부 처리 됐으니까. 그만한 솜씨가 있으면, 장비까지 제대로 갖추는 게 좋죠. 굳이 이걸 언급한 건, 상황을 좀 더 확실히 알기 위함이고, 조언도 좀 해 드리려는 생각에서였어요.”
“조언이라 하시면?”
“알다시피 제타, 박건 조장이 왕년에 건가드로 꽤 날렸잖아요. 찾아가서 제대로 된 장비 목록도 얻고, 관련해서 괜찮은 업체도 들어두시면 좋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재차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어느새 다과상이 싹 비어갈 즈음, 김연희가 슬며시 새로운 운을 띄웠다.
“요 근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광호 덕분에 한 숨 돌릴 수 있게 됐네요.”
마루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광호 길드에 대한 언급이 시작된 까닭이었다. 구정국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던 만큼, 절로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3연속 승급이라니, 광호도 골치 깨나 썩겠네요.”
개중 2번은 하위 그룹에서 발생한 거고, 그곳 주변 지대도 하위 그룹 담당이긴 하나, 일단 광호에 등록된 지대였다.
“가이드 작업만으로도 골머리가 깨질 걸요. 후훗!”
그러며 웃어 보인 김연희가 말했다.
“흠흠! 아시다시피 그쪽하고 저희하고 라이벌 관계다 보니,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네요.”
“괜찮습니다. 두 길드 사이의 역사는 대충 알고 있으니까요.”
이는 길드에 소속되기 이전부터 알던 내용으로써, 아무래도 한국을 대표하는 거인들 간의 알력다툼이다 보니, 모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그렇게 광호를 중심으로 새롭게 꾸며졌다. 이 역시 소소한 내용들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루는 묘한 긴장감 속에 입안이 바싹 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저희와 광호 사이에는 정말 역사가 많죠,”
“그렇군요.”
“라이벌이라기 보단, 앙숙에 가깝답니다.”
“길드 분위기로 짐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꼬소한 거죠. 풉!”
소소한 내용 사이사이 이처럼 광호를 찔러대는 내용들이 튀어나오는데, 마루는 마치 자신이 후벼 파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의도적이란 예감이 들었고,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들켰구나.’
구정국과의 만남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이처럼 주위만 빙빙 도는 건, 은연중에 경고를 하는 것이리라.
이러다 위장이 곪을까 걱정 돼, 그냥 불어버렸다.
“광호에서 스카웃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김연희가 이야기를 멈췄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깐 미소가 흐려지는 것 같더니, 다시금 입 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숨기셔도 될 텐데, 굳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냥, 자진납세라고 생각해 주십쇼.”
“당당하시네요.”
“사실, 좀 긴장하고 있긴 합니다. 광호와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찔릴 게 없으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루는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수락하진 않았습니다.”
물론, 살짝 간을 본 건 사실이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던전 이용권은 그만큼 매력적인 값어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루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던 김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 한편의 서랍을 열었다.
“구정국과 만나신 거, 저희도 알고 있답니다.”
‘설마?’
“아! 마루씨가 아니라 구정국 측에 붙여놓은 눈이 꽤 있던 거니까. 오해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러며 서류 하나를 꺼내 마루에게로 내밀었다.
‘이건...?’
놀랍게도 계약서였다.
“제가 생각보다 사람 보는 눈이 꽤 있습니다.”
그 말에 구정국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는 혜성 길드의 김연희 팀장을 신뢰합니다.]
앙숙 관계임에도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산다고 했던가. 새삼스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김연희가 입을 열었다.
“전 마루씨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껏 끌어들였던 각성자 중에서, 가장 장대한 미래가 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며 계약서를 두드렸다.
“당연히 광호에게 뺏길 생각도 없답니다. 오늘 마루씨를 호출한 목적은 사실 이것 때문입니다. 광호에서 어떤 제안을 했건 상관없이,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으로 재계약을 해 드리기 위해서죠.”
헌데, 거기에 광호길드의 이름이 끼어버렸다.
“얼마가 됐건, 그쪽에서 부른 것 두 배로 맞춰드리겠습니다.”
마루의 머리가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거기서 2배 여기서 2배면?’
단번에 4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와우!’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룰루랄라...’
마루는 간만에 소고기까지 사서 집으로 향했다.
아주 고급진 투 플러스 한우를 두툼히 짊어지고 가는 길,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가 싶더니, 평소의 귀가길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넘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전방의 길모퉁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아니나 다를까. 그 너머로 그림자가 비쳐들더니,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몇몇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레이 셰이드!’
그를 리튜브 스타로 만든 이들이었다.
‘뜻밖인데.’
설마, 저들이 자신들의 영역도 아닌 한국에서 이빨을 드러내려 할 줄이야. 게다가 그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무려 혜성 길드의 ‘특수 1팀’이 아니던가.
‘뭘 믿고?’
우연이라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문득, 김연희의 경고가 떠올랐다.
[또응...구정국 그 사람, 얌전히 물러날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니 한동안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소릴 들은 것이다.
[아무래도 광호도 정신없는 상황이라서, 당장 뭔가 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필요하다면 따로 가드도 붙여주겠다는 소리에, 마루가 거절했었다.
‘어쩌면 이게, 혹시 모를 상황인 걸까?’
저들 그레이 셰이드와 구정국의 연결고리가 어디 있겠냐며, 너무 과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젓던 것도 잠시였다.
슬금슬금 포위진을 갖춰가는 그레이 셰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저들이 자세를 잡기 전에, 선공필승이니 뭐니 하면서, 먼저 달려들었을 것이건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베스트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거지.’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그를 에워쌓는 그레이 셰이드들을 바라보며 마루가 입을 열었다.
“날 찾아온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확인 좀 하자. 정말 나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거냐?”
마치 답을 대신하듯, 그레이 셰이드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스릉...차앙...
그 흉흉한 모습에 마루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참, 여러모로 착각한단 말이야.”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그레이 셰이드를 이끌고 있던 발탄 타이라가 의문을 내비쳤다.
‘너무 여유로운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슬며시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걸 참,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이라 해야 하나? 생각해보면 헌터들도 다를 게 없긴 하네.”
마루의 이야기는 쭈욱 이어졌다. 그 속에 묻어나오는 느긋한 분위기에 발탄은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더욱 마루를 집중해서 살피게 됐다.
“등급이 낮은 헌터는 약할 거라는 착각. 총기류 헌터는 허접하다는 착각. 뭐, 그런 거 있잖아?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시각화의 오류 같은 거.”
사실,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긴 했다.
“확실히 비주류 헌터나 총기 각성자가 고위 몬스터를 사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몇몇은 불가능한 게 분명할 거고.”
그러며 마루가 품 안에서 총을 꺼냈다.
“하지만 그건 몬스터 한정이란 소리야.”
비릿한 미소와 함께 주변을 쭈욱 훑은 그가 물었다.
“너희 띨빡들은 대가리에 총알이 안 박힌다고 생각하니?”
상기해야 할 포인트 하나.
“몬스터도 차원방벽 없으면 잡밥이야.”
물론, 그딴 거 없이도 총알을 BB탄으로 만들어 버리는 몬스터들이 쌔고 쌨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하나였다.
“각성하고 몸뚱이 좀 단단해졌다고, 니들이 몬스터라도 된 줄 아니?”
마루가 실소했다.
“결국, 인간이야.”
총구가 움직였다.
“까불지 마.”
타앙!
그레이 셰이드가 화들짝 놀라 반응하는데, 황당하게 마루의 총알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하늘 위로 쏜 것이다.
퍽!
바로 옆 전봇대의 야간 등이 박살났다.
하나같이 의문을 내비치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발생했다.
‘엇?’
‘허억!’
일제히 무릎이 꺾였다.
“내가 왜 굳이 이 방향으로 왔을까? 좀 더 모른 척 연기하면서 유인해도 될 텐데, 어중간한 위치에서 너희를 불러냈을까? 어째서 포위망을 구경만 했을까? 어째서 주둥이만 놀리며 접근하는 걸 내버려뒀을까? 어째서? 왜? Why?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왜? 기껏해야 C급 총기류 헌터니까. 대충 우르르 몰려와서 뚜까 패면 되겠다 싶었어? 그래. 만만하다 싶었지?”
그의 물음에 그레이 셰이드들이 일제히 입술을 짓씹었다.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숫자를 보라. 무려 20명이나 됐다. 단순하게 몸으로만 밀어붙여도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 모습에 마루가 실소를 터트렸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데, 어디 승냥이 떼도 못되는 새끼들이 건방을 떨고 지랄이야.”
그가 총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내 대가리는 환기가 절실하다. 푸쳐핸섭!”
약속이나 한 듯, 죄다 땅바닥에 손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