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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꽃.

#23. 꽃.

태호 그룹의 새로운 간판이 된 적호 길드는 젊은 수장을 앞세우며,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 안타깝게도 대외적으로는 공표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는 이들 사이에선 눈을 동그랗게 뜨게 만들 정도의 내용이었다.

‘방계의 처우 개선이라.’

그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 이선도 적잖이 놀랐는데, 더더욱 놀라운 부분은 바로 그 전언을 가져온 사내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외팔이가 되어 버린 구정국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폐인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다는 게 중요했는데, 강만기는 그를 두고두고 괴롭히려는 속셈으로 살려 뒀다고 한다.

이를 강호구가 구하고 회복까지 시켜 놓은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전령으로 부리기까지 했다.

‘지난 악연을 끝내자라….’

친하게 지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더는 날을 세우지는 말자며, 지난 과오를 앞세우며 먼저 손을 내밀어 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번 반란에 앞장섰던 방계의 무리들을 자유롭게 풀어 준 점도 놀라웠다.

애초에 강용호 회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의견 조율이 됐던 부분이지만, 강호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저들의 차후 행보까지 지원을 한 것인데, 그 방법에서 작게 탄성이 나왔다.

삼족오!

그 역시 제법 인연을 맺고 있는 독자적 길드의 선두 주자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마치 이선에게 보여 주는 것 같은 행보로, 짐작건대 화해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 아닐까 싶었다.

‘보통이 아니군.’

새삼 강호구에 대해 감탄사를 터트리는 것도 잠시, 다른 방계들의 처우에 관한 부분도 떠올렸다.

이번의 반란을 통해 직계와 방계들 사이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이선이 있었다.

애초에 사건을 일으켰던 이들 대부분이 이선과의 인연으로 대우가 좋지 못하던 이들이 아니던가.

남아 있는 이들의 경우 오히려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강호구는 이들을 아예 분류해서, 마찰을 최소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의미 없는 차별을 하나씩 거두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계야 있겠지만.’

그 같은 행동을 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직계의 불만이 뒤따르겠지만, 방계의 충성은 확실히 받아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용호 회장이 뒤를 봐주는 만큼, 직계들도 결국 목소리를 죽이리라.

‘생각보다 과감한 건, 역시 큰 사모님 때문인가?’

강용호의 첫 번째 부인이 강호구의 뒤를 봐준다고 들었다. 아마도 둘째 부인의 자식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이리라.

그는 태호 그룹 내부의 여러 알력 다툼 등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굳이 그가 고민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강호구가 손을 내밀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한국 활동에 태클을 걸어왔던 태호 그룹이 아니던가.

‘이 나라가 그리 그립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쪽문으로 들어와 뒷골목을 배회하는 게 아니라, 정문으로 들어와 당당히 밝은 대로를 걷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다.

좀 더 당당해져야 했다.

‘희야를 만나려면….’

그녀는 이제 한국을 상징하는 초인이 되었다. 그 곁에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고민을 하던 것도 잠시, 그는 살살 올라오는 배 속의 신호를 확인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장 보러 간다더니, 뭐 이렇게 오래 걸려?”

마루의 외출이 예상 이상으로 길어지는 가운데, 배 속의 신호가 슬그머니 외부로 표출됐다.

꼬르르륵….

반지 착용의 후유증이라 해야 할까?

‘회복력이 상승한 건 좋은데.’

유난히 배가 자주 고팠다.

* * *

최근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는 젊은 신성.

강호구!

그는 자신의 새로운 집무실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부친 강용호 회장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그러다 작게 몸서리를 쳤다.

“설마, 아버님이 이번 사건의 배후들과 자리를 마련할 줄이야.”

강만기는 마루의 악연이라 불리던 이들의 뒷배들과 다리를 놓은 뒤, 피닉스 제거 이후 그들과의 연계로 복잡한 상황들을 해결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나같이 알아주는 거물들이기 때문에,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만기가 퇴출된 지금 상황에선 그들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강용호는 강호구에게 그들과의 만남을 준비시켰다.

―길드장 취임 선물이다!

어떻게?

‘설마, 그들의 모임을 주선한 게 아버님일 줄이야.’

저들의 최초 연회에 강용호의 입김이 닿아 있던 것이다. 그저 자리를 빌려 준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연결 고리를 뽑아낼 수 있는 게 바로 ‘태호 그룹’ 회장이란 위치였다.

길드는 비록 세계적 명성이 부족하나, 그룹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랐다.

‘형님이 아버님의 뜻을 따랐더라면…?’

강호구의 등장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졌으리라. 어쩌면 강용호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강만기를 시험하려 했던 걸지도 몰랐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건, 그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후우… 결국, 장기의 말 같은 존재인가.’

알고 있던 부분이지만, 이번 사건과 상황을 통해 한층 경각심을 새기는 계기가 되긴 충분했다.

그러면서 재차 사건을 되새기는데, 문득 현 상황의 결정적 촉매제 역할을 했던 존재가 떠올랐다.

‘발록,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필요한 걸 얻자마자 떠나 버린 그의 모습에 내심 의아하기만 했다. 수집한 정보를 되새겨 봤을 때, 분명 그가 날뛸 수밖에 없는 요소가 충분하건만, 별다른 소란 없이 한국을 뜬 것이다.

‘으음….’

그 때문인지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 탓일까?

‘이러다 위장병 도지는 거 아니야?’

각성 이후 깔끔히 완치됐던 신경성 위장병이건만, 왠지 재발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사건이 끝나고, 원하던 물건을 받아 챙긴 덕분일까?

위이이잉….

발록은 즉각 비행기에 올랐다.

딸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한시가 바쁜 순간이었다.

친우의 도움으로 능력의 폭주를 막고는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한 고통이 산드라를 괴롭힐 터, 그에게는 1분 1초가 아까웠다.

그런 이유로 걸리는 게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광호 길드.’

마루를 통해 전해 받은 그들의 비리를 떠올렸다. 특히 그중에서 유독 그의 신경을 건드리던 게 있었다.

‘불법 연구소!’

그 나름대로 철저히 조사를 했었건만, 거기에는 광호의 연구소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었다.

물론, 산드라를 생각한다면 알았더라도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문에 마루에게 정보를 건네받고도 계획대로 진행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철저히 숨겨 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부대껴 온 혜성이기에 얻어 낼 수 있는 정보이리라.

‘…장소부터가 뜻밖이었지.’

생각지도 못한 공간에 연구소를 마련하고 있었다. 워낙 폐쇄적인 영역이기도 했다.

‘북한!’

저들이 분단국가라는 걸 생각하니, 더더욱 의외였던 부분이었다.

‘일단, 다음을 기약하지.’

남겨 놓은 일 때문에라도 다시금 한국을 방문해야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반드시 찾을 생각이었다.

‘산드라가 살기 괜찮은 나라야.’

이곳 치안 및 교육 수준에 반해 버린 탓이다.

추가적으로 한 가지 더,

‘CT헌터!’

그가 제안했던 ‘실버 박사 유산’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감히 날 상대로 장난질을 한 거라면.’

불벼락을 쏟아 줄 생각이었다.

* * *

엔트라 데스크!

최근 그곳 게시판으로 한 가지 기묘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제로원의 사망설!]

그 기점이 된 게시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제로원이 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었다.

그 밑으로 나날이 댓글이 추가되며, 점차적으로 화제성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이레귤러 관련 게시글은 존슨이 전문가긴 한데.

―마족의 분신화라니. 정보 등급이 높긴 하네.

―그냥 어그로성 글이 아닐까?

―최상위 게시판은 장난질이 어려워. 진짜 가치 있는 정보만 등록되는 곳이잖아.

―엔트라넷의 메커니즘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데스크는 철저한 익명제로 운영되는 공간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특별 아이템을 구입한 뒤, 아이디 및 기본 정보 소스를 오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가지고 데스크가 과금 유도니 포인트 사기꾼이니 뭐니 하는 소리도 많았지만, 사람의 기준에선 어떠한 컨트롤도 불가능한 기준이다 보니, 그저 의미 없는 아우성만 될 뿐이었다.

물론, 데스크 내에도 친구 추가 기능은 있어서, 그들 사이에서는 익명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기는 했다.

―이게 정말 존슨의 글이라면, 왜 익명으로 올라온 건데? 아이디 커트된 이유가 뭐냐고?

―그래서 사망설이 도는 거잖아. 아이템 구입할 시간도 없었다는 거겠지.

―어그로라는 말도 돌고?

―그렇다고 치기에는 내용 퀄리티가 너무 높지 않나?

―몇 자 되지도 않는데, 퀄리티는 무슨.

―하지만 포인트는 싹 담겨 있던데.

―좀 두서없긴 해도, 그건 인정!

산타카타리나 마굴의 주요 동선, 주의 몬스터 등등, 익명 시스템만 오픈 못 했을 뿐, 이레귤러에 이르는 포인트에 대해 잘 체크한 것이다.

―이게 존슨이 올린 거라는 건 어떻게 증명하는데?

―익명제긴 해도, 아이디 일부는 오픈이잖아. 그걸로 유추하는 거지.

―Zero라는 아이디로 시작되는 놈이 한둘이냐?

―베이글도 인증했고.

―풉! 그 자칭 제로원 전문가?

―헛소리 말고, 어디 존슨 소식 좀 들은 사람 없냐?

이래저래 시끄러운 댓글들을 확인하며, 마루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라는 겁니까?”

이에 프링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분께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마루의 표정 가득 어둠이 내려앉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무릎이 풀리는 걸 느꼈다.

벽을 짚으며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는 그를 향해 프링쿨스가 말했다.

“그분께서 남긴 메시지를 읽어 주십시오.”

데스크 게시글의 마지막 문구가 마루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의 무덤에 형제의 꽃을, 8!

그리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사망설이 힘을 얻는 것인데, 그 때문에 더더욱 게시글의 주인이 누구인지로 화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의 8이란 숫자는 마루 님을 향한 것입니다.”

굳이 언급할 필요 없는 숫자를 적었다는 건?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형제분이신 마루 님을 콕 찍은 거죠.”

존슨이 형제로 삼은 이들이 몇인지 알게 된 순간이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정말… 형님이 죽은 겁니까?”

프링쿨스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답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곧 관련한 기사가 올라가게 될 겁니다. 물론, 최대한 늦춰 볼 생각이지만, 데스크가 조금씩 시끄러워지고 있어서,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당장 장례식을 치르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다? 마루의 표정이 굳어지는 가운데, 프링쿨스가 그 이유를 알려 줬다.

“그분이 지니신 억제력은 일반적인 랭커들과는 다릅니다. 존재 유무만으로도 다양한 이면의 문제아들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죠.”

항시 그 행보가 불분명하고 행방이 묘연하던 점이, 더더욱 문제아들의 통제력을 높여 줬던 것이다.

“그분의 부재가 밝혀진다면, 마르코 초대 협회장님의 사망 당시와 버금가는 혼란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 기간을 최대한 늦추면서 대비하는 게, 저희가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입니다.”

입술을 짓씹던 마루가 물었다.

“…이레귤러는 막았습니까?”

“예. 그분의 희생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마족 다섯의 분신이 대기하고 있던 장소입니다. 아마, 역대 최악의 대격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건을 그분께서 막은 겁니다.”

그러며 프링쿨스는 이야기했다.

“세상은 모릅니다. 그분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 가며 세상을 지켜 왔는지, 저도 맘 같아선 당장 그분의 위대한 행보를 밝혀 가며, 그 숭고한 희생을 알리고 퍼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참아야 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 그게 존슨을 향한 최고의 예우였다.

“후우….”

마루가 긴 한숨 끝에 물었다.

“이반나는 알고 계십니까?”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게 답한 프링쿨스가 물었다.

“이반나께서 준비가 되시는 대로 브라질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존슨의 무덤으로 가자는 소리에, 마루는 주저 없이 답했다.

“꽃을 준비하죠.”

그 끝에 무거운 한숨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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