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기(死氣)!
#7. 사기(死氣)!
마루는 칭호를 착용했다.
숙련도가 부족해서 드래곤 브레스와 피어 등, 특수 스킬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엔트라넷 연동으로 인해 칭호 착용까지는 가능한 것이다.
특수 스킬이 아니더라도 칭호 본연의 능력만으로도 전력 상승을 꾀하기에는 충분했다.
기본적인 효과 자체가 마력이 실시간으로 소모되는 대신, 전체적인 스탯이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도 칭호 발동 이후 꾸준히 포스가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기본 5%에, 마력 소모 가속으로 10%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거기에 연공법을 비롯한 각종 스킬의 중첩 효과가 겹쳐진다면?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꾸준히 전력이 상승하는 효과를 만들 터, 이런 변수는 상대하는 입장에선 더없이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마루는 자신의 변화에 익숙하기에, 스탯 상승에 맞춰 박자나 호흡 등의 분배를 자유로이 할 수 있지만, 상대하는 입장에선 수시로 전투 흐름이 출렁이는 터라, 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감이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피부가 마치 몬스터들의 거죽처럼 질기고 단단해지는 탓에,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기본 방어력도 크게 상승하기도 했다.
그 효과를 증명한다고 해야 할까?
파지지직!
마루의 돌격에 맞춰 한의 발검이 펼쳐지고, 강렬한 뇌전이 뻗어져 나오는데, 그 짜릿한 통증 속에서도 감각이 상당 부분 남아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뻐억!
둔탁한 둔기로 쳐 내듯, 그를 밀어내던 일격에도 이번에는 꿋꿋이 버텨 낼 수 있었다.
물론, 몇 차례 뒷걸음질을 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튕겨 나듯 쭈욱 밀려난 건 아니었다.
각이 보였다.
버티면서 밀어붙일 수 있는 간격이었다.
으득!
이를 악물며 뒷발에 힘을 주고 최선을 다해 무게 중심을 전방으로 내던졌다.
쿠웅!
백록담의 얕은 수면을 꿰뚫고 묵직한 진각을 밟자, 대지의 기운이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마루는 온몸을 비틀며 이 흐름을 무게 중심 너머로 던져 보냈다.
카아아앙!
한의 검격이 그의 숄더 차징에 튕겨 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활짝 열린 해골 기사의 브레스트 플레이트, 그곳에 재차 어깨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상대는 백전노장의 경험을 품고 있는 망자였다. 튕겨 나간 검의 흐름에 태연히 몸을 맡기니, 일순 몸의 궤적이 틀어졌고, 마루의 영점에도 일부 오차가 발생했다.
어깨가 들어간 듯 보이지만, 절묘하게 온몸으로 이를 받으며 막고 흘려보낸다.
한의 경험치가 엿보이는 순간이었고, 마루는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상대라는 걸 깨닫는 시점이었다.
존슨을 쫓아냈던 걸로도 충분히 무서운 상대라는 걸 알았지만, 그의 전문 분야에서도 우위를 잡기 어렵다는 점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놀란 건 마루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성력!’
죽음의 기사에게 상극이라 할 만한 기운을 지척에서 마주하고 보니, 생각 이상으로 거슬리고 불쾌하며 또 까다로웠던 것이다.
‘이럴 것 같아서 거리 조절을 한 것이건만. 쯧!’
뇌전과 검기를 쏟아 내며 굳이 마루에게 거리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건, 그의 박투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해골 괴수들을 상대로 보여 준 바 있는 신성한 기운을 꺼린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지척에서 온몸으로 마주한 마루의 성력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미 죽은 존재에게 무슨 숨결이냐 하겠지만, 기운의 흐름이 흔들리는 게 그와 비슷한 감각을 제공하고는 했다.
정면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흘려서 보냈건만, 그럼에도 내부 기운에 작은 혼선이 빚어지는 걸 느꼈다.
―짜증 나게 하는군.
“좋은 현상이네.”
―건방진 놈!
마루가 히쭉 웃었고, 그게 한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더 골치 아픈 건, 상대는 근접전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점이었다.
한 번 거리를 허용하자,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그를 진창 싸움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남다른 경험치를 앞세우며 훌륭히 이를 받아 내고 흘려 내는 등, 한은 마루 못지않은 근접 전투를 보여 주고 있지만,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탓인지, 조금씩 밀려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앞서 마루가 예상했던 것처럼, 수시로 스탯 변화가 발생하며 박자가 들쑥날쑥 멋대로 흔들리니, 한의 입장에선 피로감이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윽!
“신음성 좋고! 어때, 좋아?”
―이… 개자식이.
“왈왈!”
마루는 트래시 토크를 통한 심리전도 꾸준히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백록담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는데, 현무암이 움직인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현무암은 한이 좀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내려선 뒤, 그곳의 시꺼먼 물 위에 몸을 던졌다.
풍덩….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벌러덩 누워 버린 현무암을 삼키기엔 충분했던지, 어느새 시꺼먼 물길 속으로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이에 불길한 예감이 든 한이 조금 무리한다는 생각으로 내부의 기운을 한껏 폭발시켰다.
“크윽!”
갑자기 몰아친 그 강대한 사기 폭풍에 마루가 이를 악물며 비장의 카드를 뽑아 들었다.
[성녀의 가호 : ON]
여태 아껴 두고 있던 신성한 기운을 오픈한 것이다. 이 간격을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패를 깠다.
그 순간 기존 신성 스킬들이 가호를 등에 없고 증폭되더니, 밀려들던 사기 폭풍을 역으로 삼켜 버렸다.
한 걸음 물러났지만, 두 걸음 전진할 수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어찌나 놀랐던지, 한의 귀화가 바람 앞 촛불처럼 어지러이 요동치는 게 보였다.
족히 두 배는 증폭된 것 같은 성력의 파도가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를 덮쳐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큰 증폭이 이뤄진 건 아니지만,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발생한 사건이다 보니, 더욱 크게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어느새 물가를 벗어난 듯, 발끝에 질척이는 물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쿠웅! 쿵… 쿠웅!
마루는 연달아 진각을 밟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크게 크게 전신을 들이밀고 있었다.
“훅! 후욱! 훅!”
어깨로 때론 머리로, 마치 성난 황소처럼 온몸으로 거칠게 돌진하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한은 쉴 새 없이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이전처럼 받고 흘려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유독 크게 느껴지는 성력의 증폭과 그 파도가 마루의 존재감을 한껏 뻥튀기시킨 탓이다.
그 때문일까?
현무암의 행동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한은 마루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를 경시하던 마음도 완전히 사라졌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 하더라도 상당한 고생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며, 긴장감이 바짝 올라왔다.
그를 제대로 된 대적자로 인지한 것이다. 이 같은 마음가짐의 변화는 전투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파파팍….
좀 전까지만 해도 자존심을 앞세우며 뒷걸음질을 치는 걸 자제하던 한이건만, 이젠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몸을 빼내고 있었는데, 이는 활동 폭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전투 방식도 달라졌다.
‘이건, 기사가 아니라… 뭐 용병이잖아?’
마루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의 공격에 과감히 땅바닥을 구르는 것은 기본이고, 어느새 일어났다 싶으면 흙을 뿌리며 발차기를 던져 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들고 있던 검마저 투척 무기로 사용할 정도였다.
‘기사가 검을?’
그런 의문은 이어진 공격에 해소되었다. 한의 손끝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여긴 순간, 마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다급히 바닥을 구르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걱….
등 뒤로 스쳐가는 날카로운 예기가 있었다.
한의 검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며 그의 뒷덜미를 노린 것이다. 그러더니 자연스레 착검되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충전이 다 된 모양인 듯, 다시금 발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전과는 달리 마루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고, 직접 달려들며 발검식을 취했다.
쿵… 쿠웅… 쿵….
전과는 반대로 이번엔 한이 크게 걸음을 내디디며 땅을 찍으면서, 마치 물소처럼 전진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상황이 단번에 뒤집혀 버린 것이다.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니냐?”
―죽여 주마!
“어우, 나 죽어!”
마루는 연신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는데, 그 와중에도 입을 놀리며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언제 발검이 이뤄지며 뇌전이 쏟아질지 알 수 없어서 경계를 거듭하며 손발을 놀리는데, 그건 마치 오지 말라며 발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고, 한은 그 모습에 마루가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시퍼런 귀화가 한층 선명해지는 게 보였다. 언뜻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착각일까?
―겁먹고 도망치는 꼴이 아주 가관이군.
그 말에 마루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나는 속도에 변화를 주고자, 뒷발에 힘을 실었다.
그 순간 귀화가 일렁이고,
번쩍!
뇌전이 쏟아졌다.
마치, 마루의 자세 변화를 기다렸다는 듯 펼쳐진 발검이 그를 덮쳐 왔다.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고자 눈살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이게 웬일?
파지지직….
‘버틸… 만한데?’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전과는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웅!
이어지는 검격의 무게감도 이전과 달랐다.
성녀의 가호 때문일까?
아니었다.
―현무암~!
성난 한의 외침에 답이 있었다.
마루는 손발을 놀리며 경계하는 한편, 두 눈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는데, 그로 인해서 달라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돌하르방?’
백록담의 주변으로 돌하르방이 쭈욱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게… 어디서?’
빠르게 대충 훑어본 거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족히 수백 개는 될 법한 돌하르방이 백록담을 마치 포위하듯 펼쳐져 있었다.
“흘… 이게 바로 만상결계(萬象結界)라는 것이니라.”
현무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마루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당장 그에게 뭔가가 발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인지할 수 있는 건, 격돌 상대인 한의 기세가 급격히 꺾이고 있던 것이다.
뒷걸음질은 멈췄고, 다시금 반전과 함께 마루의 진군이 시작했다.
이를 본 현무암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적잖은 고생을 한 모양인지, 단숨에 축축해진 게 보였다.
‘쉽지가 않군.’
만상결계를 펼치느라 지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곳 백록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보물, 오래전 그가 심어 뒀던 ‘내단’을 회수하는 작업에서 빠져나간 기운도 꽤 있었다.
‘단의 기운이 너무 커졌어.’
저 깊은 화산 내부에서 심연의 불길을 가득 머금은 탓인지, 이를 거둬들인 시점부터 배 속에서 끊임없이 열기가 솟아오르며, 그를 괴롭히고 있는 중이었다.
화르르륵….
‘으음… 신물의 도움 없이 잠재우려니 쉽지 않군.’
당장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신물의 잔재를 최대한 끌어다가 내단을 품어 보고 있지만, 완벽히 소화시키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소비될 듯싶었다.
그는 만상결계를 통해 이곳 백록담에 새롭게 ‘영역 표시’를 했는데, 그 와중에 상당한 기력소모가 발생한 것이다.
‘불법 점거도 황당한데, 이젠 자릿세까지 요구하네. 끄응….’
무수히 많은 죽음의 기운이 백록담 가득 뿌려지며, 이곳은 어느새 한의 터전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이 정도로 완벽히 통제권이 넘어가 버렸을 줄이야.’
내단의 기운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 그를 괴롭혔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만상결계를 크게 펼칠 수 있었고, 백록담에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다.
내부의 고통과는 별개로 상황 자체는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현무암~!
성난 한의 외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마루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그에게 달려들었으리라.
긴 시간 쌓아 왔던 백록담의 사기가 그의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던 것이다.
한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백록담에 가득 쌓아 놨던 사기가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골치건만, 그나마 끌려오는 사기의 경우엔 무거운 모래주머니처럼, 역으로 그를 옥죄려 들고 있으니, 때아닌 뒤통수에 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사기? 죽음의 기운?’
현무암이 히쭉 웃었다.
“흘… 이놈아 생명의 끝에 현무가 있느니라.”
백록담 가득 넘실대는 어둠이 그의 발아래 엎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