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티팩트?
#8. 아티팩트?
흐름은 완전히 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끝이 나진 않았으니, 이는 상대가 그만큼 백전노장의 실력자인 탓이었다.
‘이크!’
마루는 주먹을 내지르다 황급히 회수했다.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한의 찌르기가 마주쳐 온 것인데, 간격을 한껏 좁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저런 검격이 가능할 줄이야.
그는 새삼 상대의 저력에 감탄해야만 했다.
“이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질질 끌 게냐?”
등 뒤로 현무암의 타박이 이어지며 속을 긁어 왔다.
뜻밖의 방향에서 들어오는 트래시 토크가 마루를 재촉했지만, 그는 거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꿋꿋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은 만상결계로 인해 판이 뒤집힌 이후, 공격을 내던지며 온전히 수비에 전념했는데, 그렇게 웅크리며 세운 가드가 너무 단단해 쉬이 뚫을 수가 없었다.
무리를 해서 뚫고 들어가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저 해골 너머로 일렁이는 귀화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크게 한 방, 일발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는 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신중해질 필요성이 있었기에, 마루는 몰아붙이기보단 조금씩 피를 말리는 느낌으로, 꾸준히 집요하게 잽을 날렸다.
그 와중에 날아드는 현무암의 한마디.
“신중한 것과 소심한 건 다른 거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허투루 듣진 않았다.
‘신중? 소심?’
수시로 속 긁는 소리를 자주 하긴 하나, 현무암의 이야기는 결국 그를 위한 조언인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하게 놀리려 할 때도 꽤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헛소리를 할 이유는 없다 여겼다.
그 때문일까?
마루는 그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오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한을 살폈다.
이미 오감 계열 스킬을 발동 중이니만큼, 용아병 칭호의 마력 소모를 가속화시켜, 스탯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배 속이 빠르게 허해지는 가운데, 슬쩍 조급증이 일어나려 했다. 여전히 그의 감각에 걸리는 게 없던 까닭이었다.
‘뭐지?’
의문 속에서도 일단 스탯의 펌핑은 유지시켰다.
호흡과 박자감이 달라진 탓인지, 한은 더욱 깊이 움츠리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를 관찰하며 감각의 날을 세우던 마루는 뜻밖의 방향에서 의외의 현상을 발견했다.
[사신 변환 ― 현무]
스킬을 연계시키던 중, 좀 더 과감한 전진을 위해 방어력을 앞세우던 찰나였다.
사악….
주변의 기운이 묘한 흐름을 보이는 걸 느낀 것이다.
의아해서 이를 살피던 중 놀라운 걸 확인했고, 거기서 현무암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생명의 끝에 현무가 있다.]
주변 사기가 그에게 이끌리고 있던 것이다.
‘갑자기?
이제 와서 이런 흐름이 작용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만상결계!
짐작하건대 그것이 어떠한 작용을 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이는 정답이었다.
현무암이 결계를 일으킨 덕분에, 한의 발아래 억압되고 짓눌려 있던 백록담의 사기(死氣)들이 ‘해방’된 것이다.
주변의 기운이 한을 압박하는 것도 그 같은 이유였다. 그간 억눌렸던 원념이 그를 휘감고 있는 거였다.
갑작스러운 흐름에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결코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땡큐지!’
그도 그럴 게, 용아병 칭호로 인해 기운의 소모가 커진 상황이건만, 주변 가득한 사기들이 몰려들며 공백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던 것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한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던 기운들이 그에게 자리를 허락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를 쫓아 움직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때문일까?
[사신 변환 ― 현무]
현무의 기운을 좀 더 앞세우게 됐고, 그렇게 사기에 집중하다 보니 뜻밖의 발견도 할 수 있었다.
‘하… 그런 거였어?’
마루의 시선이 한에게로 향했다. 주변 사기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자, 현무암이 했던 이야기도 이해가 갔다.
한의 웅크림?
이는 더 높이 뛰기 위한 개구리의 움츠림과 같았다.
잃어버린 통제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주변에서부터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재구축하고 있던 것이다.
만상결계도 거기까진 개입하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이를 인지하고는 있었으리라. 마루에게 던진 경고가 그 증거였다.
사기를 인지하게 되니 이런 부분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중과 소심이라….’
현무암의 말을 상기하며 마루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와 동시에 백록담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때부턴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이놈이!
한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게 마루가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지며 공세를 퍼부었던 것이다.
어느새 트래시 토크도 멈춘 채, 전력으로 들이받고 있었다.
푸우우욱!
앞서, 권격에 맞춰 찌르기를 넣을 경우, 마루는 황급히 손을 빼기 바빴는데, 이제는 오히려 더 과감히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팔을 비틀며 궤적을 틀어 보지만, 한 역시 맞춰서 움직이는 터라, 결국 꿰뚫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푸우우욱!
“크으읍!”
마루의 안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 파고든 뒤, 크게 일격을 먹이는데, 이건 거의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공격이었다.
물론, 손해를 보며 가까스로 뻗어 낸 공격이니만큼, 마루의 피해가 더 크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퇴는 없었다.
전진 또 전진이었다.
지켜보던 현무암이 쓰게 웃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뼈를 주고 살을 취하다니. 고놈 참, 극단적이기는… 흘!’
마루의 단점을 고쳐 주기 위해 조언을 했고, 어느 정도는 그가 의도한 대로 됐다. 하지만 너무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여유만 나면 신중과 소심을 헷갈려 해서 고쳐 줄까 했더니만. 한 번에 처리할 문제는 아닌가.’
밑바닥 생활로 인해 생겨난 습관이리라.
마루 본인이야 PP의 몽크처럼 행동하려 노력하지만, 현실과 게임이라는 차이점으로 인해, 완벽히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게임과 달리 ‘진짜 생명’을 건다는 부분이 그의 행동에 제약을 준 것이다.
‘흘… 그래도 반응이 영 없는 건 아니니.’
오는 내내 열심히 채찍질을 한 덕분이리라. 오늘은 일단 밑밥을 깔아 놨다는 걸로 충분했다.
‘그나저나 사기를 읽었다면, 체류자 놈의 ‘비밀’도 눈치챌 수 있으려나?’
과연, 거기까지 알아챌 수 있을지, 현무암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마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전신 가득 흥건한 핏물로 도배를 한 채 정신없이 몰아붙이는데, [삼고―고고]의 스킬 효과로 인해, 고통의 일부분이 성력으로 치환되며, 한을 더욱 거세게 압박하고 있었다.
마루의 몸짓에 따라 사방으로 흩날리는 핏물, 그 사이사이로 진한 성력이 묻어 나오는 터라, 마치 그 자체로 성수며 성혈처럼 작용하니, 주변의 사기가 자꾸만 흩어지는 게 보였다.
겨우 재구축하던 영역과 통제권이 다시금 망가지는 터라, 한의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한이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검식!
바로 뒤쫓으려던 마루의 신형에 제동이 걸렸다.
기이하게도 한의 전신에서 어떠한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바로 그 점이 마루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기세를 완벽히 갈무리하고, 이를 한 점에 응축시키고 있단 뜻이리라.
한은 필살기라 할 만한 걸 준비했다.
‘어지간하면 안 쓰려 했지만.’
이걸 사용하고 날 경우 회복 기간이 크게 늘어날 뿐만 아니라, 회복 이후로도 후유증이 오래 이어질 것이기에, 어지간하면 아끼려고 했던 기술이었다.
‘아끼다 똥 된다고 했지.’
이 나라의 격언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 상황이 딱 그에 들어맞다 여겼고, 그런 이유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마루도 그에 맞춰서 자세를 잡았다.
[스킬 ― 개벽권]
그 역시 필살기의 발동을 준비했다.
[몇의 컨디션을 투자하시겠습니까?]
엔트라넷을 확인한 결과, 현재의 컨디션은 5점대였다. 투자할 수 있는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민 끝에서 마루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3!”
그 결과,
[컨디션 : 2]
중상 수준을 넘어, 유언장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수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1점대까지 떨어질 경우?
거의 반드시 죽는다고 봐야 하는 점수대로서, 오히려 이 점수대에 이르면 상태가 멀쩡해지는 터라, 주변에서는 회복된 걸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촛불이 마지막에 화려하게 타오르듯, 마지막 순간 가장 진한 생의 숨결을 내뱉으며, 아주 잠시 활력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컨디션 1점대는 아예 생각도 하면 안 되는 점수였다.
‘겨우 3점이지만, 보통 3점은 아니지.’
개벽권의 특성상 많은 컨디션을 투자할수록 위력이 강해지지만, 그 못지않게 특별한 특징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컨디션이 바닥에 닿을수록 위력 증폭 효과가 있단 점이었다. 짐작건대 대격변의 5점대 개벽권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터였다.
“…….”
―…….
마루와 한이 각자 최후를 준비하면서, 무거운 정적인 백록담을 휘감을 때였다.
바삭… 부스럭….
거슬리는 잡음 하나가 그들 귓전을 두드렸다.
바로 그 순간 둘의 필살기가 격돌했다.
[라이트닝 플래시(Lightning Flash)!]
한의 일검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수십, 수백, 수천의 뇌전 가닥이 한 줄기의 섬광으로 응축된 일격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걸 넘어, 마치 공간을 통째로 갈라 버릴 것 같은 검은 섬광이 뻗어 오는 가운데, 마루 역시 주먹을 내질렀다.
[개벽권]
날아드는 ‘선’을 향해 ‘점’을 찍었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릉….
뇌전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백록담의 하늘 위로, 시꺼먼 폭죽이 솟구쳤다.
* * *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생긴 탓일까?
“흐흐흐흐….”
존슨은 근래 들어 매일이 즐거웠다.
물론, 주변 상황이나 돌아가는 분위기가 피로감을 유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가에선 쉬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산타카타리나에서 이반나와 결혼을 약속했고, 최근 들어서는 식장을 비롯한, 결혼과 관련한 일정들을 잡고 있는 중이었다.
대충 적당히 서류만 작성하자는 이반나와 달리, 오히려 존슨이 더 난리가 나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 세계에 달링과의 관계를 공표할 거야!]
그렇게 외치며 이반나와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번만큼은 존슨도 돈을 아끼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국? 러시아?
식장을 어디에 잡아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는데, 그에 대한 결론은 뜻밖의 장소로 나와 버렸다.
한국!
이반나에겐 제2의 고향이고, 존슨에겐 그녀를 알게 해 준 나라가 아니던가.
과거, 틈틈이 한국을 찾았던 것도, 이반나와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방문이었을 정도니, 둘 모두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나라였다.
예식과 관련한 준비를 하는 날이면, 특히 더 입가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
식장 팸플릿을 살피는 그의 표정이 잔뜩 구겨진 것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플래너가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는데, 이에 존슨이 손을 뻗어 진정시키며 말했다.
“잠시, 손님이 온 것 같네요.”
“아… 예. 비켜 드릴까요?”
존슨이 고개를 끄덕이고 플래너가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가운데, 좀 전 플래너가 앉아 있던 자리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엉덩이를 걸쳤다.
겨우 7~8세나 되었을 법한 소년이었는데, 이를 본 존슨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일론?”
“역시나 제법이야. 단번에 알아보네.”
소년, 마계 대공 사일론이 인간계에 등장했다.
* * *
인간과 망자의 격돌!
그 승부는?
“푸하아아….”
인간, 마루의 승리였다.
푸스스스….
저 앞으로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듯 마루의 무릎이 꺾이는데, 힘겹게 이를 버텨 내며 주저앉는 걸 막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던 것인데, 그렇게 잠시 호흡을 고르는 한편, 슬쩍 시선을 돌려 현무암을 바라봤다.
‘하….’
어디서 꺼낸 것인지, 팝콘을 씹고 있는 게 보였다.
‘콜라까지?’
앞서, 격돌을 자극했던 잡음의 진원지가 거기 있었다.
‘…끄응!’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마루가 걸음을 옮겨, 한의 뼛가루가 흩뿌려진 장소로 다가갔다.
그 자리에는 두 가지 물건이 남아 있었다.
검과 피리!
최초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먼저 집어 들어야 하는 건 피리였다.
하지만 마루는 검을 먼저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들켰어. 이 새끼야.”
그 순간,
―비… 빌어먹을!
한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티팩트?
착각이었다. 검이야말로 한의 본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