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왔냐?”
“어. 그런데 저 개뼈다귀 같은 놈은 누구냐?”
그리고 진짜 곰을 연상 캐 했던 산만한 덩치의 윤권이를 한 방에 날려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친구 광우였다. 광우는 윤권이를 바닥에 날려버리고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싱긋 웃으며 병실로 들어왔다. 진정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지는 여유로움이었다.
솔직히 윤권이가 쓰러지는 순간 깜짝 놀라긴 했다. 하지만 문앞에 서 있는 광우의 모습을 보자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게 납득이 가버렸다.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미들급(-90kg) 한국랭킹 3위였던 내 동생조차 괴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녀석이었다.
그냥 한국랭킹 3위가 아니었다. 고작 고3의 어린 나이에 성인들과 대결에서 거뒀던 성적이기에, 한때는 천재라고 불리며 유도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각광받았던 사람이 바로 내 동생 상수였다.
상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 위에 하늘인 녀석이 바로 광우다. 광우하면 아직도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경찰대를 다닐 때 경찰대 총장과 모 대학 총장 사이에 시비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태권도부가 유명했던 모 대학 총장이 경찰대학교 학생들의 전투력을 우습게 보면서 일어났다.
“솔직히 말씀드려 경찰대 학생들은 공부만 잘했지 운동은 잘 못 하지 않습니까? 그런 책상물림 같은 학생들이 범인을 어떻게 잡겠습니까? 범인 잡는 일은 우리 학교 태권도부 학생들이 맡기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특채를 늘리는 게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지금 우리 학생들을 보고 책상물림이라고 했습니까? 머리에 든 것도 없는 무식한 애들이 범인이나 제대로 잡을 것 같습니까?”
모 대학 총장은 그냥 공부만 하는 학생이라는 뜻으로 책상물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원래 책상물림이란 글만 읽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뜻한다. 경찰대 총장은 모 대학 총장이 경찰대학교 학생들을 비꼬았다는 생각에 발끈하고 말았다.
“뭐라고요? 지금 무식하다고 하셨습니까?”
“어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책상물림이라고 비꼰 사람이 누군데 화를 내는 겁니까?”
“책상물림보고 책상물림이라고 한 게 그렇게 기분이 나쁩니까?”
“인제 보니 책상물림이라는 뜻도 모르는 양반이었군요. 쯧쯧. 어쨌거나 방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뭘 책임지라는 말입니까?”
“우리 학교 학생이 운동을 못 한다는 말 말입니다. 책임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책임 못 질 게 또 뭐가 있습니까? 경찰대 애들이 운동신경 떨어지는 건 당연한 사실인데요. 어떻게 책임지면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한 번 붙읍시다. 우리 학교 학생을 이번 전국대학선수권 대회에 내보겠습니다. 거기서 우승하면 되겠습니까? 다른 학생이면 변명할 수도 있으니, 책상물림 중에서도 책상물림인 전체 수석 녀석을 참가시키겠습니다. 그것도 무제한급으로. 어떻습니까?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허허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자신 없으십니까?”
“어허. 정말. 좋습니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우승은커녕 8강만 올라도 아까 했던 말에 대해 사과하리다.”
“필요 없습니다. 1등 아니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한번 해봅시다. 사과할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두 사람의 다툼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내기로 이어졌다. 여기서 끝났다면 전설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치졸한 모 대학 총장이 태권도부 에이스이자 세계선수권대회 무제한급에서 2년 연속 금메달을 딴 명실공히 세계태권도의 챔피언을 참가시키면서, 전설이 시작되었다.
무제한급 챔피언이라는 것은 태권도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의미다. 전국체전도 아니고 대학선수권 정도의 대회는 수준이 낮아서 웬만하면 참석하지 않을 만큼 격이 다른 선수였다. 그런데 경찰대 총장의 배짱에 불안감을 느낀 모 대학 총장이 무리하게 출전을 강행한 것이다.
경찰대 총장이 그렇게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자신감의 근원이 바로 내 친구 최광우였다. 녀석의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은 경찰대에서 유명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도토리 키재기일 뿐이라고 비하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선전부터 전원 KO승으로 올라온 광우의 한 경기 평균 시간은 고작 1분. KO는 아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결승에 오른 무제한급 세계챔피언. 두 사람이 맞붙은 결승에서 광우는 태권도 세계챔피언을 그야말로 무참히 박살 내버리고 말았다.
훗날 내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무참히 박살 냈느냐고. 그냥 한방에 끝내지 그랬냐고.
“처음에는 우리 늙은이(경찰대 총장을 의미한다.)가 일을 귀찮게 만들어서 짜증이 났었거든. 내가 장기판 졸도 아니고 늙은이들 내기에 이용된다는 게 불쾌하더라고. 그래서 눈치 보고 예선에서 탈락하려고 했는데, 세계챔피언이라는 자식이 찾아와서 사람 성질을 긁잖아. 그 자식이 예선전 하기 전에 찾아와서 그러더라고. 거지 같은 경찰대 새끼들 때문에 이딴 허접한 대회까지 나와야 한다면서, 제발 자기랑 안 만나길 빌라고 하더라고. 자기랑 만나면 피똥을 싸게 해준다나 어쩐다나.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그냥 물러날 수는 없잖아.”
결국, 무제한급 세계챔피언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것이었다. 경찰대 학생이 그것도 입학 때부터 늘 1등만 차지했던 공부벌레가 대학선수권 대회에서 태권도 세계선수권자를 박살 냈다는 것은 그 당시 상당한 이슈가 되었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광우에게 박살이 났던 태권도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고, 이후 돌연 은퇴를 선언하더니 특채를 통해 경찰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광우의 듬직한 친구이자 믿음직한 심복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어쨌든, 태권도라고는 경찰대에서 배우기 시작해 2단 단증밖에 없던 녀석이 세계를 주름잡던 챔피언을 박살 내버린 것만 봐도 광우가 격투기에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윤권이가 바닥에 구르고 있는 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 개뼈다귀가 앞으로 날 지켜줄 보디가드거든. 어디 한군데라도 다쳐서 임무수행 못 하면 네가 대신해야 한다.”
“보디가드? 아, 상수가 소개해준다던 녀석이 저 녀석이야? 쓸만하긴 하겠네. 실력이 나쁘진 않았어.”
“뭐? 한 방에 날려버린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하하하. 너 같은 쪼랩이 고수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겠냐? 저놈과 나 사이에 3번의 수 싸움이 오갔어.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지.”
“뭐? 세 번씩이나 오갔어?”
“그럼. 주먹을 날리려고 어깨를 움직이는 순간 나는 왼쪽으로 상체를 살짝 틀면서 한 걸음 나갔거든. 보통은 여기서 빈틈을 보여. 복부가 완전 무방비. 그걸로 끝이지 뭐.”
“그런데?
“저 녀석은 거의 본능적으로 복부를 방어하더라. 웬만한 훈련 없이는 나오기 힘든 동작이야.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나간 왼발을 디딤발로 삼고 오른발을 들어 무릎을 내리찍으려고 했지. 여기서 좀 놀랐어. 그걸 알고 반걸음 물러서더라니까. 하지만 그걸로 끝이지. 옆으로 비켜났어야 했는데, 뒤로 물러났으니 균형을 잃을 수밖에. 거기다 시선은 아래로 향했으니 상체가 완전히 무방비잖아.”
“헐. 그 짧은 시간에 정말 그런 복잡한 수 싸움이 오고 간 거야?”
“그럼. 그 정도는 해야 경호원이지. 막는 데 급급해서 연계 수까지 내다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저 정도면 네놈 경호원으로 썩히기에는 아까운 실력이야.”
“연계 수? 그건 뭔데?”
“장기를 예를 들어볼게. 상대가 자신의 말인 ‘차’를 내 말인 ‘마’ 앞에 가져다 놨어. 잡아먹겠다는 이야기지. 피할 곳은 세 군데뿐이야. 한 곳은 상대의 ‘포’가 대기하고 있고, 다른 한 곳은 확실히 도망갈 수 있고, 마지막은 역으로 ‘장군’을 부르며 상대의 ‘차’를 잡아먹을 수가 있는 곳이야. 어떤 걸 택하겠어?”
“당연히 마지막 수를 써야지.”
“그렇지. 몇 수 앞을 연계해서 내다보는 거지. 그런데 장기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만, 싸움은 그렇지 못하잖아. 짧은 시간에 상대방의 공격패턴까지 파악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나를 상대로 그 정도 움직임을 보여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야.”
“헐. 그러니 결국 네 자랑이네. 자칭 세계 최강씨.”
비꼬듯 말했지만, 저놈의 싸움 실력이면 충분히 세계 최강일지도 모른다.
“그럼 뭐해. 총들고 싸우는 세상에서. 아무리 나라도 총 맞으면 죽는다고.”
“설마 너! 총알은 못 피하는 거였어?”
“하하하. 미친놈. 어쨌든, 가능성이 보이는 녀석이니까 잘 구슬려서 데리고 있어봐.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동생도 그러더니 광우까지 윤권이 실력이 정말 괜찮긴 괜찮은가 보다. 나랑 같이 일할 녀석이 좀 세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근데 저 녀석은 괜찮아?”
“괜찮지 않으면? 좀 있으면 일어날 거야. 제수씨. 많이 놀라셨죠? 저 덩치가 갑자기 덤비는 바람에. 하하하.”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이런 일에는 익숙해서...”
“아, 맞다. 어릴 때부터 태극도를 배우셨다고 했죠? 실전 격투법으로 꽤 유명한 전통무예죠.”
“그렇긴 한데. 사범님들도 광우 오라버니 같은 몸놀림을 보여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시연이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나도 얼핏 이야기는 들었다. 5살 때부터 전통무예를 배웠으니 횟수로 벌써 15년째다. 설마 나보다 더 잘 싸우고 그렇진 않겠지? 에이. 설마!
“끄응. 아구구. 동수 형. 괜찮으십니까?”
“어라. 이제 깼나 보네. 그래도 보디가드의 자세는 되어 있네. 의뢰인의 신변부터 확인하려고 들고.”
“헉.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잖아. 동수 친구라고.”
“제가 이름도 밝히라고 했지 않습니까?”
한방에 나가떨어진 녀석치고는, 광우에게 빠닥빠닥 잘 대들었다. 나 같으면 겁이 나서 눈도 못 마주쳤을 텐데 확실히 근성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냥 내가 누군지 동수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건 개뼈다귀 너야.”
“뭐라고요? 개뼈다귀요? 말을 정말 너무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누군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기습이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저는 이 병실에서 최후의 마지노선입니다.”
“그래서 누군지도 모른 채 다짜고짜 먼저 공격했어?”
“공격이 아니라 그냥 제압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동수 형과 형수님은 크게 걱정 안 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 사람을 납치했던 사건 아닙니까? 굉장히 강력한 범죄의 대상이 되신 겁니다. 언제 어떻게 다시 나타나서 해코지하려고 들지 모르는데 저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죠.”
“한방에 나가떨어진 놈이 말은.”
광우는 윤권이를 일부러 자극이라도 하듯 계속 도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저러진 않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이 하는 양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욕만 진창 먹을 줄 알았는데 반겨주시는 댓글이 여럿 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직은 워밍업 단계지만, 다음편이나 다다음 편에서 다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겁니다.
자정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