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화 (1/126)

[이설린] 리벤지 가이드라인

1.

그것은 까만 개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몸을 묶고 있던 흐릿한 끈이 끊어지자마자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곧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기를 반복했다.

“왼쪽으로 몰아! 건물 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해!”

“몇 초도 못 잡아놓고 뭐 하는 거야?”

다섯 명이나 되는 에스퍼가 그것 하나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급조된 팀이라서인지, 서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서인지 통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5명 중 제일 등급이 높은 에스퍼가 작전 지시를 내리며 답답해했지만, 정원이 보기에는 그도 다른 넷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허접했다.

정원의 옆에는 하필 괴생명체가 나타난 장소를 지나가던 민간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사건을 완전히 해결하기 전까지 주위를 통제해야 하므로,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린 셈이었다. 파견된 에스퍼 5명이 전부 진돗개만한 괴수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는 건 정원의 몫이었다.

보통의 경우 운이 나쁘다고 표현했겠지만, 그는 상당히 신이 난 모습이었다.

“우와~ 에스퍼들 활동 현장을 직접 보니까 박력이 남다르네요.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가 에스퍼 매니아라 영상은 정말 많이 봤는데 이렇게 현장에 떨어져본 건 처음이거든요. 아,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전 에스퍼 분석 전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에스퍼레소’라고 합니다. 구독자가 최근에 60만 명을 넘어섰어요!”

쉴 새 없이 뭔가를 떠벌리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정원은 고전하는 에스퍼들을 바라보며 에스퍼레소의 말에 적당히 대답했다.

“네. 좋으시겠네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는 게 티가 난 모양이었다.

“음.”

에스퍼레소가 실망한 듯 탄성을 흘렸다. 이 상황에 자신의 유튜브 구독자를 자랑하는 정성은 확실히 대단했기에, 정원은 선심 쓰듯 한마디를 덧붙여 줬다.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에스퍼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유튜버가 얼마 없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광고나 협찬 제안, 캐스팅 제안이 정말 많이 들어오거든요.”

괜히 칭찬해 줬나 싶을 만큼 부산스러운 반응이었다. 정원은 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한쪽 귀를 막았다.

“이번 괴생명체는 진돗개만한 크기네요. 보통 저만한 크기면 제거하는 데에 C급 에스퍼 한두 분 정도가 필요한 걸로 알려져 있죠.”

유튜버라서 그런지 반응이 없어도 혼자서 떠드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런데 이 현장에는 에스퍼가 다섯 분이나 파견되셨네요! 국가기관답게 신중을 기하려는 걸까요?”

어디 몰래 카메라라도 숨겨 둔 게 아닐까? 토크쇼 MC처럼 주절거리는 에스퍼레소를 보다 못한 정원이 결국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촬영 중이신가요?”

“예?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국가기관에서는 사건 현장 촬영을 금지하고 있잖아요. 덕분에 남아 있는 영상도 아무것도 없고요. 그래서 저도 국가기관 에스퍼분들이 사건을 해결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흥분해서 그만 직업병이 튀어나왔네요.”

에스퍼레소가 손사래를 쳤다.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카메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정원은 그에게서 시선을 뗀 뒤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지는 알 것 같습니다.”

“네?”

“에스퍼가 다섯 명이나 달라붙어 있는데도 고전하는 이유가 궁금하신 거겠죠? 말씀하신 것처럼, C급 에스퍼 한 명이면 해결될 잔챙이 상대로.”

단순한 분석인 척 말했지만, 에스퍼 전문 유튜버라면 업계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에스퍼의 숫자에 의문을 갖는 척한 의도는 뻔했다. 사기업에 비해 국가기관 소속 에스퍼들의 능력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아이고, 아닙니다. 그렇게 주제넘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저처럼 지나가다 휘말린 사람은 그저 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죠.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괴물이라도 저 같은 일반인한테는 충분히 위협적인걸요.”

물론 에스퍼레소는 부인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정원의 눈에는 탐탁지 않게 보였다. 정원은 건조한 눈으로 그를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 현장에 있는 에스퍼들 중 네 명은 F급, 한 명은 D급입니다. 고전할 수밖에요.”

“아, 그렇군요. 상위 등급 에스퍼분들은 아무래도 바쁘실 테니까요.”

바로 수긍했지만 의뭉스러운 어조였다. 정원은 D급보다 높은 에스퍼들은 바쁜 게 문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몇 없는 게 문제라는 말을 하는 대신 침착하게 말했다.

“굳이 포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아닌가요?”

“음, 이미 환심을 사긴 틀린 것 같네요. 아무래도 국가기관에는 상급 에스퍼 자체가 몇 없는 걸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정말로 인력난에 시달리시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에스퍼레소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잠자코 기다리려던 정원은 자신이 방금 한 생각과 일치하는 말이 나오자 바로 입을 열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알려진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국가기관에 상급 에스퍼나 가이드가 없다는 건 널리 알려져 이미 대외비도 아닌 사항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정원이 대놓고 긍정할 줄은 몰랐는지, 에스퍼레소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제가 에스퍼나 가이드였어도 국가기관보다는 여타 사기업을 선택했을 것 같아요. 연봉 단위부터가 다르니까요.”

유튜브라고 해도 방송 경험이 있어서인지 표정을 추스르는 속도가 빨랐다. 금세 회복한 그가 넉살 좋게 대답을 유도했다. 난데없이 에스퍼/가이드 전문 사기업의 연봉을 강조하는 이유야 뻔했다. 정원은 걸려들지 않았다.

“에스퍼레소 님.”

“앗, 그렇게 불러주시니까 민망하네요. 왜 그러시나요?”

침착한 부름에 너스레를 떤 에스퍼레소였지만, 다음 말에는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얼마 전에 E&X에 입사하셨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구독자가 60만 명이라면 캐스팅 디렉터로서 충분한 역량이죠.”

“…….”

E&X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에스퍼/가이드 전문육성기업이었다. 에스퍼레소는 평범한 민간인 유튜버인 척했지만, 사기업에 들어가 에스퍼나 가이드를 스카웃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지 그의 얼굴은 경직된 상태였다.

“하하, 이거, 다 알고 계셨네요.”

곧 그가 머쓱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부정은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원은 차분하게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우연히 현장을 지나고 계셨던 건 맞나요.”

만일 E&X 쪽에서 일부러 그를 보낸 거라면 다른 대처가 필요할 터였다. 다행히 에스퍼레소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정말입니다.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정원 님을 뵙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어요. 막상 직접 보게 되니까, 아, 이분을 우리 회사로 모셔갈 수만 있으면 내 연봉이 얼마까지 뛸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그냥 막 점령해 버려서요. 실례했습니다.”

능숙하고 뻔뻔한 사과에 정원은 즉각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전 소속을 옮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단호한 말이었다. 에스퍼레소가 쩝, 입맛을 다셨다.

“어떤 제안을 드려도 거절하신다더니, 정말이네요. 주제넘은 말이지만 아깝습니다. 제가 정원 님처럼 S급 가이드였다면 당장 수십, 수백 억 연봉 주는 곳에 들어가서 돈방석에 앉았을 텐데.”

“돈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초연한 말투에 그는 신기하다는 듯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든 말든 다 끝난 일이라는 듯 현장을 지켜보던 정원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정리될 것 같네요. 이제 요원들이 자택까지 모셔다 드릴 겁니다.”

떠밀리듯 요원들 쪽으로 향하며, 에스퍼레소는 아쉬운 듯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정원 님! 또 뵙겠습니다. 다음번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까딱이기만 했다.

* * *

겨우 현장을 수습한 다섯 명의 에스퍼는 하나같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에스퍼레소가 끌려 나가지 않았더라면 ‘기력을 몽땅 소진하신 모양입니다. 다 회복되려면…….’ 같은 분석을 주절거렸을 만한 모습이었다.

정원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곧장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핀 뒤 제일 기력 소모가 커 보이는 에스퍼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가이딩을-.”

“자, 잠시만요.”

다 죽어 가는 얼굴의 어린 에스퍼가 정원을 만류했다. 일단 손을 멈추자 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남들 앞에서 가이딩을 받는 게 좀…….”

남들이 보건 말건 가이딩을 요구하는 에스퍼가 있는 한편, 이처럼 부끄러워하는 에스퍼도 있었다. 정원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남들에게 보이기 곤란한 신체 접촉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요. 가이딩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주위의 눈치를 보는 듯하면서도 뜻은 굽히지 않았다. 정원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런 상대를 굳이 설득하려 들 필요는 없었다. 에스퍼란 쓸데없이 섬세한 구석이 있어서, 강제로 남들 앞에서 가이딩을 하려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차량에서 한 분씩 진행하는 걸로 하죠.”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다른 네 명 중에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는 것을 보면 차로 가는 것 자체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정원은 어린 에스퍼를 이끌고 차에 올랐다.

“소매를 걷어 보세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즉각 본론을 꺼내자 그는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어 소매를 끌어올렸다. 드러난 손목을 감싸 쥐자 그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어어…….”

“다 됐습니다. 불편하거나 이상이 느껴지시나요?”

겁을 집어먹은 아이에게 순식간에 주사를 놓는 것처럼 빠르고 신속한 가이딩이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에스퍼는 신기하다는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더… 빠르시네요.”

슬쩍 눈치를 보며 덧붙인 말이었다. 칭찬인가. 자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주 듣는 말이었기에 별로 감흥은 없었다. 정원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후 어린 에스퍼를 내보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비켜!’ 라는 거친 목소리가 들린 직후 다음 에스퍼가 차 문을 열고 들어왔다. 힐끗 보니 5명의 에스퍼 중 유일하게 D급인 사람이었다. 잔뜩 찌푸린 표정을 보니 아마 방금 목소리의 주인공도 그인 모양이었다.

최저 F급에서 최고 S급까지 있는 만큼 D급은 높다고 하기 어려운 등급이었지만, 인력이 부족한 국가기관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어깨를 뻣뻣하게 펴고 다닐 만한 위치였다. 특히 지금처럼 F급들 틈에 섞여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하여튼, 아무 도움도 안 된 놈들이 저렇게 비실거리기만 하지.”

앞서 가이딩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정원은 이번에도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상태를 살폈다. 딱히 이전 에스퍼보다 능력 소모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가벼운 접촉만으로 해결이 될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정원의 앞자리에 털썩 걸터앉더니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해? 안 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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