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벗으라니. 의도가 너무나 투명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원은 이 난데없고 무례한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 또한 꽤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경박한 말투와 조롱하는 것 같은 태도쯤은 가렵지도 않게 느껴진다. 당황하는 대신 힐끗 눈을 들어 건조하게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소매를 걷어 주시겠어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상대의 말을 아예 듣지 못했다는 것처럼. 이렇게 반응하면 머쓱해서라도 아무 일 없었다는 척 포기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눈앞의 남자는 그런 타입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채혈이라도 하시나?”
정원은 빈정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짐짓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피차 알 만한 사이에…. 이보세요, 난 방금까지 저 덜떨어진 놈 나오길 기다리느라 핏줄이 다 꼬이는 줄 알았다고.”
마지막에는 코웃음까지 덧붙이니 정원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피차 알 만한 사이라니, 본인이 뭘 안다는 건지. 그러나 남자는 꿋꿋했고, 엄살 또한 심했다.
“이러다 폭주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자, 시간 끌지 말고 시작해.”
그가 여기서 폭주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그리고 설령 폭주한다 하더라도 정원은 그를 바로 가라앉힐 자신이 있었다. 가만히 남자를 지켜보자 그는 이미 보란 듯이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정원은 그 모습을 해괴한 것을 보듯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손목 단추만 푸시면 됩니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남자의 코웃음 소리가 거세졌다. 그가 정색하며 다그쳤다.
“야, 언제까지 시간 끌 생각인데?”
“그러니까.”
더 이상 듣고 있어 봤자 태도를 바꿀 것 같지 않고, 점잖게 말을 돌려 봤자 통할 상대 같지도 않았다. 정원은 덤덤한 눈으로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섹스를 원하신다 이건가요.”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원에게서 이렇게 직설적인 말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는지, 곧 의기양양하게 주절거렸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원하는 거지.”
실제로 에스퍼들 중에는 성적인 접촉이 아니면 가이딩을 받은 기분도 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정말 많았다. 사실 급박한 상황이었다면 정원의 반응도 달랐을 것이다. 능력 소모가 극심하거나 등급이 높은 경우에는 가이딩을 할 때 실제로 보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업무의 일환이라면 정원은 거부감 등을 이유로 뻗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하고 벗으라고.”
얼굴을 구긴 채 윽박지르는 에스퍼를 정원이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원은 등급으로 사람을 깔보거나 구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둘 사이의 등급 차이를 생각했을 때 이 에스퍼의 무례한 태도는 비상식적이었다.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에스퍼들이 전반적으로 가이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고. 둘째, 정원이 국가의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국가기관을 절대 떠나지 않는 탓에 얕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이러나저러나 정원은 그런 이유로 화를 낼 생각이 없었다. 정원이 담담하게 제안했다.
“우선 손목을 내주세요. 열 셀 동안 차도가 없다 싶으면 얼마든지 벗어드리겠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벗겠다는 말을 하는 정원을 향해 남자가 짜증스럽게 또 코웃음을 쳤다. 저러다 코가 헐겠다. 덤덤하게 생각하는 사이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열은 내가 세.”
“좋으실 대로.”
빨리 센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정원의 말에 남자가 그제야 겨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정원이 그의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숫자 세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지만, 숨이 넘어갈 듯 빠르게 세는 건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았다. 정원은 변화 없는 표정으로 힘을 불어넣었다.
“…여섯. 일곱. 여덟….”
남자의 얼굴이 점점 미묘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숫자를 세는 목소리도 점차 떨떠름해졌다.
“…열.”
숫자를 모두 센 뒤, 남자는 떫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정원은 열을 세자마자 칼같이 그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방금 전 어린 에스퍼에게 부었던 것에 비해서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 그렇다고 표정이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의 풀다 만 셔츠 단추를 힐끗 보며 정원이 말했다.
“벗어드릴까요?”
“…….”
“효과가 없으셨다면 빨리 말씀해 주시죠. 다른 분들이 기다리셔서요.”
효과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상대가 우길 가능성이 있었기에 뱉은 말이었다. 다행히 남자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토를 달기는커녕 아예 이어지는 말 자체가 없었다.
가이딩이 끝난 직후라 머리가 맑아져 새삼 민망해지기라도 한 건가. 이럴 거면 처음부터 쓸데없는 짓을 하지나 말지 싶었지만, 이제라도 끝난 게 다행이었다.
“되셨으면 그만 나가 주시죠?”
삐딱한 말에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차 문을 쾅 닫는 소리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이어지는 가이딩은 별일 없이 순조로웠다. 다른 에스퍼들은 지친 탓인지, 아니면 방금 그 에스퍼에게 기가 눌려서인지 얌전하기만 했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모든 에스퍼의 가이딩을 마친 정원은 곧바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모처럼 저녁때가 되기 전에 임무가 끝난 날이었으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본부로부터 온 전화였다. 정원은 기분 나쁜 예감에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 정원 씨, 미안한데 바로 복귀해줄래?
괜한 예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떨어진 요청에 정원은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오늘 일은 여기서 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 그랬는데, 관장님이 급한 일로 호출하셔서 말이야. 미안해.
씁쓸한 기분도 잠깐이었다. 어차피 여가 계획이 실현되는 경우는 잘 없었다. 순간 에스퍼레소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라더라. 본인이 상급 가이드라면 사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대접받는 삶을 살 거라고 했던가…….
정원은 작게 냉소했다. 자신이 아직도 이런 일로 상념에 빠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바로 입을 열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돌아갈게요.”
* * *
“아, 정원 군. 왔어? 앉아, 앉아.”
정원이 들어서자마자 관장이 반색하며 인사했다. 자리에 앉으면 말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정원은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서 있을 테니 말하라는 뜻이었다. 관장이 작게 혀를 차더니 농담처럼 입을 열었다.
“정원 군 다리를 부러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람 좋은 양 말하고 있지만, 실은 이렇게 대꾸하지 않으면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앉아서 듣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어질 관장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관장은 의외로 정말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기 임무가 생겼는데, A급 이상의 가이드가 필요해.”
당연히 질질 끌 줄 알았건만, 바로 본론이 나오는 걸 보면 급한 사안이긴 한 모양이었다. 정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몇 명이나 필요한가요.”
“정원 군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하겠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 아니라,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랬다. 인원을 물어본 것은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S급 가이드에게 일 대 다로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설령 에스퍼와의 동조율이 낮더라도 웬만큼은 커버가 가능했다.
정원은 S급 가이드 중에서도 단연 톱에 속하는 가이드였다. 안정된 가이딩 능력은 물론, 누구를 만나도 유지되는 높은 동조율 덕분이었다. 이제까지 상대해 본 모든 에스퍼와의 동조율이 80% 이상이었다. 다른 가이드가 함께 있다면 일이 줄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인력이 부족한 국가기관에서 그런 배려를 해 줄 리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임무 내용이 어떻게 되나요. 언제부터 시작이죠?”
서서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정원이 결국 관장이 권했던 자리에 앉으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어차피 시키는 건 다 해야 하는 입장이니 망설이는 척해 봤자 정원의 손해였다.
“그게 말이지.”
관장이 드물게 머뭇거렸다. 그답지 않게 뭘 망설이는 걸까.
“실은 문제가 하나 있는데.”
“뭔가요.”
“현장이 외국이야.”
정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관장처럼 뻔뻔한 사람이 망설일 때부터 알아는 봤지만, 이건 생각했던 것 이상의 문제였다. 정원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했다.
“잘 아실 텐데요? 전 국외로는 안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