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석주의 몸이 정원을 한가득 덮고 있었다. 주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사이 섞여 있는 석주의 가명이 유독 귀에 들어왔다. 비명 같은 목소리. 슬쩍 옆으로 눈을 돌려 확인하니 대리석 파편 하나가 정원의 얼굴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추락해 있었다.
석주 덕분에 어떻게든 저기 얻어맞는 사고는 피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강석주는? 강석주는 괜찮은 건가?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일어서기 위해 몸을 들썩거리자, 석주는 더 강하게 체중을 실어 정원을 짓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아직 다 끝난 거 아니니까.”
또다시 귓가를 오싹하게 만드는 예의 그 목소리. 정원은 황급히 입을 열어 물었다.
“강석주 씨. 괜찮은 건가요?”
“안 다쳤으니까 걱정 마세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석주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정원은 몇 차례 더 눈을 깜빡였다. 그들을 둘러싼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감이 없어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석주에게 깔리듯 덮인 채 보호받은 이 상황에서.
데자뷔라는 건 원래 대부분의 경우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지만, 오늘의 기시감에는 어쩐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쩐지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
왜일까.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사람들이 손을 뻗어 석주를 일으켜 주었다. 한순간에 허전해졌다.
『데이비드, 괜찮아요? 다친 데는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다 비껴갔어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석주의 목소리가 어쩐지 저 멀리에서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했다. 정원은 혼자 주섬주섬 몸을 바로 세웠다. 달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석주를 걱정하느라 정원 쪽에는 시선도 거의 두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소외감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꾸만 석주 쪽에 눈이 갔다.
『정말 다행이네. 우와, 그런데 난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반사 신경이 좋아요?』
『솔직히 어지간한 에스퍼보다 대단한 수준 아닌가? 그 왜, 옆 부서에 고속 이동 능력 있는 에스퍼 있잖아. 난 순간 그 사람 보는 줄 알았지 뭐예요.』
석주를 향해 이어지는 낯부끄러운 칭찬 세례에 괜히 듣고 있는 정원이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참 석주를 떠받들어 주던 직원들이 어느덧 마무리되어 가는 현장을 완전히 수습하기 위해 다시 저편으로 달려갔다. 다시 둘만 남은 가운데 석주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다친 데는요.”
물어보는 타이밍이 너무 늦지 않나 싶었지만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불만을 가질 리도 없었다.
“덕분에 멀쩡하네요.”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정원은 이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 이상한 기시감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렇다고 그걸 석주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석주 씨. 방금 강석주 씨가 절 깔고 엎드리셨을 때 제가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요. 혹시 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아시나요?’
이건 뭐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이없게만 들릴 테니까.
“계속 일할 거예요?”
그때 석주가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빨리 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지라는 식의 이죽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래서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원은 눈을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나요.”
대뜸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석주는 정원을 마주 보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소득 없이 고생만 하는 것 같아서.”
그게 다인가. 계속 얼굴을 들여다봐도 뭔가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정원은 그에게서 시선을 뗀 뒤 조금 냉정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얻는 게 없어도 어쩔 수 없죠. 뭐라도 해 보는 겁니다. 안 될 걸 안다고 해도요.”
“의미 없는 짓을 하면서 뭐라도 하고 있다고 혼자 위로하는 건 아니고요?”
정원이 멈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껏 석주에게서 들었던 모든 말 중 단연 가장 기분 나쁜 말이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기도 했고, 묘하게… 서운하기도 했다.
정원은 자신이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게 맞아도……. 그런 말을 강석주 씨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요.”
석주는 여전히 정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네. 내가 실언했어요.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닙니다.”
차라리 맞는 말이지 않냐고 비꼬거나 우겼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냉랭하게 실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며 넘어갈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과 때문에 더 마음이 복잡했다. 이를 악문 채 눈을 돌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하는 정원에게 석주가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나겠다고 했죠.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요?”
석주에게서 이런 질문은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다. 정원이 살짝 표정을 구겼다. 석주는 정원에게로 바짝 다가선 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부연했다.
“만나기만 하면 그만인 건 아니잖아요. 뭐라도 해야 할 텐데, 뭘 어떻게 하려는 건가 궁금해서요. 명색이 세계 최고의 에스퍼라느니 하는 사람인데.”
복수를 한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하려는 거냐는 질문이겠지. 정원은 대답하지 않고 냉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파트너도 아닌 사람한테 그걸 말해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 말에 석주는 그냥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돌렸다. 정원은 그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아예 몸을 돌린 뒤, 어떻게든 이 불쾌한 섭섭함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는 그저 비즈니스로 엮여 잠시 정원의 파트너였던 사람일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늘도 정원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냥 적당히 고마워해야 할 텐데, 그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할 텐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말 때문에 기시감 같은 것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 * *
『와, 오늘은 정말 데이비드 덕분에 살았지.』
회사로 돌아올 때까지도 그 말은 멈추지 않았다. 유난히 오버스럽게 반응하는 것은 역시 팀장이었다.
『솔직히 팀장님은 데이비드한테 감사하셔야죠. 거기서 데이비드가 못 피했으면 괜히 현장에 비각성자 신입사원 데려갔다가 망한 상황밖에 안 됐을 텐데.』
『나도 알아. 아니까 지금 이러는 거잖아.』
팀장은 연신 석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키 차이가 꽤 많이 나 한껏 손을 뻗는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개발 1부의 화목한 모습을 떨떠름한 눈으로 지켜보던 정원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그럼 부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연락해 주신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것 같아서……. 오늘은 정말 감사했-.』
『음. 아니, 아니. 잠깐 들렀다 가.』
정원은 손을 내젓는 팀장의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와서 보고서에 쓸 내용만 좀 확인하고 가. 도와주고 가면 더 좋고. 어차피 늦은 거 좀 더 늦으면 어때?』
지금쯤 단단히 벼르고 있을 영업 2부의 에스퍼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무엇보다 오늘은 이 이상 석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른 부서여도 상사는 상사, 에스퍼는 에스퍼였다. 그 말을 거부하는 건 정원답지 않은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남의 부서 보고서를 쓰는 업무까지 도와야 하는 건가. 정원의 부서에서는 정원이 놀고 있는 모습은 못 보면서도 그렇게 중요한 일을 시키지는 않았기에, 이건 정말 별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개발 1부에 다시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회사에 남아 있던 가이드 두 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팀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표정이 펴졌다.
『뭐야, 다들 왜 그러고 있어?』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들어서던 팀장도 곧 깜짝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엇, 전무님 아니십니까?』
예상 못 한 말에 정원도 덩달아 멈췄다. 팀장의 시선 끝에 앉아 있는 것은 언뜻 봐도 젊어 보이는 얼굴의 남자였다. 정원과 석주의 또래이거나 기껏해야 몇 살 정도 많아 보였다.
에스퍼는 나이가 아니라 능력이 중요하니 젊은 중역이 있는 회사는 흔했다. 그래도 테프트 정도로 규모가 있고 설립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난 회사에서는 웬만한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좋은 점심입니다. 현장 일이 조금 전에 끝났다면서요?』
『네, 오늘 임무 규모가 꽤 큰 편이어서요.』
『이 자리는 누구 자립니까? 전에 와 봤을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정리가 잘 돼 있네요.』
전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다름 아닌 석주의 자리였다.
『아, 저희 신입사원 자리입니다. 이번에 비각성자 특별 전형으로 입사한…….』
『적응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현장에도 같이 다녀온 겁니까?』
『예. 오늘 현장에서도 단단히 한몫을 했어요. 제가 본 비각성자 중에 제일 괜찮은 친구입니다. 하하하!』
『흐음.』
전무의 시선이 날카롭게 석주를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