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정원은 에스퍼의 기운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전무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기운을 풀고 있는 듯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전무는 그 나이에 어떻게 테프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듯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낮아도 A급인 것 같았고, 아마 S급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제아무리 에스퍼의 기운에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S급 에스퍼가 작정하고 위압감을 내뿜으면 움츠러드는 것이 당연했다. 모든 직원이 다 안절부절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원 역시 불쾌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정원의 입장에서는 견디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기운이라고 해도 처음 석주를 만났을 때의 그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던 느낌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괜찮았다.
같은 S급인 데다, 아마도 이 남자보다 강할 석주에게는 더욱 아무것도 아닌 상황일 터였다. 그렇지만 석주는 짐짓 괴롭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전무가 힘을 거두는 것이 느껴졌다.
시험하려고 한 걸까. 대체 뭘? 실제 비각성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비각성자를 힘으로 누르려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정원은 눈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전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 정말 잘된 일이네요. 비각성자를 모집하는 건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그렇게까지 적응을 잘하고 있다니. 이번 일에 대한 보고는 이 신입한테 받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거야… 전무님께서 원하신다면 물론 가능하죠. 하지만 워낙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혼자서는 뭘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 제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팀장이 앞에 있으면 어떻게 자기 뜻대로 말할 수 있겠어요? 상사 없는 자리에서 물어보고 싶은 거죠. 오늘 현장은 어떤 분위기였는지, 회사 생활은 어떤지, 비각성자로서 각성자만 일하고 있던 회사에 들어온 기분은 어떤지… 안 그래도 정말 흥미가 많았거든요. 괜찮겠죠? 그러니까……. 데이비드?』
고개를 숙여 석주의 명찰을 살핀 전무가 그렇게 물었다. 석주는 물론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걱정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건 팀장 쪽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눈을 굴렸다. 그렇게 아끼는 석주가 임원의 앞에 혼자 불려간다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정원은 전무와 팀장, 석주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석주가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 중 하나를 걱정해야 한다면 저 자신만만한 전무 쪽을 골라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석주 혼자 회사의 중역을 독대하는 상황이 신경 쓰이기는 했다. 왜냐하면…….
눈치를 살피던 정원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기, 저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비각성자입니다.』
『음?』
그제야 전무의 시선이 돌아왔다. 정원은 인생 처음으로 열정 넘치는 신입사원 행세를 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저도 이번 현장에 함께 다녀왔는데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저도 꼭 같이 보고를 올리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했다. 석주에게만 이 회사의 임원을 만날 좋은 기회를 넘길 수는 없었다. 너무 젊은 나이라 테프트의 사장이 잠수를 타기 전부터 이 회사에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역은 중역이니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석주는 곱지 못한 얼굴로 눈을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그 시선은 아예 무시한 채 전무를 향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팀장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적극적으로 정원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러면 되겠네요.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테고, 둘 모두 비각성자이니 전무님께서 원하시는 대답도 두 배로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자, 자. 얼른 가서 보고하도록 해!』
전무도 정원의 말에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덕분에 두 사람은 나란히 전무의 사무실로 향할 수 있었다.
* * *
『음, 그러니까 자연 발생한 기현상을 처리하러 다녀왔다는 거지요? 괴물이 나왔고, 건물이 무너져서 다친 사람이 조금 있었다고요. 그런 현장에 비각성자로서 가 있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게다가 데이비드는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를 감싸기까지 했다고요.』
사무적인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과장된 칭찬이었다. 석주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은 덕분에 말을 하는 것은 모조리 정원의 몫이었다.
『예. 정말 덕분에 살았죠. 입사 시험을 볼 때부터 데이비드에게는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원의 대답 역시 전무만큼이나 영혼이 없었다. 진지한 척 고개를 끄덕이던 전무가 종이에 뭐라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보고는 여기까지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정식 보고서는 따로 받을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말씀하세요.』
『우리 회사 사장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
갑작스러운 화제에 정원이 의아한 듯 답했다. 간신히 평온한 척 대답하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화들짝 놀라 과민반응을 보일 뻔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특별하게는…….』
무슨 말이라도 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하다못해 세계 최고의 에스퍼가 아니냐는 말이라도. 하지만 차마 자신의 입을 벌려 사장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고 싶지가 않았던 탓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마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적잖이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정원을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석주였다.
『워낙 유명하시지만 알려진 게 많지 않으니까요. 굉장히 뛰어난 에스퍼라고 들었습니다. 항간에는 하룻밤에 우랄산맥을 지구 반대편으로 옮길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는 말까지 돌지 않나요?』
『하하하, 그거야 물론 과장이지만 이 회사에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원들도 아주 많죠. 사장님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전무 본인 또한 사장을 언급할 때 표정이 확 풀어지는 것을 보니 사장을 향한 사랑이 적잖이 큰 듯했다.
정원은 그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평온한 표정. 평온한 표정. 어떻게 해서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 남자의 이야기만 나오면 남에게 들킬 만큼 얼굴색이 나빠지곤 했지만, 지금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틀림없이 의심을 살 터였다.
오로지 그 부분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 수준이었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던 끝에 석주가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정원의 손을 그러쥐었다. 퍼뜩 정신이 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숨까지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정원의 손을 마사지하듯 몇 번 주무르면서도 석주는 태연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지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물어본 건데요. 사실 여러분께 제안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서 말입니다.』
『제안이라니, 뭔가요?』
『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장님의 수련이 끝날 예정입니다.』
그 말에 겨우 돌아왔던 정신이 다시 나가 버리려 했다. 아마 석주에게 손이 잡힌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전무를 추궁했을 터였다.
『그 왜,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 종종 나오는 거 말입니다. 사장님은 이미 세계 최고의 에스퍼이지만, 더더욱 본인을 갈고닦아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싶다는 욕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오래전부터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신 채 능력 향상에 몰두했는데, 이제 겨우 그걸 마치고 밖으로 나올 마음이 든 모양입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사장이 어디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남몰래 테러를 일으키고 다녔는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전무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조만간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낼 텐데요. 그때를 맞아서 우리 지부에서도 행사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뜻깊은 자리가 되겠네요.』
하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석주는 잘도 그런 말을 했다. 전무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 자리에 여러분이 함께하는 게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방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멈출 듯 느리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박동을 찾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