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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벤지 가이드라인-52화 (52/126)

52.

그 소년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이 바랜 것 같은 회색 머리카락과 그 밑의 검은 눈동자가 싸늘했다.

석주는 이곳에서 지내며 몰랐던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사람의 눈동자는 대부분 검은색이라는 것. 기억에 있는 눈동자라고는 짐승의 것처럼 샛노란 눈 하나뿐이라 자연히 그게 일반적이라 여겼는데, 여기에서 본 사람들의 눈동자는 모두 검은색 아니면 짙은 갈색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의 눈동자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아니, 새로울 이유가 없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평범한 검은색 눈동자는 이상할 만큼 눈길을 끌었다.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는 공허함 때문이었을까.

센터장은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겼다고 말했다. 누가 무엇을 빼앗아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눈이 마주친 저 소년 역시 자신처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이라는 것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방금 그 폭발은 어떻게 된 거고?”

“그게…….”

방금의 폭발로 머리가 폭탄 맞은 꼴이 된 연구원이 센터장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지 센터장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저 친구가 가이딩하기를 거부했어요. 의식하고 일부러 거부한 건지, 아니면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남을 가이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청각이 예민한 석주의 귀에는 그 말이 모두 들렸다.

“뭐, 가족들을 잃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괜히 중요한 가이딩을 맡기려고 하지도 마.”

“알겠습니다.”

석주는 힐끗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한 눈에 순간 복잡한 기색이 일렁였다.

표정이나 감정을 읽는 데 서툰 석주로서는 그 눈에 스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그는 석주와 달리… 자신이 뭘 빼앗겼는지 정도는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렇게 괴로운 얼굴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소년을 다시 본 건 며칠 뒤였다.

그사이 센터장의 말대로 기억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아직은 끊긴 채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지만, 이전만큼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뚝 떨어진 듯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을 데리고 있던 남자의 얼굴도 점점 명확하게 생각이 났다. 처음에는 샛노란 색 눈동자뿐이었다가, 웃는 얼굴과 자주 짓던 표정도.

자신이 그에게 모든 기억과 가지고 있던 능력을 빼앗겼다는 사실까지도 떠올려 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날 보았던 소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종종 그에게 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고 싶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통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없어 거의 미련을 버린 상태였다. 다른 이에게 행방을 묻거나, 일부러 찾아다니기에는 그를 마주쳤던 시간이 너무 짧고 무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석주는 어쩌면 자신이 그를 다시 만나기를 생각보다 훨씬 더 바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은 석주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뒤로 가면 위험하댔어.”

가리키는 방향을 힐끗 돌아보았다. 건물 뒤편 좁게 나 있는 길이었다. 연못 근처에서 나타난 개구리가 저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별생각 없이 따라갔을 뿐, 꼭 그쪽으로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석주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럼 넌 거기서 뭐 해.”

위험한 곳 근처라면 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생각.”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냥 생각.”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강석주는 한 번도 그냥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찌푸린 채 한참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날 보았던 얼굴은 너무 텅 비어 있는 나머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허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은 자연스럽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차이가 어색했다.

“갈 데가 없는 거면 여기 와서 앉아.”

소년이 다시 말했다. 석주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꺼낸 말이었다. 자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는 것을 보며, 석주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말을 할 줄 알았네.”

자리에 앉으며 툭 던지듯 내뱉었다.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말을 하는 게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 것처럼.

“저번에 봤을 때는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 없길래.”

그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석주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소년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나…….”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날은 소란스러웠고, 일방적으로 그를 볼 수 있었던 석주와 달리 그에게는 석주가 배경에 있는 사물 중 하나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미안하다는 듯 변명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은 잘 기억이 안 나.”

“너도 누구한테 뺏겼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갑작스러운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반갑게 묻자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기억을 뺏길 수도 있어?”

나와 같은 사람은 아니구나. 수긍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빼앗겨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었던 걸까.

소년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끊겼다. 대답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더 호기심이 생긴 건지, 그는 석주의 얼굴 근처에서 기웃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넌 어쩌다 여기 오게 됐어?”

“…….”

“넌 뭘 좋아해?”

“…….”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낼 땐 뭘 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의 내용을 채 곱씹기도 전에 다음 말이 연달아 쏟아지자 석주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무슨 물어볼 게 그렇게 많아?”

그 말에 소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나. 기분이 상했다 해도 자신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히 그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는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넌 뭔가 궁금한 거 없어? 있으면 너도 물어봐.”

“딱히…….”

그대로 말을 흐리려던 석주는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가이딩이라는 게 뭐야?”

소년의 말이 멈췄다. 그는 조금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가, 잠시 후 설명을 했다.

“에스퍼를 달래 주는 거야.”

“에스퍼는 뭔데?”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신기해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런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에스퍼는…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야.”

“초능력은 뭐야?”

“보통 사람들은 못 하는 특별한 거. 비를 내린다거나 물건을 움직인다거나.”

“비는 원래도 내리고, 물건은 손으로도 움직일 수 있잖아.”

그런 걸 남들은 못 하는 특별한 거라고 표현할 수가 있나.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소년은 곧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고 보니까 그렇네. 네 말이 맞아.”

“넌 가이딩을 하는 사람이야? 가이딩도 초능력이야?”

“가이드는 맞지만… 이건 초능력이 아니야. 가이드는 초능력을 쓰는 사람들을 달래 주는 사람이라니까.”

센터장은 강석주가 에스퍼라고 했다. 분명 에스퍼임에도 지금은 몸에서 능력의 흔적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말라붙은 상태라고. 그렇지만 찾을 길은 반드시 있을 거라고 말했다.

딱히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에 능력이라는 것이 돌아오든 말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소년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나도 에스퍼래.”

석주가 꺼낸 말에 소년의 눈동자가 금세 경계심으로 물들었다. 에스퍼를 싫어하나?

“그럼 나도 네가 달래 주는 거야?”

“…….”

얼굴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져 있던 소년이 곧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너한테선… 딱히 에스퍼 같은 느낌이 안 드는데.”

“지금은 능력이란 게 없대.”

“…….”

찌푸려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소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에스퍼일 수가 있어?”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더니 갑자기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앉아 있는 사이 소년이 벌떡 일어섰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거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남긴 뒤 소년, 정원은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해졌던 정신이 멀쩡히 돌아왔다.

아직 그가 물어본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도 못했는데.

가이드라면서. 가이드는 에스퍼를 달래 주는 사람이라면서. 달래 준다는 게 정확히 뭘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의 어감은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전과 달리 공허하지 않았던 그의 눈동자도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초능력이 없어서 안 된다는 걸까. 그렇다면 능력이라는 게 돌아오면……. 그때는 다시 말을 섞을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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