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53화 (53/126)

53.

“오늘 상태는 좀 어때?”

“평소랑 똑같아.”

석주는 힐끗 눈을 들어 연구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 사람들이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석주의 말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대할 때처럼, 자신들에게 정중하고 공손한 말투를 쓰기를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석주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어차피 공손하게 말하는 법 같은 건 배우지도 않았고, 꼭 그래야 할 이유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놓고 석주의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짐작하기로는 자신이 에스퍼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아무 능력이 없는 상태인데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기억은 얼마나 돌아왔는지, 능력은 어떤지…. 이런 것들.”

언짢은 기색을 갈무리하지 않은 채 말을 잇는 그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겨우 시선을 느꼈는지 수첩을 들여다보던 연구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흠칫 놀랐다. 석주는 한참 그 얼굴을 마주 보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긴 한데 뭔지는 잘 모르겠어. 능력은 딱히 돌아온 느낌이 안 들어.”

헛기침을 한 연구원이 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석주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매일 있는 일과였다. 연구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석주의 상태를 묻고, 대답하는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받아 적었다. 별로 영양가도 없는 대답을 대체 어디 쓰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또 능력이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기억은 실제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기억 속 그 남자에게 능력을 빼앗기기 전까지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진 능력을 사용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나 방금 대답을 뭉뚱그렸듯이, 그 사실을 낱낱이 고백하지는 않았다. 대답은 매일 거기서 거기였다.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는 것. 능력은 물론이고 기억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딱히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잘 모르고 있다면, 굳이 직접 나서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낱낱이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함께 있는 동안 그 남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모종의 방법으로 석주에게서 기억과 능력을 빼앗았다는 건 이제 알겠지만 정확히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찾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자신과 무슨 관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와 지내던 곳은 외국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주 가끔 그 남자와 함께 밖에 나가면 이곳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이들이 이곳과 다른 언어를 쓰며 돌아다녔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석주를 한국까지 데려온 걸까. 또 그는 왜 한국에 온 것일까?

사실 그런 건 크게 궁금하진 않고, 이곳에서 석주의 관심을 끄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수첩을 정리하는 연구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석주가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그때 걔는?”

“걔라니?”

연구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아직 여기 있어? 안 보이던데.”

설명이라고는 없이 질문뿐이었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설명을 길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게 껄끄러웠다.

그래서 연구원의 의아한 표정을 보면서도 구체적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한참 혼자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드디어 뭔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그 어린애? 네 또래인 애 얘기하는 거야? 그, 가이드.”

“맞아.”

“걔야 그냥… 있지? 뭐가 궁금한 건데?”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을 듣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 뭐가 궁금하냐고 묻는다면, 그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지가 궁금했다고 대답해야 할까. 그렇게 보낸 뒤로 다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그때 이후로 보이질 않길래.”

“뭐, 너하고는 훈련하는 내용도 다르고, 지내는 곳도 꽤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연구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석주는 더 물어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왔다.

왜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또 같은 장소였다. 지난번 그 소년을 마주쳤던 곳. 그날 이후로 연구소 안을 돌아다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이곳에 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귀소 본능 같았다. 소년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직접적인 거부 의사를 표현했고, 그러니 그 뒤로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 석주를 피해서일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찾아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석주는 오늘도 소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걸음을 돌리려 했다.

바닥에서 작은 신음이 들려오기 전에는.

미세한 기척에 눈을 돌려 보니… 소년이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채. 당황한 석주는 답지 않게 급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앓는 소리를 내는 그를 흔들어 깨우자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이 뜨였다.

혼미한 눈동자가 석주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디 아파?”

“아……. 너구나.”

대뜸 던진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지? 잠깐 잠들었던 건가…….”

소년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석주는 이상할 만큼 입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당장 입을 열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소년이 다시 자신을 밀치고 도망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자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잡힌 곳을 내려다보았다.

“아픈데…….”

“…….”

손목이 아프다는 말에도 힘을 풀지 않았다. 막상 빠져나가려는 마음은 없는 건지, 소년은 손목을 비틀거나 하는 대신 그냥 고개를 들어 석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할 말? 무슨 할 말.”

오히려 그 말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네가 에스퍼라고 해서 싫었는데, 너도 누구한테 능력을 뺏겼다며?”

“…….”

“나는 능력을 뺏긴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네 기분을 알 것 같아서. 그래서 사과하고 싶었어.”

“왜 사과해?”

“네 사정도 모르고 혼자 싫어했으니까.”

“지금은 안 싫어?”

이유 모를 조급함에 대뜸 물었다. 석주의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소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싫지.”

“…….”

“너도 복수하고 싶어?”

말이 없는 석주의 눈치를 살피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왔다. 석주는 빠르게 되물었다.

“너는 복수하고 싶어?”

“응.”

“너도 뭘 뺏긴 거야?”

“…….”

“뭘 뺏겼는데?”

소년이 대답하지 않자 석주는 초조해졌다. 소년이 대화에 흥미를 잃기 전에 다른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뭘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남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질문할 내용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가지고 있는 기억 속 장면들을 떠올려봤지만 모두 무의미하고 희미할 뿐이었다.

석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소년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만약에 형이 살아있다면, 형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형이 있어?”

석주가 곧바로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비밀 지켜 줄 거야?”

“난 어디 가서 말할 사람도 없어.”

그 담담한 말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내내 침울한 표정이던 소년이 그 말에 활짝 웃으며 대답을 내놓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곳에서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검은 눈동자가 유독 검다고, 그 눈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소년이 입을 열었다.

“있었어, 형.”

“…….”

“난 지금 형의 자리를 뺏고 있는 거야.”

이어지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석주는 어떤 결심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해 본, 맹세 같은 결심이었다.

* * *

“능력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

다시 만난 센터장에게 석주는 대뜸 그 이야기를 꺼냈다. 센터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꼭 그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대답했다.

“한 가지 시험해 볼 만한 방법이 있기는 한데…….”

“그래.”

“뭐라고?”

“시험해 봐. 할게.”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센터장이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한참 설명했지만, 석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그때의 석주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위험하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낄 리도 없었다.

센터장은 석주에게 간단하게나마 실험의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능력을 빼앗겼음에도 석주가 여전히 에스퍼인 건, 그의 안에 기운이 미세하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기운을 원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니 다른 에스퍼의 능력을 통해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어서, 시들시들해져 있는 능력의 근원을 깨워 보겠다는 것이었다.

에스퍼는 본능적으로 다른 에스퍼의 기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듯했다. 본인이 강한 에스퍼일수록 다른 에스퍼의 기운이 주입되었을 때 거부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그 현상을 이용하겠다는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석주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설명 같은 건 됐어. 가능성이 있으니까 꺼낸 얘기 아냐?”

“정말로 괜찮겠니? 죽는다고 해도 센터 쪽에서는 아무 책임도 져 줄 수가 없는데.”

석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남은 거라고는…….

‘폭주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소 S급의 위력이에요. 당장 센터를 폐쇄하지 않으면…….’

‘죽지 마. 내가 죽여 버리기 전엔 절대 죽지 마!’

몇 개의 목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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