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2화 (122/126)

122.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확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정원이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라니.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박성범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기억하는 정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정하고 차분한 미형에, 감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무표정한 얼굴. 그가 지금은 다 죽어가는 상태로 이곳에 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폭주 직전이라니!’

강석주가 폭주하기 직전이라는 것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시사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정말로 폭주를 일으키는 순간 지금 이 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고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석주라는 에스퍼의 폭주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가능할까?

‘지금 본부에 남아 있는 가이드가 몇 명이나 되지? 전부 다 동원하면 막을 수 있을까?

기관에 있는 가이드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도 답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를 데려와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것이 유일한 S급이었던 정원이거늘.

강석주가 정말 과장 없이 폭주하기 직전이라면, 지금 이렇게 그를 찾아가는 것마저 자살 행위였다. 기절해 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임시이긴 해도 지금 기관의 책임자는 박성범이었다. 무책임하게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석주가 있다는 곳에 도착했다. 기관 내의 의료 시설이었다.

박성범이 달려오는 길에 상상한 것은 다 죽어 가는 정원을 들쳐 멘 석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기관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인 덕분인지, 정원은 이미 병상에 누워 의료진들의 케어를 받고 있었다. 석주는 그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상태였다. 박성범은 그 질문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우선 다급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눈으로 본 강석주의 모습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온화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폭주 직전이라고 들은 것과 달리, 정원의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파트너 가이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은 차분해 보였다. 그렇기에 무심코 안심해 버린 것이다.

박성범의 질문을 들은 강석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름이 등을 타고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보고하러 뛰어왔던 연구원이 왜 그렇게 사색이 되어 있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입을 열어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실책처럼 느껴졌다.

‘입 다물고 있을걸!’

그러나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다. 강석주는 박성범의 얼굴을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살려내 주세요.”

박성범이 저절로 움찔했다. 그로서는 정원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살려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그러지 못하기라도 하면? 과연 강석주의 반응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박성범의 시선이 저절로 누워 있는 정원을 향했다. 그리고 그에게 달라붙어 다급하게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있는 의료진들에게도. 그중 한 사람이 마침 고개를 들었다. 박성범을 발견한 그가 석주에게 보이지 않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가망이 없다는 뜻인가? 아니…….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아주 살려낼 가망이 없지는 않은 듯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은 더없이 불행한 상황이었지만.

박성범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게…… 물론 최선을-.”

“살려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주의 무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박성범의 어깨가 움찔했다. 강석주는 그의 나이의 절반이나 될까, 기관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강한 에스퍼라는 것만으로도 지금 그의 말이 짧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제까지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가며 대접해 주었던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박성범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 없다거나, 이렇게 말했다가 죽기라도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냐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당장은 강석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무, 물론! 물론 그래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낼 거라네!”

그 말에 혀라도 깨문 듯한 표정이 된 것은 의료진이었다. 박성범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완벽하게 무감한 얼굴로 박성범을 바라보던 강석주의 눈빛은 곧 아무런 대답 없이 떨어져 나갔다.

‘납득한 걸까?’

어쨌든 그가 지금 당장 폭주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박성범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석주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가이드, 정원에게로.

누군가 무사히 회복하기를 이토록 간절히 바라 본 것은 처음인 듯했다. 박성범이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맞잡은 양손이 허옇게 질렸다.

* * *

“다행히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의식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한참의 고군분투 끝에 의료진이 꺼낸 말이었다. 정원을 살려내지 못하면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릴 것처럼 형형한 기세를 내뿜고 있던 강석주는, 정작 그 말을 꺼냈을 때에는 그리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반송장을 살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의료진의 입장에서는 김이 빠질 수도 있는 반응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강석주가 날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의식 찾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지금 상태가 많이 나쁜 건 아니죠?”

그 질문을 던진 것은 강석주가 아니었다.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여자의 물음이었다. 강석주가 최근 함께 일하는 비즈니스 상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관 소속도 아닌 사람이 당당하게 들어와 채근하는 모습이라니. 일반적인 상태였다면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며 그녀를 내쫓으려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고비를 넘겼다는 말로 겨우 안정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석주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의료진은 진땀을 빼며 입을 열었다.

“그, 글쎄요. 이제 남은 건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상태라서…….”

여자에게 머뭇머뭇 대답하면서도 눈으로는 계속해서 석주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석주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가 테프트의 사장을 상대한 뒤 돌아왔을 때 다른 의료진들과 함께 그를 치료한 적이 있었으니까. 강석주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서 쉬쉬한 것도 그가 위험하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정말 실감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강석주의 상태를 마주하고 나서야 절절하게 실감했으니. 강석주가 지금 당장 손짓 한 번만으로도 모든 의료진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에스퍼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거 맞죠?”

자꾸만 캐묻는 여자의 모습이 야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석주의 눈치를 보며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정원이 의지를 다잡고 당장 의식을 되찾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바람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기…….”

“…….”

“눈 좀 붙이시는 게…….”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린 준희가 석주의 주위를 맴돌았다. 차마 아주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강석주를 나름대로 오래 알아 온 준희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당연했다. 강석주는 벌써 일주일이 다 되도록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정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럴수록 약해 보이기는커녕 더 공포스러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날이 그를 둘러싼 기운이 살벌해졌다.

어떻게든 그를 좀 재워 달라는 부탁에 다가오기는 했다.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것은 준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골랐다. 무섭기는 해도 한마디쯤은 더 붙여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천하의 강석주라도 정말로 쓰러지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왜일까?”

“네?”

말을 붙이면서도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뜬금없이 나온 석주의 말은 준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펄쩍 뛰며 대답했다. 그러나 준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석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말을 이을 뿐이었다.

“왜…… 안 일어나지?”

겨우 입을 열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석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의지 문제라는 건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뜻이잖아.”

“……그, 그렇죠.”

“그런데 왜…….”

반쯤 공포에 질려 있던 준희였다. 하지만 지금 석주의 모습을 보니 공포는 어느새 가라앉고, 안쓰러운 기분만이 남았다.

석주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싫어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를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인 석주가 그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준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