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벤지 가이드라인-123화 (123/126)

123.

“이, 이보게.”

그 뒤로 다시 나흘쯤 지났을까? 준희를 찾아와 누군가 말을 걸었다. 박성범이었다. 원래 국가 기관 사람들은 기관 소속도 아닌 준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신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반영하기는커녕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석주가, 기관 사람들이 아닌 준희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렇기에 박성범이 먼저 찾아와 준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준희는 놀람 반, 신기함 반으로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어, 왜 그러세요?”

그러나 그 태도는 박성범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박성범과 달리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이리라.

“왜냐니!”

박성범이 벌컥 언성을 높였다. 큰소리가 나자 준희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언성을 높인 채로 말을 이어 가려던 박성범이 잠시 망설였다. 준희 개인은 아무 힘도 없는 상대였다. 에스퍼도 아니고, 심지어는 가이드도 아닌 일반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석주와 함께 일하는 상대를 마냥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박성범이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

박성범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문을 한 겹 사이에 놓고 있어 바라보는 상대가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리는 없었다. 짐짓 태연한 듯하던 준희의 얼굴도 어두운 기색으로 물들었다.

정원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렇다는 건, 석주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그 옆을 지킨 지도 열흘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강석주는 강인한 에스퍼였다. 단순히 강인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사실 열흘쯤 저런 상태를 유지한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멀쩡한 상태일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강석주…… 상태가 어떻지?”

박성범이 어렵사리 물었다. 강석주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조차 확신이 없는 듯했다. 원래 강석주를 상대하던 것은 기관 내에서도 유 관장 정도였으니, 그 자리를 얼떨결에 대신하고 있는 박성범으로서는 강석주가 어려워 어쩔 줄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준희의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깃들었다.

‘어떤 상태냐고?’

“어떠냐면…… 안 좋죠.”

몹시 불명확한 말이었다. 성의 없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만큼 상황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었다. 박성범의 얼굴이 황당한 듯 일그러졌다가, 곧 다시 가라앉았다. 무슨 그렇게 무책임한 말이 다 있느냐고 힐난하려는 듯 날카로워졌던 눈빛도 그저 침중해졌다. 알고 있는 것이다. ‘좋지 않다’는 것이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고, 실은 무엇보다 명확한 말이라는 걸.

힐끗 그 얼굴을 살핀 준희가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저러다 쓰러질까 봐 걱정이에요. 뭐라도 먹게 하려고 하긴 했는데… 그 뒤로 밥 몇 숟가락이나 먹었을까요?”

“허어…….”

“평소였으면 괜찮았겠지만…….”

준희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제일 큰 문제는 한 가지였다. 강석주가 지금 가이딩조차 받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 말은 즉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로 벌써 열흘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대체 왜 일어나질 않는 건가?!”

답답함에 결국 박성범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그 말이 가리키는 상대는 분명했다. 일어나지 않는 정원이었다.

실력 좋은 의료진이 모두 달라붙어 정원 한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에만 전념했다. 그러지 못했다가는 정말로 강석주가 폭주해 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피부에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정원의 상태는 이제 거의 안정되었다. 몸이 어떤지만 물으면 멀쩡하다고 말해도 무방한 상태였다.

그런데 통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다. 박성범으로서는 그게 답답해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 질문에는 준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준희 역시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도는 듯했다.

'......싫어서?'

그는 정원이 싫어서 깨어나지 않는 것인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대충은 짐작이 갔다.

지금 정원이 의식을 차리는 것은 그의 의지에 달렸다고, 의료진들은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정원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

말없이 병실 쪽을 바라보던 준희가 질끈 눈을 감았다.

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원이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되찾아 눈을 뜨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안 그러면… 이러다 진짜로 송장 치우겠어요.’

마음속으로 정원에게 말을 걸었다. 입 밖으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시야에 들어온 시계는 마지막으로 봤던 것보다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모르는 사이 졸아 버린 모양이었다. 몸이 한계에 부딪힌 걸까.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절대 잠들지 않겠다고 생각했건만. 생각만으로 어떻게 하지 못할 만큼 한계에 몰린 모양이었다.

창 밖에서는 차분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석주는 언제 까무룩 졸았냐는 듯 선명한 눈동자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나 그새 정말로 잘못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날 정도로 희고 창백한 모습이었다.

석주는 어린아이나 할 법한 짓을 했다. 손을 뻗어 정원의 코 밑에 가져다 댄 뒤,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다행히 정원의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느리기는 했지만.

“정원 씨…….”

입 밖으로 힘없는 부름이 흘러나왔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뱉고 마는 이름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석주의 기억은 거의 온전해졌다. 눈을 감을 때마다 정원과의 추억이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꼭 기억에게 조롱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러니까 정원이 자신의 옆에 있었을 때. 다시 말해 온전한 정원을 되찾을 수 있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던 기억이, 그를 저 꼴로 만들어 버린 뒤에야 떠오른다는 것이. 꼭 정원을 기억하지 못했던 석주 자신을 힐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폭발이 일어나기 전 정원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텐데도. 그걸 알아채자마자 석주를 불렀다면 어떻게든 그를 지켜 냈을 텐데도. 아마 정원도 석주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강석주를 믿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대로 삶을 놓아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큼…… 더는 강석주의 옆에는 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던 걸까.

석주는 참담한 심정으로 손을 뻗어, 바르게 놓여 있는 정원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몸은 차갑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손만큼은 살아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따뜻했다. 정원에게 아직 산 사람의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눈을 떠 주기만 하면.’

멍하니 생각했다.

정원이 자신의 옆에 있고 싶지 않다고 해도 괜찮았다. 자신이 그를 잊었던 것에 대한 보복처럼 그 역시 석주를 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떠나라고 한다면 떠날 것이다. 다시는 찾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다시 깨어나 주기만 한다면.

석주의 얼굴이 석고 인형처럼 창백하게 굳어졌다. 머지않아 그 입에서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

그때였다.

열흘 동안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던 정원에게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 것은.

시작은 석주가 붙들고 있던 손끝에서부터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석주는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정원을 들여다보았다.

손끝이 움직이고,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내 팔이 통째로 까딱였다.

그리고는, 정원이 눈을 떴다.

“정…… 원 씨.”

한참 지옥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던 석주가 탄성처럼 정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봐. 정원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봐.

그리고…… 어쩌면 깨어난 정원이 강석주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지독한 두려움이 담긴 얼굴로, 석주가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

정원의 고개가 석주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석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원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대답을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석주의 숨이 거칠어졌다. 방금 전 했던 결심을 되새긴 것이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떠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해 주리라는 결심.

“당신은요.”

한참 만에 정원이 입을 열어 물었다. 석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전과 달리, 이제는 미약한 희망을 담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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