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화 (1/281)

◈1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1)

새가 소쩍소쩍 우는 낮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으음, 아무래도 이건…….”

찻잔을 두드리는 나의 손가락은 새하얗고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아가씨!”

나는 하녀 베키의 호령에 화들짝 놀라 찻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앗 뜨거!”

약이 담긴 잔은 무척이나 뜨거워 황급히 손을 뗐음에도 닿은 자리가 화끈거렸다.

“아가씨!”

“놀라서 데었잖아, 베키.”

“어떡해, 어떡해요! 흐어어엉.”

그러나 나보다 더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베키를 응시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의원, 의원을 불러야 해요!”

“아니야.”

“아가씨는 부는 실바람에도 쓰러지시는 분이시라구요!”

“베키, 사람은 실바람에 쓰러지지 않아.”

가까스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 말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칫 우악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동작이었으나 옷자락을 잡은 내 손끝에서는 우아함이란 것이 묻어나왔다.

방 한쪽에 걸린 거울에 파리한 낯빛의 여자가 비쳤다.

“넌 호들갑이 너무 심하다니까.”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몸이…… 약하시잖아요.”

나는 생긋 웃었다.

“보렴. 병에 걸렸어도 멀쩡히 눈 뜨고 숨만 잘 쉬고 있단다.”

있단다, 라니!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돋아! 이런 말투는 익숙해지지도 않는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한구석에 시선을 주었다.

“저것들이 내가 가져오라고 한 초상화들이니?”

“네? 네……. 그런데 아가씨.”

베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말했다.

“대체 제국 귀족 나리들 중 ‘미남’인 분들의 초상화는 왜 모아 오라고 하신 거예요?”

베키는 혼인 적령기인 내가 초상화를 모으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했다.

그러나 백작뿐 아니라 공작, 남작, 자작 심지어 기사와 황족 그림까지 몽땅 모아 오라고 한 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려 줄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알려 준 대로 가져왔겠지?”

흘끗 그림을 바라본 베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발, 흑발, 적발 그밖에 특이한 머리색은 전부 다 포함되었을 거예요!”

“흐응, 그렇단 말이지.”

“네네! 세상에나, 전 눈이 번쩍 뜨이는 줄 알았잖아요. 특히나 황족 초상화는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고요!”

“수고했어. 일단 찻잔 들고 나가 있을래? 쉬고 싶어.”

“네, 나가 볼게요!”

베키를 보낸 나는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미소를 싹 지웠다.

그리고 초상화 더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기에 ‘남자주인공’이 있을까?’

아니……. 아니지.

‘있어야만 한다.’

없으면 안 되지. 나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미남은 왜 쓸데없이 많은 건데?”

나는 복잡한 심정을 담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신 차리자, 유진. 아니, 달린아.”

머리채를 쥐어뜯는 내 이름은 ‘달린 에스테’.

한 달 전, 나는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고, 내 눈앞에는 낯선 천장과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아가씨가 일어나셨어요! 이번에는 정말…….”

처음 보는 천장과 치렁치렁한 머리칼, 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아, 잠시만. 나 이런 시추에이션 아주 잘 아는데.’

온통 낯선 것으로 가득한 공간을 바라보며 혹시 꿈인가 의심했던 난 빠르게 그다음 가정을 떠올렸다.

Q. 꿈이 아니라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A. 정답! 책 빙의!

‘……로판 경력 1n년 차, 이런 상황 아주 익숙하단 말이지.’

“네? 이 나라 이름이요? 비센 제국이에요, 아가씨!”

비센 제국.

“신전이 있냐니요, 당연히 있죠. 그리고 달은 원래 두 개였어요.”

거기에 신전이 있고, 달이 두 개라니…….

이거 최근에 읽은 《내가 진짜 둘째 딸 성녀예요》로구나!

차원 이동이냐, 빙의냐? 골치를 썩이던 고민이 싹 걷히며 행복한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책의 인물로 눈을 떴구나!

내가 빙의한 영애 ‘달린 에스테’는 이름도 생소한 엑스트라였다.

평소 자주 몸살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무척 병약한 몸이었다. 이번에 쓰러졌던 것도 지병 때문이었다고 했다.

‘와 세상에, 이러다 깨면 개꿈이었겠거니 했겠지만.’

어쩐지 며칠이 지나도 꿈에서 안 깨더라?

‘로판 독자에게 이런 상황을 내려 주시다니. 답을 알고 푸는 문제집인가!’

책으로만 읽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니 솔직히 황당하긴 한데, 책 제목을 알았으니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완전 개꿀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했었지.

“……얘네 왜 안 와?”

《내가 진짜 둘째 딸 성녀예요!》에서는 분명 건국제가 열리는 첫째 날, 황궁 정원에서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만나기로 되어 있는 황궁 정원 앞에서 밤새도록 이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나는 깨달았다.

……이 소설이 아닌가?

기억을 곱씹던 나는 생각지 못한 부분을 발견했다.

《내가 진짜 둘째 딸 성녀예요!》는 비교적 최근에 읽은 책이라 그나마 줄거리가 대충 떠올랐다.

그리고 그 책 속 주인공들이 살던 나라는 ‘비센 제국’이 아니라 ‘빈센트 왕국’이었음을 떠올렸다.

그랬다. 이름을 착각했다!

“엥, 그 책이 아니라고?”

나는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는 그 동네가 아니라니…… 그럼 여긴 어디야?

“아가씨! 열이 펄펄 들끓어요!”

“으으…….”

“대체 하루아침 사이에 왜 열이 들끓는 거죠? 무엇을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어. 콜록, 콜록콜록!”

나는 밤새도록 주인공들을 기다리다가 얻은 호된 몸살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적였다.

생각해 보자. 분명히 건국제가 열린 계절이 비슷하다.

얼마 전 신전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도 같았다.

일단 소설 속이란 걸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하늘과 베키가 말해 준 최근 사건이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사건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첫째, 왕국의 이름이 다르다!

둘째,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기억하고 있던 사건에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용이 비슷한 다른 소설인가?

이 경우 힌트를 새로 얻어야 하는가?

지금 벌어지는 건국제가 힌트가 될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야.

……분명히 건국제에서 파티를 벌이는 소설이 있었는데. 그 소설이 몇 개였더라?

젠장, 로판에는 건국제가 너무 많이 나온다! 따라서 머릿속에 생각나는 소설도 한두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아니, 근데 있어 봐. 생각할수록 화딱지 나네.”

파티! 연회! 건국제가 나오는 소설이 한둘이냐고! 더구나 로판엔 이런 이벤트가 매번 등장하잖아!

‘아니야, 침착하자.’

일단 기억나는 대로 비슷한 이름이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추려 봤다.

‘《그 이상한 책에 마음을 주지 마세요》랑, 《졸지에 감방 죄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마법사를 주워 왔다》 이거도 달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제목만이 아니었다.

제목을 떠올리는 동안 내용이 뒤섞이고, 남주도 세 명 네 명 줄줄이 떠올랐다.

‘아 X됐다. 역하렘은 읽지 말걸…….’

역하렘! 남주가 다발로 등장하는 장르도 좋아했을 게 뭐람!

환장하게도 남주의 신분도 각각 달랐다. 하나가 황자면 또 다른 소설에서는 공작이었다. 마법사에 기사도 있었다.

……너무 많이 읽었다.

이 빌어먹을 작가 놈들!! 나는 애꿎은 작가님들을 탓했다.

“개성 있게 좀 써 보란 말이야!!”

회상에서 벗어나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남주 취향이 매우, 아주, 굉장히 뚜렷하다는 점이다.

“후, 그래. 나는 무조건 하나밖에 읽지 않았어.”

내 소나무 취향이 남주를 찾아낼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난 까칠한 놈만 팠다!”

일단 이 제국에서 일어났다는 폭발 사건이나 설정이 익숙하다.

그렇다면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남자주인공이 누구인지만 안다면 책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다독했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바보 맞나?

……아냐, 나 자신을 믿자.

“그래…… 날 믿어 보자. 내 취향이 곧 남주렷다!”

일단은 빙의한 이상 어떤 내용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다.

‘젠장, 하필 피폐물도 좋아한 탓에…….’

읽었던 소설 중에 주인공 주변 인물들이 요절하는 소설도 꽤 여럿 있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후, 지금은 평화롭지만 내가 빙의한 몸이 알고 보니 악역의 말단 졸개라거나……. 으으, 끔찍해! 주인공들 서사에 휘말려 비명횡사하는 엑스트라 1이면 어떡해?”

운이 좋으면 주인공이나 조연 옆에서 꿀 빠는 친구 역일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솔직히 아닐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어쨌거나 주인공과 책 내용을 알아야 어느 쪽이든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무엇보다 궁금하단 말이지.’

남자주인공, 넌 누구냐. 반드시 너부터 찾아내야 한다.

“좋아, 일단 추려 보자.”

내 취향의 남자들을!

그 결과 지금 내 눈앞에는 수많은 초상화가 보기 좋게 일렬로 정리된 채 늘어서 있다는 사연이다.

‘단서는 까칠한 남자주인공을 좋아하는 내 취향뿐이니, 직접 부딪히다 보면 알아내지 않을까 했지.’

그런데 뭐야, 초상화가 왜 이렇게 많아?

“……분명, 아주, 아주아주 독보적인 미남만 골라 오라고 했는데?”

남주의 첫 덕목, 미남일 것.

한데 초상화는 벽을 꽉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뒷줄까지 꽉 차 있었다. 방대한 수에 시작 전부터 질리고 말았다.

아니, 대체 왜 이렇게 쓸데없이 미남이 많은 건데?

똑똑똑.

때마침 문이 열렸다. 다과상을 든 베키가 들어왔다.

“아가씨, 다과여요.”

“베키!”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에 그녀를 내 옆으로 불렀다. 쪼르르 달려온 베키에게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우리나라에 왜 이렇게 미남들이 많은 거야?”

“네? 아가씨, 모르셨어요?”

베키는 오히려 그림을 가리키는 나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세상에, 아가씨 몸살로 많이 지치셨나 봐요. 300년 전 폭군 네로티타스 황제의 괴이한 성벽 때문에 귀족 나리 중에는 미남미녀가 유달리 많잖아요.”

“괴이한 성벽?”

“네, 못생긴 외모의 사람은 남녀불문하고 처형시켜서 유명했잖아요? 끝내는 반란으로 죽었지만, 30년이나 통치했으니 이후 후손들은 미남미녀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아가씨의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대단한 폭군이네.”

……뭐 이딴 세계관이 다 있지?

이렇게 괴상한 황제가 있었다면 뭐라도 기억날 만도 한데!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책에는 나오지 않거나 스쳐 지나가는 얘기였을 거야.

덕분에 일이 아주 힘들어졌다는 건 분명하다!

빙의 한 달째, 막 이 세계의 적응을 마친 나, 달린 에스테,

특이사항, 비센 제국의 그럭저럭 괜찮은 백작 가문의 딸이란 건 확실히 앎.

그러나 아직도 여기가 정확히 어떤 세계인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로맨스 독자 경력 1n년. 읽은 소설만 1000여 권에 이르는 독자는 소설 제목을 모른다.

……저기, 여기 무슨 소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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