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2화 (2/281)

◈2화. 0. 빙의했는데 무슨 소설인지 모름 (2)

* * *

많은 소설을 읽다 보면 인생 소설이라 할 만한 작품을 만나는 일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트렌드에 발맞춰 읽다 보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소위 ‘최애’도 그때그때 바뀌는 법.

한때는 좋아하는 작품이나 작가님 덕질을 위해 트위터까지 가입했었다.

하지만 눈물 줄줄 흘리며 읽었던 마성의 명작도 몇 년쯤 지나면 주인공 성조차 긴가민가해지는데…….

‘하물며 스쳐 지나간 소설을 어떻게 전부 기억하는데?!’

좋아하는 남자주인공만 다섯이 넘고, 인생 소설은 손가락만으로 꼽을 수 없어 발가락을 동원해도 부족할 정도다.

그리고 설령 가장 좋아한 소설이라 해도 나라 이름까지 맞출 자신은 없다!

시간이 날 때마다 플랫폼의 판매 순위를 보면서 이거 사 볼까, 저거 사 볼까, 로판을 슈퍼 세일 물품 담듯이 담던 내게 책 빙의는 너무 가혹했다.

‘젠장, 좋아할 게 아니었어!’

생각해 보자. 마지막 트렌드가 뭐였더라?

로판에는 시기마다 유행을 타는 소재가 있었다.

책에 빙의해서 남자주인공이든 악당이든 잘생긴 애랑 알콩달콩하는 「빙의물」.

폭군 아빠 밑에 태어나서 주변 인물 모두를 내 발아래 두고 딸바보, 동생 바보로 만드는 「육아물」.

아주 X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엄청난 후회 속에 삶을 마친 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 인생 실전을 외치는 「회귀물」.

짠하게 느껴질 만큼 버티고 버틴 여주가 난 이제 너희들 필요 없다며 전부 던져 버리는 「후회물」이라거나.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인데도 주인공 둘은 계약 관계라고만 주장하는「계약결혼물」까지…….

하지만 머릿속으로 최신 로판 트렌드를 열심히 뒤져봐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소재 가리지 않고 읽는 잡식 독자였으니까.

보통 책에 빙의한 주인공들은 제국이나 왕국 이름을 듣자마자

“이 소설은 내가 백번도 넘게 읽은 소설이야!”

“으아닛 이 소설은!”

하고 알아차리던데…….

핸드폰 가득 소설이 넘치는 독자는 어떡하라는 거죠?

읽은 소설을 한 문장 한 문장 떠올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로 이 상황은 아주 X된 거라는 거다.

‘금발 미남, 흑발 미남, 은발 미남! 아주 골고루 사랑해 줬으니까!’

나는 끙 신음을 내뱉으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앗,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아냐…… 조금 피곤해서. 베키, 미안한데 이 초상화, 애들 불러다 한 번만 더 분류해 줄래?”

“앗, 네!”

후, 진정하자. 일단 지금 할 일은 최대한 후보를 줄이는 거다.

내 남자주인공 취향 첫 번째.

한창 흑발의 북부 대공 남주가 유행할 때…… 나는 홀로 다른데 푹 빠졌다.

흑발? 필요 없다. 일단 눈동자 색이 차가운 놈이 좋아.

“벽안만 남겨 줘.”

남주의 조건은 시린듯한 푸른 눈이지! 아암. 벽안에 성격만 내 취향이면 머리색 같은 건 전혀 상관없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시X, 푸른 눈은 또 왤케 많죠……?’

푸른 눈도 여러 가지 채도가 있단 걸 간과했다.

그랬다. 여긴 3D 세상이었다, 젠장!

“눈물 난다, 정말.”

어흐흑. 얼굴에 손을 묻고 서럽게 흐느꼈다. 나도 빙의물 주인공들처럼 ‘비센 제국? 알아! 세상에, 이 소설이잖아!’ 하고 외치고 싶다.

“아가씨이, 울지 마세요…….”

현재 나는 열이 펄펄 끓어서 누워 있었다.

초상화 앞에서 너무 열을 올린 나머지 정말로 열이 오르고 말았다.

‘달린 에스테’의 몸은 아주 병약했다. 대체 무슨 지병을 가진 건진 몰라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혈압 오를 일이 생기면 그대로 몸살을 앓았다.

한마디로 스트레스에 대단히 취약했다.

‘……멘탈 관리도 알아서 하라는 건가.’

가뜩이나 무슨 책인지 몰라 억울해 돌아가실 것 같은데 육체 및 정신 건강까지 주의해야 한다니.

무슨 빙의 레벨이 이렇게나 높단 말이더냐. 욕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숨죽여 산 것은 어디까지나 여기가 어떤 소설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이 소설 장르가 ‘피폐물’이라면 괜히 알짱대다가 요절하는 수가 있었으니까.

‘과거의 난 왜 피폐물도 좋아해서!’

내 인생도 같이 피폐해질 것 같은, 구르고 구르는 여주의 삶이 그야말로 눈물겨운 장르인「피폐물」.

상대적으로 마이너이긴 했지만 내 인생에서는 네가 메이저였다, 피폐물아…….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단서는 매우 빈약한 것들뿐. 남자들의 초상화를 들이라 한 것은 나름대로 최대한 머리를 굴려 짜낸 방편이었다.

“그래도 초상화 분류는 무사히 마쳤으니 다행이다. 이제 초상화 속 인물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한담?”

내 곁을 지키던 하녀 베키는 잠시 물수건을 갈러 자리를 비웠다. 나는 뜨거운 뺨을 매만지며 후 숨을 뱉었다.

“그나저나 뭐 이렇게 자주 앓아?”

나는 끙차,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누웠다.

‘아이고, 죽겠다.’

아무리 병약하대도 한 달에 두세 번씩 픽픽 쓰러지는 몸이라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감기라기엔 매번 고열을 동반하고, 몸살이라기엔 몇 날 며칠을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설마 내가 시한부 주인공…….’

“……은 아니야.”

다행이랄지 뭐랄지. 나는 시한부 여주가 나오는 소설은 읽지 않았다.

눈물 버튼 예약은 싫었으니까.

다만 불안한 점은 주변 인물이 시한부일 수도 있다는 건데.

‘아, 다시 잠이 오네…….’

끙끙 앓다가 다시 잠에 빠진 것인지, 슬며시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점차 선명해지는 목소리는 종종 듣곤 하던 하녀들의 것이었다.

“흑, 우리 아가씨 안타까워 죽겠어. 어떡해?”

“쉿, 조용히 해. 아가씨 깨셔.”

한 사람은 그나마 자주 본 베키고, 다른 한쪽은 긴가민가했다. 한나인가? 아니면 샤리나?

“사실 우리 아가씨가 편찮으시지만 않았더라도 제국 미인 계보가 바뀌었을 거라구.”

음,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힘없이 웃었다.

웃긴데 웃을 힘이 없어…….

아무튼 다른 한쪽은 샤리나인 것 같다.

“언제까지 아가씨는 자기 병을 모르고 사셔야 해? 갈수록 병환이 깊어지시잖아.”

“난 아가씨가 웃으실 때마다 마음 아파 죽겠어. 아무것도 모르시고…….”

“그만해. 백작님 명이란 거 너도 잘 알잖아. 백작님이라고 좋아서 내린 결정이시겠니?”

나는 눈을 끔뻑였다. 어째, 심상치 않은 얘기 같은데.

“그치만 치료법도 없는 병 때문에 2년도 못 사는 처지라니. 아가씨가 너무 가여워.”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아가씨가 일곱 살일 적부터 봐 왔단 말이야…….”

“네 맘을 누가 몰라. 여기서 너랑 같은 마음이 아닌 사람이 있겠니? 백작님께서 매번 의사를 데려오는데 전부 소용이 없으니…….”

잠깐만, 나 단순한 몸살이 아니었어?

충격에 눈을 깜빡이다 말고 소리를 내자, 하녀들이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잠꼬대인 척 몸을 뒤집자, 안도의 한숨이 이어서 들렸다.

“우리 아가씨, 마탑주님이라도 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분은 사람을 지독하도록 가리잖아. 만나 주실 리가 없는걸. 황실이 아니라면 뵙기도 힘들다며.”

“얼른 돌아가자. 아가씨는 푹 주무시려나 봐.”

달칵, 문이 닫혔다.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눈을 번쩍 뜬 나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시한부? 내가?”

예고도 없이 던져진 대형 폭탄에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내가 시한부라고? 야 씨, 잠깐만요.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야.

하긴 처음 이 몸으로 깨어났을 때도 병석에서 한 달 만에 일어난 거라고 했었지.

‘그게 몸살이 아니었던 거야?’

지나치게 행복해하던 얼굴들이 이상하긴 하더니만……. 시한부면 콜록콜록 기침하다 피를 토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그럼 지금 책 제목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한부이기까지 한 거야?

……나한테 왜 이러세요.

“무슨, 게임도 이렇게는 안 만들겠다!”

나 안 해, 안 한다고!

누가 로판 소설 등장인물이 되고 싶다고 했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꿈도 꾸지 말걸!

‘빙의물 절망 버전이냐!’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그래, 있어 봐. 일단 ‘시한부’ 설정이라 하니, 나 달린 에스테로부터 추정할 수는 없을까?

‘혹시나 내가 주인공일 가능성은?’

아냐, 아니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시한부가 주인공인 소설은 보지 않았다.

그럼 남은 건 조연인데, 조연 중에는 있었던 것 같기도?

그러고 보니 주인공의 주변 인물 중 시한부에 병약한 영애가 등장하는 소설이!

……기억 안 나잖아, 염병.

내가 읽은 소설들의 공통점은 남주가 비슷하다는 것뿐이었고 그 외 나머지는 다양했다.

전 육아물도 계약 결혼도 피폐물도 아주 잘 봤습니다. 여주인공이 시한부만 아니라면 말이죠!

젠장, 난 왜 이렇게 골고루 읽어서!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단서를 얻었다. 이 소설에는 시한부 캐릭터가 나온다는 점.

‘그렇다면 ‘달린’은 그저 그런 엑스트라가 아니었던 걸까?’

아 나. 빙의 한 달 하고도 보름 차, 갈수록 왜 인생이 더 하드해지는 느낌인가.

신이시여, 제발 좀 도와주세요!

“왜, 빙의하면 당연히 뒤따르는 기억력도 내겐 없냐고오오!”

억울하다. 신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기억력을 내려 주세요, 네?

제발!

나는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지 없는지 모를 신에게 애타게 빌었다.

이 험한 세상 대체 어떻게 헤쳐나가라고! 안 도와줄 거면 차라리 지금 죽여라, 어?

[띠리링]

그 순간 나는 묘한 소리를 들었다. 마치 이곳에는 없는 듯한 전자음?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아무것도 없었다. 으음, 잘못 들었나.

하지만 그 순간 눈앞에 커다란 창이 등장했다.

[드디어 당신의 처지를 알아차린 당신! ‘요정’이 인사드립니다.]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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