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화 (12/281)

◈12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첨예하게 날 선 눈매가 보였다.

그러나 인상이 그리 날카로워 보이지 않은 건 온화한 시선이나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 덕분이었다.

나를 붙잡아 준 그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한 푸른색 눈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제가 부주의했네요…….”

“어디 영애의 탓이겠습니까. 마침 탁자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습니다.”

키가 훌쩍 큰 남자는 이목구비와 눈동자 색 등이 눈에 익었다.

‘헉, 눈에 익은데.’

이전에 내 취향이라 꼽았던 초상화 중 한 사람이었다!

역시나 내 취향답게 조금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남자는 갈색 머리칼에 진한 남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부드러운 얼굴 이면에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와, 성격 나빠 보이는 것까지 완벽하네.’

2황자님이 청초하니 아직 풋풋하고 정석적인 느낌이 조금 있으면 이쪽은 어른스러운 흑막 같은 느낌이다.

그의 눈이 살짝 휘어지며,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오싹하도록 낮고 그윽한 목소리였다.

위에서 살짝 흔들리는 머리칼을 바라보던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못 먹는 감2인가.’

촉이 와, 촉이. 2황자님 이후로 생긴 촉이.

2황자를 떠올리자 이 남자를 향하던 두근거림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싹싹 지워졌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 허리에서 느껴지니 상당히 어색했다. 남자도 이를 느꼈는지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눈앞의 남자와 복도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해요. 까딱하면 침대행이어서요.”

“네? 아, 별말씀을.”

“달아 두셔도 되는데, 민폐가 되면 안 되니까 다음에 꼭 한 번 더 인사할게요. 지금은 급해서요.”

“네? 달아…….”

“빚이요, 빚!”

나는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방긋 웃었다.

“이자 붙이셔도 됩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렸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미남도 충분히 멋졌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캄캄한 복도로 들어선 나는 잠시 헤맸으나 곧 정원으로 이어진 등을 발견했다.

‘온실에서 봤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네.’

그러나 대책 없이 정원에 들어선 나는 곧 당황했다. 여기서 꼬마 여주님을 어떻게 찾지?

정원에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었는지 아스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빙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소설을 착각해서 주인공들을 기다리다 몸살을 얻었던 곳도 바로 이런 정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어디든 가 보자.’

무도회는 길었다. 본격적인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그러나 정원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나는 어둑어둑한 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가 어디죠?

분명 조금 전까지는 일정 간격으로 마법등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달이 밝아서 등이 없어도 앞은 잘 보였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막막했다. 난 얼이 빠져서 뺨을 긁적였다.

이거, 어떡하지?

끙, 신음을 흘리며 길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무슨 소리지?’

고양이가 움직일 때처럼 아주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총총총.

그리고 그 소리는 곧 깡총깡총 뛰는 소리로 바뀌었다.

나는 숨죽이고 서서 숫자를 세다가 소리에 맞춰 홱 뒤로 돌았다.

“끄앙!”

이와 동시에 아주 앳되고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꽈당!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갓 세 살이나 되었을까. 아주 조그만 아기였다.

“……놀라쨔나.”

찹쌀떡같이 포동포동한 뺨, 말랑한 원통 두 개를 붙인 것처럼 오동통한 팔. 자그만 손발까지.

달빛 아래 아이의 머리칼이 빛났다. 특이하게도 위쪽은 흰색에 가까웠고 아래로 갈수록 하늘색이 짙어졌다.

그리고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

나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팔찌가 번쩍번쩍 빛나면 반응하고 있었다.

틀림없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일이 잘 되려니 길을 잃어도 주인공을 덜컥 만나는군. 아기를 보자마자 나는 일이 아주 수월하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이어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 이바. 내 뼈따구가 똑 부러지기라두 하면 책임질 거야, 앙?”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응, 그래. 요즘 귀가 안 좋나 봐. 환청이 들리네. 귀가 안 좋은 게 맞을 거야.

“귓구뇽이 막켜써?”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 사랑스러운 육아물 주인공님이 뼈다구니 귓구녕이니 그런 상스러운 소리를 내뱉었을 리 없잖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누군가는 나를 머나먼 세계로 도망가도록 두지 않았다.

[퀘스트(서브) - ‘아기 황녀님을 만나러 가자!’가 완료되었어요!]

[으랏차차! 요정은 보상을 주었어요! ᕙ(•̀‸•́‶)ᕗ]

시끄러워. 지금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고!

[요정은 빙의자 님을 돕습니다.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요! ٩(๑>∀<๑)۶]

[주인공 찾기 성공!]

‘아냐, 아닐 거야!’

[주인공 찾기 성공!]

‘XX! XXXX!’

[요정은 바르고 고운 말을 사랑해요! (*'ㅂ'*)]

그 순간 내 입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바르고 고운 말만 씁니다! 바르고 고운 말만 씁시다!”

욕이 자동 필터링 되더니 경고 문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플랫폼에서 욕설 댓글을 막는 것처럼!

아, 잠깐만. 이제 내 입으로 욕도 못 하냐! XXXX! ♪♬~♩! ♬~♩!

“바르고 고운 말만 씁니다! 바르고 고운 말만 씁시다!”

속으로 욕하는 것도 금지냐고! 이 정도도 못 하게 막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어이가 없어진 나는 혀를 쯧 차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아, 그래. 팔찌가 틀릴 리가 없지.’

그래, 눈물을 머금고 인정하자.

눈앞의 이 조그만 아기가 내가 찾던 육아물 주인공. ‘유엘 래빗 비센’이다.

[딩동! 정답! 인물 열람에 ‘주인공’의 정보가 추가됐어요! ✧*.◟(ˊᗨˋ)◞.*✧]

[유엘 래빗 비센

칭호: 전생을 기억하는 자(lv. ??)

역할: 육아물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 주인공, ??

호감도: -47

상태: 전생을 기억하는 아기 황녀님, ‘클리셰’에서 벗어난 상태, 매우 위험합니다!]

이제 되지도 않는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날 우롱하는 저 요정 놈에게도 적응한 것 같아, 응.

이어서 뜨는 주인공님의 인물 정보에 깜짝 놀랐다.

우선 첫 번째로 호감도에 한 번.

‘호감도 상태 왜 이래?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날 벌레 보듯 보던 너네 오빠도 –7에 그쳤단 말이야!

이뿐만이 아니었다.

[상태: 전생을 기억하는 아기 황녀님, ‘클리셰’에서 벗어난 상태, 매우 위험합니다!]

……저기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빙의자 님이 진실에 도달했어요! 숨겨진 정보를 공개할게요! ᕕ( ᐛ )ᕗ]

[유엘 래빗 비센

칭호: 전생을 기억하는 자(lv. ??)

역할: 《제국의 아들 부잣집 막내딸》 주인공, 전생(前生) 정복 황제 ‘로아타’ <-new!

호감도: -47

상태: 전생을 기억하는 아기 황녀님, ‘클리셰’에서 벗어난 상태, 매우 위험합니다!

특징: 저런, 사랑받아 마땅한 아기 황녀님이 놀랍게도 세계의 뒤틀림으로 전생을 기억하고 맙니다!

육아물 클리셰에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기 주인공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황녀님의 전생 기억은 아주 특별합니다. 유의해 주세요!

아기 황녀님의 전생은 무려 전쟁 영웅이자 정복전쟁을 통해 거대한 나라를 세운 황제 ‘로아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아기 황녀님에게 작은 몸은 귀찮고 갑갑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술이 고프고, 담배가 그립고, 만사가 귀찮고 심드렁한 아저씨 같은 성격까지!

부디 이 뒤틀림을 바로잡아 주세요!]

“……예?”

잠시만, 잠시만.

여기 계신 이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쁜 아기님이 글쎄 전생에 전쟁으로 짱 먹은 황제였다고?

‘로아타’라면 내가 어거지로 머리에 쑤셔 넣었던 이 세계 상식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대륙의 역사를 기술한 책 제일 첫 장에 등장하던데?

‘……야, XX! 이건, 너무 막장 아니냐?’

생각뿐 아니라 입 밖으로도 욕이 튀어나왔다.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물론 필터링되어 나갔지만.

“……허어, 미칭 닌간인갸?”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오동통한 뺨, 이 달빛 아래에서도 얼마나 사랑스러운 외양인지. 감탄이 흘러나왔다. 진짜 귀엽네.

만약 이 아이가 내 아이이고 지금처럼 연회 도중에 사라졌다면 납치라도 당했을까 미친 사람처럼 찾았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 귀여운 외양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표정 또한 매우, 매우! 불량했다.

“이봐, 뭐냐고 묻쨔냐. 귀가 앙 들리나?”

“…….”

“쯔쯔, 절믄 사람이 벌써, 귀가 머겄나.”

아뇨, 귀 안 먹었고요. 제 귀는 멀쩡하고요. 아주 잘 들립니다, 아기님. 아니, 황제님? 이거 어떡하라고?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곧 펼쳐질 퀘스트의 난이도가 결단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