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
‘가뜩이나 원작 내용도 기억 안 나는데, 이렇게 괴상하게 비틀린 설정을 어떻게 고쳐놓으라고?’
황당한 상황의 연속에 내 얼굴이 저절로 한껏 찌그러졌다.
아니, 일단 침착하자. 주인공을 만났으니, 드디어 메인 퀘스트를 받을 차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메인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갸르륵 (p`>ω<´q)]
앗, 자, 잠깐만! 마음의 준비가!
[퀘스트(메인) - ‘아기 황녀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자!’
이런 세상에!
전생을 기억하는 아기 황녀님은 거친 언행과 행동으로 도무지 가족과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어요!
가족들은 아기 황녀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녀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오해를 바로잡고 가족에게 사랑받는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세요!
※아기 황녀님은 아주 걸걸하고 거칠며, 고집스러운 아저씨 같은 성격을 가졌어요.
내용: 100일 내로 황가 사람들의 호감도를 90 이상 달성
보상: 건강 수치 +30, 다음 소설 힌트, ???, ???
실패 시: 사망]
아니나 다를까. 딱 봐도 범상치 않은 퀘스트가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눌렀다. 지금 황가 사람들 호감도가 어떻길래?
그것보다 실패하면 사망이란다. 나 원 참.
뭐만 하면 죽인다고 협박하는데,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 듣고 있냐고!
[친절한 요정의 선물! 빙의자 님께 현재 황가 인물별 호감도를 공개할게요! ( ˇ͈ᵕˇ͈ ) ¨̮♡⃛]
선심 쓰듯 던진 창이 툭 나타났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현재 호감도*
1. 황제(폭군): -118
2. 황태자(첫째 오빠): 10
3. 2황자(둘째 오빠): -9
4. 3황자(셋째 오빠): -80]
……이거 실화인가?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지?
‘황제가 마이너스 백시입팔? 백시입파알? 이걸 어떻게 올려?’
이분은 뭔 짓을 했길래 혼자 마이너스 쪽으로 맥스(MAX)를 찍어놓았어?
그리고 2황자의 태도를 봐서는 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니었어? 왜 이래?!
나 안 해. 못 해!
[저런,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15]
안 해! 안 한다고!
[으앙,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ಡ︷ಡ) 현재 건강 수치: 10]
……이러기야?
[히잉,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아, 해! 해! 한다고!”
[수락! 퀘스트가 진행됩니다! 흔쾌한 결정에 요정이 기뻐해요! ❁´▽`❁]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이렇게 난이도 높은 퀘스트를 줬으면 인간적으로 욕 정돈 쓸 수 있게 해 주자, 어?
홀로 요정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나는 나를 바라보던 어린 아기의 표정이 시시각각 묘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허어, 징쨔 미첫나 보군…….”
그 순간이었다.
“흡!”
[이런, 빙의자 님 건강 수치가 너무 많이 떨어졌어요! 상태 이상 [호흡곤란]에 돌입해요)! ( Ĭ ^ Ĭ ) ]
야!
“흡, 후, 으……!”
“이바! 숨 쉬고라! 청청히! 청청히! 후! 하! 따랴해!”
“흐, 아, 흐, 후, 하.”
등을 토닥이는 조그만 손길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걱정이 담긴,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솔직히 워낙 어린 아기이다 보니 울상을 짓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지만.
“미안햐다, 오해를 해꾼. 아푼 아이엿느냐?”
“…….”
아, 아기 황녀님, 말투 왜 그래요. 나는 조금 울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껄껄껄, 오해햘 뻔했지 않으냐!”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기 황녀님, 그렇게 웃지 마요! 아저씨 같잖아!
우리 회사 부장님도 그렇게는 안 웃었다고!
여기서 잠깐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육아물 클리셰 총정리.
1. 폭군 아빠가 나온다.
-자매품: 폭군 공작 혹은 폭군, 악마, 등등 아무튼 딸에게 관심도 없고 차가운 아빠. 처음에는 딸을 좋아하지 않는다.
2. 엄마는 없다. 이미 죽었다.
3. 오빠들이 있다. 보통 평균적으로 셋 정도다.
4. 외동딸 혹은 막내딸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아빠와 오빠들에게 애교와 어리광을 부린다.
5. 엔딩: 애기어와 애기력, 사랑스러움 만렙 주인공이 아빠, 오빠, 가신, 신하, 남주와…… 사돈의 팔촌, 길 가던 개미, 지나가던 드래곤, 쳐들어온 적군, 와 놀라워라! 이 모두의 사랑을 받는다.
문제는 이 아기 황녀님이 전생에 대단한 황제였다는 데 있었다.
퀘스트 창에 따르면 아주 걸걸하고 거칠며, 고집스러운 아저씨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
‘아니, 짝다리 짚은 거만 봐도…… 목젖이 보이도록 껄껄 웃는 것만 봐도!’
아까 퀘스트 창에서 황가 가족들이 황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했던가.
나라도 오해할 것 같다. 겉은 귀여운 아기인데, 껄껄껄 웃는다면…….
‘귀신이라도 씐 줄 알겠다.’
내용이 비틀린 건 물론이요, 가족들과의 사이도 원활하지 못한 상태.
2황자의 호감도는 대체 왜 저런 건지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되겠지.
그래, 상황파악은 했으니 이제 시작이다.
할 수 있다, 달린아. 할아버지, 아니, 로판 고인물의 명예를 걸고!
[요정이 야광봉을 들고 빙의자 님을 응원합니다! (ɔ ˘⌣˘)˘⌣˘ c)]
넌 조용히 해.
‘나는 이 책 내용을 몰라. 아니, 기억이 잘 안 나.’
그러니 해피엔딩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아는 클리셰들을 어떻게든 잘 버무려야 한단 소리였다.
제일 쉬운 길이 뭘까. 육아물 하면 애기어니까, 눈앞의 껄껄 웃는 이 아기 황녀님이 부친인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면 되지 않을까?’
순간 껄껄 웃는 아기가 애교를 부리는 장면을 속으로 상상한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연해졌다.
그러고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난 경상도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었다.
그때 대학 선배들이 경상도 여자는 애교가 많지 않으냐며 ‘오빠야’라고 불러 보라거나 ‘애교 좀 부려 봐’라는 소리를 종종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선배고 뭐고 로우킥을 날리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랬던 내가! 남에게 애교를 가르쳐야 한다니. 아무리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지만!
[아앗, 히잉!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중요하지! 중요해! 애교보다 중요한 건 없어! 애교가 세상을 구한다. 뿌잉뿌잉!
……X발! ♬~♩!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후,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바루고 고운 말을 조아하느냐? 심성이 무척 올바른 아이로구나.”
“아, 예…….”
존댓말을 하다 말고 말을 흐렸다.
그래, 이제 이 아기 황녀님이라 쓰고 속에는 걸걸한 황제님을 품은 주인공님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기…….”
존댓말과 반말 사이에서 나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직 아기 황녀님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황실에서 정식으로 공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의 신분을 알아챈 티를 내면 안 되겠지.
“도와줘서 고마워. 놀랐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나는 소매로 톡톡 입술을 닦았다.
나름 연약해 보이려 수를 쓴 건데, 워낙 호흡곤란이 심각했다 보니 아주 잘 먹힌 듯했다. 아기 황녀님의 심란해 보이는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음, 언니가 이렇게 가끔 발작을 일으키곤 한단다.”
“바루고 고운 말을 쑤고 싶은 발작?”
“……그래, 그런 걸로 해 두자.”
그래, 그걸로 해 두자꾸나. 이미 이 아기 황녀님에게 있어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은 저 멀리 날아간 것 같지만.
“절믄 나이에 발쟉이라니 안 돼꾸나, 쯔쯔.”
저기요, 제가 젊은 나이면 님은 아, 응애에요, 라구요.
[와, ‘주인공(아기 황녀)’의 호감도가 대폭 올랐어요! ٩(๑>∀<๑)۶]
[‘주인공(아기 황녀)’의 빙의자 님을 향한 현재 호감도 : -47 -> -20]
주인공 호감도 오르면 좋지. 근데 내가 남주도 아닌데 특별히 쓸 곳이 있나?
[요정의 꿀팁!]
[호감도가 높을 시 특수 이벤트 발생! 주인공이 무조건 부탁을 들어줍니다. ٩( 'ω' )و ٩( 'ω' )و]
정정합니다. 통이 크시군요, 전(前) 황제 폐하. 초면에 죄송하지만 사랑합니다. 무려 27이나 올려 주시다니.
그럼에도 아직 마이너스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그리고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마이너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포옥, 다가온 조그만 얼굴이 갸웃 기울어졌다.
“이샹하구나.”
“ㄴ, 아니 으응?”
“왜, 내 정체를 모른 촉하지?”
“…….”
“다 알았우면서?”
……예?
“나한테 존댓말 해쨔나, 아까. 예, 라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